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辰]十七年이라 〈秦太初七이요 燕建興七이요 後秦建初七이요 魏登國七年이라〉
南郡公桓玄
注+[頭註]溫之少子니 見上癸酉年이라이 負其才地注+[頭註]地는 謂地位門地라하고 以雄豪注+[頭註]雄은 武稱이요 豪는 弛也라 又獸之將群者爲雄이요 智過百人謂豪라自處한대 朝廷
이 疑而不用
이라
年二十三
에 始拜太子洗馬
하고 後
에 出補義興太守
하니 鬱鬱不得志
注+[通鑑要解]玄爲洗馬時에 琅琊王道子 値其酣醉하야 張目謂客曰 桓溫晩塗欲作賊은 云何오하니 玄伏地流汗하야 不能起라 由是로 不自安而切齒於道子云云이라하야 歎曰
고하고 遂棄官歸
하다
태원太元 17년(임진 392) - 진秦나라 태초太初 7년이고, 연燕나라 건흥建興 7년이고, 후진後秦 건초建初 7년이고, 위魏나라 등국登國 7년이다. -
남군공南郡公 환현桓玄注+[頭註]환현桓玄은 환온桓溫의 작은아들이니, 앞의 계유년조癸酉年條(373)에 보인다. 이 자신의 재주와
문벌門閥注+[頭註]지地는 지위와 문지門地(門閥)를 이른다. 을 믿고 영웅호걸
注+[頭註]웅雄은 용맹하다는 명성이고, 호豪는 방종함이다. 또 짐승 중에 무리를 거느리는 것을 웅雄이라 하고, 지혜가 백 사람을 능가하는 것을 호豪라 한다. 로 자처하자, 조정에서 의심하고 등용하지 않았다.
나이 23세에 비로소
태자세마太子洗馬에 제수되고 뒤에 나가
의흥태수義興太守에 보임되니, 답답하여 뜻을 얻지 못해서
注+[通鑑要解]환현桓玄이 태자세마太子洗馬였을 때에 낭야왕琅琊王 사마도자司馬道子가 마침 술에 취하여 술김에 눈을 부릅뜨고 객에게 이르기를 “환온桓溫이 말년에 모반하고자 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환현桓玄이 땅에 엎드려 진땀을 흘리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환현桓玄이 이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사마도자司馬道子에 대해 이를 갈며 원망하였다. 탄식하기를 “아버지는
구주九州의
백伯이 되었는데, 자식은
오호五湖注+[頭註]격호滆湖‧조호洮湖‧사호射湖‧귀호貴湖‧태호太湖를 오호五湖라 한다. 오호五湖의 작은 지류支流가 모두 태호太湖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태호太湖가 오호五湖의 명칭을 겸하여 얻은 것이다. 의
장長이 된단 말인가.” 하고는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남군南郡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