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戊寅] 〈隋恭帝侑義寧二年이요 恭帝侗皇泰元年이요 唐高祖武德元年이요 夏王竇建德五鳳元年이요 涼王李軌安樂元年이요 楚王朱粲昌達元年이라
○ 是歲
에 幷楚士弘, 魏, 定楊, 梁師都, 秦, 梁
하야 凡十二國
이러니 隋煬帝廣, 恭帝侑, 秦, 魏亡
이라〉
四月
에 宇文化及
注+[附註]述之子也라 初에 化及無賴러니 事帝於東宮하니 寵昵之하다 化及이 從帝楡林할새 冒禁하고 與突厥交市어늘 帝怒하야 將斬之러니 旣而오 釋之하야 以爲屯衛將軍하니라이 弑煬帝於江都
하고 自稱大丞相
하다
於是에 東自九江으로 西抵三峽하고 南盡交趾하고 北距漢川히 銑皆有之하니 勝兵이 四十餘萬이러라
○ 五月戊午에 隋恭帝禪位于唐하니 唐王이 卽皇帝位하다
○ 隋煬帝凶問
이 至東都
어늘 留守官
이 奉越王侗
注+[頭註]代王侑之兄이라[通鑑要解]侗은 眉目如畵하고 溫厚仁愛하고 風格儼然이라하야 卽帝位
하고 改元皇泰
하다
世充
이 漸結黨援注+[通鑑要解]援은 音圓이니 引也, 牽也라하야 恣行威福하고 子弟咸典兵馬
하야 勢震內外하니 皇泰王
은 拱手而已
러라
○ 時
에 中國人避亂者 多入突厥
하니 突厥
注+[釋義]夏曰獯鬻이요 商曰鬼方이요 周曰獫狁이요 漢曰匈奴요 魏曰突厥이라 突厥은 其姓阿史那氏니 蓋古匈奴北部也라이 彊盛
이라
東自
注+[頭註]契은 音乞이니 本東胡種이라 其先이 居鮮卑山이러니 至元魏하야 自號契丹이라, 室韋
注+[釋義]契丹之別種也요 丁零之苗裔니 地據黃龍하니라로 西盡吐谷渾, 高昌
注+[釋義]吐谷渾은 西域國이니 其先은 本遼東鮮卑라 (徙)[徒]河涉歸之長子曰이니 其孫葉延이 遂以其(自)[名]으로 爲吐谷渾氏하니라 高昌은 西域小國이라諸國
이 皆臣之
하니 控弦
이 百餘萬
이라
唐初起兵에 資其兵馬하고 前後餉遺를 不可勝紀러라
置國子, 太學, 四門生
注+[附註]四門學은 始於魏하니 於四門에 置學이라 唐有二館七學하니 曰弘文館, 崇文館은 皆以宰相領之하고 其生徒를 以皇屬國戚及大臣子孫爲之하며 曰國子學, 曰太學은 亦以大臣子孫爲之하며 曰廣文, 曰四門은 以朝臣之子孫與庶人之俊秀者爲之하며 曰律學, 曰書學, 曰算學은 皆以庶人之通其學者爲之하니 凡六學은 隷於國子監하니라[通鑑要解]唐六典에 國子生은 文武官三品巳上及子孫과 從二品已上曾孫이요 四門生은 文武官七品巳上及侯, 伯, 子, 男과 若庶人子爲俊士生者라하니 合三百餘員
이요 郡縣學
에 各置生員
하다
○ 唐主待裴寂特厚
하야 稱爲裴監
注+[通鑑要解]寂爲晉陽宮監일새 親之하야 以舊稱之라而不名
하고 委蕭瑀
注+[頭註]內史令이라以庶政
하야 事無大小
히 莫不關掌
注+[頭註]關은 由也니 如行者之有關津也라하다
瑀亦孜孜盡力
하야 繩違注+[釋義]繩은 直其失也라擧過하니 人皆憚之
러라
○ 唐萬年縣法曹孫伏伽 上表
