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
에 秦王堅
이 徙關東豪傑及雜夷十五萬戶於關中
하고 處烏桓於馮翊, 北地
注+[通鑑要解]北地는 郡名이라하고 丁零翟
注+[通鑑要解]丁零은 北狄種名이니 漢匈奴傳註에 地名이라 翟은 本音狄이니 後人姓音宅이라於新安,
池
하다
○ 十月
에 大司馬溫
이 恃其材略位望
注+[頭註]地位聞望이라하고 陰蓄不臣之志하야 嘗撫枕歎曰 男子
不能流芳百世어든 亦當遺臭萬年이라하더라
溫이 欲先立功河朔하야 以收時望하고 還受九錫이러니 及枋頭之敗에 威名頓挫라
旣克壽春에 謂參軍郗超曰 足以雪枋頭之恥乎아 超曰 未也니이다
久之
요 超就溫宿
할새 中夜
에 謂溫曰 明公
이 當天下重任
하야 今以六十之年
으로 敗於大擧
하니 不建不世之勳
이면 不足以鎭愜
注+[通鑑要解]愜은 伏也라民望
이리이다
溫曰 然則奈何
오 超曰 明公
이 不爲伊, 霍之擧
注+[頭註]超知溫心而迎合之라者
면 無以立大威權
하야 鎭壓四海
하리이다
鄱)陽石氏曰 伊尹이 放太甲하고 霍光이 廢昌邑王은 爲宗社計라
其心이 公也어늘 小人이 妄以爲擬하니 不亦異哉아
○ 十一月
에 溫
이 自廣陵
으로 詣建康
하야 宣太后令
하야 廢帝爲東海王
하고 以會稽王昱
으로 統承皇極
하야 卽皇帝位
하니 溫
이 威勢翕赫
注+[通鑑要解]翕은 盛也라이러라
卿이 何事乃爾오 安曰 未有君拜於前하고 臣揖於後니이다
於是에 詔進溫丞相, 大司馬하야 留京師輔政하니 溫이 固辭하고 仍請還鎭姑孰하다
히 政出桓溫
하야 하고 虛器徒擁
하야 卒被廢黜
하니 哀哉
라
○ 十二月
에 大司馬溫
이 奏東海王
이 宜依昌邑故事
注+[釋義]漢昭帝崩에 迎昌邑王하야 卽帝位러니 有罪被廢하야 歸于昌邑하니라라하야 乃封海西縣公
하다
함안咸安 원년元年(신미 371) - 진秦나라 건원建元 7년이다. -
정월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관동關東의 호걸과 여러 오랑캐 족속 15만 가호를
관중關中으로 옮겼으며,
오환烏桓을
풍익馮翊과
북지北地注+[通鑑要解]북지北地는 고을 이름이다. 에
안치安置시키고
정령丁零 사람
적빈翟斌注+[通鑑要解]정령丁零은 북쪽 오랑캐의 종족 이름이니,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주註에는 지명地名이라고 하였다. 택翟은 본음本音이 적이니, 후인들이 성姓으로 쓸 때에는 음音이 택(책)이다. 을
신안新安과
민지澠池에
안치安置시켰다.
○ 10월에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은 자신의 재주와 지략과 지위와 명망
注+[頭註]위망位望은 지위와 명망이다. 을 믿고 은밀히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고서 일찍이 베개를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남자가 아름다운 명성을
백대百代에 남길 수 없으면 또한 더러운 이름이라도 만년토록 남겨야 한다.” 하였다.
환온桓溫이 먼저 하삭河朔(河北) 지방에서 공을 세워 당대의 명망을 거두고 돌아와 구석九錫을 받고자 하였는데, 방두枋頭에서 패하자 위엄과 명성이 크게 꺾였다.
수춘壽春을 점령한 뒤에 참군參軍 치초郗超에게 이르기를 “방두枋頭의 치욕을 씻을 수 있겠는가?” 하니, 치초郗超가 대답하기를 “안 됩니다.” 하였다.
얼마 후
치초郗超가
환온桓溫을 찾아가 함께 잠을 잤는데, 한밤중에
환온桓溫에게 이르기를 “
명공明公이 천하의
중임重任을 담당하여 이제 60의 나이로 크게 군대를 동원하여 출정함에 실패하였으니, 좀처럼 세상에 나타나지 않을 큰 공업을 세우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바람을 진정시키고 복종
注+[通鑑要解]협愜은 복종함이다. 시킬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환온桓溫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치초郗超가 말하기를 “
명공明公이
이윤伊尹과
곽광霍光의 일
注+[頭註]치초郗超가 환온桓溫의 속마음을 알고 영합한 것이다. 을 하지 않는다면 큰 위엄과 권력을 세워서
사해四海를 진압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환온桓溫이 평소 배반할 마음이 있었는데, 이 말을 깊이 옳게 여겨서 마침내 치초郗超와 더불어 의논을 결정하였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추방하고 곽광霍光이 창읍왕昌邑王을 폐위한 것은 종묘사직을 위한 계책이었다.
그 마음이 공정하였는데, 소인小人이 함부로 이에 비견하였으니, 이상하지 않은가.”
○ 11월에
환온桓溫이
광릉廣陵으로부터
건강建康에 나가서
태후太后의 명령을 선포하여 황제를 폐위시켜
동해왕東海王으로 삼고,
회계왕會稽王 사마욱司馬昱으로
황극皇極의 대통을 이어서 황제에 즉위하게 하니,
환온桓溫의 위엄과 권세가 대단히 혁혁
注+[通鑑要解]흡翕은 성대함이다. 하였다.
시중侍中 사안謝安이 환온桓溫을 보고 멀리서 절하자, 환온桓溫이 놀라며 말하기를 “안석安石(謝安의 자字)아!
경卿이 무슨 일로 이와 같이 하는가?” 하니, 사안謝安이 말하기를 “군주가 앞에서 절하고 신하가 뒤에서 읍하는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환온桓溫을 승상丞相‧대사마大司馬로 승진시켜 경사京師에 머물면서 정사를 보필하게 하니, 환온桓溫이 한사코 사양하고 그대로 돌아가 고숙姑孰에 진주鎭駐할 것을 청하였다.
“애제哀帝로부터 폐제廢帝에 이르기까지 정사가 환온桓溫에게서 나와 황제는 칼날을 쥐고 거꾸로 칼자루를 환온桓溫에게 내주어 이름뿐인 빈 자리[虛器]만 끼고 있다가 마침내 폐출당하였으니, 슬프다.”
○ 12월에
대사마大司馬 환온桓溫이
동해왕東海王(廢帝)은 마땅히
창읍왕昌邑王의
고사故事注+[釋義]한漢나라 소제昭帝가 붕崩함에 창읍왕昌邑王(劉賀)을 맞이하여 황제에 즉위하였는데, 죄가 있어 폐출당하여 창읍昌邑으로 돌아갔다. 를 따라야 한다고 아뢰어 마침내
해서현공海西縣公에 봉하였다.
환온桓溫의 위엄이 내외에 떨쳐지니, 황제가 비록 지존의 자리에 있었으나 팔짱을 끼고 침묵만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