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에 李靖이 帥驍騎三千하고 自馬邑으로 進屯惡陽嶺하야 夜襲定襄破之하다
突厥頡利可汗
이 不意靖猝至
注+[釋義]猝은 忽至也라에 大驚
이러니 又爲靖破於陰山
注+[釋義]陰山은 北戎之地니 東西千餘里라 草茂盛하고 多禽獸하니 匈奴依阻其中이러니 漢武克匈奴하고 置陰山縣하니라이라
靖
이 斬首萬餘級
하고 俘男女十餘萬
하며 斥地
하야 自陰山
으로 北至大漠
하고 注+[釋義]後魏每戰克에 欲天下聞知하야 乃書帛하야 〈建〉於漆竿上하고 名爲露布하니라以聞이라
○ 三月에 四夷君長이 詣闕하야 請上爲天可汗이어늘 上曰 我爲大唐天子하니 又下行可汗事乎인저하니 群臣及四夷 皆稱萬歲라
是後에 以璽書로 賜西北君長에 皆稱天可汗이라하다
太宗이 以萬乘之主로 而兼爲夷狄之君하야 不恥其名而受其佞하야 事不師古하니 不足爲後世法也니라
突厥頡利可汗
이 至長安
이어늘 上御順天樓
하야 盛陳文物
하야 引見
하고 詔館於太僕
하고 厚廩食之
注+[釋義]館은 去聲이니 以館館客也라 太僕寺는 掌廐牧輦輿之政하니라하다
上皇
이 聞擒頡利
하고 歎曰
하고 不能報
러니 今我子能滅突厥
하니 吾付託得人
이라
上皇이 召上與貴臣十餘人及諸王, 妃, 主하야 置酒凌煙閣할새 酒酣에 上皇이 自彈琵琶하고 上이 起舞하고 公卿이 迭起爲壽하야 逮夜而罷하다
○ 突厥旣亡
에 其部落
이 或北附薛延
注+[附註]北狄種勅勒也라 本傳에 薛延陁者는 先與薛種雜居러니 後滅延陁部而有之하고 號薛延陁라 貞觀二年에 遣使立薛延陁夷男하야 爲可汗한대 夷男이 建牙於大漠之鬱督軍山이라하니 卽烏德鞬山也라하고 或西奔西域
이나 其降唐者 尙十萬口
라
今幸而破亡하니 陛下以其降附라하야 不忍盡殺인댄 宜縱之하야 使還故土요 不可留之中國이니이다
晉初
에 諸胡
注+[頭註]卽라與民雜居中國
이어늘 郭欽, 江統
이 皆勸武帝
하야 驅出塞外
하야 以絶亂階
라호되 武帝不從
이러니
後二十餘年에 伊, 洛之間이 遂爲氈裘之域하니 此는 前事之明鑑也니이다
孔子曰
라하시니 若救其死亡
하야 授以生業
하고 敎之以禮義
면 數年之後
에 悉爲吾民
이니
選其酋長하야 使入宿衛면 畏威懷德하리니 何後患之有리잇고
上이 卒用彦博策하야 處突厥降衆하야 東自幽州로 西至靈州하며 分突利所統之地하야 爲四州하고 分頡利之地하야 爲六州하다
其餘酋長至者는 皆拜將軍中郞將하야 布列朝廷하니 五品已上이 百餘人이라 殆與朝士相半이러라
孔子美齊桓之功曰
라하시니 聖人之懲戎狄
이 如此
라
太宗이 旣滅突厥하고 而引諸戎入中國하야 使殊俗醜類로 與公卿大夫로 雜處於朝廷이라
苟欲冠帶四夷하야 以誇示天下하야 而不知亂華亦甚矣라
是以로 唐室이 世有戎狄之亂하니 豈非太宗之所啓乎아
林邑
注+[釋義]南蠻國名이니 漢日南象林之地로 在交州南千餘里하니라이 獻火珠
注+[頭註]大如鷄卵하고 圓白皎潔하니 光照數尺이라 狀如水精하니 日中에 以艾藉珠면 火燃이라러니 有司以其表辭不順
이라하야 請討之
한대 上曰
好戰者亡하나니 如隋煬帝, 頡利可汗
을 皆耳目所親見也
라
給事中張玄素 上書諫하야 以爲洛陽은 未有巡幸之期어늘 而預修宮室하시니 非今日之急務니이다
陛下初平洛陽에 凡隋氏宮室之宏侈者를 皆令毁之러시니 曾未十年에 復加營繕하시니 何前日惡之而今日效之也닛고
陛下役瘡痍之人하야 襲亡隋之敝하시니 恐又甚於煬帝矣니이다
上謂玄素曰 卿謂我不如煬帝라하니 何如桀, 紂오 對曰 若此役不息이면 亦同歸于亂耳니이다
上歎曰 吾思之不熟하야 乃至於是라하고 顧謂房玄齡曰 朕以洛陽土中으로 朝貢道均이라하야 意欲便民이라
故로 使營之러니 今玄素所言이 誠有理하니 宜卽爲之罷役하라
後日
에 或以事至洛陽
이면 雖露居
라도 亦無傷也
라하고 仍賜玄素綵二百匹
