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問魏徵曰 人主何爲而明이며 何爲而暗고 對曰 兼聽則明하고 偏信則闇이니이다
昔
에 堯
淸問下民이라 故
로 有苗之惡
이 得以上聞
하고 舜明四目, 達四聰
注+[頭註]書註에 廣四方之視聽이라하니라이라 故
로 共, 鯀, 驩, 苗
注+[釋義]諸本에 作共鯀驩兜하니 誤라 蔡氏曰 共工은 官名이요 鯀은 (蔡)[崇]伯名이요 驩兜는 臣名이요 三苗는 國名이니 所謂四凶也라 不能蔽也
니이다
秦二世
는 偏信趙高
라가 以成望夷之禍
注+[頭註]望夷는 宮名이니 二世自殺於此라하고 하고 注+[頭註]彭城閣은 江都也라 世基事는 見三十四卷丙子年하니 宇文化及이 弑煬帝於江都하니라하니이다
是故로 人君이 兼聽廣納이면 則貴臣不得壅蔽하야 而下情得以上通也니이다
○ 上謂黃門侍郞王珪曰 開皇十四年에 大旱이어늘 隋文帝不許賑給하고 而令百姓으로 就食山東이러니
但使倉庾之積
注+[頭註]在邑曰倉이요 在野曰庾니 倉無屋爲庾라이 足以備凶年
이니 其餘何用哉
리오
○ 上謂侍臣曰 人言天子至尊하야 無所畏憚이라호되 朕則不然하야
上畏皇天之鑑臨하고 下憚群臣之瞻仰하야 兢兢業業이라도 猶恐不合天意하고 未副人望이로라
魏徵曰 此는 誠致治之要니 願陛下愼終如始하시면 則善矣리이다
○ 頡利表請入朝
어늘 上謂侍臣曰 曏者突厥之彊
에 控弦
注+[頭註]控은 引也라百萬
이라
憑陵中夏하고 用是驕恣하야 以失其民이러니 今에 自請入朝하니 非困窮이면 肯如是乎아
然이나 朕或失道면 他日에 亦將如突厥하리니 能無懼乎아
○
祖孝孫
이 作唐雅樂
이어늘 上曰 禮樂者
는 蓋聖人
이 緣(物)[情]以設敎耳
니 治之隆替 豈由於此
리오
御史大夫杜淹曰 齊之將亡
에 作
注+[頭註]曲은 樂書云 樂有歌하고 歌有曲하고 曲有調라하니라하고 陳之將亡
에 作
하니 其聲哀思
注+[釋義]樂記에 亡國之音은 哀以思라한대 註에 思는 悲也라하니라하야 行路聞之
하고 皆悲泣
하니이다
故
로 者聞之則喜
하고 憂者聞之則悲
하나니 悲喜在人心
이요 非由
也
라
聖人이 履中正而樂和平하고 又思與四海共之, 百世傳之하야
夫禮樂은 有本有文하니 中和者는 本也요 容聲者는 文也니 二者不可偏廢라
先王이 守禮樂之本하야 未嘗須臾去於心하고 行禮樂之文하야 未嘗須臾遠於身이라
興於閨門
하야 著於朝廷
하고 注+[釋義]禮地官에 有鄕師, 遂師, 比長, 隣長하니 鄭氏曰 百里內爲六鄕이요 外爲六遂라하니라 比長은 各掌其比之治하야 五家相受相和親하며 隣長은 掌相糾相受하니 凡邑中之政相贊이라하고 達於諸侯
하고 流於四海
하야 自祭祀軍旅
로 至於飮食起居
히 未嘗不在禮樂之中
하니 如此數十百年然後
에 治化周浹
하야 鳳凰來儀也
라
太宗遽云 治之隆替 不由於樂이라하니 何發言之易而果於非聖人也오
夫禮非威儀之謂也나 然無威儀면 則禮不可得而行矣요 樂非聲音之謂也나 然無聲音이면 則樂不可得而見矣라
故로 曰無本不立이요 無文不行이라하니 奈何以齊, 陳之音不驗於今世라하야 而謂樂無益於治亂이리오
畿內有蝗이러니 上入苑中이라가 見蝗하고 掇數枚하야 祝之曰 民以穀爲命이어늘 而汝食之하니 寧食吾之肺腸하라하고 擧手欲呑之한대
