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壬申] 〈梁世祖承聖元年이요 魏主欽元年이요 齊天保三年이라〉
梁湘東王繹이 與王僧辯, 陳霸先等으로 東擊侯景하니 景兵大潰하야 與百餘騎東走어늘 追及斬之하다
○ 己丑
에 梁僧辯等
이 上表勸進
注+[釋義]勸進은 進上尊號也라하고 且迎都建業
이어늘
湘東王答曰
淮海長鯨注+[釋義]長鯨은 喩侯景이라이 雖云授首
나 襄陽短狐 未全革面
注+[釋義]短狐는 喩岳陽王詧이요 革面은 言變革其面而從也라[附註]短狐는 𧌒也니 本草에 謂之射工이라 在水中하야 含沙射人이면 皮膚成瘡이라 梁主以捨詧而立綱爲太子라하야 內常愧之하야 寵亞諸子하고 詧亦內懷不平하고 遂畜財下士하야 招募勇敢士러니 에 魏(主)[立]詧하야 爲梁主하니라하니 太平玉燭
注+[釋義]泰階六星이 平則治라 四時調曰玉燭이라[附註]爾雅에 春爲靑陽이요 夏爲朱明이요 秋爲白藏이요 冬爲玄英이니 四時和를 謂之玉燭이라하니라 此는 釋太平之時에 四氣和暢하야 以致嘉祥之事也라 謂之玉燭者는 言四時和氣 溫潤明照라 故로 謂之玉燭이라이어든 爾乃議之
하라
○ 益州刺史武陵王紀
注+[頭註]元帝繹之兄이라 頗有武略
이러니 聞侯景陷臺城
하고 四月
에 卽皇帝位
하다
○ 十一月에 梁湘東王繹이 卽位於江陵하야 改元大赦하다
임신(552) - 양梁나라 세조世祖(元帝)의 승성承聖 원년元年이고, 위주魏主 원흠元欽의 원년元年이고, 제齊나라 천보天保 3년이다. -
양梁나라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이 왕승변王僧辯‧진패선陳霸先 등과 함께 동쪽으로 후경侯景을 공격하니, 후경侯景의 군대가 크게 무너져서 백여 명의 기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하였는데, 추격하여 따라잡아 목을 베었다.
○
기축일己丑日(3월 21일)에
양梁나라
왕승변王僧辯 등이
상동왕湘東王에게
표문表文을 올려 황제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권하고
注+[釋義]권진勸進은 황제皇帝의 존호尊號를 올린 것이다. 또 그를 맞이하여
건업建業에 도읍하게 하자,
상동왕湘東王이 답하기를 “
회해淮海의 큰 고래(侯景)
注+[釋義]장경長鯨은 후경侯景을 비유한 것이다. 가 비록 머리를 바쳤으나
양양襄陽의
단호短狐(蕭詧)가 아직 완전히 귀순하지 않았으니,
注+[釋義]襄陽短狐 미전혁면未全革面:[釋義]短狐는 악양왕岳陽王 소찰蕭詧을 비유한 것이고, 혁면革面은 얼굴빛을 바꾸고 복종함을 말한다.[附註]短狐는 물여우이니, 《본초강목本草綱目》에 이를 일러 사공射工이라 하였다. 물속에 있으면서 모래를 머금어 사람을 쏘면 사람의 피부에 부스럼이 생긴다. 양주梁主(武帝)가 소찰蕭詧을 버리고 소강蕭綱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해서 내심 항상 이를 부끄러워하여 소찰蕭詧을 여러 아들 다음으로 총애하였고, 소찰蕭詧 또한 내심 불평을 품고 마침내 재물을 모으고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어서 용감한 군사들을 불러 모집하였다. 경오년庚午年(550)에 위魏나라가 양왕梁王 소찰蕭詧을 양주梁主로 삼았다. 천하天下가 태평해지고
사시四時가 고르게 되거든
注+[釋義]泰階(三台星)의 여섯 별이 고르면 세상이 다스려진다. 사시四時가 고른 것을 옥촉玉燭이라 한다.[附註]玉燭은 《이아爾雅》에 “봄을 춘양春陽이라 하고 여름을 주명朱明이라 하고 가을을 백장白藏이라 하고 겨울을 현영玄英이라 하니, 사시四時가 조화로운 것을 옥촉玉燭이라 이른다.” 하였다. 이는 태평한 시대에는 사시四時의 기운이 화창해서 아름답고 상서로운 일을 이르게 함을 말한 것이다. ‘옥촉玉燭’이라고 이른 것은 사시四時에 화기가 온윤溫潤하고 밝게 비추기 때문에 옥촉玉燭이라 이른 것이다. 그대들은 그때 가서 비로소 이 일을 의논하라.” 하였다.
○
익주자사益州刺史 무릉왕武陵王 소기蕭紀注+[頭註]무릉왕武陵王 소기蕭紀는 원제元帝 소역蕭繹의 형이다. 가 자못
무략武略이 있었는데,
후경侯景이
대성臺城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4월에
황제皇帝에 즉위하였다.
○ 11월에 양梁나라 상동왕湘東王 소역蕭繹이 강릉江陵에서 즉위하여 개원改元하고 크게 사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