注+[頭註]綵는 繪帛也라하다
魏徵聞之하고 歎曰 張公論事에 有回天之力하니 可謂仁人之言哉인저
對曰 文帝勤於爲治
하야 每臨朝
에 或至日昃
하고 五品已上
으로 引坐論事
에 衛士傳而食注+[原註]餐은 蘇昆反이요 又千安反이라하니 雖性非仁厚
나 亦勵精之主也
니이다
文帝不明而喜察하니 不明則照有不通이요 喜察則多疑於物하야 事皆自決하고 不任群臣이니
天下至廣하고 一日萬機라 雖復勞神苦形이나 豈能一一中理리오
群臣이 旣知主意하야 唯取決受成하고 雖有愆違나 莫能諫爭하니 此所以二世而亡也니라
擇天下賢才
하야 寘之百官
注+[通鑑要解]寘는 音至니 與置同이라하야 使思天下之事
하고 關由宰相
하야 審熟便安然後
에 奏聞
하야
有功則賞하고 有罪則刑하니 誰敢不竭心力하야 以修職業이리오
何憂天下之不治乎아 因勅百司호되 自今으로 詔勅行下에 有未便者어든 皆應執奏하고 毋得阿從하야 不盡己意하라
書曰 元首明哉
하면 股肱良哉
하야 庶事康哉
라하고 又曰 元首叢脞
注+[頭註]叢脞는 煩碎也라哉
하면 股肱惰哉
하야 萬事
哉
라하니 此舜, 皐陶所以
歌
注+[頭註]賡은 續也라而相戒也
라
君知人이면 則賢者 得行其所學하고 臣任職이면 則不賢者 不得苟容於朝하니 此庶事所以康也라
若夫君行臣職이면 則叢脞矣요 臣不任君之事면 則惰矣니 此萬事所以隳也라
當舜之時하야 禹平水土하고 稷播百穀하야 土穀之事를 舜不親也요 契敷五敎하고 皐陶明五刑하야 敎刑之事를 舜不治也요 伯夷典禮하고 夔典樂하야 禮樂之事를 舜不與也요 益作虞하고 垂作共工하야 虞工之事를 舜不知也라
禹爲一相하야 總百官하고 自稷以下는 分職以聽焉하니 君人者는 如天運於上에 而四時寒暑 各司其序어든 則不勞而萬物生矣라
君不可以不逸也니 所治者大하고 所司者要也요 臣不可以不勞也니 所治者寡하고 所職者詳也일새라
不明之君은 不能知人故로 務察而多疑하야 欲以一人之身으로 代百官之所爲하니 則雖聖智라도 亦日力不足矣라
故로 其臣下 事無大小히 皆歸之君하야 政有得失에 不任其患하야 賢者不得行其志하고 而持祿之士 得以保其位하니 此天下所以不治也라
是以로 隋文은 勤而無功하고 太宗은 逸而有成하니 彼는 不得其道요 此는 得其道故也니라
上
이 讀
할새 云 人五臟之系 咸附於背
라하야늘 詔自今
으로 毋得笞囚背
하라하다
故로 耳目所接에 其心이 必在於民하니 禁笞囚背는 亦可謂善推其所爲者矣로다
古之爲國者
는 요 後世
엔 作爲刑書
하야 惟恐不備
하니 俾民之知所避也
라
唐興에 高祖入京師하야 約法十二條하고 及受禪에 命劉文靜等하야 損益律令하고 武德二年에 頒新格五十三條하다
太宗卽位하야 詔房玄齡等하야 復定舊令한대 玄齡等이 以爲
肉刑旣廢하고 (令)[今]以笞杖徒流死로 爲五刑이로되 而又刖足이면 是六刑也라하니 於是에 除斷趾法하니라
太宗이 嘗覽明堂針灸圖하니 見人之五臟이 皆近背하야 針灸失所면 則其害致死하고 歎曰
夫箠者는 五刑之輕이요 死者는 人之所重이니 安得犯至輕之刑하야 而或致死리오하고 遂詔하야 罪人無得鞭背라
然
이나 自
也
로 法官
이 以
爲戒
하고 有
者
는 又不加罪
하니 自是
로 吏法稍密
이라
帝以問大理卿劉德威한대 對曰 律에 失入은 減三等하고 失出은 減五等이어늘
今失入無辜하고 而失出爲大罪라 故로 吏皆深文이니이다
帝矍然하야 遂命失出入者를 皆如律하니 自此로 吏亦持平하니라
初卽位에 有勸以威刑肅天下者어늘 魏徵以爲不可라하고 因爲上하야 言王政本於仁恩하야 所以愛民厚俗之意한대 太宗이 欣然納之라
諸宰相
이 侍宴
할새 上謂王珪曰 卿
은 識鑑精通하고 復善談論하니 玄齡以下
를 卿宜悉加品藻
注+[頭註]定其差品及文質을 如衣裳之加藻火黼黻也라하고
處煩治劇注+[頭註]劇은 艱也라하야 衆務畢擧는 臣不如戴冑
요
恥君不及堯, 舜하야 以諫諍爲己任은 臣不如魏徵이어니와