하야 以爲隋以
聞其過
로 亡天下
라
陛下龍飛晉陽
에 遠近
이 響應
하야 未朞年而登帝位
하시니 徒知得之之
하고 不知隋失之之不難也
라
臣謂宜
其覆轍
하야 務盡下情
이라하노이다 唐主省表大悅
하야 下詔褒稱
하고 擢爲治書侍御史
하고 賜帛三百匹
하다
天下之勢는 如人一身하야 必氣血周流無壅而後에 能存이니 諫者는 使下情上通하고 上意下達하야 如血氣之周流於一身也라
高祖鑑隋之所以亡하야 首闢言路하니 可謂知先務矣라
是以로 民知上之憂己하야 而疾痛에 將有所赴愬也리니 唐室之興이 不亦宜乎아
初
에 魏公李密
이 旣殺翟讓
注+[釋義]先是에 翟讓이 以立密自負하고 求寶貨於房彦藻한대 彦藻等이 因說密殺之하니라하고 頗自驕矜
이라
開
하야 散米
할새 無防守
하니 取之者 隨意多少
하야 或離倉之後
에 力不能致
하야 委棄衢路
하니 自倉城
으로 至郭門
히 米厚數寸
이요 群盜來就食者 近百萬口
라
密
이 喜
하야 謂賈閏甫曰 此可謂足食矣
로다 閏甫對曰
國은 以民爲本이요 民은 以食爲天이니 今民所以襁負如流而至者
는 以所天
注+[頭註]民은 以食爲天이라在此故也
어늘
而有司曾無愛吝
하고 屑越
注+[釋義]荀子에 (屑)[薛]越이라하니 言輕棄之也라[通鑑要解]屑은 輕也요 越은 語辭라如此
하니 切恐一旦
에 米盡民散
이면 明公
이 孰與成大業哉
잇고
李密
이 與王世充
注+[附註]隋大業初에 爲이러니 善伺帝顔色하야 以媚帝하니 帝愛昵之하다 世充이 觀隋政亂하고 陰結豪傑하니 帝以有將略이라하야 委以捕諸盜러니 所向輒定하니라 後에 自爲太尉, 中書令하야 置官屬하고 矯恭帝詔하야 自爲鄭王하다 又矯皇泰主侗策禪位하야 國號鄭하고 遂鴆侗이러니 後爲秦王所禽하니라戰
하야 失利
하고 與衆三萬人
으로 歸關中
하다
○ 薛仁杲之爲太子也에 與諸將으로 各有隙이러니 及卽位에 衆心이 猜懼하니 由是로 國勢浸弱이러라
秦王世民
이 至高
注+[頭註]墌은 音隻이라 城名이니 在定平縣이라하니 仁杲使宗羅㬋
로 將兵拒戰
이어늘
唐世民이 引大軍하고 自原北으로 出其不意하니 羅㬋士卒이 大潰라 斬首數千級하다
世民이 率二千餘騎하야 追之曰 破竹之勢를 不可失也라하고 遂進至城下圍之하다
諸將이 皆賀하고 因問曰 大王이 一戰而勝하고 輕騎로 直造城下하시니 衆皆以爲不克이러니 而卒取之는 何也잇고
將驍卒悍하니 吾特出其不意而破之요 斬獲이 不多라
若緩之
면 則皆入城
하리니 仁杲撫而用之
면 未易克也
요 急之
면 則散歸隴外
하야 折墌
注+[頭註]城名이니 在保定縣이라 仁杲所據라虛弱
하리니 仁杲破膽
하야 不暇爲謀
라
世民
이 所得降卒
을 悉使仁杲兄弟及宗羅㬋
로 將之
하야 與之射獵
에 無所疑間
하니 賊
이 畏威銜恩하야 皆願效死
注+[通鑑要解]效는 致也라러라
密
이 自恃智略功名
하야 見上
에 猶有傲色
이러니 及見世民
에 不覺驚服
하고 私謂殷開山
