[乙酉]三年이라 〈趙光初八年이요 後趙七年이라〉
五月에 以陶侃으로 爲征西大將軍, 都督荊, 湘, 雍, 梁四州諸軍事, 荊州刺史하니 荊州士女相慶이러라
侃이 性聰敏恭勤하야 終日斂膝危坐하고 軍府衆事를 檢攝無遺하야 未嘗少閑하다
常語人曰 大禹
는 聖人
이로되 乃惜寸陰
하시니 至於衆人
하야는 當惜分陰
注+[釋義]分은 分寸之分也라이니
豈可但逸遊荒醉하야 生無益於時하고 死無聞於後리오
嘗造船
할새 其木屑竹頭
를 侃
이 皆令籍而掌之
한대 人咸不解所以
러니 後正會
注+[頭註]會之首月也라에 積雪初晴
하야 廳事前
에 餘雪猶濕
이어늘 乃以木屑布地
하고 及桓溫伐蜀
에 又以侃所貯竹頭
로 作丁
注+[頭註]丁은 讀曰釘이라裝船
하니 其
綜理微密이 皆此類也
러라
晉俗之敝
가 在於淸談廢事
어늘 而侃能勤事如此
하니 可謂砥柱中流
注+[頭註]書禹貢에 砥作底라 在冀州大河中流하니 其形如柱라하야 不爲習俗所移
라
故로 能以弱制强하야 誅剪逆臣하고 克復大業하니라
太后
注+[頭註]荀氏라臨朝稱制
하고 以司徒導
로 錄尙書事
하고 與中書令庾亮
과 尙書令卞壼
으로 參輔朝政이나
明帝
는 潛謀獨斷
하야 躬率
하고 掃除大憝
하야 未及朞年
에 敦黨悉平
하니 雖享國日淺
이나 而志亦可壯矣
니라
태령太寧 3년(을유 325) - 조趙나라 광초光初 8년이고, 후조後趙 7년이다. -
5월에 도간陶侃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도독형주상주옹주량주제군사都督荊州湘州雍州梁州諸軍事‧형주자사荊州刺史로 삼으니, 형주荊州의 남녀 백성들이 서로 경하하였다.
도간陶侃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공손하고 부지런하여 종일토록 무릎을 모으고 단정히 앉아서 군부軍府의 여러 가지 일을 단속하여 빠뜨림이 없어 일찍이 조금도 한가한 적이 없었다.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대우大禹는
성인聖人인데도 마침내
촌음寸陰注+[釋義]분分은 분촌分寸의 분分이다. 을 아끼셨으니,
중인衆人들에 이르러서는
분음分陰을 아껴야만 한다.
어찌 다만 편안히 놀고 할 일을 폐한 채 술에 취하여, 살아서는 세상에 유익함이 없고 죽어서는 후세에 알려짐이 없게 하겠는가.
일찍이 배를 만들 때에 톱밥과 대나무 조각을
도간陶侃이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관장하게 하니, 사람들이 모두 어디에 쓰려는 것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뒤에
원단元旦의 모임
注+[頭註]정회正會는 정세正歲의 첫 달에 모이는 것이다. 에 눈이 많이 내리다가 날씨가 막 개어서
청사廳事 앞에 남은 눈이 아직도 젖어 있자 이에 톱밥을 땅에 뿌렸으며,
환온桓溫이
촉蜀을 정벌할 때에 또
도간陶侃이 저장해 두었던 대나무 조각으로 대못
注+[頭註]정丁은 정釘으로 읽는다. 을 만들어 배를 정비하니, 일을 종합하고 처리함에 치밀하고 빈틈없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
진晉나라 풍속의 병폐는
청담淸談을 하여 일을 폐지하는 데 있었는데,
도간陶侃이 일을 부지런히 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중류中流의
지주砥柱注+[頭註]《서경書經》 〈우공禹貢〉에는 ‘지砥’가 ‘저底’로 되어 있다. 기주冀州의 대하大河(黃河) 중류中流에 있으니, 그 모양이 기둥과 같다. 가 되어서
습속習俗에 옮김을 당하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므로 약한 형세로 강한 자를 제압하여 역신逆臣을 죽이고 대업大業을 회복하였다.
태자太子가 황제에 즉위하니, 나이가 5세였다.
태후太后注+[頭註]태후太后는 순씨荀氏이다. 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제制를 칭하고
사도司徒 왕도王導를
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고,
중서령中書令 유량庾亮과
상서령尙書令 변곤卞壼과 함께 참여하여 조정의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그러나 일의 대체大體는 모두 유량庾亮에게서 결정되었다.
“명제明帝는 은밀히 도모하고 홀로 결단하여 몸소 육군六軍(全軍)을 거느리고 원흉元兇을 소탕하여 미처 기년期年이 되기 전에 왕돈王敦의 도당이 모두 평정되었으니, 비록 재위한 연수는 짧으나 뜻은 또한 장하게 여길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