至於
激濁注+[頭註]激은 水礙也니 孟子에 激而行之면 可使在山이라하니라揚淸하고 嫉惡好善하야는 臣於數子
에 亦有微長
이니이다
上深以爲然
하고 衆亦服其確論
注+[釋義]確은 克角反이니 言其論堅하야 不可破也라이러라
○ 上之初卽位也에 常(嘗)與群臣으로 語及敎化할새 上曰 今承大亂之後하니 恐斯民未易化也로라 魏徵對曰 不然하니이다
久安之民은 驕佚하니 驕佚則難敎하고 經亂之民은 愁苦하니 愁苦則易化니
上
이 深然之
어늘 封德彛非之曰 三代以還
으로 人漸澆訛
注+[原註]澆는 堅堯反이요 訛는 五禾反이니 謬也라라
故로 秦任法律하고 漢雜霸道하니 蓋欲化而不能이니
魏徵은 書生이라 未識時務하니 若信其虛論이면 必敗國家하리이다
徵曰 五帝, 三王이 不易民而化하야 行帝道而帝하고 行王道而王하니 顧所行如何耳니이다
昔
에 黃帝征
尤
하고 誅九黎
하고 湯放桀
하고 武王伐紂
하야 皆能身致太平
하니 豈非承大亂之後耶
잇가
若謂古人淳樸
하야 漸致澆訛
인댄 則至于今日
하야는 當悉化爲鬼魅
注+[頭註]魅는 老物之精也라 人面鬼身四足이요 好惑人하니 山林異氣所生이라矣
리니 人主安得而治之
릿고 上
이 卒從徵言
하다
元年에 關中飢하야 米斗直(値)絹一匹이요 二年에 天下蝗하고 三年에 大水호되 上이 勤而撫之하니 民雖東西就食이나 未嘗嗟怨이러니
是歲
에 天下大
注+[頭註]稔은 熟也라하야 流散者 咸歸鄕里
하고 米斗不過三, 四錢
이요 終歲斷死刑
이 纔二十九人
이라
東至于海
하고 南及
히 皆外戶不閉
하며 行旅不齎糧
하고 取給於道路焉
이러라
封倫
注+[頭註]倫은 名也요 字는 德彛라言三代以還
으로 人漸澆訛
라하니 未爲甚失
이어늘 魏徵
이 言若果澆訛難化
면 當爲鬼魅
라하니 則非也
라
以
已來觀之
하면 三代之時 固不及唐虞之世
요 周之文勝
이 又不如虞夏之質
이라
兩漢風俗이 豈敢望周며 而唐之風俗이 又安能及漢邪아
若謂民常淳朴
하야 無有澆訛
라하면 則結繩之治 可以易約劑
注+[附註]에 大市以質하고 小市以劑라한대 注에 는 爲之(卷)[券]하야 藏之也라 兩書一札이니 同而別之라 長曰質이요 短曰劑라요 土鼓之樂
이 리라
要之컨대 一治一亂이 天下之大數也니 亂極人少면 則氣厚而人淳하고 治極人夥면 則氣漓而人澆라
蓋或二三百歲와 或五六百歲에 淳漓一變하고 而天地之氣 盈虛消息하니 後世誠不及古矣어니와
若夫人之所以爲人이 出於本心하야 不可泯滅者는 則古猶今爾라
是故로 可以懷之以仁이요 理之以義요 先之以敬讓이요 示之以好惡也라
魏徵이 有見於飢渴者之易爲飮食이로되 而無見於人心之未亡者라
故로 其效止於米斗三錢하고 外戶不閉하니 則無以進矣라
上謂長孫無忌曰 貞觀之初에 上書者皆云 人主當獨運威權이요 不可委之臣下라하고
唯魏徵이 勸朕하야 偃武修文하야 中國旣安이면 四夷自服이라하야늘 朕用其言하야
今頡利(咸)[成]擒
에 其酋長
이 竝帶刀宿衛
注+[頭註]宿은 守也라하고 部落
이 皆襲衣冠
하니 徵之力也
니라
徵이 再拜謝曰 突厥破滅하고 海內康寧은 皆陛下威德이니 臣何力焉이리잇고 上曰 朕能任公하고 公能稱所任하니 則其力이 豈獨在朕乎아
太宗이 可謂能審取舍(捨)矣니 魏徵仁義之言也는 欲順天下之理而治之요 封德彛刑罰之言也는 欲咈天下之性而治之라
夫民은 莫不惡危而欲安하고 惡勞而欲息하나니 以仁義治之則順하고 以刑罰治之則咈矣라
故로 治天下는 在順之而已니 咈之而能治者는 未之聞也라
太宗이 從魏徵하고 而不從德彛하야 行之四年에 遂致太平하니 仁義之效 如此其速也라
及其成功하야는 復歸美於下하니 此近世帝王之所不及也니라
房玄齡奏호되 閱府庫甲兵하니 遠勝隋世니이다 上曰 甲兵은 武備라 誠不可闕이나 然煬帝甲兵이 豈不足耶아
卒亡天下
하니 若公等
이 盡力
하야 使百姓乂安
注+[頭註]乂는 治也라이면 此乃朕之甲兵也
니라
