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未] 〈梁大寶二年이요 魏大統十七年이요 齊天保二年이라〉
三月
에 魏主殂
注+[頭註]文帝寶炬也라하고 太子欽
이 立
하다
○ 齊以湘東王繹
으로 爲梁相國
하야 建梁臺
注+[頭註]臺는 라하야 摠百揆
하고 하다
○ 九月
에 侯景
이 逼梁主
하야 禪位於豫章王
注+[頭註]棟은 昭明太子統子華容公歡之子也라이라가 尋弑之
하다
簡文
이 幼而聰睿
하야 多聞博達
하고 富贍詞藻
러니 不幸
하야 正位宸極
에 受制賊臣
하야 卒罹
焉
이라
當是時
하야 太陰晝見
하고 天雨黃沙
하며 이라가 更日乃止
하야 梁祚將傾
에 天文告變
하니 雖以才如周公
이라도 猶難戡難
이온
賊景이 陰簒弑之謀하고 蕭棟이 陽受禪之號하야 而建康之梁이 爲景汚矣로다
○ 梁王僧辯
注+[頭註]大都督이라等
이 聞太宗殂
하고 啓湘東王繹
하야 請上尊號
하다
○ 梁豫章王棟이 禪位于景하니 景卽位하야 稱帝于南郊하다
[二十史略]簡文皇帝는 名綱이니 在東宮十八年而後에 遇侯景之亂하야 旣立에 受制於景而已러라
湘東王繹이 鎭江陵하야 自稱假黃越, 大都督이라하야 中外諸軍이 承制러니
岳陽王詧은 昭明太子統之第三子也라 鎭襄陽하야 與繹으로 相攻할새 詧이 遣使降于西魏하야 以求援하니 西魏立梁蕭詧하야 爲梁王하다
[二十史略]侯景
이 自稱漢王
이라하고 廢梁主弑之
하니 不及三年
에 改元者一
이니 曰大寶
라
先是에 始興太守陳霸先이 起兵討景하고 湘東王이 遣王僧辯討景하니 景이 簒位數月而爲僧辯霸先所敗하야 亡走吳하야 欲入海라가 爲其下所斬이라
신미(551) - 양梁나라 대보大寶 2년이고, 위魏나라 대통大統 17년이고, 제齊나라 천보天保 2년이다. -
3월에
위주魏主注+[頭註]위주魏主는 문제文帝 원보거元寶炬이다. 가 죽고
태자太子 원흠元欽이 즉위하였다.
○
제齊나라가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을
양상국梁相國으로 삼아
양대梁臺注+[頭註]대臺는 행대行臺이다. 를 세워
백규百揆를 총괄하고
황제皇帝의
제制를 받들게 하였다.
○ 9월에
후경侯景이
양주梁主를 핍박하여
예장왕豫章王注+[頭註]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은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의 아들인 화용공華容公 소환蕭歡의 아들이다. 에게
양위讓位하게 하였다가 얼마 후 시해하였다.
“간문제簡文帝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워 견문見聞이 많고 널리 통달하며 문장력이 풍부하였는데, 불행히도 나라가 어려운 때를 만나 제왕帝王의 자리[宸極]에서 왕위를 바로잡음에 적신賊臣(侯景)에게 제재당하여 끝내 토낭土囊의 애통함을 당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태음太陰(달)이 낮에 나타나고 하늘에서 황사黃沙가 내렸으며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나 하늘에 뻗쳐 있다가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쳐서 양梁나라의 국운國運이 기울려 하자 천문天文이 변고를 알렸으니, 비록 주공周公과 같은 훌륭한 재주가 있어도 오히려 난리를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하니 더구나 문장이 궁체宮體를 이루었다 한들 나라가 멸망하는 데에 무슨 보탬이 있었겠는가.
역적인 후경侯景은 남몰래 찬탈하고 시해할 계책을 세우고, 소동蕭棟은 겉으로 선양禪讓을 받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건강建康의 양梁나라가 후경侯景에게 더렵혀지고 말았다.”
○
양梁나라
왕승변王僧辯注+[頭註]왕승변王僧辯은 대도독大都督이다. 등이
태종太宗(簡文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에게 아뢰어
존호尊號를 올릴 것을 청하였다.
○ 양梁나라 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이 후경侯景에게 양위讓位하니, 후경侯景이 즉위하여 남교南郊에서 황제를 칭하였다.
크게 사면하고 태시太始로 개원改元하였으며, 소동蕭棟을 봉하여 회음왕淮陰王으로 삼았다.
[二十史略]簡文皇帝는 이름이 소강蕭綱이니, 동궁東宮에 있은 지 18년 만에 후경侯景의 난리를 만나 즉위하였는데, 즉위한 뒤에 후경侯景에게 제재당하기만 하였을 뿐이다.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이 강릉江陵에 진주鎭駐하여 가황월假黃越‧대도독大都督이라 스스로 칭하여 중외中外의 여러 군대가 그의 통제를 받았다.
악양왕岳陽王 소찰蕭詧은 소명태자昭明太子 소통蕭統의 셋째 아들인데, 양양襄陽에 진주鎭駐하여 소역蕭繹과 서로 공격할 때에 소찰蕭詧이 사신을 보내 서위西魏에 항복하고 구원해 줄 것을 청하니, 서위西魏가 양梁나라 소찰蕭詧을 세워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二十史略]侯景이 스스로 한왕漢王이라 칭하고 양주梁主 간문제簡文帝를 폐위하였다가 시해하니, 양주梁主가 자리만 지키고 있은 지가 채 3년이 못 되었고 개원改元한 것이 한 번이니, 대보大寶이다.
후경侯景이 예장왕豫章王 소동蕭棟을 세웠는데 얼마 후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였다.
이보다 앞서 시흥태수始興太守 진패선陳霸先이 군대를 일으켜 후경侯景을 토벌하고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이 왕승변王僧辯을 보내어 후경侯景을 토벌하니, 후경侯景이 황제의 지위를 찬탈한 지 몇 개월 만에 왕승변王僧辯과 진패선陳霸先에게 패하여 오吳 지방으로 달아나서 해도海島로 들어가려고 하다가 부하에게 참수당하였다.
그의 시신을 건강建康으로 보내어 머리는 강릉江陵에 전달하고 손과 발은 잘라서 북제北齊로 보내었다.
상동왕湘東王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원황제元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