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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6)

통감절요(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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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절요(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己巳] 〈梁太淸三年이요 魏大統十五年이요 東魏武定七年이라
正月 侯景 百道攻城하야 晝夜不息이라
梁主聞城已陷하고 歎曰 自我得之하고 自我失之하니 亦復何恨이리오
俄而 入見於太極東堂할새 以甲士五百人으로 自衛러니 稽顙殿下하야 不敢仰視하고 汗流被面이라
退謂王僧貴注+[頭註]景之親貴隆重者曰 吾常跨鞍對陳(陣)에 矢刃交下로되 而意氣安緩하야 了無怖心이러니 今見蕭公 使人自慴注+[頭註] 音疊이니 懼怯也하니 豈非天威難犯이리오
吾不可以再見之라하더라
是後 梁主所求 多不遂志注+[頭註]爲侯景所制하고 飮膳 亦爲所裁節하니 憂憤成疾하다
五月丙辰 梁主臥淨居殿이라가 口苦하야 索蜜不得이라 再曰 라하고 遂殂하니 年八十六이라
是日 太子卽位하다
[史略 史評]史斷曰
梁武以齊之同姓으로 世系有考하고 遭時昏亂하야 遂移齊鼎이라
孝慈恭儉하고 博學能文하며 敬禮大臣하고 勤於庶政하며 立贖刑條하고 하며 徵士求言하고 尊經興學하야 禮樂制度 相望于冊이라
是以 天監之世 時和歲豐하야 海內無事
이나 晩節末路 하고 禍成戎羯하야 衣冠 斃鋒鏑之下하고 老幼粉戎馬之足하야 金甌遂缺하고 寶鼎屢移하야 爲千古所閔笑者 何哉
議者僉謂 帝信朱异之謀하고 貪河南之地하야 棄與國하고 納叛人하야 其禍遂至於此라하니
殊不知帝崇尙釋敎하야 變夏爲夷하야 堂堂袞冕 至加夷狄之衣하고 宗廟去牲하야 至具蔬果之薦하니 如是 則不待侯景入國而江左已爲夷狄之區 不待社稷變遷而宗廟已不血食矣
其後 臣叛其君하고 子叛其父하야 或頓兵自固而不急君父之難하고 或擧州降仇而不恤宗國之亡하니 夫以浮屠之學 棄君臣, 絶父子하야 而末流之禍 其烈如此어늘 有國家者 尙欲崇奉其敎而不悟하니 果何爲哉
○ 六月 梁臨賀王正德 怨侯景賣己하야 密書 召鄱陽王範注+[頭註]合州刺史하야 使以兵入이러니 遮得注+[釋義]謂遮截於路而得之其書하고 縊殺之注+[頭註]侯景殺蕭正德이라하다
○ 八月 東魏高澄 爲蘭京所殺注+[釋義] 蘭(起)[欽]之子 澄以爲膳奴 京屢訴어늘 澄欲殺之하니 因是謀亂하니라[通鑑要解]澄嘗獲衡州刺史蘭欽子京하야 爲膳奴 京屢自訴하니 澄杖之曰 更訴하면 當殺하리라하다 進食할새 置刀盤下라가 殺之하다하다
變起倉猝하니 內外震駭 聞之하고 指麾部分하야 入討群賊하야 斬而하다
洋至하야 大會文武할새 神彩英暢하고 言辭敏洽하니 衆皆大驚이러라
澄政令有不便者 洋皆改之하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하야 已不容誅어늘 及其嗣霸 不承先志하고 肆爲悖逆하야 幽辱其主 如拘寇仇
未幾 膳奴之刃 禍起不測하니 天道好還 有以也夫인저
○ 十二月 梁始興太守陳霸先注+[頭註]字興國이니 吳興長城人이라 其本甚微일새 自云漢太丘長寔之後也라하니 是爲陳高祖 結郡中豪傑하야 欲討侯景할새 郡人侯安都 各帥衆千餘人하고 歸之어늘 遣使하야 間道注+[頭註] 去聲이니 微路也 投空隙而行하야 不公顯也詣江陵하야 受湘東王繹注+[頭註]武帝第七子 是爲元帝節度하다