정월正月에 이정李靖이 날랜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마읍馬邑으로부터 전진하여 악양령惡陽嶺에 주둔해서 밤에 정양군定襄郡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은 뜻밖에
이정李靖이 갑자기 쳐들어오자
注+[釋義]졸猝은 갑자기 이르는 것이다. 크게 놀랐는데, 또다시
이정李靖에게
음산陰山注+[釋義]음산陰山은 북융北戎 지역이니 동서로 천여 리이다. 풀이 무성하고 금수禽獸가 많으니 흉노匈奴가 그곳에 의지하였는데,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흉노匈奴를 점령하고 음산현陰山縣을 설치하였다. 에서 격파당하였다.
이정李靖이 만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고 남녀 백성 10여만 명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영토를 개척하여
음산陰山으로부터 북쪽으로
대막大漠에 이르고
노포露布注+[釋義]후위後魏가 전투에 이길 때마다 천하에 널리 알리고자 하여 그 사실을 비단에 적어 칠간漆竿 위에 세우고 노포露布라 이름하였다. 로 보고하였다.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아 경사京師로 보내니, 〈그를 따르던 무리가 모두 투항하여〉 사막沙漠 이남 지역이 마침내 텅 비게 되었다.
- 《당서唐書》의 〈이정전李靖傳〉과 〈돌궐전突厥傳〉에 나옴 -
○ 3월에 사방 오랑캐의 군장君長이 대궐에 나와서 상上을 천가한天可汗이라 부를 것을 청하자, 상上이 말하기를 “내가 대당大唐의 천자天子가 되었는데, 또 아래로 가한可汗의 일을 행한단 말인가?” 하니, 신하들과 사방 오랑캐의 군장君長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이후로 옥새玉璽가 찍힌 문서를 서북西北 지방의 군장君長에게 하사할 때에는 모두 천가한天可汗이라 칭하였다.
“태종太宗이 만승萬乘의 군주로서 겸하여 이적夷狄의 군주가 되어서 그 이름(天可汗)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아첨함을 받아들여 일을 함에 옛것을 본받지 않았으니, 후세의 법이 될 수 없다.”
돌궐突厥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이
장안長安에 오자,
상上이
순천문루順天門樓에 납시어
문물文物을 성대하게 진열하고서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인견引見하고,
조명詔命을 내려
태복시太僕寺에 머물게 하고 많은
늠료廩料를 먹게 하였다.
注+[釋義]관館은 거성去聲이니, 객관客館에 객을 머물게 하는 것이다. 태복시太僕寺는 궁중의 마소를 기르는 일과 임금이 타는 수레에 관한 정사를 맡았다.
상황上皇이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았다는 말을 듣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한漢 고조高祖는 백등산白登山에서 흉노에게 포위당하여 곤궁을 당하고 보복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내 아들은 돌궐突厥을 멸망시켰으니 내가 나라를 맡김에 인물을 얻었다.
