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酉]十年이라 〈秦王苻丕大安元이요 燕二요 後秦白雀二年이라
正月
에 慕容沖
이 卽帝位於阿房
注+[原註]是爲西燕이라[通鑑要解]先時에 謠曰 鳳凰止阿房이라하니 堅曰 鳳凰은 非梧桐이면 不捿요 非竹實이면 不食이라하고 乃植桐竹數十萬株于阿房하야 以待之하니라 沖小字鳳凰이니 至是하야 止阿房城이라하다
○ 四月에 劉牢之至鄴하니 燕王垂 邀擊大破之라 坐軍敗하야 徵還하다
○ 五月
에 西燕主沖
注+[通鑑要解]垂復興於山東하고 而沖稱號於關中이라 故로 書西燕以別之也라이 攻長安
이어늘 秦王堅
이 身自督戰할새 飛矢滿體하야 流血淋漓라
沖이 縱兵暴掠하니 關中士民이 流散하고 道路斷絶하야 千里無煙이러라
堅이 大懼하야 以讖書云 帝出五將이면 久長得이라하야 乃留太子宏하야 守長安하고 遂出奔五將山하다
後秦王萇이 遣驍騎將軍吳忠하야 帥騎圍之하니 秦兵이 皆散走호되 堅이 神色自若하야 坐而待之라
俄而
오 忠至執之
하야 送詣新平
하야 幽於別室
注+[通鑑要解]後秦王萇이 幽秦堅於別室하고 使求傳國璽하니 堅叱之曰 五胡次序에 無汝羌名이라 璽已送晉하니 不可得也라하니라 萇이 遣人殺之하고 欲隱其名하야 諡堅曰 壯烈天王이라하다이러니 萇
이 遣人
하야 縊堅於新平佛寺
하다
論者皆以爲秦王堅之亡은 由不殺慕容垂, 姚萇故也라하나 臣獨以爲不然이라
許劭謂魏武帝는 治世之能臣이요 亂世之姦雄이라하니
使堅治國에 無失其道면 則垂, 萇은 皆秦之能臣也니 烏能爲亂哉아
魏文侯問李克吳之所以亡한대 對曰 數戰數勝이니이다
對曰 數戰則民疲하고 數勝則主驕하니 以驕主御疲民이면 未有不亡者也라하니 秦王堅이 似之矣로다
石氏之彊也에 氐, 羌之屬이 無不內徙而爲臣이러니 一朝失馭에 而角立爲患하니 理固然也라
苻洪
이 徘徊枋頭
하야 有虎踞中原之志
라 以健
注+[頭註]洪之世子라爲不肖
나 然猶西取關中
注+[附註]肖는 似也라 洪病甚하야 謂健曰 吾所以未入關者는 以爲中州可定이러니 今不幸爲豎子所困이라 中州는 非汝所能辦이니 我死어든 汝急入關하라하고 言終而卒하다 豎子所困은 謂趙將麻秋 爲洪所獲하야 以爲將軍이러니 秋因宴鴆洪하니라하고 幷姚襄
注+[頭註]姚襄은 弋仲第五子니 見二十八卷丙辰年의 奔平陽注라하고 却桓溫
注+[頭註]見二十八卷甲寅年이라하야 遂彊其國
하며 堅以雄才英略
으로 加之慈惠忠信
하고 擧王猛於布衣
하야 任之以政
하야 勳舊不能離
하고 親戚不敢妬
하니 非至明
이면 能如是乎
아
故
로 能呑彊燕, 擧河西
하고 兼巴蜀, 包漢沔
하고 俘索頭
注+[頭註]索頭는 鮮卑別部也니 姓拓跋氏라 其俗이 以索辮髮이라 因號索頭라, 屠龜玆
注+[原註]龜는 音丘요 玆는 音慈라[頭註]龜玆는 西域國名이라하야 奄有天下十分之九
하니 五胡
注+[頭註]見二十六卷이라之盛
이 未有如堅者也
라
觀其擧百萬之衆하야 以攻晉할새 先爲之除宮築第하야 以待其君臣하니 意以爲羅中之禽을 往無不獲也러니 及一戰而敗에 遂顚沛不振하야 昔之俘囚降虜가 皆起而爲敵이라
數月之間
에 寇讐徧於四方
하고 戎馬塞於郊甸
注+[頭註]甸은 自邦國以及四郊之內라하야 以至身死人手
하고 子孫殄滅
은 何哉
오
論者皆咎堅寵信羌與鮮卑
注+[頭註]謂姚萇, 慕容垂라하고 輕於伐晉
이나
要之컨대 堅恃其强大하야 易而無備하니 此其所以敗亡也夫인저
太保安
이 薨
하니 以琅邪(琊)王道子
注+[頭註]簡文帝子라로 錄尙書事
注+[頭註]錄은 總也라하다
○ 長樂公丕 在鄴이라가 將西赴長安이러니 入至晉陽하야 始知長安不守하야 堅已死하고 乃發喪하고 卽皇帝位하다
○ 十二月에 燕王垂 始定都中山하고 卽皇帝位하다
○ 呂光
注+[頭註]秦尙書呂婆樓之子也라 略陽氐人이니 是爲後涼이라이 自稱涼州刺史
하다
태원太元 10년(을유 385) - 진왕秦王 부비苻丕의 대안大安 원년元年이고, 연燕나라 2년이고, 후진後秦 백작白雀 2년이다.