注+[頭註]名嶠라 以學行으로 爲元帥長史하야 從秦王討薛擧라가 爲所敗하야 除名爲民이러니 從平仁杲하고 討世充하야 以功封鄖國公하니라曰 眞英主也
라
魏徵
이 隨密至長安
하야 久不爲朝廷所知
라 乃自請安集山東
이어늘 唐主以爲秘書丞
하야 乘傳
注+[釋義]乘傳者 依乘符傳命行이 若使者持節爾라 傳者는 以木爲之하니 長尺五요 書符其上하야 以爲信이라至黎陽
注+[頭註]上丁丑年에 李密이 取黎陽倉이라하야 遺徐世勣書
하야 勸之早降
하다
世勣
이 遂決計西向
할새 謂郭孝恪
注+[通鑑要解]長史라曰 此民衆土地
는 皆魏公有也
니
吾若上表獻之면 是는 利主之敗하야 自爲功以邀富貴也니 吾實恥之하노라
今宜籍郡縣戶口士馬之數하야 以啓魏公하야 使自獻之라하고 乃遣孝恪詣長安하다
唐主聞世勣使者至
에 無表
하고 止有啓與密
注+[頭註]與는 予通하니 送也라하고 甚怪之
러니
孝恪이 具言世勣意한대 唐主乃歎曰 徐世勣이 不背德, 不邀功하니 眞純臣也라하고 賜姓李하다
古者天子建國에 賜姓命氏는 所以別其族類之所出이니 子孫이 各本於其祖하야 不可改也라
漢〈高〉祖賜婁敬姓爲劉하니 鄙陋無稽甚矣어늘 而唐世遂以爲法하야 或加於盜賊夷虜하야 遂以逆族異類로 爲同宗하니 然則古之賜姓者는 別之러니 而後之賜姓者는 亂之也라
夫天親은 不可以人爲어늘 而强欲同之면 豈〈循〉理也哉아
上瀆其姓하고 下忘其祖하니 非先王之制라 不可爲後世法也니라
李密
이 驕貴日久
하고 又自負歸國之功
하야 朝廷待之
가 不副本望
注+[附註]初에 密將至할새 唐主遣使迎勞相望하니 密喜曰 我擁衆百萬이라가 解甲歸唐하니 功亦不細라 豈不以見處乎아하더니 至長安하야 乃拜光祿卿, 邢國公하니 密大失望하니라[通鑑要解]李密이 遇會하야 職當進食하니 深恥之라 退하야 以告王伯當한대 伯當曰 天下事在公度內耳라하니 乃言於唐王而請之云云이라이라하야 鬱鬱不樂
이라
請往收而撫之하야 憑藉國威면 取王世充을 如拾地芥耳리이다 乃以王伯當으로 爲密副而遣之하다
十二月
에 李密
이 遂據桃林縣城
하야 驅掠徒衆
하고 直趣南山
하야 乘險而東
이어늘 盛彦師
注+[頭註]行軍總管이라擊斬之
하고 傳首長安
하다
○ 有犯法不至死者
어늘 唐主特命殺之
러니 監察御史李素立
이 諫曰 三尺法
注+[頭註]以三尺竹簡으로 書法律이라은 王者所與天下共之也
니 法一動搖
면 人無所措手足
이니이다
陛下甫創鴻業
注+[頭註]鴻은 與洪通이라에 奈何棄法
이니잇고
命所司하야 授以七品淸要官하니 所司擬雍州司戶어늘 唐主曰 此官은 要而不淸이니라
又擬秘書郞한대 唐主曰 此官은 淸而不要라하고 遂擢授侍御史하다
무인(618) - 수隋나라 공제恭帝 양유楊侑의 의녕義寧 2년이고, 공제恭帝(越王) 양동楊侗의 황태皇泰 원년이고, 당唐나라 고조高祖의 무덕武德 원년이고, 하왕夏王 두건덕竇建德의 오봉五鳳 원년이고, 양왕涼王 이궤李軌의 안락安樂 원년이고, 초왕楚王 주찬朱粲의 창달昌達 원년이다.