상황上皇이 상上과 귀한 대신大臣 10여 명 및 여러 왕‧왕비‧공주를 불러 능연각凌煙閣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거나하게 취하자 상황上皇이 스스로 비파琵琶를 타고 상上이 일어나 춤을 추었으며 공경公卿들이 차례로 일어나 축수祝壽하는 잔을 올려 밤이 되어서야 파하였다.
○
돌궐突厥이 멸망한 뒤에 그
부락部落들이 혹은 북쪽으로
설연타薛延陁注+[附註]설연타薛延陁는 북적北狄의 종족種族인 칙륵勅勒이다. 《신당서新唐書》 〈회골전回鶻傳〉에 “설연타薛延陁는 예전에 설薛의 종족과 섞여 살았는데, 뒤에 연타延陁의 부락을 멸망시켜 그 땅을 소유하고 설연타薛延陁라 이름하였다. 정관貞觀 2년(628)에 사신을 보내어 설연타薛延陁의 이남夷男(眞珠毗伽可汗)을 세워 가한可汗으로 삼았는데, 이남夷男이 대막大漠(고비 사막)의 울독군산鬱督軍山에 왕정王庭을 세웠다.” 하였으니, 울독군산鬱督軍山은 바로 오덕건산烏德鞬山이다. 에게 붙고 혹은 서쪽으로
서역西域으로 도망하였으나
당唐나라에 항복한 자가 그래도 10여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신하들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이들을 사의事宜에 맞게 구처區處(措處)하는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돌궐突厥은 대대로 침략하고 도둑질하여 백성의 원수였습니다.
지금 다행히 패망하였으니, 폐하께서 그들이 항복하고 귀부歸附했다 해서 차마 다 죽이지 못하신다면 마땅히 이들을 풀어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옛 땅으로 돌아가게 해야 하고 중국中國에 머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진晉나라 초기에 여러 오랑캐들
注+[頭註]진晉나라 초기의 여러 오랑캐란 바로 오호五胡이다. 을
중국中國 백성들과 뒤섞여
중국中國에 살게 하였는데,
곽흠郭欽과
강통江統이 모두
무제武帝에게 오랑캐들을 변방 밖으로 몰아내어 난리의
계제階梯(발단)를 끊으라고 권하였으나
무제武帝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뒤 20여 년 만에 이수伊水와 낙수洛水 사이(洛陽)가 마침내 짐승의 털과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는 오랑캐 지역이 되었으니, 이는 지나간 일로서 밝은 거울입니다.” 하였다.
온언박溫彦博이 말하기를 “왕자王者는 만물萬物에 대하여 하늘처럼 덮어주고 땅처럼 실어주어서 버리는 바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 돌궐突厥이 곤궁하여 우리에게 귀의해 왔는데, 어찌하여 이들을 버리고 받아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공자孔子께서 말씀하기를 ‘가르침이 있으면 종류가 없다.’ 하였으니, 만약 그들의 죽음을 구원하여 생업生業을 마련해 주고 예의禮義를 가르친다면 몇 년 뒤에는 모두 우리 백성이 될 것입니다.
그 추장酋長을 뽑아서 그로 하여금 중국에 들어와 숙위宿衛하게 한다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德을 생각할 것이니, 어찌 후환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上이 끝내 온언박溫彦博의 계책을 써서 돌궐突厥의 항복한 무리를 중원中原에 거처하게 하여 동쪽으로는 유주幽州로부터 서쪽으로는 영주靈州에 이르게 하였으며, 돌리가한突利可汗이 거느리던 지역을 나누어 네 주州를 만들고 힐리가한頡利可汗이 거느리던 지역을 나누어 여섯 주州를 만들었다.
그 밖에 추장酋長으로 온 자들은 모두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에 임명되어 조정에 나열하니, 5품 이상이 백여 명이어서 조사朝士와 거의 반반이 될 정도였다.
- 《당서唐書 돌궐전突厥傳》과 《정관정요貞觀政要》에 나옴 -
“선왕先王의 제도에 융적戎狄을 황복荒服으로 삼아서 오랑캐가 중화中華와 뒤섞이지 않게 하였으니, 이는 족류族類를 분별하고 내외內外를 구별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공功을 찬미하여 말씀하기를 ‘관중管仲이 없었다면 나는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좌임左袵을 했을 것이다.’ 하였으니, 성인聖人이 융적戎狄을 징계함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태종太宗은 돌궐突厥을 멸한 뒤에 여러 오랑캐들을 이끌어 중국中國으로 들어오게 해서 풍속이 다른 무리로 하여금 공경公卿, 대부大夫들과 함께 조정에서 뒤섞여 있게 하였다.