左右諫曰 惡物이 或成疾이리이다 上曰 朕爲民受災하노니 何疾之避리오하고 遂呑之러니 是歲에 蝗不爲災하니라
○ 上謂侍臣曰
赦者는 小人之幸이요 君子之不幸이니 一歲再赦면 善人喑啞
注+[頭註]喑은 泣無聲이요 啞는 不能言也라라
夫
養稂莠注+[通鑑要解]稂은 與蓈同하니 害苗草요 莠는 音有니 似稷無實也라者는 害嘉穀이요 赦有罪者는 賊良民이라
故로 朕卽位以來로 不欲數赦하노니 恐小人恃之하야 輕犯憲章故也로라
比見群臣
이 屢上表賀祥瑞
하니 夫家給人足而無瑞
면 不害爲堯, 舜
注+[頭註]害는 妨也라이요 百姓愁怨而多瑞
면 不害爲桀, 紂
라
後魏之世
에 吏焚連理木
注+[通鑑要解]枝幹旣分而復合爲一하고 旣合而復分이라 故로 名焉이라하고 煮白雉而食之
나 豈足爲至治乎
아
嘗有白鵲構巢於寢殿之上
호되 合歡如腰鼓
注+[釋義]合歡은 會合歡適也라 曰 腰鼓는 大者瓦요 小者木이니 皆廣首而纖腰라하니 本胡鼓라 毛員鼓, 鷄婁鼓 皆腰鼓也니 兩頭擊之면 聲相應和라[頭註]兩巢相連而中細하야 其形如腰鼓라하니 左右稱賀
어늘
瑞在得賢이니 此何足賀리오하고 命毁其巢하고 縱鵲於野外하다
○ 天少雨어늘 李百藥이 上言호되 宮人無用者尙多하야 陰氣鬱積하니 亦足致旱이니이다
○ 突厥
이 寇邊
이어늘 朝臣
이 或請修
하고 發民乘
한대
上曰 突厥
이 災異相仍
이어늘 頡利不懼而修德
하고 暴虐滋甚
하야 하니 亡在朝夕이라
朕方爲公하야 掃淸沙漠하리니 安用勞民하야 遠修邊塞乎아
○ 十月에 上以瀛州刺史盧祖尙이 才兼文武라하야 徵入朝하고 諭以交趾久不得人일새 須卿鎭撫라한대
祖尙이 拜謝而出이러니 旣而오 悔之하야 辭以疾이라
上遣杜如晦等
하야 諭旨
호되 祖尙固辭
어늘 上大怒曰 我使人不行
이면 何以爲政
이리오하고 命斬於朝堂
이러니 尋
注+[頭註]俄也라悔之
하다
他日
에 與侍臣
으로 論齊文宣帝
注+[頭註]高洋이라는 何如人
고 魏徵對曰 文宣狂暴
나 然人與之爭
하야 事理屈則從之
니이다
曏者에 盧祖尙이 雖失人臣之義나 朕殺之는 似爲太暴라
由此言之
컨대 不如文宣矣
로다하고 命復其官蔭
注+[通鑑要解]復其官이면 則得蔭其子若孫이라 唐凡用蔭에 一品은 子正七品上이요 二品은 子正七品下요 三品은 子從七品上이요 從三品은 子從七品下요 正四品은 子正八品上이요 從四品은 子正八品下요 正五品은 子從八品上이요 從五品及國公子는 從八品下라 三品已上은 蔭曾孫하고 從五品已上은 蔭孫하나니 孫은 降子一等하고 曾孫은 降孫一等하며 贈官은 降正名一等也라하다
徵
이 容貌不逾中人
호되 而有膽略
하야 善回人主意
하고 每
犯顔苦諫하야 或逢上怒甚
이라도 徵
이 神色不移하니 上亦爲之霽
注+[釋義]郭氏曰 今南陽人이 呼雨止爲霽라하고 師古曰 霽는 止也라하니라威
러라
嘗謁告
注+[頭註]謁은 亦告也라 又請也니 請假也라上冢
이라가 還
하야 言於上曰 人言陛下欲幸南山
하야 外皆嚴裝已畢
이로되 而竟不行
이라하니 何也
잇고
○ 上
이 嘗得佳
注+[通鑑要解]鷂는 鷙鳥라 列子에 鷂爲鸇하고 鸇爲布穀이라가 久復爲鷂라하니 此物變也라하야 自臂之
라가 望見徵來
하고 匿懷中
이러니 徵奏事故久不已
하니 鷂竟死懷中
하다
○ 上曰 爲朕養民
이 唯在都督, 刺史
하니 朕常疏其名於屛風
