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寅]元興元年이라 〈燕光始二요 秦弘始四요 魏天興五年이라
以尙書令元顯으로 爲驃騎大將軍하야 討桓玄할새 以劉牢之로 爲前鋒하고 譙王尙之로 爲後部하다
明公은 英威振於遠近하고 元顯은 口尙乳臭요 劉牢之는 大失物情하니
若兵臨近畿
하야 示以禍福
이면 土崩之勢
를 可
足
注+[頭註]翹는 企也라而待
하리니
何有延敵入境하야 自取窮蹙者乎잇가 玄이 從之하다
玄至新亭
注+[釋義]在江寧縣南十里하니 俯近江渚라 周顗嘗與群公으로 遊宴于此하니라하니 元顯
이 引兵欲還宮
이어늘
玄
이 遣人拔刀
하야 隨後大呼曰 放仗
注+[釋義]放仗은 謂呼令放棄兵仗也라하라하니 軍人
이 皆崩潰
러라
玄
이 入京
하야 摠百揆
注+[釋義]書云納于百揆라한대 蔡氏傳曰 揆는 也니 百揆는 揆度庶政之官이라 惟唐, 虞有之하니 猶周之冢宰也라하고 斬元顯及東海王彦璋, 譙王尙之等於建康市
하니 劉牢之
는 北走至新州
하야 縊而死
하고 道子等
도 皆死
하다
自隆安
注+[頭註]帝之初年號라以來
로 中外之人
이 厭於禍亂
이라
及玄初至하야 黜奸佞하고 擢雋(俊)賢하니 京師欣然하야 冀得少安이러니 旣而오 玄이 奢豪縱逸하야 政令이 無常하고 朋黨이 互起하야 陵侮朝廷하고 裁損乘輿供奉之具하니 帝幾不免飢寒이라
○ 孫恩이 赴海死하니 衆이 推恩妹夫盧循하야 爲主하다
원흥元興 원년元年(임인 402) - 연燕나라 광시光始 2년이고, 진秦나라 홍시弘始 4년이고, 위魏나라 천흥天興 5년이다.
○ 남량왕南涼王 독발녹단禿髮傉檀의 홍창弘昌 원년元年이다. -
상서령尙書令 사마원현司馬元顯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아 환현桓玄을 토벌할 때에 유뇌지劉牢之를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고 초왕譙王 사마상지司馬尙之를 후부도독後部都督으로 삼았다.
환현桓玄이 크게 놀라서 성곽을 수리하고 식량을 모아 강릉江陵을 지키고자 하였는데, 장사長史 변범지卞範之가 말하기를
“명공明公께서는 용맹과 위엄이 원근에 떨쳐졌는데, 사마원현司馬元顯은 입에서 아직 젖내가 나고 유뇌지劉牢之는 민심을 크게 잃었으니,
만일 우리 군대가
근기近畿에 가서
화복禍福의
도리道理를 보여 준다면 흙이 무너지는 듯한 형세를 발돋움하고
注+[頭註]교翹는 발돋움하고 바라는 것이다.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적을 맞아들여 경내로 들어오게 해서 스스로 곤궁하고 위축됨을 취한단 말입니까?” 하니, 환현桓玄이 그의 말을 따랐다.
환현桓玄이
신정新亭注+[釋義]신정新亭은 강녕현江寧縣 남쪽 10리 되는 곳에 있으니, 강가 부근이다. 주의周顗가 일찍이 여러 공들과 여기에서 놀고 잔치하였다. 에 이르니,
사마원현司馬元顯이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환현桓玄이 사람을 보내 칼을 뽑아 들고 뒤를 따라가며 크게 고함치기를 “병장기를 버리라.” 하니,
注+[釋義]방장放仗은 고함을 쳐서 병장기를 버리게 함을 이른다. 군사들이 모두 와해되었다.
환현桓玄이 서울로 들어가서
백관百官을 총령하고
注+[釋義]《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이르기를 “백규百揆에 앉혔다.” 하였는데, 채씨蔡氏의 전傳에 이르기를 “규揆는 헤아림이니, 백규百揆는 여러 정사를 헤아리는 관원이다. 오직 당唐‧우虞 시대에만 있었으니, 주周나라의 총재冢宰와 같다.” 하였다. 사마원현司馬元顯,
동해왕東海王 사마언장司馬彦璋,
초왕譙王 사마상지司馬尙之 등을
건강建康의 시장에서 목 베니,
유뇌지劉牢之는 북쪽으로 달아나
신주新州에 이르러 목을 매어 죽고
사마도자司馬道子 등도 모두 죽었다.
융안隆安注+[頭註]진晉나라 안제安帝의 처음 연호年號이다. 이래로
중외中外의 사람들이 재앙과 난리를 싫어하였다.
환현桓玄이 처음에 이르러서 간신들을 물리치고 준걸들을 발탁하니, 경사京師가 기뻐하여 다소 편안해지기를 바랐는데, 이윽고 환현桓玄이 사치하고 방종하여 정사와 명령이 일정함이 없고 붕당朋黨이 서로 일어나서 조정을 능멸하고 승여乘輿(皇帝)에게 공봉供奉하는 물품을 대폭 줄이니, 황제가 거의 기한飢寒을 면치 못하였다.
○ 손은孫恩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으니, 무리들이 손은孫恩의 매부인 노순盧循을 추대하여 군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