진실로 사이四夷에게 관冠을 쓰고 띠를 매게 하여 천하에 과시하고자 해서 오랑캐가 중화中華를 어지럽힘이 또한 심함을 알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중국中國이 어찌 서로 빠져서 오랑캐가 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당唐나라 황실皇室이 대대로 융적戎狄의 난亂이 있었으니, 어찌 태종太宗이 계도啓導한 것이 아니겠는가.”
임읍林邑注+[釋義]임읍林邑은 남만南蠻의 나라 이름이니, 한漢나라의 일남군日南郡 상림현象林縣 지역으로 교주交州 남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이
화주火珠注+[頭註]화주火珠는 크기가 계란만 하고 둥글고 희며 깨끗하니, 광채가 몇 자 떨어진 곳까지 환하게 비춘다. 모양은 수정水精처럼 생겼는데, 한낮에 쑥을 구슬 밑에 깔아 놓으면 쑥에 불이 붙는다. 를 바쳤는데,
유사有司가 그
표문表文의 내용이 공순하지 않다 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자,
상上이 말하기를 “전쟁을 좋아하는 자는 망하는 법이니,
수隋나라
양제煬帝와
힐리가한頡利可汗 같은 자들을 모두 귀와 눈으로 직접 보았다.
작은 나라는 승리한다 해도 무용武勇이 되지 못하거든 더구나 승리를 기필할 수 없음에랴.
언어言語 사이의 하찮은 일을 어찌 개의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 6월에 병졸을 징발하여 낙양궁洛陽宮을 수리해서 순행巡幸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급사중給事中 장현소張玄素가 글을 올려 간하기를 “낙양洛陽에는 아직 순행할 기약이 있지 않은데 미리 궁궐을 수리하게 하시니, 오늘날의 급선무가 아닙니다.
폐하께서 처음 낙양洛陽을 평정했을 적에 수隋나라의 웅장하고 사치한 궁실宮室들을 모두 부수도록 명령하셨는데, 이제 10년이 못 되어서 다시 영선營繕을 하게 하시니, 어찌하여 지난날에는 미워하시고 오늘날에는 그것을 본받는단 말입니까.
또 오늘날의 재력財力이 수隋나라 때와 비교하여 어떠합니까.
폐하께서 부상당한 사람들을 부역시켜서 망한 수隋나라의 병폐를 따르시니, 또 수隋나라 양제煬帝보다도 더 심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장현소張玄素에게 이르기를 “경卿은 내가 수隋나라 양제煬帝만 못하다고 하는데, 걸桀‧주紂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하니, 장현소張玄素가 대답하기를 “만약 이 부역을 그치지 않는다면 또한 그들과 똑같이 혼란함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감탄하기를 “내가 깊이 생각하지 못해서 마침내 이에 이르렀다.” 하고는 방현령房玄齡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짐朕은 낙양洛陽이 사방의 중앙이어서 조공朝貢하는 거리가 균등하다고 여겨, 마음에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궁궐을 경영하게 하였는데, 지금 장현소張玄素가 말한 것이 진실로 일리가 있으니, 즉시 부역을 중지하도록 하라.
후일에 혹 일이 있어
낙양洛陽에 이르게 되면 비록 노천에서 거처한다 하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다.” 하고, 인하여
장현소張玄素에게
채백綵帛 200필
注+[頭註]채綵는 회백繪帛(그림(채색)이 있는 비단)이다. 을 하사하였다.
위징魏徵이 이 말을 듣고 감탄하기를 “장공張公이 일을 논함에 황제의 마음을 바른 길로 돌아서게 하는 힘이 있으니, 어진 사람의 말이라 이를 만하다.” 하였다.
○ 상上이 방현령房玄齡과 소우蕭瑀에게 이르기를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어떠한 군주君主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
문제文帝는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조회에 임할 때마다 혹은 해가 기울 때까지 정사를 보기도 하였고, 5품 이상의 관원을 나오게 하여 앉아서
정사政事를 의논할 적에
위사衛士를 시켜 음식을 날라오게 하여 먹었으니,
注+[原註]손餐은 蘇昆反(손)이요, 또 千安反(찬)이다. 비록 성품이
인후仁厚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쓴 군주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공公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
문제文帝는 현명하지 못하면서 살피기를 좋아하였으니, 현명하지 못하면 비춤에 통달하지 못함이 있고 살피기를 좋아하면 남을 많이 의심하여 일을 모두 스스로 결단하고 신하들에게 맡기지 않게 된다.