[二十史略]魏主恪하니 諡曰宣武皇帝라하고 廟號世宗이라하다
子詡立하니 甫六歲일새 母胡氏稱制러니
及魏主旣長 好遊騁하야 不親視朝하고 而胡后方淫亂하니 魏政始衰하니라
將軍張彛之子仲瑀 上하야 排抑武人하니 喧謗盈路
立榜大巷하고 會集하야 屠其家라호되 彛父子不以爲意러니
至是하야 相率至尙書省하야 詬罵하고 以瓦石으로 擊省門하니 上下懾懼하야 不敢禁討
遂至彛第하야 焚其舍하고 曳彛父子하야 敺擊投火中하니 仲瑀 重傷走免하고하니
遠近震駭
胡后收其兇强八人하야 斬之하고 餘不復治하고 大赦以安之하니라
至洛陽이라가 見張彛之死하고 還家傾貲하야 以結客하니
或問其故한대 歡曰 相率하야 焚大臣之第호되 朝廷 懼而不問이라
爲政如此하니 事可知矣
財物 豈可常守邪
自先世 坐法徙北邊하야 遂習鮮卑之俗하고 深沈有大志하야 與侯景等으로 相友善하고으로 雄鄕里하니라
[二十史略]魏胡太后 臨朝以來 嬖倖用事하야 政事縱弛하니 盜賊蜂起하고 封疆日蹙이라
魏主詡寖長 太后自知所爲不謹하고 務爲壅蔽하니 母子嫌隙日深이러라
六州大都督 兵强이라
高歡 見榮하고 卽勸擧兵하야 이러니 魏主殂하니 胡太后鴆之也
諡曰孝明皇帝라하다
爾朱榮 擧兵하야 立孝文之姪長樂王子攸하고 沈胡太后于河하니 封榮太原王하야 還晉陽하다
北海王顥奔梁이어늘 立之하고 遣將送入洛陽하니 子攸出奔이라
渡河來救하니 顥走死어늘 子攸歸하야 加榮天柱大將軍하다
蓄不臣之志어늘 魏主密謀誅之하고 榮入 手刺之하니 爾朱世隆 與爾朱兆 立宗室長廣王曄하야 入洛陽하다
子攸遇弑하니 諡曰孝莊皇帝라하다
世隆 又以曄疏遠이라하야 廢之하고 而立孝文之姪廣陵王恭이러니 高歡 起兵誅爾朱氏하고 入洛陽하야 廢恭而立孝文之孫平陽王脩하다
脩弑恭하니 諡曰節閔皇帝라하다
自爲大丞相하야 建府於晉陽하고 居之하다
魏主畏歡하야 謀伐晉陽이러니 擁兵來어늘 魏主奔長安하야 依關西大都督宇文泰하고 以泰 爲大丞相하니 歡追魏主不及이라
遂立淸河王世子善見於洛陽하고 遷于鄴하니 魏自道武 至是一百四十九年而分爲東魏, 西魏하다
脩至長安하야 踰半年 又與泰 有隙하니 泰鴆之러니 諡曰孝武皇帝라하다
泰立南陽王寶炬하니라
與泰 連年相攻戰하야 互有勝負러니
歡卒 遺書囑其子澄曰 侯景 有飛揚跋扈之志하니 非汝所能制 堪敵景者 惟慕容紹宗이라하더니
果叛하야 以河南으로 降西魏라가 未幾 復附于梁하니 封景爲河南王하다
景使至梁이어늘 梁群臣 皆不欲納하고 梁主亦自謂我國家如金甌하야 無一傷缺하니 恐納景이면 因以生事라호되 惟朱力勸納之하니라
東魏遣慕容紹宗하야 擊景하니 敗南走하야 襲梁據之하고 請命梁하니
就以爲南豫州牧하다
旣而 東魏求成於梁하니 意欲得景이라
景恨梁通東魏하야 遂反於하야 引兵南渡하야 圍建康하니라
梁主自卽位以來 江左久無事 惟崇佛法하야 屢捨身佛寺하니 上下化之러니
及景逼 援兵至者 皆爲景所敗하고 城中飢甚이라
梁主遣人하야 與景盟하고 以爲大丞相하니 臺城 受圍五月而陷이라
梁主爲景所制하고 飮膳 亦被裁損이라 憂憤成疾하야
口苦索蜜이라가 不得하야 再曰荷荷라하고 遂殂하니
在位四十八年 改元者七이니 曰天監, 普通, 大通, 中大通, 大同, 中大同, 太淸이라
先是 太子統 仁明孝儉하고 好學有文하야 在東宮三十年而終하니라
梁主舍嫡孫而立別子하야 至是卽位하니 是爲太宗簡文皇帝러라


기사(549) - 나라 태청太淸 3년이고, 나라 대통大統 15년이고, 동위東魏 무정武定 7년이다. -
정월에 후경侯景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양주梁主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내가 스스로 천하를 얻었고 내가 스스로 천하를 잃었으니, 또한 다시 무엇을 한하겠는가.” 하였다.