注+[釋義]疏는 條陳以紀之라 屛은 三禮圖에 는 從廣八尺이요 라하니 今之屛風은 則遺象也라하야 坐臥觀之
하고 得其在官善惡之跡
하야 皆注於名下
하야 以備黜陟
하노라
縣令은 尤爲親民하니 不可不擇이라하고 乃命內外五品以上하야 各擧堪爲縣令者하야 以名聞하니라
상上이 위징魏徵에게 묻기를 “군주君主가 어떻게 하면 밝으며 어떻게 하면 어두운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여러 사람의 의견을 겸하여 들으면 밝고, 한 사람의 의견을 편벽되이 믿으면 어두워집니다.
옛날에
요堯임금은
하민下民들에게 묻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유묘有苗의 죄악이 위로 알려질 수 있었고,
순舜임금은 사방의 눈을 밝게 살피고 사방의 소리를 밝게 들었기
注+[頭註]《서경書經》 〈순전舜典〉의 주註에 “사방의 보고 들음을 넓히는 것이다.” 하였다. 때문에
공공共工‧
곤鯀‧
환도驩兜‧
삼묘三苗注+[釋義]‘공곤환묘共鯀驩苗’가 제본諸本에는 ‘공곤환두共鯀驩兜’로 되어 있으니, 잘못이다. 채씨蔡氏(蔡沈)가 말하기를 “공공共工은 관직 이름이고, 곤鯀은 숭백崇伯의 이름이고, 환도驩兜는 신하의 이름이고, 삼묘三苗는 나라 이름이니, 이른바 사흉四凶이다.” 하였다.가 죄악을 숨기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진秦나라
이세황제二世皇帝는
조고趙高를 편벽되이 믿었다가
망이궁望夷宮의
화禍注+[頭註]망이望夷는 궁궐 이름이니, 이세황제二世皇帝(胡亥)가 〈간신奸臣 조고趙高의 핍박을 받고〉 이곳에서 자살하였다. 를 이루었고,
양梁나라
무제武帝는
주이朱异를 편벽되이 믿었다가
대성臺城의 치욕을 취하였고,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우세기虞世基를 편벽되이 믿었다가
팽성각彭城閣의 변란을 이루었습니다.
注+[頭註]隋煬帝……以致彭城閣之變:팽성각彭城閣은 강도江都이다. 우세기虞世基의 일은 34권 병자년조丙子年條(616)에 보이니, 우문화급宇文化及이 양제煬帝를 강도江都에서 시해하였다.
이 때문에 인군人君이 겸하여 듣고 널리 받아들이면 귀한 신하들이 군주의 총명을 가리지 못하여 아랫사람의 정情이 위로 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 상上이 황문시랑黃門侍郞 왕규王珪에게 말하기를 “개황開皇 14년(594)에 큰 가뭄이 들자 수隋나라 문제文帝가 〈다른 곳에서 식량을 운반해다가〉 백성들을 구휼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백성들로 하여금 산동山東에 나아가서 먹게 하였는데,
말년末年에 이르러서는 천하天下에 비축한 식량이 50년을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양제煬帝는 부유함과 풍족함을 믿고 사치를 부리는 마음이 만족할 줄 모르다가 끝내 천하天下를 잃었다.