천하天下는 지극히 넓고 군주는 하루에도 만기萬機가 있으니, 비록 다시 정신을 수고롭게 하고 형체를 괴롭게 하더라도 어찌 하나하나 다 이치에 맞게 할 수 있겠는가.
신하들이 이미 군주의 뜻을 알고는 오직 군주가 결단한 것만 취하고 이루어진 명령만을 받아서 비록 군주가 잘못하고 사리에 위배되는 일이 있더라도 간쟁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수隋나라가 두 대代 만에 멸망한 이유이다.
천하天下의 어진 자와 재주 있는 자를 가려
백관百官에 두어서
注+[通鑑要解]치寘는 음이 지(치)이니, 치置와 같다. 그들로 하여금
천하天下의 일을 생각하게 하고, 일이
재상宰相을 경유하여 편리함과 타당함을 자세히 살핀 뒤에
주달奏達하게 한다.
그리하여 공이 있으면 상을 내리고 죄가 있으면 처벌하니, 누가 감히 마음과 힘을 다하여 직무를 닦지 않겠는가.
어찌 천하天下가 다스려지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 인하여 여러 관사官司에 명하기를 “지금부터 조칙詔勅을 행함에 편리하지 않은 것이 있거든 모두 마땅히 논집論執하여 아뢰도록 하고, 아첨하고 순종하여 자신의 뜻을 다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서경書經》에 ‘
원수元首(군주)가 밝으면
고굉股肱(보필하는 신하)이 어질어서 여러가지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
원수元首가 자질구레
注+[頭註]총좌叢脞는 번다하고 자질구레한 것이다. 하면
고굉股肱이 태만해져서 만사가 폐해질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순舜임금과
고요皐陶가 노래를 이어받아 불러서
注+[頭註]갱賡(갱)은 뒤이음이다. 서로 경계한 내용이다.
군주는 사람을 아는 것을 밝음으로 삼고, 신하는 직책을 맡음을 어짊으로 삼는다.
군주가 사람을 알면 어진 자가 배운 바를 행할 수 있고, 신하가 직책을 맡으면 어질지 못한 자가 구차히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니, 이는 여러 가지 일이 잘 이루어지는 이유이다.
만약 군주가 신하의 직책을 행하면 자질구레하게 되고, 신하가 군주의 일을 맡지 않으면 태만하게 되니, 이는 온갖 일이 폐해지는 이유이다.
순舜임금 때를 당하여 우禹는 수토水土를 평정하고 후직后稷은 백곡百穀을 파종해서 수토水土와 백곡百穀의 일을 순舜임금이 직접 하지 않았고, 설契은 오교五敎(五倫의 가르침)를 펴고 고요皐陶는 오형五刑을 밝혀서 오교五敎와 오형五刑의 일을 순舜임금이 다스리지 않았고, 백이伯夷는 예禮를 맡고 기夔는 음악을 맡아서 예禮와 음악의 일을 순舜임금이 관여하지 않았고, 익益은 우虞(山澤을 맡은 관원)가 되고 수垂는 공공共工이 되어서 우虞와 공공共工의 일을 순舜임금이 알지 못하였다.
우禹는 일상一相(으뜸 재상)이 되어서 백관百官을 총괄하고 직稷으로부터 이하는 직책을 나누어 다스렸으니, 인군人君이란 천도天道가 위에서 운행함에 사시四時와 한서寒暑가 각각 그 차례를 맡으면 수고롭지 않고도 만물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
군주는 편안하지 않으면 안 되니 다스리는 바가 크고 맡은 바가 중요하기 때문이며, 신하는 수고롭지 않으면 안 되니 다스리는 바가 적고 맡은 직책이 상세하기 때문이다.
현명하지 못한 군주는 사람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살핌에 힘쓰고 의심이 많아서 자기 한 사람의 몸으로써 백관百官들이 하는 일을 대신하고자 하니, 이렇게 하면 비록 성聖스럽고 지혜롭더라도 시간과 힘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군주에게 책임을 돌려서 정사에 잘잘못이 있더라도 그 폐해를 책임지지 아니하여, 어진 자는 자신의 뜻을 행할 수 없고 녹봉만 지키는 선비들은 자신의 지위를 보존할 수 있으니, 이는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이다.
이 때문에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부지런했으나 공이 없었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편안하였으나 이룸이 있었으니, 문제文帝는 그 도道를 얻지 못하였고 태종太宗은 그 도道를 얻었기 때문이다.”
