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에 苻健이 卽天王位하야 國號를 大秦이라하고 凡趙之苛政不便於民者를 皆除之하다
○ 初에 桓溫이 聞石氏亂하고 上疏請出師하야 經略中原호되 事久不報라
溫이 知朝廷仗殷浩하야 以抗己하고 甚忿之나 然이나 素知浩之爲人하야 亦不之憚也라
以國無他釁
이라하야 遂得相持彌年
注+[通鑑要解]久也라하니 雖有君臣之跡
이나 覊縻而已요 八州
注+[頭註]溫이 都督荊, 司, 雍, 益, 梁, 寧, 交, 廣八州하니라士衆資調
注+[釋義]謂資財調賦라 殆不爲國家用
이러라
十二月에 溫이 拜表輒行할새 帥衆四五萬하고 順流而下하야 軍于武昌하니 朝廷이 大懼라
司馬高
이 言於會稽王昱曰 王宜致書
하야 諭以禍福
이면 自當返
요 如其不爾
면 便六軍整駕
하리니 逆順
이 於玆判矣
리이다하고
乃於坐
에 爲昱草書
注+[通鑑要解]書曰 寇難宜平이요 時會宜接이니 此實爲國遠圖요 經略大算이라 能弘斯會는 非足下而誰리오 然이나 異常之擧는 衆之所駭니 苟或望風振擾하야 一時竝散이면 則望實竝喪하고 社稷之事去矣云云하니 溫見書하고 卽上疏하야 謝之也라하니 溫卽上疏
하야 惶恐謝罪
하고 回軍還鎭
하다
영화永和 7년(신해 351) - 조趙나라 영녕永寧 2년이고, 위魏나라 영흥永興 2년이다.
○ 진주秦主 부건苻健의 황시皇始 원년元年이다.
예전에 있던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양涼‧대代‧연燕 등 소국小國이 셋이며 새로운 대국大國이 하나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
정월에 부건苻健이 천왕天王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진大秦이라 하고, 백성들에게 불편한 모든 조趙나라의 까다로운 정사를 모두 제거하였다.
○ 처음에 환온桓溫이 석씨石氏가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 상소上疏하여 출병해서 중원中原을 경략經略할 것을 청하였으나 조정朝廷에서는 이 일에 대해 오랫동안 답을 내리지 않았다.
환온桓溫은 조정이 은호殷浩에게 기대어 자신에게 항거함을 알고 매우 분해 하였지만 평소 은호殷浩의 사람됨을 알았으므로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라에 별다른 일이 없다 하여 마침내 1년이 되도록
注+[通鑑要解]미년彌年은 오램이다. 서로 대치만 하니, 비록 겉으로는
군신간君臣間의 관계를 유지하였으나 매여 있기만 할 뿐이었고, 〈
환온桓溫이 관할하는〉 8
주州注+[頭註]환온桓溫이 형주荊州‧사주司州‧옹주雍州‧익주益州‧양주梁州‧영주寧州‧교주交州‧광주廣州의 8주州를 도독하였다. 의 군사와 재물과
공물貢物注+[釋義]자조資調는 자재資財(資産)와 조부調賦(해마다 바치는 공물)를 이른다.이 거의 국가를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환온桓溫이 여러 번 북벌北伐을 청하였으나 윤허하는 조서詔書가 내려지지 않았다.
12월에 환온桓溫이 표문表文을 올리고 곧바로 떠날 적에 병력 4, 5만 명을 거느리고 물길을 따라 내려와서 무창武昌에 군대를 주둔하니, 조정朝廷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사마司馬인 고숭高崧이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에게 말하기를 “왕이 환온桓溫에게 글을 보내어 화복禍福(出兵의 이해利害)으로 타이른다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돌아갈 것이요, 만일 이렇게 하지 않으면 곧바로 육군六軍을 정돈하여 토벌해야 할 것이니, 반역과 순종함이 여기에서 판명이 날 것입니다.” 하고,
마침내 그 자리에서
사마욱司馬昱을 위해 편지를 초하니,
注+[通鑑要解]고숭高崧이 초한 편지에 이르기를 “적의 화난禍難은 평정해야 하고 좋은 기회는 꼭 잡아야 하니, 이는 실로 국가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책이요 천하를 경략經略하는 중대한 계획이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넓힐 수 있는 것은 족하足下가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이번의 이상한 행동은 사람들이 놀라는 바이니, 만일 혹 소문을 듣고 소요를 일으켜 족하足下의 군대가 일시에 모두 흩어져 버린다면 족하足下의 명성과 실제는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국가國家의 대사大事는 글러 버릴 것이다.……” 하니, 환온桓溫이 편지를 보고 즉시 상소하여 사죄하였다. 환온桓溫이 〈편지를 받고는〉 즉시
상소上疏하여 황공해하며 사죄하고 군대를 돌려
진鎭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