창고
注+[頭註]읍邑에 있는 것을 창倉이라 하고 들에 있는 것을 유庾라 하니, 창고에 지붕이 없는 것을 유庾라 한다. 의 저축은 단지 흉년에 대비하고자 해서일 뿐이니, 그 나머지는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 상上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지극히 높아서 두려워하고 꺼리는 바가 없다.’고 하나 짐朕은 그렇지 않다.
위로는 황천皇天이 굽어보고 계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여러 신하들이 우러러봄을 꺼려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데도 오히려 하늘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렵다.” 하였다.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이는 진실로 훌륭한 정치를 이룰 수 있는 요점이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끝을 삼가서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이 하시면 좋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이
표문表文을 올려
입조入朝할 것을 청하자,
상上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종전에
돌궐突厥이 강성할 적에는 활을 당겨
注+[頭註]공控은 당김이다. 쏠 수 있는 군사가 백만이었다.
그리하여 중하中夏를 능멸하고 이 때문에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민심民心을 잃었는데, 지금 스스로 입조入朝할 것을 청하니 저들이 곤궁하지 않다면 이와 같이 하려 하겠는가.
짐朕은 이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두렵다.
왜냐하면 돌궐突厥이 쇠약하면 변경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기쁘다.
그러나 짐朕이 혹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를 잃으면 후일 또한 장차 돌궐과 같아질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경卿들은 마땅히 입이 닳도록 간절히 간함을 아끼지 말아서 짐朕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보필하라.” 하였다.
○ 태상시太常寺 소경少卿 조효손祖孝孫이 ‘당아악唐雅樂’을 만들자, 상上이 말하기를 “예악禮樂이라는 것은 성인聖人이 성정性情을 따라 가르침을 베풀 뿐이니, 정치政治의 융성함과 침체함이 어찌 예악禮樂에 연유하겠는가.” 하였다.
어사대부御史大夫 두엄杜淹이 말하기를 “
제齊나라가 망할 적에 ‘
반려곡伴侶曲’
注+[頭註]곡曲은 《악서樂書》에 이르기를 “음악에는 노래가 있고 노래에는 곡曲이 있고 곡曲에는 조調가 있다.” 하였다. 을 지었고
진陳나라가 망할 적에 ‘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를 지었는데, 그 소리가 애처롭고 구슬퍼서
注+[釋義]齊之將亡……其聲哀思:《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망국亡國의 음악은 애처로우면서 슬프다.” 하였는데, 주註에 “사思는 슬퍼하는 것이다.” 하였다. 길 가는 자들이 이 노래를 듣고 모두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하니 정치의 융성함과 침체함이 어찌 예악禮樂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上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즐거운 자가 음악을 들으면 기뻐하고, 근심하는 자가 음악을 들으면 슬퍼하는 것이니, 슬픔과 기쁨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고, 음악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다.
망해가는 나라의 정사政事는 백성들이 반드시 근심하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면 슬퍼할 뿐이다.
지금 ‘반려곡伴侶曲’과 ‘옥수후정화玉樹後庭花’ 두 곡조曲調가 모두 남아 있으니, 짐朕이 공公을 위해 연주할 것이다.
그러나 공公이 이 곡曲을 듣고서 어찌 슬퍼하겠는가.” 하였다.
우승右丞 위징魏徵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예禮이다 예禮이다 하지만 옥玉과 비단을 이르겠는가.
악樂이다 악樂이다 하지만 종鍾과 북을 이르겠는가.’ 하였으니, 음악은 진실로 인화人和에 달려 있고 성음聲音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였다.
“예禮는 성인聖人이 실천하는 것이요, 악樂은 성인聖人이 즐거워하는 것이다.
성인聖人이 중정中正의 도道를 실천하고 화평和平함을 즐거워하고, 또 나아가 온 천하 사람들과 이것을 함께하고 백세토록 전할 것을 생각하였다.