○ 서연주西燕主 모용충慕容沖의 경시更始 원년元年이다.
○ 서진왕西秦王 걸복국인乞伏國仁의 건의建義 원년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대국大國이 셋이며, 새로운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소국小國이 하나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다섯이다. -
정월正月에
모용충慕容沖이
아방성阿房城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注+[原註]이(慕容沖)가 바로 서연西燕이다. [通鑑要解]이보다 앞서 동요에 이르기를 “봉황鳳凰이 아방阿房에 머문다.” 하니, 부견苻堅이 말하기를 “봉황鳳凰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하고는 마침내 오동나무와 대나무 수십만 그루를 아방성阿房城에 심어 놓고 봉황을 기다렸다. 모용충慕容沖의 소자小字가 봉황鳳凰이니, 이때에 이르러 아방성阿房城에 머물렀다.
○ 4월에 유뇌지劉牢之가 업성鄴城에 이르자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기다리고 있다가 공격하여 대파하니, 패전敗戰한 죄에 걸려서 부름을 받고 소환되었다.
○ 5월에
서연주西燕主 모용충慕容沖注+[通鑑要解]모용수慕容垂는 산동山東에서 연燕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모용충慕容沖은 관중關中에서 연燕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므로 서연西燕이라고 써서 구별한 것이다. 이
장안長安을 공격하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몸소 전투를 독려하였는데, 이때
유시流矢가 몸에 가득 꽂혀 흘러나온 피가 흥건했다.
모용충慕容沖이 군대를 풀어서 사납게 노략질하니, 관중關中의 선비와 백성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고 도로에 행인들이 끊어져 천리를 가도 밥 짓는 연기가 나지 않았다.
부견苻堅이 크게 두려워하여 도참서圖讖書에 “황제皇帝가 나가서 오장五將에 이르면 천하를 장구하게 지킬 수 있다.”고 했다 하여, 마침내 태자太子 모용굉慕容宏을 남겨 두어 장안長安을 지키게 하고는 마침내 나가 오장산五將山으로 도망하였다.
후진왕後秦王 요장姚萇이 효기장군驍騎將軍 오충吳忠을 보내어 기병을 거느리고 포위하게 하니, 진秦나라 군대가 모두 흩어져 달아났으나 부견苻堅은 정신과 얼굴빛을 변치 않고 태연자약하게 앉아서 기다렸다.
얼마 후
오충吳忠이 이르러
부견苻堅을 사로잡아서
신평新平으로 보내어 별실에 가두었는데,
注+[通鑑要解]후진왕後秦王 요장姚萇이 진왕秦王 부견苻堅을 별실別室에 가두고 사람을 보내 전국새傳國璽를 요구하니, 부견苻堅이 꾸짖기를 “오호五胡의 차서次序에 너희 강인羌人의 이름은 없다. 전국새傳國璽는 이미 진晉나라로 보냈으니 줄 수가 없다.” 하였다. 요장姚萇이 사람을 보내어 부견苻堅을 죽이고 자기 이름을 숨기고자 하여 부견苻堅의 시호를 장렬천왕壯烈天王이라 하였다. 요장姚萇이 사람을 보내
신평新平의
불사佛寺에서
부견苻堅을 목 졸라 죽였다.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멸망한 것은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나 나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
허소許劭가 이르기를 ‘위魏나라 무제武帝(曹操)는 치세治世의 유능한 신하이고 난세亂世의 간웅姦雄이다.’라고 하였다.
만일 부견苻堅이 나라를 다스림에 바른 도리를 잃지 않았다면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은 모두 진秦나라의 유능한 신하였을 것이니, 어찌 난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부견苻堅이 망한 이유는 갑자기 승리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이다.
위魏나라 문후文侯가 이극李克에게 오吳나라가 망한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문후文侯가 ‘자주 싸워서 자주 승리함은 국가의 복인데, 무슨 이유로 망하였는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자주 싸우면 백성들이 지치고 자주 승리하면 군주가 교만해지니, 교만한 군주로써 지친 백성을 부리면 망하지 않을 자가 없습니다.’ 하였으니, 진왕秦王 부견苻堅이 이와 같았다.”