얼마 후 후경侯景이 들어와서 태극전太極殿 동당東堂에서 뵐 적에 갑사甲士 5백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후경侯景대전大殿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감히 황제를 우러러 보지 못하였으며 얼굴이 온통 땀으로 뒤덮였다.
후경侯景이 물러가 왕승귀王僧貴注+[頭註]왕승귀王僧貴후경侯景이 친애하고 귀하게 여겨 높이고 중시하는 자이다. 에게 이르기를 “내가 항상 안장에 올라 적진과 대치할 적에 화살과 칼날이 여기저기서 쏟아졌으나 뜻과 기운이 편안하고 느긋하여 전혀 두려운 마음이 없었는데, 지금 소공蕭公을 뵙자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두렵게 만드니,注+[頭註]은 음이 접(습)이니 두려워하는 것이다. 아마도 천자天子의 위엄을 범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내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하였다.
이후로 양주梁主는 요구하는 바를 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고,注+[頭註]뜻대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후경侯景에게 제재당한 것이다. 마시는 음료와 반찬도 제재당하니,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었다.
5월 병진일丙辰日(2일)에 양주梁主정거전淨居殿에 누워 있다가 입이 써서 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두 번 ‘하하荷荷’하고 한탄하고는 마침내 죽으니, 이때 나이가 86세였다.
이날 태자太子가 즉위하였다.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나라 무제武帝나라의 동성同姓으로서 상고할 만한 세계世系가 있고 혼란한 때를 만나서 마침내 나라의 정권政權을 잡았다.
효성스럽고 인자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박학博學하고 문장을 잘하였으며, 대신大臣들을 공경히 예우하고 정사政事에 부지런하였으며, 속형贖刑의 조목을 세우고 길분吉翂의 죽음을 용서해 주었으며, 선비를 초빙하여 훌륭한 말을 구하고, 경서經書를 높이고 학교를 일으켜서 예악禮樂제도制度가 서책에 서로 이어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천감天監 연간에는 사시四時가 조화롭고 연사年事가 풍년이 들어서 해내海內에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틈이 내부에서 생겨나고 가 오랑캐에게 이루어져서, 의관衣冠 차림의 사대부士大夫들이 칼날 아래에서 죽고 노약자들은 오랑캐의 말발굽에 짓밟혀 가루가 되게 하여, 금구金甌(국가)가 마침내 손상되고 보정寶鼎(정권)이 여러 번 바뀌어 천고에 불쌍히 여겨지고 비웃음거리가 된 것은 어째서인가?