예악禮樂은 본本이 있고 문文이 있으니, 중정中正과 화평和平함은 본本이요 용모와 음성은 문文이니,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폐할 수가 없다.
선왕先王은 예악禮樂의 본本을 지켜서 일찍이 잠시도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였으며, 예악禮樂의 문文을 행하여 일찍이 잠시도 몸에서 멀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규문閨門에서 일으켜서
조정朝廷에 드러내고
향鄕‧
수遂‧
비比‧
인隣에 미치게 하고
注+[釋義]《주례周禮》 〈지관地官〉에 향사鄕師‧수사遂師‧비장比長‧인장隣長이 있으니, 정씨鄭氏(鄭玄)가 말하기를 “백리百里 이내를 육향六鄕이라 하고 그 밖을 육수六遂라 한다.” 하였다. 《주례周禮》 〈지관地官〉에 “비장比長은 각각 자기 비比의 정사를 맡아 5가호가 서로 의탁하고 서로 화친하게 한다. 인장隣長은 서로 규찰하고 서로 책임지는 것을 관장하여 모든 읍邑 안의 정사를 서로 돕게 한다.” 하였다. 제후諸侯에게 도달시키고 온 천하에
유행流行하게 하여,
제사祭祀와
군려軍旅로부터
음식飮食과
기거起居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예악禮樂의 가운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와 같이 하기를 수십 수백 년 동안 한 뒤에야
정치政治와
교화敎化가 두루 흡족하여
봉황鳳凰이 와서 춤을 추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태종太宗은 대번에 정치의 융성함과 침체함이 음악音樂에서 연유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말을 쉽게 하여 성인聖人을 비난하기를 과감하게 하였는가.
예禮는 위의威儀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위의威儀가 없으면 예禮가 행해질 수 없고, 악樂은 성음聲音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성음聲音이 없으면 악樂이 드러날 수 없다.
그러므로 ‘본本이 없으면 서지 못하고 문文이 없으면 행해지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니, 어찌 제齊나라와 진陳나라의 음악이 지금 세상에 징험되지 않는다고 하여 음악이 천하의 치란治亂에 유익함이 없다고 말한단 말인가.
주먹 만한 돌을 보고 태산泰山을 깔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기내畿內에 황충蝗蟲이 있었는데, 상上이 동산 안에 들어갔다가 황충蝗蟲을 보고 몇 마리를 잡아서 축원하기를 “백성들은 곡식을 생명으로 삼는데 네가 곡식을 먹으니, 차라리 나의 폐와 창자를 먹으라.” 하고 손을 들어 황충蝗蟲을 삼키려 하였다.
좌우의 신하들이 간하기를 “나쁜 물건이 혹 병을 이룰까 염려됩니다.” 하자, 상上이 말하기를 “짐朕이 백성을 위하여 재앙을 받으려 하니, 어찌 병을 피하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삼켰는데, 이해에 황충蝗蟲이 재해災害가 되지 않았다.
○
상上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
사면赦免은
소인小人의 다행이요
군자君子의 불행이니, 1년에 두 번 사면하면 선량한 사람이 벙어리가 되어 말을 하지 못한다.
注+[頭註]음喑은 흐느끼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요, 아啞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잡초
注+[通鑑要解]낭稂은 낭蓈과 같으니, 싹을 해치는 풀이요, 유莠는 음이 ‘유’이니, 기장과 비슷하나 알맹이가 없다. 를 기르는 것은 아름다운 곡식을 해치는 짓이며 죄가 있는 사람을 사면하는 것은 어진 백성을 해치는 짓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짐朕은 즉위한 이래로 자주 사면하고자 하지 않으니, 소인小人들이 이것(사면)을 믿고서 헌장憲章을 쉽게 범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근래에 보건대 신하들이 자주
표문表文을 올려
상서祥瑞를 축하하는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면서
상서祥瑞가 없으면
요堯‧
순舜이 됨에 무방하고,
注+[頭註]해害는 해로움이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원망하면서
상서祥瑞가 많으면
걸桀‧
주紂가 됨에 무방하다.