○ 이해에 초楚나라의 임사홍林士弘, 위魏나라, 정양定楊(劉武周), 양사도梁師都, 진秦, 양梁나라의 소선蕭銑까지 아울러 모두 12개국이었는데, 수隋나라의 양제煬帝 양광楊廣과 공제恭帝 양유楊侑, 진秦나라, 위魏나라가 망하였다. -
4월에
우문화급宇文化及注+[附註]우문화급宇文化及은 우문술宇文述의 아들이다. 처음에 우문화급宇文化及은 무뢰배였는데, 양제煬帝가 동궁東宮으로 있었을 때 양제煬帝를 섬기니 총애하고 가까이하였다. 우문화급宇文化及이 황제를 따라 유림楡林에 갔을 적에 금령禁令을 무릅쓰고 돌궐突厥과 교역交易하니 황제가 노하여 목을 베려 하였는데, 얼마 뒤 석방하여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으로 삼았다. 이
양제煬帝를
강도江都에서 시해하고 스스로
대승상大丞相이라 칭하였다.
○ 양梁나라 소선蕭銑이 황제皇帝에 즉위하였다.
이때에 동쪽으로 구강九江으로부터 서쪽으로 삼협三峽에 이르고, 남쪽으로 교지交趾까지 다하고 북쪽으로 한천漢川에 이르기까지 소선蕭銑이 모두 소유하니, 승병勝兵(精兵)이 40여만 명이었다.
○ 5월 무오일戊午日(16일)에 수隋나라 공제恭帝가 당唐나라에 양위讓位하니, 당왕唐王(李淵)이 황제에 즉위하였다.
○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부음이
동도東都에 이르자,
유수관留守官이
월왕越王 양동楊侗注+[頭註]越王 양동楊侗은 대왕代王 양유楊侑의 형이다. [通鑑要解]楊侗은 미목이 그린 듯이 아름다웠고 온후하고 인자하였으며 풍격이 엄숙하였다. 을 받들어 황제에 즉위하게 하고
황태皇泰로
개원改元하였다.
왕세충王世充을 좌복야左僕射로 삼아서 내외의 여러 군사軍事를 총독하게 하였다.
왕세충王世充이 점점
당원黨援注+[通鑑要解]원援은 음音이 ‘원’이니, 끌어들임이요, 당김이다. 을 맺어서 상벌을 마음대로 내리고
자제子弟들이 모두
병마兵馬를 관장하여 권세가 내외에 진동하니,
황태왕皇泰王은 팔짱만 끼고 있을 뿐이었다.
○ 이때에
중국中國에서 피난 가는
한족漢族들이
돌궐突厥로 많이 들어가니,
돌궐突厥注+[釋義]하夏나라 때에는 훈육獯鬻이라 하고, 상商나라 때에는 귀방鬼方이라 하고, 주周나라 때에는 험윤獫狁이라 하고, 한漢나라 때에는 흉노匈奴라 하고, 위魏나라 때에는 돌궐突厥이라 하였다. 돌궐突厥은 그 성姓이 아사나씨阿史那氏이니, 옛날 흉노匈奴의 북부北部이다. 이 강성해졌다.
동쪽으로
거란契丹注+[頭註]거란契丹의 걸契은 음이 걸(글)이니, 본래 동호東胡의 종족이다. 그 선조가 선비산鮮卑山에서 살았는데, 원위元魏(北魏) 때에 이르러 스스로 거란契丹이라 이름하였다. 과
실위室韋注+[釋義]실위室韋는 거란契丹의 별종別種이고 정령丁零의 후손이니, 황룡黃龍 땅을 점거하였다. 로부터 서쪽으로
토욕혼吐谷渾과
고창高昌注+[釋義]토욕혼吐谷渾은 서역西域의 나라이니, 그 선조는 본래 요동遼東의 선비족이었다. 도하섭귀徒河涉歸의 장자長子가 토욕혼吐谷渾이니, 그 손자인 섭연葉延이 마침내 그 이름을 따라 토욕혼씨吐谷渾氏라 하였다. 고창高昌은 서역西域의 작은 나라이다. 의 여러 나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궐突厥의 신하가 되니, 활을 당겨 쏠 수 있는 군사가 백여만 명이었다.
당唐나라가 처음 군대를 일으켰을 때에 돌궐突厥의 병마兵馬를 이용하였으며 전후로 그들이 보내준 군량과 물건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었다.
