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卯] 〈隋恭帝侗皇泰二年이요 唐武德二年이요 鄭王王世充開明元이요 梁王沈法興延康元이요 吳王李子通明政元年이라
是歲
에 隋, (梁)[涼], 楚粲亡
하니 幷楚, 夏, 定楊, 梁師都, 梁銑
하야 이라〉
唐
이 初定
租,
庸,
調法注+[原註]此는 唐賦役之法也라 有田則有租하고 有家則有調하고 有身則有庸하니 租出穀하고 庸出絹하고 調出繒纊布麻하니라하야 每丁
에 租二石
과 絹二匹
과 綿三兩
이요 自玆以外
에는 不得橫有調斂
注+[頭註]橫, 調는 竝去聲이니 調는 謂賦也라하다
○ 唐主考第群臣
할새 以李綱, 孫伏伽
注+[頭註]李綱은 太子少保요 孫伏伽는 治書侍御史라로 爲第一
하다
因置酒高會
注+[頭註]皆召尊爵이라 故曰高會라 一說에 大會라하니라하고 謂裴寂等曰 隋氏以主驕臣諂
으로 亡天下
라
朕이 卽位以來로 每虛心求諫이나 然唯李綱이 差盡忠款하고 孫伏伽는 可謂誠直이요 餘人은 猶踵敝風하야 俛眉而已니 豈朕所望哉아
○ 七月에 劉武周進逼幷州어늘 齊王元吉이 棄州하고 奔還長安하니 晉陽土豪薛深이 以城納武周하다
上이 悉發關中兵하야 以益世民所統하야 使擊武周하다
○ 五月
에 鄭主世充
이 弑隋主侗
注+[通鑑要解]世充이 遣人酖之라 隋主 請與太后訣이나 不許하니 乃布席禮佛曰 自今以往으로 不復生帝王家라하다 以帛縊殺之하다하고 諡曰恭皇帝
라하다
기묘(619) - 수隋나라 공제恭帝 양동楊侗의 황태皇泰 2년이고, 당唐나라 무덕武德 2년이고, 정왕鄭王 왕세충王世充의 개명開明 원년이고, 양왕梁王 심법흥沈法興의 연강延康 원년이고, 오왕吳王 이자통李子通의 명정明政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수隋나라, 양涼나라(李軌), 초왕楚王 주찬朱粲이 망하니, 초楚나라(林士弘), 하夏나라(竇建德), 정양定楊(劉武周), 양사도梁師都, 양梁나라의 소선蕭銑까지 아울러 모두 아홉 나라이다. -
당唐나라가 처음으로
조租‧
용庸‧
조법調法注+[原註]조租‧용庸‧조법調法은 당唐나라 때의 부역賦役을 부과하는 법法이다. 전지田地가 있으면 조租가 있고, 집이 있으면 조調가 있고, 몸이 있으면 용庸이 있으니, 조租는 곡식으로 내고 용庸은 견絹으로 내고 조調는 〈그 지방에서 나는 산물産物에 따라〉 견릉絹綾과 고치와 삼베와 마麻로 냈다. 을 제정하여
장정壯丁마다
조租는 2석,
견絹은 2필,
면綿은 3량을 내게 하고 이 이외에는 제멋대로 징발하거나 거두어들이지
注+[頭註]횡橫과 조調는 모두 거성去聲이니, 조調는 부세賦稅를 이른다. 못하게 하였다.
- 《당서唐書》의 〈고조본기高祖本紀〉와 〈식화지食貨志〉에 나옴 -
○
당주唐主가 여러 신하들을 고과하여 등급을 매길 적에
이강李綱과
손복가孫伏伽注+[頭註]이강李綱은 태자소보太子少保이고, 손복가孫伏伽는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였다. 를 제일로 삼았다.
인하여 술자리를 마련하여 성대하게 연회
注+[頭註]높은 작위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부르기 때문에 고회高會라고 한다. 일설一說에는 대회大會(많이 모임)라고 한다. 를 베풀고는
배적裴寂 등에게 이르기를 “
수隋나라는 군주가 교만하고 신하가 아첨하여 천하를 잃었다.
짐朕이 즉위한 이후로 언제나 마음을 겸허히 하여 간언諫言을 구하였으나 오직 이강李綱만이 비교적 충성을 다하였고 손복가孫伏伽는 진실하고 충직하다고 이를 만하며, 그밖의 사람은 아직도 옛 풍속을 따라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니, 이것이 어찌 짐朕이 바라는 바이겠는가.” 하였다.
○ 왕세충王世充이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國號를 정鄭이라 하였다.
○ 7월에 유무주劉武周가 진격하여 병주幷州를 핍박하자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이 병주幷州를 버리고 도망하여 장안長安으로 돌아오니, 진양晉陽의 토호土豪인 설심薛深이 유무주劉武周에게 성城을 바쳤다.
○ 유무주劉武周의 군세軍勢가 매우 정예精銳로우니, 관중關中이 진동하고 놀랐다.
상上이 관중關中의 병력을 모두 징발해서 이세민李世民이 통솔하는 군대에 보태어 유무주劉武周를 공격하게 하였다.
○ 5월에
정주鄭主 왕세충王世充이
수주隋主 양동楊侗을 시해하고
注+[通鑑要解]왕세충王世充이 사람을 보내어 짐독鴆毒으로 수주隋主를 죽이게 하였다. 수주隋主가 태후太后와 영결永訣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니, 마침내 자리를 깔고 예불禮佛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후로 다시는 왕가王家에 태어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독을 마셨으나 숨이 끊어지지 않자〉 비단으로 목을 졸라 죽였다. 시호를
공황제恭皇帝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