후위後魏(北魏) 때엔 관리들이
연리목連理木注+[通鑑要解]연리목連理木은 가지와 줄기가 이미 나누어졌다가 다시 합하여 하나가 되고, 이미 합하였다가 다시 나누어지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을 태우고 흰 꿩을 삶아서 먹을 정도로 많았지만 어찌 지극히 잘 다스려졌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흰 까치가
침전寢殿 위에 둥지를 지었는데 서로
정情이 좋아서 둥지 두 개가 연결된 것이 마치
요고腰鼓(장구)와 같으니,
注+[釋義]合歡은 모여서 기뻐하고 뜻에 맞는 것이다. 《산당고색山堂考索》에 이르기를 “요고腰鼓(장구)는 큰 것은 질그릇으로 만들고 작은 것은 나무로 만드니, 모두 양쪽의 머리는 넓고 가운데의 허리는 가늘다.” 하였으니, 본래 호고胡鼓이다. 모원고毛員鼓와 계루고鷄婁鼓가 모두 요고腰鼓이니, 양쪽 머리를 두드리면 소리가 서로 응하여 울린다.[頭註]둥지 두 개가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 가운데가 가늘어 그 모양이 요고腰鼓와 같은 것이다.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축하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내 항상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상서祥瑞를 좋아한 것을 비웃노라.
상서祥瑞는 어진 인재를 얻는 데에 있으니, 이것이 어찌 축하할 만한 일이겠는가.” 하고는 명령하여 그 둥지를 부수고 까치를 야외로 날려 보내게 하였다.
○ 날씨가 가물어 비가 적게 오자, 이백약李百藥이 상언上言하기를 “궁인宮人 중에 쓸모없는 자가 아직도 많아 음기陰氣가 막혀서 쌓이니, 또한 가뭄을 초래하기에 충분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명령하여 궁녀를 골라서 내보내게 하니, 전후로 내보낸 것이 3천여 명이었다.
○ 돌궐突厥이 변방을 침략하자, 조정의 신하들이 혹 옛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백성을 징발하여 보장堡障에 올라가 지키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上이 말하기를 “돌궐突厥에 재이災異가 계속되는데도 힐리頡利가 두려워하여 덕德을 닦지 않고 포학함이 더욱 심하여 골육간骨肉間에 서로 공격하니, 머지않아 망할 것이다.
짐朕은 공公들을 위하여 사막沙漠을 깨끗이 청소할 것이니, 어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여 멀리 변경의 요새를 수리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였다.
○ 10월에 상上이 영주자사瀛州刺史 노조상盧祖尙이 문무文武를 겸비했다 하여 불러서 입조入朝하게 하고 고유告諭하기를 “교지交趾 지방이 오랫동안 훌륭한 지방관地方官을 얻어 다스리지 못하니, 반드시 경卿이 가서 진무鎭撫해 주어야 한다.” 하였는데,
노조상盧祖尙이 배사拜謝하고 나갔으나 이윽고 이를 후회하고서 병으로 사양하였다.
상上이
두여회杜如晦 등을 보내어 그를 타일렀으나
노조상盧祖尙이 한사코 사양하자,
상上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사람을 부려서 명령이 행해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정사를 행하겠는가.” 하고 명령하여
조당朝堂에서 그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는데, 오래지 않아
注+[頭註]심尋은 얼마 후이다. 이 일을 후회하였다.
후일
시신侍臣과 의론할 적에 “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注+[頭註]제齊나라(北齊) 문선제文宣帝는 고양高洋이다. 는 어떠한 군주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
문선제文宣帝는 성질이 광포하였으나 다른 사람과 논쟁할 때에 사리가 굽히면 상대의 말을 따랐습니다.” 하였다.
지난번 노조상盧祖尙이 비록 신하의 의리를 잃었으나 짐朕이 그를 죽인 것은 너무 포학한 듯하다.
이로써 말한다면 내가
문선제文宣帝만 못하다.” 하고는 명령하여
노조상盧祖尙의
관직官職을 회복시켜 그의 자손에게
음직蔭職을 줄 수 있게 하였다.