의론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무제武帝주이朱异의 계책을 믿고 하남河南 땅을 탐해서 동맹국을 버리고 배반한 자를 받아들여 그 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무제武帝불교佛敎를 숭상해서 중하中夏를 바꾸어 오랑캐가 되게 하여, 당당한 곤룡포와 면류관을 오랑캐의 옷[袈裟]밑에 받쳐 입고, 종묘宗廟에 희생을 없애고 채소와 과일을 올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와 같다면 후경侯景나라에 쳐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강동江東 지역이 이미 오랑캐의 구역이 되었고, 사직社稷이 바뀌고 옮겨 가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종묘宗廟가 이미 혈식血食을 못하게 되었음을 전혀 알지 못한 것이다.
그 뒤에 신하가 군주를 배반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배반하여, 혹은 군대를 주둔시켜 자신만 견고히 지키면서 군부君父의 어려움을 급히 구원하지 않고, 혹은 고을을 가지고 원수에게 항복하여 종국宗國(祖國)이 망함을 돌아보지 않았으니, 부도浮屠의 학문이 군신간의 의리를 버리고 부자간의 인륜을 끊어서 말류末流의 앙화가 그 혹독함이 이와 같았는데도 국가國家를 소유한 군주가 오히려 불교佛敎의 가르침을 신봉하고자 하고 그 폐단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은 과연 어째서인가?”
○ 6월에 나라 임하왕臨賀王 소정덕蕭正德후경侯景이 자신을 배반한 것을 원망하여 밀서로 파양왕鄱陽王 소범蕭範注+[頭註]파양왕鄱陽王 소범蕭範합주자사合州刺史였다. 을 불러서 병력을 거느리고 들어오게 하였는데, 후경侯景이 그 편지를 가로채고는注+[釋義]차득遮得은 길에서 가로막고 얻음을 이른다. 소정덕蕭正德을 목 졸라 죽였다.注+[頭註]후경侯景소정덕蕭正德을 죽인 것이다.
○ 8월에 동위東魏고징高澄난경蘭京에게 살해당하였다.注+[釋義]蘭京은 형주자사衡州刺史 난흠蘭欽의 아들이니, 고징高澄이 음식을 만드는 종으로 삼았다. 난경蘭京이 여러 번 하소연하자 고징高澄이 그를 죽이려고 하니, 이로 인하여 반란을 도모하였다. [通鑑要解]高澄은 일찍이 형주자사衡州刺史 난흠蘭欽의 아들 난경蘭京을 잡아 음식 만드는 종으로 삼았는데, 난경蘭京이 자주 하소연하니 고징高澄이 매질하며 이르기를 “다시 하소연하면 너를 죽일 것이다.” 하였다. 후에 난경蘭京이 음식을 올릴 적에 칼을 소반 아래에 두었다가 고징高澄을 찔러 죽였다.
이때 변란이 갑자기 일어나니, 내외가 진동하고 놀랐다.
태원공太原公 고양高洋이 이 말을 듣고 휘하의 부대를 지휘하여 들어와서 역적들을 토벌하여 목을 베고 살을 저몄다.
고양高洋진양晉陽에 이르러서 문무백관들을 크게 모을 때에 신채神彩영명英明하고 발랄하며 언사言辭가 민첩하고 흡족하니,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고징高澄정령政令 중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고양高洋이 모두 고쳤다.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고징高澄이 과거 세자世子였을 때에 여색을 좋아한 것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高歡)를 창과 칼날 아래에 거의 빠뜨릴 뻔하여 그 죄가 이미 죽어도 용서받을 수 없는데, 패업霸業을 잇게 되자 선왕先王의 뜻을 계승하지 않고 제멋대로 패역悖逆한 짓을 하여 군주를 유치幽置하고 욕보이기를 도둑과 원수처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음식을 만드는 종이 〈음식을 올릴 적에 칼을 소반 아래에 숨겼다가〉 고징高澄을 찔러 죽여 가 예측하지 못한 데에서 일어났으니, 천도天道가 돌려주기를 좋아함이 이유가 있는 것이다.”
