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亥]三年이라 〈燕長樂元이요 秦弘始元이요 魏天興二年이라
魏王珪置五經博士하고 增國子太學生員하야 合三千人하다
○ 南燕王德이 引師而南하니 北鄙諸郡이 皆降之어늘 遂定都廣固하다
○ 會稽世子
注+[頭註]會稽王은 道子이니 卽瑯琊王이라元顯
이 性苛刻
하야 生殺任意하니 孫恩
注+[附註]琅琊人이니 世奉五斗米道라 恩叔父泰 有秘術하야 愚者敬之如神하야 皆竭財産하고 進子女하야 以祈福慶이러니 爲會稽王道子所誅한대 恩逃于海하다 衆聞泰死하고 惑之하야 皆謂蟬蛻登仙이라 故로 就海中資給하니 恩聚合亡命하야 志欲復讐하고 因民心騷動하야 遂叛하니라 後爲臨海太守辛景所討하야 窮蹙赴海自沈하니 妖黨謂之水仙이라하야 投水從死者百數러라 五斗米道는 見二十三卷米賊注하니라이 因民心騷動
하야 自海島
로 其黨
하야 殺上虞令
하고 遂攻會稽
하다
於是에 會稽及東陽, 新安凡八郡人이 一時起兵하야 殺長吏以應恩하니 旬日之中에 衆이 數十萬이러라
時
에 承平注+[頭註]承은 一作昇이라日久하야 民不習戰이라 故
로 郡縣兵
이 皆
望風奔潰라
恩據會稽하야 自稱征東將軍하고 表會稽王道子及世子元顯之罪하야 請誅之하다
○ 自帝卽位以來
로 內外乖異
하야 石頭以南
은 皆爲荊, 江所據
注+[頭註]荊은 殷仲堪이요 江은 王愉라하고 以西
는 皆豫州所專
注+[頭註]豫는 庾楷라이요 京口及江北
은 皆劉牢之
注+[附註]彭城人이니 沈毅多計畫이라 爲桓玄參軍하야 領精銳하고 爲前鋒하야 百戰百勝하니 號爲北(部)[府]하고 敵人畏之라 復爲龍驤將軍, 領江州而死하니라及廣陵相高雅之所制
하야 朝政所行
은 惟三吳而已
러니
及孫恩作亂
에 八郡
注+[頭註]謂荊, 江, 豫, 京口, 江北及三吳라이 皆爲恩有
하야 畿內諸縣
에 盜賊이 處處蜂起注+[釋義]言其衆也라하고 恩黨
이 亦有潛伏在建康者
하니 人情危懼
하야 常懼竊發
이러라
於是에 內外戒嚴하야 加道子黃鉞하고 元顯領中軍將軍하고 命徐州刺史謝琰하야 兼督吳興義興軍事하야 以討恩하고
十二月
에 謝琰
이 與牢之
로 轉鬪
注+[頭註]轉相戰鬪也라而前
하니 所向輒克
이러라
○ 初
에 彭城劉裕
注+[頭註]宋高祖라 勇健有大志
라
僅識文字
하고 以賣履爲業
하고 好
蒲
注+[通鑑要解]老子所作이니 令人擲之爲戲라 以爲之子하니 有梟盧雉犢塞五者하야 爲勝負之策하니 卽今之骰子라 骰는 音頭니 骰子는 博陸彩具라하니 爲鄕閭所賤
이라
劉牢之擊孫恩
할새 引裕參軍事
하고 使將數十人
하야 賊
이러니 遇賊數千人
하야 卽迎擊之
라가 從者皆死
하고 裕墜岸下
라
賊이 臨岸欲下어늘 裕奮長刀하야 仰斫殺數人하고 乃得登岸하야 仍大呼逐之하니 賊皆走하고 裕所殺傷이 甚衆이러라
劉敬宣
注+[頭註]牢之之子라이 怪裕久不返
하야 引兵尋之
라가 見裕獨驅數千人
하고 咸共歎息
하야 因進擊賊
하야 大破之
하고 斬獲千餘人
하다
○ 初에 恩聞八郡響應하고 謂其屬曰 天下無復事矣라
當與諸君으로 朝服至建康이라하더니 旣而오 聞牢之引兵濟江하고 恩驅男女二十餘萬口하야 復逃入海島하다
○ 殷仲堪
注+[原註]時爲荊州剌史하니라이 恐桓玄跋扈
注+[頭註]見十九卷丙戌年注라하야 乃與楊佺期
注+[頭註]雍州刺史라로 結婚爲援
이어늘 玄
이 引兵擊殺之
하다
玄이 旣克荊, 雍하고 表求領荊, 江二州하니 朝廷이 不能違러라
○ 涼王光
이 卒
하고 太子紹卽位
하니 太原公纂
注+[原註]纂이 嗜酒好獵이어늘 隆安五年에 呂超殺之하고 而立呂隆이러니 安帝元興二年에 降于秦하야 涼遂滅하니라[頭註]太原公纂은 紹之庶兄이라이 殺之
하고 而卽天王位
하다
융안隆安 3년(기해 399) - 연燕나라 장락長樂 원년元年이고, 진秦나라 홍시弘始 원년元年이고, 위魏나라 천흥天興 2년이다.