○ 당唐나라에서 배적裴寂과 유문정劉文靜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닦아 정하게 하였다.
국자학國子學,
태학교太學校,
사문학四門學注+[附註][附註]四門學은 위魏나라에서 시작되었으니, 사문四門에 학교를 설치하였다. 당唐나라는 2관館 7학學이 있었으니, 홍문관弘文館과 숭문관崇文館은 모두 재상이 맡았고 황족皇族과 국척國戚(외척) 및 대신大臣의 자손을 생도生徒로 삼았으며, 국자학國子學과 태학太學은 또한 대신大臣의 자손을 생도生徒로 삼았고, 광문학廣文學과 사문학四門學은 조신朝臣의 자손과 서인庶人 중에 준수한 자를 생도生徒로 삼았고, 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은 모두 서인庶人 중에 그 학문에 통달한 자를 생도生徒로 삼았으니, 6학學은 모두 국자감國子監에 소속되었다. [通鑑要解]《당육전唐六典》에 의하면 국자학생國子學生은 문무관文武官 3품品 이상 및 국공國公의 자손子孫과 종從2品 이상의 증손曾孫이요, 사문학생四門學生은 문무관文武官 7품品 이상 및 후侯‧백伯‧자子‧남男과 서인庶人의 자제 중 준사생俊士生이 된 자이다. 등의 학교를 설치하니
생원生員이 도합 3백여 명이었으며,
군현郡縣의
학學에도 각각
생원生員을 두었다.
- 《당서唐書》의 〈형법지刑法志〉와 〈선거지選擧志〉에 나옴 -
○
당주唐主가
배적裴寂을 특별히 후대하여
배감裴監注+[通鑑要解]배감裴監은 배적裴寂이 〈수隋나라에 벼슬하여〉 진양궁감晉陽宮監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를 친근히 여겨 옛 관직명으로 부른 것이다. 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소우蕭瑀注+[頭註]소우蕭瑀는 내사령內史令이었다. 에게 모든 정사를 맡겨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관장關掌注+[頭註]관關은 경유함이니, 길을 가는 자가 관문과 나루를 통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였다.
소우蕭瑀 또한 부지런히 힘을 다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注+[釋義]승繩은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다. 허물을 들어 말하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 당唐나라 만년현萬年縣의 법조法曹인 손복가孫伏伽가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수隋나라는 과실을 듣기 싫어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잃었습니다.
폐하께서 진양晉陽에서 용비龍飛(興起)하자 원근遠近에서 호응하여 1년이 채 못 되어 황제의 지위에 오르셨으니, 한갓 천하를 얻기 쉬운 줄만 아시고 천하를 잃기 어렵지 않음은 알지 못하십니다.
신臣은 마땅히 수隋나라의 복철覆轍(실패한 자취)을 바꾸어서 되도록 아랫사람들의 실정을 다 아셔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니, 당주唐主가 표문表文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조서를 내려 칭찬하고, 손복가孫伏伽를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로 발탁하고 비단 300필을 하사하였다.
“천하의 형세는 사람의 한 몸과 같아서 반드시 기氣와 혈血이 두루 유행하고 막힘이 없은 뒤에야 생존할 수 있으니, 간하는 자는 아랫사람의 실정을 위로 통하게 하고 윗사람의 마음을 아래로 통하게 해서 혈血과 기氣가 온몸에 두루 유행하는 것과 같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언로言路가 열리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언로言路가 막히면 나라가 혼란해지는 것이다.
고조高祖는 수隋나라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거울로 삼아서 첫 번째로 언로言路를 열어놓았으니, 급선무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윗사람이 자신들을 위해 근심해 줌을 알아서 괴로울 때에 장차 달려가 하소연할 곳이 있을 것이니, 당唐나라 황실이 흥왕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8월에 진주秦主 설거薛擧가 죽고, 태자太子 설인고薛仁杲가 즉위하였다.
처음에
위공魏公 이밀李密이
적양翟讓을 죽인 뒤에
注+[釋義]이보다 앞서 적양翟讓이 이밀李密을 위공魏公으로 세웠다고 자부하고 방언조房彦藻에게 보화寶貨를 요구하자, 방언조房彦藻 등이 이로 인하여 이밀李密을 설득해서 그를 죽였다. 자못 스스로 교만하고 자랑하였다.
