六月에 魏主下詔하야 不得爲北俗之語於朝廷하고 違者는 免所居官하다
○ 魏詔求遺書
하되 秘閣
注+[通鑑要解]漢時書府는 在外則有太常, 太史, 博士掌之하고 內則有延閣, 廣內, 石渠之藏이라 後漢則藏之東觀이요 晉有中外三閣하니 此秘閣之名所由始也라所無
로 有益時用者
는 加以優賞
하다
○ 八月
에 魏立國子, 太學, 四門
注+[頭註]四門學始此하니 於四門置學이라小學於洛陽
하다
○ 魏高祖好讀書하야 手不釋卷하고 在輿據鞍에 不忘講道하고
善屬文
하야 多於馬上口占
注+[頭註]隱其辭하야 口以授人曰口占이라하고 旣成
에 不更一字
러라
自
以後
로 詔策
을 皆自爲之
하고 好賢樂善
하야 情如飢渴
하고 所與遊接
을 常寄以布素之意
하니 如李沖, 李彪, 高閭, 王肅, 郭祚, 宋弁, 劉芳, 崔光, 邢巒之徒 皆以文雅見親
하고 貴顯用事
라
制禮作樂이 鬱(蔚)然可觀하야 有太平之風焉이러라
을해(495) - 제齊나라 건무建武 2년이고, 위魏나라 태화太和 19년이다. -
6월에 위주魏主가 조명詔命을 내려 북쪽 지방의 말인 선비어鮮卑語를 조정에서 쓰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맡고 있는 관직을 면직시켰다.
○
위魏나라가
조명詔命을 내려
산일散佚된 책들을 구하되
비각秘閣注+[通鑑要解]한漢나라 때의 서부書府는 지방에서는 태상太常‧태사太史‧박사博士가 관장하였고 서울에는 연각延閣‧광내廣內‧석거각石渠閣이 있었다. 후한後漢 때에는 동관東觀에 보관하였고, 진晉나라 때에는 중외中外에 삼각三閣이 있었으니, 〈비서랑秘書郞이 삼각三閣의 비서秘書를 관장하였다.〉 이것이 비각秘閣이라는 명칭이 시작된 유래이다. 에 없는 것으로 세상에 유익할 경우에는 후한 상을 내렸다.
○ 8월에
위魏나라가
낙양洛陽에
국자학國子學‧
태학太學‧
사문四門注+[頭註]사문학四門學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으니, 낙도洛都의 사문四門에 학교를 설치하였다. 小學을 세웠다.
○ 위魏나라 고조高祖는 책 읽기를 좋아하여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수레에 타거나 말안장에 앉아 있을 때에도 도道를 강론함을 잊지 않았다.
글을 잘 지었는데, 대부분 말 위에서 입으로 불러 주었고
注+[頭註]속으로 문장을 헤아리고서 입으로 불러 주는 것을 구점口占이라 한다. 이미 완성하고 나서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태화太和 11년(487) 이후로 조령詔令과 책문策文을 모두 직접 지었으며, 어진 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거워하여 절실한 마음이 굶주리고 목마를 때 음식을 구하는 것과 같았으며, 더불어 교유하고 대하는 사람들에게 항상 포의布衣와 교제하는 질박한 뜻을 붙이니, 이충李沖‧이표李彪‧고려高閭‧왕숙王肅‧곽조郭祚‧송변宋弁‧유방劉芳‧최광崔光‧형만邢巒 같은 무리들이 모두 문아文雅로써 친애함을 받았으며 존귀하고 현달하여 용사用事하였다.
예악禮樂을 제정한 것이 성대하여 볼 만해서 태평太平한 유풍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