○ 12월에 나라 시흥태수始興太守 진패선陳霸先注+[頭註]진패선陳霸先흥국興國이니, 오흥吳興 장성長城 사람이다. 근본이 매우 미미하므로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 태구장太丘長 진식陳寔의 후예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가 바로 나라 고조高祖이다. 군내郡內의 호걸들과 결탁하여 후경侯景을 토벌하려고 할 적에 고을 사람 후안도侯安都장시張偲 등이 각각 병사 천여 명을 거느리고 귀부歸附하자, 사자使者를 보내어 샛길注+[頭註]거성去聲이니 샛길이다. 좁은 틈으로 길을 가서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강릉江陵에 이르러서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注+[頭註]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무제武帝의 일곱째 아들이니, 이가 바로 원제元帝이다. 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二十史略]魏主(北魏) 원각元恪이 죽으니, 시호를 선무황제宣武皇帝라 하고 묘호廟號세종世宗이라 하였다.
아들 원후元詡가 즉위하니, 나이가 겨우 6세이므로 모후母后 호씨胡氏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를 칭하였다.
위주魏主가 장성하자 놀이와 사냥을 좋아하여 직접 조정에 나아가 정사를 보지 않았고 호후胡后가 음란하니, 나라 정사가 비로소 쇠하였다.
장군 장이張彛의 아들 장중우張仲瑀봉사封事를 올려 무인武人을 배척하고 억제하니, 비방하는 말이 길에 가득하였다.
이에 무인武人들이 큰 길거리에 비방하는 을 써 붙이고 날짜를 잡아 모여서 그의 집을 도륙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장이張彛 부자父子는 개의치 않았다.
이때에 시종侍從을 맡은 우림군羽林軍호분위虎賁衛 근 천 명이 서로 이끌고 상서성尙書省에 이르러서 장이張彛 부자父子를 욕하고 꾸짖고는 기와와 돌로 상서성尙書省을 치니, 상하上下가 두려워하여 감히 금지하고 토벌하지 못하였다.
이들이 마침내 장이張彛의 집에 이르러서 집에 불을 지르고 장이張彛 부자父子를 끌어내어 구타하고 불 속에 던져넣으니, 장중우張仲瑀는 중상을 입고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장이張彛는 죽었다.
이에 원근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호후胡后가 그들 중 흉악하고 세력이 강한 자 8명만 체포하여 목을 베고, 그 나머지는 다시 죄를 다스리지 않고 크게 사면하여 이들을 안심시켰다.
회삭진懷朔鎭 함사函使고환高歡낙양洛陽에 왔다가 장이張彛가 죽은 것을 보고는 집에 돌아와 재산을 모두 털어 문객들과 교분을 맺었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물으니, 고환高歡이 말하기를 “숙위병宿衛兵들이 서로 이끌고서 대신大臣의 집에 불을 질렀는데도 조정에서 두려워하여 죄를 묻지 않는다.
정사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앞으로의 일을 알 만하다.
재물을 어찌 항상 지킬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고환高歡선대先代로부터 법에 걸려 북쪽 변방으로 이주당해서 마침내 선비족鮮卑族의 풍속을 익혔으며, 사람됨이 깊고 침착하며 큰 뜻이 있어서 후경侯景 등과 서로 친하였고 임협任俠으로 향리鄕里에 알려졌다.
[二十史略]魏나라 호태후胡太后가 조정에 임어한 이후로 총애하는 소인小人들이 용사用事하여 정사政事가 해이해지니, 도적들이 사방에서 떼 지어 일어나고 국경이 날로 위축되었다.