낙구창洛口倉을 열어 쌀을 나누어 줄 때에 방비하고 지키는 자가 없어서 쌀을 가져가는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많이 가져갔다가 혹은 창고를 떠난 뒤에 도저히 자기 힘으로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길거리에 쌀을 버리니, 창성倉城으로부터 곽문郭門에 이르기까지 쌀이 몇 치 두께로 깔렸으며 여러 도둑떼들이 와서 먹는 것이 백만 명에 가까웠다.
이밀李密이 기뻐하여
가윤보賈閏甫에게 이르기를 “이는 양식이 풍족하다고 이를 만하다.” 하니,
가윤보賈閏甫가 대답하기를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양식을 하늘로 삼으니, 지금 백성들이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물이 흐르듯이 오는 이유는 하늘로 여기는 곡식
注+[頭註]백성은 양식을 하늘로 삼는다. 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사有司가 일찍이 곡식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함부로 버리니,
注+[釋義]《순자荀子》 〈왕제王制〉에 “설월薛越”이라 하였으니, 가볍게 버린다는 말이다. [通鑑要解]屑은 가벼움이요, 월越은 어조사이다. 하루아침에 쌀이 다 없어지고 백성들이 흩어지면
명공明公은 누구와 함께 큰 사업을 이루시겠습니까?” 하였다.
이밀李密이
왕세충王世充注+[附註]왕세충王世充은 수隋나라 대업大業 초년에 민부랑民部郞이 되었는데, 황제의 얼굴빛을 잘 살펴서 황제에게 아첨하니, 황제가 사랑하고 가까이하였다. 왕세충王世充이 수隋나라의 정사가 혼란한 것을 보고 은밀히 호걸들과 교분을 맺으니, 황제가 장수의 지략이 있다 하여 도둑들을 잡는 일을 맡겼는데, 향하는 곳마다 곧 평정하였다. 뒤에 스스로 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이 되어 관속官屬을 두고 공제恭帝의 조서詔書를 위조하여 스스로 정왕鄭王이 되었다. 또다시 황태왕皇泰王 양동楊侗(恭帝)의 책서策書를 위조하여 선위禪位를 받아 국호國號를 정鄭이라 하고 마침내 양동楊侗을 독살하였는데, 뒤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사로잡혔다. 과 싸워 실패하고 무리 3만 명과 함께
관중關中으로 돌아갔다.
○ 설인고薛仁杲가 태자太子였을 적에 여러 장수들과 각각 틈이 있었는데, 즉위하게 되자 여러 사람의 마음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니, 이로 말미암아 국세國勢가 점점 약해졌다.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고척성高墌城注+[頭註]척墌은 음音이 ‘척’이다. 고척高墌은 성城의 이름이니 정평현定平縣에 있다. 에 이르니,
설인고薛仁杲가
종라후宗羅㬋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막아 싸우게 하였다.
당唐나라 이세민李世民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천수원淺水原 북쪽으로부터 불의에 출격하니, 종라후宗羅㬋의 사졸士卒들이 크게 궤멸되어 진왕秦王이 수천 명의 수급首級을 베었다.
이세민李世民이 2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며 말하기를 “파죽지세破竹之勢를 놓쳐서는 안 된다.” 하고는 마침내 전진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포위하였다.
한밤중에 성을 지키는 자들이 다투어 스스로 투항하니, 설인고薛仁杲가 계책이 다하여 나와서 항복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축하하고 인하여 “대왕大王께서 한 번 싸워 이기고는 경무장한 기병을 데리고 곧바로 성 밑에 이르시니, 여러 사람들이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데 끝내 점령함은 어째서입니까?” 하고 묻자,
이세민李世民이 대답하기를 “종라후宗羅㬋가 거느린 군사는 모두 농외隴外 사람이다.
장수가 용맹하고 군사들이 사나우니 내가 단지 불의에 출격하여 격파했을 뿐이요,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은 많지 못하다.
