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酉]隆安元年이라 〈燕永康二요 秦皇初四요 魏皇始(三)[二]年이라
○ 南涼王禿髮烏孤太初元年이요 北涼王段業神璽元年이라
慕容麟이 帥二萬餘人하고 出據新市어늘 甲子晦에 魏王珪進軍攻之할새 太史令鼂崇曰 不吉하니이다
昔
에 紂以甲子亡
하니 謂之疾日
注+[頭註]左傳昭九年 辰在子卯謂之疾日注에 疾은 惡也니 紂以甲子喪하고 桀以乙卯亡이라 故로 以爲忌라이라 兵家忌之
하니이다
珪曰 紂는 以甲子亡이어니와 武王은 不以甲子興乎아 崇無以對러라
十月甲戌에 珪與麟으로 戰於義臺하야 大破之하니 麟遂奔鄴하다
甲申
에 魏克中山
注+[頭註]是年三月에 魏王珪 圍中山한대 燕王寶走出이어늘 慕容詳이 城守拒魏하고 自謂能却魏兵하야 兵威已振이라하야 遂卽帝位러니 麟襲殺詳而自立이라 至是하야 珪克中山이라하다
융안隆安 원년元年(정유 397) - 연燕나라 영강永康 2년이고, 진秦나라 황초皇初 4년이고, 위魏나라 황시皇始 2년이다.
○ 남량왕南涼王 독발오고禿髮烏孤의 태초太初 원년元年이고, 북량왕北涼王 단업段業의 신새神璽 원년元年이다.
○ 예전에 있던 대국大國이 셋이고 서진西秦과 양涼 등 소국小國이 둘이고, 새로운 소국小國이 둘이니, 참국僭國이 모두 일곱이다. -
위왕魏王 탁발규拓跋珪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중산中山을 포위하니, 중산中山이 기근饑饉이 몹시 심하였다.
모용린慕容麟이 2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와 신시新市를 점거하자, 갑자일甲子日(9월 29일) 그믐에 위왕魏王 탁발규拓跋珪가 진군하여 공격하려 하였는데, 이때 태사령太史令 조숭鼂崇이 말하기를 “불길합니다.
옛날에
주왕紂王이
갑자일甲子日에 망하였으니, 이날을
질일疾日注+[頭註]《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9년조年條의 ‘진재자묘辰在子卯 위지질일謂之疾日(일진이 갑자甲子와 을묘乙卯에 있는 것을 질일疾日이라 한다)’ 주注에 “질疾은 불길한 것이니, 주왕紂王은 갑자일甲子日에 망하였고 걸왕桀王은 을묘일乙卯日에 망하였다. 그러므로 꺼리는 것이다.” 하였다. 이라 이르는 바,
병가兵家에서 이를 꺼립니다.” 하였다.
탁발규拓跋珪가 말하기를 “주왕紂王은 갑자일에 망하였으나 무왕武王은 갑자일에 흥하지 않았는가?” 하니, 조숭鼂崇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10월 갑술일甲戌日(10일)에 탁발규拓跋珪가 모용린慕容麟과 의대義臺에서 싸워 크게 격파하니, 모용린慕容麟이 마침내 업성鄴城으로 도망하였다.
갑신일甲申日(20일)에
위魏나라가
중산中山을 이겼다.
注+[頭註]이해 3월에 위왕魏王 탁발규拓跋珪가 중산中山을 포위하자 연왕燕王 모용보慕容寶가 달아나니 모용상慕容詳이 성城을 수비하여 위魏나라를 막고서, 스스로 위魏나라 군대를 물리쳐 군대의 위엄이 이미 떨쳐졌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황제에 즉위하였다. 모용린慕容麟이 모용상慕容詳을 습격하여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탁발규拓跋珪가 중산中山을 이겼다.
모용린慕容麟은 업성鄴城에 이르러 다시 조왕趙王이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