위주魏主 원후元詡가 점점 장성하자 태후太后는 자신의 행실이 신중하지 못하였음을 알고 은폐하기를 힘쓰니, 모자간母子間에 틈이 날로 깊어졌다.
이때 육주대도독六州大都督수용현秀容縣 추장酋長 이주영爾朱榮의 군대가 강성하였다.
고환高歡이주영爾朱榮을 만나 보고는 즉시 군대를 일으켜 황제의 측근을 깨끗이 소탕할 것을 권하였는데, 마침 위주魏主가 죽으니 호태후胡太后가 독살한 것이었다.
후에 시호를 효명황제孝明皇帝라 하였다.
이주영爾朱榮이 군대를 일으켜 효문제孝文帝의 조카인 장악왕長樂王 원자유元子攸를 세우고 호태후胡太后황하黃河에 빠뜨려 죽이니, 나라에서 이주영爾朱榮태원왕太原王에 봉하여 진양晉陽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북해왕北海王 원호元顥나라로 도망하자, 나라에서 그를 황제로 세우고 장수를 보내어 호송해서 낙양洛陽으로 들여보내니, 원자유元子攸가 도망하였다.
이주영爾朱榮이 황하를 건너와서 구원하니, 원호元顥가 패주하다가 죽었으므로 원자유元子攸가 돌아와서 이주영爾朱榮천주대장군天柱大將軍에 임명하였다.
이주영爾朱榮이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자 위주魏主가 은밀히 그를 죽일 것을 도모하고는 이주영爾朱榮이 들어오자 직접 찔러 죽이니, 이주영爾朱榮종제從弟이주세륭爾朱世隆이주영爾朱榮종자從子이주조爾朱兆와 함께 종실宗室장광왕長廣王 원엽元曄을 세워 낙양洛陽으로 들어갔다.
원자유元子攸가 시해당하니, 뒤에 시호를 효장황제孝莊皇帝라 하였다.
이주세륭爾朱世隆은 또 원엽元曄이 왕실과 혈연관계가 소원하다 하여 폐위하고 효문제孝文帝의 조카인 광릉왕廣陵王 원공元恭을 세웠는데, 고환高歡이 군대를 일으켜 이주씨爾朱氏를 죽이고는 낙양洛陽으로 들어와 원공元恭을 폐위하고 효문제孝文帝의 손자인 평양왕平陽王 원수元脩를 세웠다.
원수元脩원공元恭을 시해하니, 뒤에 시호를 절민황제節閔皇帝라 하였다.
고환高歡이 스스로 대승상大丞相이 되어 진양晉陽를 세우고 그곳에 거주하였다.
위주魏主고환高歡을 두려워하여 진양晉陽을 정벌할 것을 도모하였는데, 고환高歡이 군대를 이끌고 오자 위주魏主장안長安으로 도망하여 관서대도독關西大都督 우문태宇文泰에게 의지하고 우문태宇文泰대승상大丞相으로 삼았다.(이것이 서위西魏임) 고환高歡위주魏主를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마침내 청하왕淸河王의 세자인 원선견元善見낙양洛陽에 세우고 으로 돌아가니,(이것이 동위東魏임) 나라는 도무제道武帝로부터 이에 이르기까지 149년 만에 동위東魏서위西魏로 나누어졌다.
[二十史略]元脩가 장안長安에 이르러 반 년이 지나서 또다시 우문태宇文泰와 틈이 생기자 우문태宇文泰가 그를 독살하였는데, 뒤에 시호를 효무황제孝武皇帝라 하였다.
우문태宇文泰남양왕南陽王 원보거元寶炬를 세웠다.
고환高歡우문태宇文泰는 여러 해를 계속하여 공격하고 싸워서 서로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고환高歡이 죽을 때에 유서遺書를 남겨 그의 아들 고징高澄에게 부탁하기를 “후경侯景은 잘난 체하고 발호하려는 뜻이 있으니 네가 통제할 수 있는 바가 아니요, 후경侯景을 대적할 만한 자는 모용소종慕容紹宗뿐이다.” 하였다.