○ 양주涼主 여찬呂纂의 함녕咸寧 원년元年이고, 북량北涼 천새天璽 원년元年이다. -
위왕魏王 탁발규拓跋珪가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설치하고 국자학國子學과 태학太學의 생원生員을 늘려 모두 3천 명이 되게 하였다.
○ 남연왕南燕王 모용덕慕容德이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니, 북쪽 변방의 여러 군郡이 모두 항복하였으므로 마침내 광고廣固에 도읍을 정하였다.
○
회계왕會稽王의
세자世子注+[頭註]회계왕會稽王은 사마도자司馬道子이니, 곧 낭야왕瑯琊王이다. 인
사마원현司馬元顯이 성품이 까다롭고 각박하여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것을 마음대로 하니,
손은孫恩注+[附註]손은孫恩은 낭야琅琊 사람이니, 대대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믿었다. 손은孫恩의 숙부叔父인 손태孫泰가 비밀스런 방술이 있어서, 어리석은 자들이 그를 신神처럼 공경하여 모두 재산을 탕진하고 자녀를 바쳐 복福을 빌었는데,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죽임을 당하자 손은孫恩이 해도海島로 도망하였다. 사람들이 손태孫泰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의혹하여 모두 이르기를 ‘환골탈태하여 신선이 되어 올라갔다.’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해도海島에 나아가 물자物資를 공급하니, 손은孫恩이 망명한 자들을 모아서 마음속으로 복수하고자 하여 민심이 소동騷動한 틈을 타서 마침내 배반하였다. 뒤에 임해태수臨海太守 신경辛景에게 토벌당하여 궁지에 몰리자 바다에 뛰어들어 스스로 빠져 죽었는데, 요망한 무리가 수선水仙(水國의 신선神仙)이라 이르며 물속에 투신하여 따라 죽은 자가 백 명으로 헤아려졌다. 오두미도五斗米道는 23권 미적米賊 주注에 보인다. 이
민심民心이 소요한 틈을 타서
해도海島로부터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상우령上虞令을 죽이고 마침내
회계會稽를 공격하였다.
이에 회계會稽와 동양東陽, 신안新安 등 모두 여덟 군郡의 사람들이 일시에 군대를 일으켜서 수령을 죽이고 손은孫恩에게 호응하니, 열흘 만에 무리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
이때
삼오三吳 지방은 태평을 누린
注+[頭註]승承은 다른 곳에는 승昇으로 되어 있다. 지가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투를 익히지 않았으므로
군현郡縣의 병력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달아나 궤멸되었다.
손은孫恩이 회계會稽를 점거하여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 자칭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회계왕會稽王 사마도자司馬道子와 세자世子인 사마원현司馬元顯의 죄를 열거하여 그들을 죽일 것을 청하였다.
○ 황제가 즉위한 이래로 조정과 지방 군벌이 서로 괴리되어서
석두성石頭城 이남은 모두
형주荊州와
강주江州의 두
자사刺史에게 점거당하였고
注+[頭註]형주자사荊州刺史는 은중감殷仲堪이요, 강주자사江州刺史는 왕유王愉이다. 석두성石頭城 이서는 모두
예주豫州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注+[頭註]예주자사豫州刺史는 유해庾楷이다. 경구京口와
강북江北은 모두
유뇌지劉牢之注+[附註]유뇌지劉牢之는 팽성彭城 사람이니, 침착하고 굳세며 계책이 많았다. 환현桓玄의 참군參軍이 되어 정예병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백전백승하니, 이름하기를 북부병北府兵이라 하고 적들이 두려워하였다. 다시 용양장군龍驤將軍‧영강주자사領江州刺史가 되었다가 죽었다. 와
광릉상廣陵相인
고아지高雅之에게
공제控制당하여 조정의 정사가 행해지는 곳은 오직
삼오三吳 지방뿐이었다.