“석씨石氏가 강할 때에는 저족氐族과 강족羌族의 무리가 안으로 옮겨 와서 신하 노릇 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하루아침에 통치 능력을 잃게 되자 맞서서 우환이 되었으니, 이는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부홍苻洪은
방두枋頭에 배회하여 범처럼 웅크리고 앉아서
중원中原을 병탄할 마음을 품었으며,
부건苻健注+[頭註]부건苻健은 부홍苻洪의 세자이다. 은 불초하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서쪽으로
관중關中을 취하고
注+[附註][附註]以健爲不肖 연유서취관중然猶西取關中:초肖는 같음이다. 부홍苻洪이 병이 심해지자, 아들인 부건苻健에게 이르기를 “내가 관중關中에 들어가지 않은 까닭은 중주中州(東晉)를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겨서였는데, 지금 불행히도 수자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 중주中州는 네가 차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니, 내가 죽거든 너는 급히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라.” 하고는 말을 마치자 죽었다. 수자豎子에게 곤욕을 당했다는 것은 조趙나라 장수 마추麻秋가 부홍苻洪에게 사로잡히자 그를 장군으로 삼았는데, 마추麻秋가 연회를 틈타 부홍苻洪에게 짐독을 먹인 일을 이른 것이다. 요양姚襄을 겸병하며
注+[頭註]요양姚襄은 요익중姚弋仲의 다섯째 아들이니, 28권 병진년조丙辰年條(356)의 분평양奔平陽 주注에 보인다. 환온桓溫을 물리쳐서
注+[頭註]환온桓溫을 물리친 일은 28권 갑인년조甲寅年條(354)에 보인다. 마침내 자기 나라를 강하게 하였으며,
부견苻堅은 영웅의 재주와 지략에 자애로운 은혜와
충신忠信을 겸하였고
포의布衣로 있던
왕맹王猛을 등용하여 정사를 맡겨서
훈구勳舊의 신하가 이간질하지 못하고 친척들이 감히 질투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극히 밝은 자가 아니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강한
연燕나라를 병탄하고
하서河西 지방을 차지하고
파巴‧
촉蜀 지방을 겸병하고
한漢‧
면沔 지방을 포괄하며
색두索頭注+[頭註]색두索頭는 선비족鮮卑族 중의 한 부족이니, 성姓은 탁발씨拓跋氏이다. 풍속에 변발을 하였기 때문에 인하여 색두索頭라 호칭한 것이다. 를 사로잡고
구자국龜玆國注+[原註]龜는 음이 구이고, 자玆는 음이 자이다.[頭註]龜玆는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이다. 을 도륙하여 순식간에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였으니,
오호五胡注+[頭註]오호五胡는 26권에 보인다. 의 성대함이
부견苻堅과 같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부견苻堅이 백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진晉나라를 공격할 때에 먼저 궁궐을 소제하고 집을 지어서 진晉나라의 군신君臣들을 대비하였으니,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진晉나라의 군신君臣들은 그물 속의 새와 같아서 어디를 가든 잡지 못함이 없을 것이라고 여긴 것인데, 한번 싸워 패하자 마침내 낭패를 당하여 떨치지 못해서 옛날 포로로 잡혔던 죄수와 항복한 오랑캐들이 모두 일어나 적이 되었다.
그리하여 몇 달 사이에 적과 원수가 사방에 두루 널리고
군마軍馬가
교전郊甸注+[頭註]전甸은 나라 안으로부터 사방 교외郊外의 이내까지이다. 에 가득 차서 몸이 남의 손에 죽고 자손이 멸망함에 이르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의론하는 자들은 모두
부견苻堅이
강족羌族과
선비족鮮卑族注+[頭註]강족羌族과 선비족鮮卑族은 요장姚萇과 모용수慕容垂를 이른다. 을 총애하고 신임하였으며
진晉나라를 경솔하게 정벌한 것을 탓한다.
그러나 저들은 모두 그 자취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요 그 근본은 알지 못한 것이다.
요컨대 부견苻堅은 자기 나라가 강성하고 큰 것만 믿고 상대방을 쉽게 여겨 대비가 없었으니, 이것이 어쩌면 패망한 이유일 것이다.”
태보太保 사안謝安이 죽으니,
낭야왕琅琊王 사마도자司馬道子注+[頭註]사마도자司馬道子는 간문제簡文帝(司馬昱)의 아들이다. 를
녹상서사錄尙書事注+[頭註]녹錄은 총괄하는 것이다. 로 삼았다.
○ 장악공長樂公 부비苻丕가 업성鄴城에 있다가 서쪽으로 향하여 장안長安으로 달려가려 하였는데, 진양晉陽에 들어와서 비로소 장안長安을 지켜내지 못하여 부견苻堅이 이미 죽은 것을 알고는 마침내 상喪을 발표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 12월에 연왕燕王 모용수慕容垂가 비로소 중산中山에 도읍을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
○
여광呂光注+[頭註]여광呂光은 진秦나라 상서尙書 여파루呂婆樓의 아들이다. 약양略陽의 저인氐人이니, 이가 바로 후량後涼이다. 이
양주자사涼州刺史라고 자칭하였다.
○ 서진西秦의 걸복국인乞伏國仁이 진주秦州와 하주河州 두 주州의 목牧을 자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