만약 이들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니,
설인고薛仁杲가 이들을 어루만져 사용한다면 쉽게 이기지 못하였을 것이요, 만약 이들을 급하게 몰아붙인다면 흩어져
농외隴外로 돌아가서
절척성折墌城注+[頭註]절척折墌은 성城의 이름이니, 보정현保定縣에 있다. 설인고薛仁杲가 점거한 곳이다. 이 허약해질 것이니,
설인고薛仁杲의 간담이 서늘해져서 도모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이 때문에 승리한 것이다.”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고 복종하였다.
이세민李世民이 항복한 병졸들을 모두
설인고薛仁杲의 형제와
종라후宗羅㬋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여, 그들과 활을 쏘고 사냥할 때에 의심하거나 간격을 두는 바가 없으니, 적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은혜를 생각해서 모두
사력死力을 바치기
注+[通鑑要解]효效는 바침이다. 를 원하였다.
○ 당주唐主가 이밀李密로 하여금 빈주豳州에서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맞이하게 하였다.
이밀李密이 스스로
지략智略과
공명功名을 자부하여
상上을 뵐 때에도 오히려 오만한 기색이 있었는데,
이세민李世民을 만나 볼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놀라 복종하고는
은개산殷開山注+[頭註]은개산殷開山은 이름이 교嶠이니 학행學行으로 원수부元帥府 장사長史가 되어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을 따라 설거薛擧를 토벌하다가 패배당하여 〈진군공陳郡公에서〉 제명除名되어 서민庶民이 되었다. 뒤에 설인고薛仁杲를 평정하고 왕세충王世充을 토벌하여 그 공功으로 운국공鄖國公에 봉해졌다. 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참으로
영명英明한 군주이다.
이와 같지 않다면 어떻게 화란禍亂을 평정하였겠는가.” 하였다.
○ 서세적徐世勣이 이밀李密의 옛 영토를 점거하고서 아직 귀속한 바가 있지 않았다.
위징魏徵이
이밀李密을 따라
장안長安에 이르러서 오랫동안
조정朝廷에 알려지지 못하자 마침내 스스로
산동山東 지방을
안집安集시킬 것을 청하니,
당주唐主가 그를
비서승秘書丞으로 삼아
역마驛馬를 타고
注+[釋義]승전乘傳은 부전符傳을 가진 자가 부전符傳에 따라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 것이 사자使者가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전傳은 나무로 만드니 길이가 1척尺 5촌寸이요, 그 위에 부符를 써서 신표信標로 삼는다. 여양黎陽注+[頭註]앞의 정축년丁丑年(617)에 이밀李密이 여양창黎陽倉을 취하였다. 에 이르러서
서세적徐世勣에게 편지를 보내어 빨리 항복하라고 권하게 하였다.
서세적徐世勣이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서쪽을 향하여 귀순하려 할 적에
곽효각郭孝恪注+[通鑑要解]곽효각郭孝恪은 장사長史였다. 에게 이르기를 “이 민중과 토지는 모두
위공魏公(李密)의 소유이다.
내가 만약 표문表文을 올려 이것을 바친다면 이는 주군主君의 실패를 이용하여 자신의 공으로 삼아 부귀富貴를 바라는 것이니, 내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이제 마땅히 군현郡縣의 호구戶口와 군사와 말의 숫자를 장부에 적어 위공魏公에게 아뢰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바치게 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곽효각郭孝恪을 보내어 장안長安에 이르게 하였다.
당주唐主는
서세적徐世勣의
사자使者가 왔는데,
표문表文은 없고 다만
이밀李密에게 보내는
注+[頭註]여與는 여予와 통하니 보내는 것이다. 장계狀啓만 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곽효각郭孝恪이 서세적徐世勣의 뜻을 말하자 당주唐主가 마침내 감탄하여 이르기를 “서세적徐世勣이 은덕을 배반하지 않고 공功을 바라지 않으니, 참으로 마음이 곧고 진실한 신하이다.” 하고 이씨성李氏姓을 하사하였다.