注+[通鑑要解]관직을 회복하면 그 아들과 손자에게 음직蔭職을 줄 수 있다. 당唐나라는 음직蔭職을 줄 때에 일품一品의 관원은 아들에게 정칠품상正七品上을, 이품二品의 관원은 아들에게 정칠품하正七品下를, 3품品의 관원은 아들에게 종칠품상從七品上을, 종삼품從三品의 관원은 아들에게 종칠품하從七品下를, 정사품正四品의 관원은 아들에게 정팔품상正八品上을, 종사품從四品의 관원은 아들에게 정팔품하正八品下를, 정오품正五品의 관원은 아들에게 종팔품상從八品上을, 종오품從五品과 국공國公의 아들은 종팔품하從八品下를 주었다. 삼품三品 이상은 증손자에게까지 음직蔭職을 줄 수 있고, 종오품從五品 이상은 손자에게까지 음직蔭職을 줄 수 있었으니, 손자는 아들보다 1등等을 강등하고 증손자는 손자보다 1등等을 강등하며 증관贈官은 정관正官보다 1등等을 강등하였다.
위징魏徵이 용모는 보통 사람보다 낫지 못하였으나
담력膽力과
지략智略이 있어서
군주君主의 뜻을 잘 돌렸고, 매번 군주의 노여움을 무릅쓰고 굳이 간해서 혹
상上이 매우 노여워하여도
위징魏徵이 정신과 안색이 변하지 않으니,
상上이 또한 이 때문에 노여움을 거두곤
注+[釋義]곽씨郭氏가 말하기를 “지금 남양南陽 사람들은 비가 그친 것을 이름하여 제霽라고 한다.” 하였고, 안사고顔師古는 말하기를 “제霽는 그침이다.” 하였다. 하였다.
위징魏徵이 일찍이 휴가를 얻어
注+[頭註]알謁 또한 고告(말미)이다. 또 청하는 것이니, 휴가를 청하는 것이다. 성묘하러 갔다가 돌아와
상上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의 말에 폐하께서
남산南山에 행차하시려 하여 밖에서 따르는 신하들이 모두 이미 엄하게 행장을 마쳤는데 끝내 가지 않으셨다 하니, 어째서입니까?” 하니,
상上이 웃으며 말하기를 “진실로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경卿이 꾸짖을까 두려웠기 때문에 중지한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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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上이 일찍이 아름다운 새매
注+[通鑑要解]요鷂는 성질이 사나운 새이다. 《열자列子》 〈천서天瑞〉에 “요鷂가 전鸇이 되고 전鸇이 포곡布穀이 되었다가 오랜 뒤에 다시 요鷂가 된다.” 하였으니, 이는 물건이 변하는 것이다. 를 얻어 친히 팔뚝에 올려놓고 놀다가
위징魏徵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는 품속에 숨겼는데,
위징魏徵이 〈이것을 알고는〉 일을 아뢰면서 일부러 오래도록 마치지 않으니, 새매가 끝내 품속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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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上이 말하기를 “
짐朕을 위하여 백성을 기르는 것은 오직
도독都督과
자사刺史에게 달려 있으니,
짐朕이 항상 그들의 이름을
병풍屛風에 써서
注+[釋義]소疏는 조목별로 들어서 기록하는 것이다. 병屛은 《삼례도三禮圖》에 “의扆는 세로와 가로가 8척이고 도끼 모양을 그린다.” 하였으니, 오늘날의 병풍은 옛 모양을 본뜬 것이다. 앉으나 누우나 그것을 보고, 그들이 관청에 있을 때에 잘하고 잘못한
행적行跡을 알아내어 이름 아래에 모두 달아서 그들을 파면하거나 승진시킬 때에 대비하노라.
현령縣令은 더더욱 백성들을 가까이하니, 잘 가리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는, 마침내 내외의 오품五品 이상의 관원에게 명령하여 현령縣令이 될 만한 자를 천거해서 이름을 보고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