그런데 후경侯景이 과연 배반하여 하남河南 땅을 가지고 서위西魏에 항복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나라에 붙으니, 나라에서 후경侯景을 봉하여 하남왕河南王으로 삼았다.
후경侯景사자使者나라에 이르자, 나라 신하들이 모두 그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나라 군주도 혼잣말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금구金甌(금으로 만든 작은 사발)와 같아서 조금도 손상된 곳이 없으니, 후경侯景을 받아들이면 이로 인하여 일이 생길까 두렵다.” 하였으나 오직 주이朱异가 강력히 권하여 받아들이게 하였다.
동위東魏모용소종慕容紹宗을 보내어 후경侯景을 공격하니, 후경侯景이 패배하여 남쪽으로 도망가서 나라 수춘壽春을 습격하여 점거하고 나라에 은혜로운 명령을 내려주기를 청하였다.
나라가 이에 그를 남예주목南豫州牧으로 삼았다.
이윽고 동위東魏나라에게 화해할 것을 청하니, 후경侯景을 잡으려고 해서였다.
후경侯景나라가 동위東魏와 통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마침내 수양壽陽(壽春)에서 배반하여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양자강揚子江을 건너 건강建康을 포위하였다.
양주梁主가 즉위한 뒤로 강동江東 지방이 오랫동안 태평하였으므로 오직 불법佛法을 숭상하여 여러 번 불사佛寺사신捨身하니, 상하上下가 모두 이를 따라하였다.
후경侯景대성臺城을 압박해 들어오자 구원하러 온 군대가 모두 후경侯景에게 패하였고 안이 몹시 굶주렸다.
양주梁主가 사람을 보내어 후경侯景과 맹약하고 후경侯景대승상大丞相으로 삼으니, 대성臺城이 포위된 지 5개월 만에 함락되었다.
양주梁主후경侯景에게 제재당하고 음식 또한 삭감당하자, 근심하고 분하여 병이 되었다.
양주梁主가 입이 써서 꿀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두 번 ‘하하荷荷’ 하고 한탄하고는 마침내 죽었다.
재위 48년 동안에 개원改元한 것이 일곱 번이니, 천감天監보통普通대통大通중대통中大通대동大同중대동中大同태청太淸이다.
이보다 앞서 태자太子 소통蕭統은 인자하고 총명하고 효도하고 검소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력이 있었는데, 동궁東宮에 있은 지 30년 만에 죽었다.
양주梁主적손嫡孫을 버리고 별자別子(蕭綱)를 세워 이때에 이르러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태종太宗 간문황제簡文皇帝이다.


역주
역주1 荷荷 : 원망하여 화내거나 좋아서 웃을 때에 발하는 감탄사이다.
역주2 赦吉(翁)[翂](분)死 : 吉翂은 字가 彦霄로 襄陽에 世居하였다. 아버지가 原鄕令으로 있다가 관리의 모함을 받아 死刑에 처해지게 되자, 吉翂이 15세의 어린 나이로 登聞鼓를 울려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죽기를 자원하니, 武帝는 그가 남의 사주를 받아 청원하는 것이라고 의심하여 刑具를 늘어놓고 진짜로 아버지 대신 죽일 것처럼 위협하였다. 그러나 吉翂이 끝내 굽히지 않자, 그의 아버지를 용서해 주었다.
역주3 釁起蕭墻 : 蕭墻은 君臣이 회견하는 곳에 설치하는 병풍으로 집안을 가리킨다. 틈이 蕭墻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內部에서 발생하는 변란을 이르는데, 여기서는 조정이나 임금 측근에서 일어나는 환난을 말한다. 《論語》 〈季氏〉에 魯나라의 季氏가 附庸國인 顓臾를 치려 하자, 孔子는 “나는 季氏의 우환이 顓臾에 있지 않고 蕭墻 안에 있을까 두렵다.[吾恐季孫之憂 不在顓臾而在蕭墻之內也]”라고 한 데에서 연유된 말이다.