“옛날 천자天子가 나라를 세울 적에 성씨姓氏를 하사한 것은 그 족류族類가 나온 바를 분별하기 위한 것이니, 자손들이 각각 선조先祖를 근본으로 삼아서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누경婁敬에게 성姓을 하사하여 유씨劉氏로 삼으니 비루하여 황당무계함이 심하였는데, 당唐나라 때에는 마침내 이것을 법法으로 삼아서 혹은 도적과 오랑캐에게도 성姓을 하사하여 마침내 역적의 집안과 다른 종족을 동종同宗으로 삼았으니, 그렇다면 옛날에 성姓을 하사한 것은 구별하기 위해서였는데 후세에 성姓을 하사한 것은 혼란하게 만든 것이다.
천연天然의 혈족血族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가 없는데 억지로 같게 하고자 한다면 어찌 순리順理이겠는가.
위로는 성姓을 모독하고 아래로는 선조를 잊는 것이니, 선왕先王의 제도가 아니어서 후세後世의 법法이 될 수 없다.”
이밀李密이 교만하고 귀해진 지가 오래되었고 또
당唐나라로
귀부歸附한 공로를 자부하여, 조정의 대우가 본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
注+[附註][附註]처음에 이밀李密이 오려 할 적에 당주唐主가 사신을 보내 영접하고 위로함이 서로 이어지자, 이밀李密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백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고 있다가 갑옷을 벗고 당唐나라로 귀부歸附하니, 공이 또한 적지 않다. 어찌 태사台司의 벼슬로 대접해 주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장안長安에 이르러서 마침내 광록경光祿卿‧형국공邢國公에 봉해지니, 이밀李密이 크게 실망하였다. [通鑑要解]李密이 연회할 때를 만나 직무상 음식 공급을 담당하게 되자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다. 연회에서 물러나와 왕백당王伯當에게 얘기하니, 왕백당王伯當이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공의 계획 안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당왕唐王에게 말하여 이렇게 청한 것이다. 해서 야속하게 여겨 즐거워하지 않았다.
이에 당주唐主에게 계책을 올리기를 “산동山東의 무리는 모두 신臣이 예전에 거느리던 부하들입니다.
청컨대 가서 그들을 거두어 어루만져 국가의 위엄을 빙자한다면 왕세충王世充을 잡는 것은 땅의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것입니다.” 하니, 마침내 왕백당王伯當을 이밀李密의 부관副官으로 삼아서 보내었다.
12월에
이밀李密이 마침내
도림현桃林縣의
성城을 점거하여 무리를 몰아 노략질하고 곧바로
남산南山으로 달려가서 험고한 곳을 점령하고 동쪽으로 오자,
성언사盛彦師注+[頭註]성언사盛彦師는 행군총관行軍總管이었다. 가 공격하여 목을 베고
수급首級을
장안長安에 전달하였다.
○ 법을 범하였으나
사죄死罪(사형에 처해야 할 죄)에 이르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당주唐主가
특명特命으로 그를 죽이게 하자,
감찰어사監察御史 이소립李素立이 간하기를 “
삼척三尺의
법法注+[頭註]삼척법三尺法은 3척尺의 죽간竹簡에 법률法律을 쓴 것이다. 은
왕자王者가 천하 사람들과 함께 준수하는 것이니, 법이 한 번 동요되면 사람들이 손발을 둘 곳이 없습니다.
폐하陛下께서 이제 겨우 큰
기업基業注+[頭註]홍鴻은 홍洪과 통한다. 을 창건하셨는데, 어찌하여 법을 버리신단 말입니까.
신臣이 외람되이 법사法司를 맡고 있으니, 감히 조명詔命을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니, 당주唐主가 그의 말을 따랐다.
관계 부서部署에 명하여 그에게 7품의 청요관淸要官을 제수하게 하였는데, 관계 부서部署에서 옹주雍州 사호司戶에 의망하자 당주唐主가 말하기를 “이 벼슬은 요직要職이기는 하나 깨끗하지 않다.” 하고,
또 비서랑秘書郞에 의망하자 “이 벼슬은 깨끗하기는 하나 요직이 아니다.” 하고는, 마침내 이소립李素立을 발탁하여 시어사侍御史에 제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