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戌] 〈梁中大通二年이요 魏永安三年이요 曄建明元年이라〉
魏爾朱榮
이 雖居外藩
이나 遙制朝政하니 樹置親黨
하야 布列魏主左右
하야 伺察動靜注+[釋義]伺는 候也라하야 大小를 必知라
魏主雖受制於榮이나 然性勤政事하야 朝夕不倦하야 數親覽辭訟하고 理寃獄하니 榮이 聞之하고 不悅이라
魏主旣外逼於榮
하야 恒
怏不
이러니 遂與城陽王徽
로 圖榮殺之
하다
是夜
에 爾朱世隆
注+[頭註]榮之從弟니 時爲僕射라이 帥榮部曲
하야 焚西陽門
하고 出屯河陰
하다
十月
에 汾州刺史爾朱兆 聞榮死
하고 自汾州
로 帥騎據晉陽
이러니 世隆
이 至長子
어늘 兆來會之
하야 共推太原太守長廣王曄
注+[頭註]太武帝子요 追尊景穆皇帝晃之孫이라하야 卽皇帝位
하고 大赦
하고 改元建明
하다
○ 十二月에 魏兆輕兵으로 倍道兼行하야 從河橋西渡하다
先是
에 敬宗
注+[頭註]魏莊帝子攸廟號라이 以大河深廣
이라하야 謂兆未能猝濟
러니 是日
에 水不沒馬腹
하고 暴風
에 黃塵
이 漲天
이라
兆騎叩宮門이어늘 宿衛乃覺하고 彎弓欲射로되 矢不得發이라
一時散走
어늘 兆騎執其主
하야 鎖於永寧寺樓上
이러니 遷於晉陽
하야 殺之
하다
○ 魏初
에 葛榮部衆流入幷, 肆
注+[頭註]二州名이라者 二十餘萬
이러니 爲契胡
注+[頭註]謂爾朱氏也니 見上戊申年이라 契은 音喫이니 如契丹之契이라陵暴
하야 皆不聊生
하야 謀亂不止
라
兆患之하야 問計於高歡한대 歡曰 宜選王腹心하야 使統之라한대 兆遂以其衆委焉하다
歡
이 以兆醉
로 恐醒而悔之
하야 遂出宣言
호되 受委
하야 하니 可集汾東
하야 受號令
하라하고
乃建牙陽曲川하니 軍士素惡兆而樂屬歡하야 莫不皆至라
方今에 四方紛擾하야 人懷異望하고 高公은 雄才蓋世하니 復使握大兵於外면 譬如借蛟龍以雲雨하야 將不可制矣리이다 兆弗聽하다
경술(530) - 양梁나라 중대통中大通 2년이고, 위魏나라 영안永安 3년이고, 원엽元曄의 건명建明 원년元年이다. -
위魏나라
이주영爾朱榮이 비록 몸은
외번外藩(太原王의
봉지封地)에 있었으나 멀리서 조정의 정사를
공제控制하니,
당여黨與와 신임하는 자들을 많이 심어놓아서
위주魏主의 좌우에 포진시키고 조정의
동정動靜을 사찰
注+[釋義]사伺는 살핌이다. 하게 하여 조정의 크고 작은 정사를 반드시 알았다.
위주魏主가 비록 이주영爾朱榮에게 공제控制당하였으나 타고난 성품이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조석으로 게을리 하지 아니하여 자주 사송辭訟을 직접 살피고 억울한 옥사를 다스리니, 이주영爾朱榮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위주魏主가 이미 밖으로 이주영爾朱榮에게 핍박당하여 항상 앙앙불락했는데, 마침내 성양왕城陽王 원휘元徽와 함께 도모하여 이주영爾朱榮을 죽였다.
이날 밤(9월 25일)에
이주세륭爾朱世隆注+[頭註]이주세륭爾朱世隆은 이주영爾朱榮의 종제從弟이니, 이 당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였다. 이
이주영爾朱榮의 부대를 거느리고 가서
서양문西陽門을 불태우고 나가서
하음河陰에 주둔하였다.
10월에
분주자사汾州刺史 이주조爾朱兆가
이주영爾朱榮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분주汾州로부터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진양晉陽을 점거하였는데,
이주세륭爾朱世隆이
장자현長子縣에 이르자
이주조爾朱兆가 와서 회동하여
태원태수太原太守인
장광왕長廣王 원엽元曄注+[頭註]장광왕長廣王 원엽元曄은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의 아들이고, 경목황제景穆皇帝로 추존追尊된 탁발황拓跋晃의 손자이다. 을 함께 추대해서 황제에 즉위하게 한 다음 크게 사면하고
건명建明으로 개원하였다.
○ 12월에 위魏나라 이주조爾朱兆가 경무장한 기병으로 행군속도를 배가하여 하교河橋의 서쪽으로부터 건너왔다.
이보다 앞서
경종敬宗注+[頭註]위魏나라 장제莊帝 원자유元子攸의 묘호廟號이다. 은
황하黃河가 깊고 넓어서
이주조爾朱兆가 갑자기 건너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이날
황하黃河의 물이 말의 배에도 차지 않았고 폭풍이 불어 누런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었다.
이주조爾朱兆의 기병이 궁궐 문을 공격하자, 숙위병宿衛兵이 비로소 깨닫고 활을 당겨 쏘고자 하였으나 바람이 너무 거세어 화살을 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일시에 흩어져 도망하니, 이주조爾朱兆의 기병이 군주를 사로잡아 영녕사永寧寺 누상樓上에 가두었는데, 진양晉陽으로 옮겨서 목 졸라 죽였다.
○
위魏나라 초기에
갈영葛榮의
부중部衆으로서
유락流落하다가
병주幷州와
사주肆州注+[頭註]병幷과 사肆는 두 주州의 이름이다. 로 들어간 자가 20여만 명이었는데,
계호契胡(爾朱氏)
注+[頭註]계호契胡는 이주씨爾朱氏를 이르니, 앞의 무신년조戊申年條(528)에 보인다. 글契은 음音이 긱(글)이니, 거란契丹(글안)의 글契과 같다. 에게 능멸당하여 모두 살 수가 없어서 끊임없이 반란을 도모하였다.
이주조爾朱兆가 이를 걱정하여 고환高歡에게 계책을 묻자, 고환高歡이 말하기를 “왕의 심복을 뽑아서 그로 하여금 통솔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이주조爾朱兆가 마침내 갈영葛榮의 무리를 고환高歡에게 맡겼다.
고환高歡은 이주조爾朱兆가 이때 술에 취했으므로 술이 깨면 후회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군영軍營에 나와서 선언하기를 “내가 왕王의 위임을 받아 주진州鎭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으니, 분하汾河 동쪽에 집결하여 나의 호령을 받으라.” 하고는
마침내 양곡천陽曲川(汾水)에 아기牙旗를 꽂으니, 군사軍士들이 평소 이주조爾朱兆를 미워하고 고환高歡에게 소속되는 것을 즐거워하여 모두 이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장사長史 모용소종慕容紹宗이 간하기를 “안 됩니다.
지금 사방이 분분하고 소란해서 사람마다 모반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며 고공高公은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으니, 그로 하여금 다시 밖에서 대군大軍을 장악하게 하는 것은 비유하면 교룡蛟龍에게 구름과 비를 빌려 주는 것과 같아서 장차 공제控制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이주조爾朱兆가 듣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