역주4 衡州刺史 : 《資治通鑑》에는 徐州刺史로 되어 있다.
역주5 太原公洋 : 太原公 高洋은 高澄의 아우로 北齊의 文宣帝이다.
역주6 : 련
역주7 高澄……幾陷其父於槊刃之下 : 高澄이 世子였을 때에 女色을 매우 좋아하니, 崔季舒가 항상 高澄을 위하여 중매하는 일을 맡았다. 이 당시 薛寘의 妻인 元氏가 姿色이 뛰어나므로 高澄이 그녀를 맞이하여 사통하고자 하였으나 元氏가 바로 사절하고 또 통곡하니, 世子가 崔季舒로 하여금 廷尉에게 회부시켜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역주8 : 시
역주9 封事 : 密封한 疏章을 이른다. 옛날에 신하가 上疏하여 일을 아뢸 때에 누설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검은색 주머니를 사용하여 봉함하였다.
역주10 剋期 : 만날 기한을 정함을 이른다.
역주11 羽林, 虎賁近千人 : 羽林軍은 侍從하는 일을 맡고 虎賁衛는 宿衛를 맡는데, 평상시에 정해진 인원이 없으므로 숫자가 많게는 천 명에까지 이른 것이다.
역주12 懷朔鎭函使高歡 : 懷朔鎭은 곧 朔州이니 山西省에 속한다. 예전에 後燕의 燕郡太守 高湖가 北魏로 달아났는데, 그의 아들 高謐이 侍御史가 되었다가 法에 걸려 懷朔鎭으로 유배되어 대대로 북쪽 변방에 살면서 마침내 鮮卑族의 풍속을 익혔다. 高謐의 손자 高歡은 사려가 깊고 큰 뜻을 품고 있었는데, 집이 가난하여 平城에서 부역하였다. 이때 富者인 婁氏의 딸이 그를 보고 기이하게 여겨 마침내 그에게 시집가니, 高歡이 이로 인하여 馬匹을 소유하고 懷朔鎭의 官府에 馬匹을 바쳐 函使에 충원될 수 있었다. 모든 上書와 表文은 봉함하였는바, 函使는 봉함한 글을 받들고 京師에 나아가는 使者를 이른다.
역주13 宿衛 : 숙직하면서 宮禁을 호위함을 이른다.
역주14 任俠 : 如淳이 말하기를 “서로 믿는 것을 任이라 하고 是非를 함께하는 것을 俠이라 하니, 《漢書》 〈任俠傳〉에 이른바 ‘권세가 州里에 행해지고 힘이 公侯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俠은 擁衛하는 것이니, 권세와 힘으로써 사람을 받들어 보좌하는 것이다.” 하였다.
역주15 秀容酋長爾朱榮 : 秀容은 縣의 이름이니, 忻州에 속하였다. 酋長은 오랑캐 부족을 통솔하는 우두머리의 칭호이다.
역주16 淸帝側 : 高歡은 황제의 近臣을 죽여 上을 능멸한다는 이름을 숨기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황제의 측근을 깨끗이 소탕한다고 말한 것이다.
역주17 [二十史略] : 魏나라가 東魏와 西魏로 나뉘고 梁나라가 後梁으로 나뉜 사실이 너무 소략하므로 《二十史略》의 내용을 뽑아 이를 보충하였다.
역주18 : 이
역주19 壽春 : 長懷 이서 지방의 要衝地이니, 이 당시에 南豫州라고 하였다.
역주20 壽陽 : 壽陽은 바로 壽春이다.
역주21 臺城 : 建康城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통감절요(6)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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