손은孫恩이 난리를 일으켜 여덟
군郡注+[頭註]여덟 군郡은 형주荊州, 강주江州, 예주豫州, 경구京口, 강북江北 및 삼오三吳(吳郡, 오흥吳興, 단양丹陽)를 이른다. 이 모두
손은孫恩의 소유가 되자,
기내畿內의
제현諸縣에서 도적들이 곳곳마다 봉기
注+[釋義]봉기蜂起는 많음을 말한 것이다. 하고
손은孫恩의 도당 중에 또한
건강建康에 잠복해 있는 자가 있으므로
인정人情이 위태롭게 여기고 두려워하여 항상 적이 갑자기 일어날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안팎으로 엄밀하게 경계하여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황월黃鉞을 가하고 사마원현司馬元顯에게 영중군장군領中軍將軍을 가하였으며 서주자사徐州刺史 사염謝琰에게 명하여 오흥吳興과 의흥군義興郡의 군사軍事를 겸하여 도독해서 손은孫恩을 토벌하게 하였다.
유뇌지劉牢之 또한 군대를 일으켜 손은孫恩을 토벌할 적에 표문을 올리고 즉시 떠났다.
12월에
사염謝琰이
유뇌지劉牢之와
전전轉轉하여 싸우면서
注+[頭註]전투轉鬪는 전전轉轉하면서 서로 전투하는 것이다. 전진하니, 향하는 곳마다 이겼다.
○ 처음에
팽성彭城의
유유劉裕注+[頭註]유유劉裕는 송宋나라 고조高祖이다. 가 용맹하고 굳세며 큰 뜻이 있었다.
겨우 글자를 알고 짚신을 파는 것을
생업生業으로 삼으며
저포樗蒲(쌍륙과 골패 놀이)
注+[通鑑要解]노자老子가 만든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이것을 던지게 하여 놀이를 하는 것이다. 오목五木으로 자子를 삼는데, 효梟‧노盧‧치雉‧독犢‧새塞의 다섯 가지가 있어 승부勝負의 책策으로 삼으니 바로 지금의 두자骰子(주사위)이다. 두骰는 음音이 두(투)이니, 두자骰子는 박륙博陸(쌍륙)할 때 사용하는 채구彩具이다. 를 좋아하니,
향려鄕閭에서 천대를 받았다.
유뇌지劉牢之가 손은孫恩을 공격할 적에 유유劉裕를 임용하여 참군사參軍事로 삼아,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을 엿보게 하였는데 수천 명의 적을 만나 즉시 요격하였다가 수행했던 자는 모두 죽고 유유劉裕는 언덕 아래로 떨어졌다.
적이 언덕에서 굽어보고 내려오려 하자, 유유劉裕가 긴 칼을 휘둘러 몇 사람을 올려다보면서 찔러 죽이고 마침내 언덕으로 올라가서 크게 고함치면서 그들을 쫓아가니 적이 모두 도망하였으며, 유유劉裕에게 살상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유경선劉敬宣注+[頭註]유경선劉敬宣은 유뇌지劉牢之의 아들이다. 이
유유劉裕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군대를 이끌고 찾아 나섰다가
유유劉裕가 홀로 수천 명을 쫓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함께 감탄하고 인하여 적진을 향해 진격해서 크게 격파하고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천여 명이었다.
○ 처음에 손은孫恩이 여덟 군郡이 호응한다는 말을 듣고 부하들에게 이르기를 “천하에 다시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
내 그대들과 조복朝服을 입고 건강建康에 이르러 제위帝位에 오르겠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유뇌지劉牢之가 군대를 이끌고 절강浙江을 건너왔다는 말을 듣고는 손은孫恩이 남녀 백성 20여만 명을 몰고 다시 해도海島로 도망하여 들어갔다.
○
은중감殷仲堪注+[原註]은중감殷仲堪이 이때 형주자사荊州剌史로 있었다. 은
환현桓玄이
발호跋扈注+[頭註]발호跋扈는 19권 병술년丙戌年(146) 주注에 보인다. 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양전기楊佺期注+[頭註]양전기楊佺期는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었다. 와 혼인을 맺어 서로 원조하게 하였는데,
환현桓玄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은중감殷仲堪과
양전기楊佺期를 공격하여 죽였다.
환현桓玄이 이미 형주荊州와 옹주雍州를 점령하고 표문表文을 올려 형주荊州와 강주江州 두 주州를 거느릴 것을 청하니, 조정朝廷에서 어기지 못하였다.
○
양왕涼王 여광呂光이 죽고
태자太子 여소呂紹가 즉위하니,
태원공太原公 여찬呂纂注+[原註]呂纂이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자, 융안隆安 5년(401)에 종제從弟 여초呂超가 그를 죽이고 여륭呂隆을 세웠는데, 안제安帝 원흥元興 2년(403)에 진秦나라 요흥姚興에게 항복함으로써 양涼나라가 마침내 멸망하였다.[頭註]太原公 여찬呂纂은 여소呂紹의 서형庶兄이다. 이 그를 죽이고
천왕天王에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