상上이 《명당침구서明堂鍼灸書》를 읽을 적에 여기에 이르기를 “사람은 오장五臟의 계통이 모두 등에 붙어 있다.”라고 하니, 조명詔命을 내리기를 “지금부터는 죄수들의 등을 매질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太宗은 진실로 백성을 기르는 데에 뜻이 있는 자였다.
그러므로 귀와 눈으로 접할 때에 그 마음이 반드시 백성에게 있었으니, 죄수의 등을 매질하는 것을 금지한 일은 또한 그 하는 바를 잘 미루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옛날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은 일의 경중輕重을 헤아려서 결단하고 형법서刑法書(형벌 규정을 적어 놓은 책)를 쓰지 않았으니 이는 백성들이 다투는 마음이 있을까 염려해서이고, 후세에는 형법서刑法書를 만들어서 행여 구비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니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피할 바를 알게 하고자 해서이다.
그 법을 만든 것은 비록 다르지만 마음씀은 똑같으니,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지 않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덕德으로써 인도하고 예禮로써 가지런히 하면 백성들로 하여금 선善으로 옮겨 가고 죄를 멀리하면서 자신도 알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당唐나라가 처음 일어났을 때에 고조高祖가 경사京師에 들어가서 법을 간략히 하여 12조항을 만들었고, 선양禪讓을 받게 되자 유문정劉文靜 등에게 명하여 율령律令을 손익損益(加減)하게 하였으며, 무덕武德 2년(619)에는 신법新法 53개 조항을 반포하였다.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방현령房玄齡 등에게 명령하여 다시 옛 율령을 정하게 하자, 방현령房玄齡 등이 이르기를
‘육형肉刑은 이미 폐지되었고 이제 태형笞刑‧장형杖刑‧도형徒刑‧유형流刑‧사형死刑을 다섯 가지 형벌로 삼았으나 또다시 발을 벤다면 이는 여섯 가지 형벌입니다.’ 하니, 이에 발을 베는 법을 제거하였다.
태종太宗이 일찍이 《명당침구도明堂針灸圖》에 ‘사람의 오장五臟이 모두 등과 가까이 있어서 침구針灸할 때 제자리를 놓치면 그 폐해가 죽음을 초래한다.’는 내용을 보고는 탄식하여 말하기를
‘채찍질은 다섯 가지 형벌 중에 가벼운 것이고 죽음은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바이니, 어찌 지극히 가벼운 형벌을 범하여 혹 죽음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죄인의 등을 매질하지 말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장온고張蘊古가 죽은 뒤로부터 법관法官들이 실출失出을 경계하고, 실입失入이 있는 경우에는 또 그 법관에게 죄를 가하지 않으니, 이로부터 옥리獄吏들의 법이 점점 치밀해졌다.
황제가 이것을 대리경大理卿 유덕위劉德威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법률에 의하면 실입失入은 3등을 감하고, 실출失出은 5등을 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실입失入은 죄가 없고 실출失出은 큰 죄가 되기 때문에 옥리獄吏들이 다 문법文法(법조문)을 까다롭게 따지는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두려워하여(깜짝 놀라) 마침내 실출失出과 실입失入을 모두 법률대로 처벌하도록 명하니, 이로부터 옥리獄吏들이 또한 공평함을 유지하게 되었다.
태종太宗은 영특함과 용맹함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나 타고난 자질이 인자하고 관대하였다.
처음 즉위했을 때에 위엄과 형벌로써 천하를 엄숙히 할 것을 권하는 자가 있었는데, 위징魏徵이 이를 불가하다 하고, 인하여 상上을 위해 ‘왕정王政은 인자함과 은혜에 근본을 두어서 백성을 사랑하고 풍속을 후하게 해야 하는 뜻’을 말하니, 태종太宗이 흔연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태종太宗이 마침내 너그러움과 인자함으로써 천하를 다스리고 형법에 더욱 신중하였다.”
여러 재상들이
상上을 모시고 잔치할 적에
상上이
왕규王珪에게 이르기를 “
경卿은 식견과
조감照鑑이 정통하고 여기에 담론까지 잘하니,
방현령房玄齡 이하의 재상들을
경卿이 모두
품평品評注+[頭註]품조品藻는 품급品級(人品의 등급)과 문질文質을 정하는 것을 마치 의상衣裳(官服)에 마름‧불‧보黼‧불黻의 무늬를 그리거나 수놓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을 가하라.
또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 몇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이 어떻다고 여기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부지런히 국사를 봉행하여 아는 것을 하지 않음이 없음은 신이 방현령房玄齡만 못하고,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비하여 나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는 것은 신臣이 이정李靖만 못하고,
아뢰기를 자세하고 분명히 하여 출납을 공정하게 함은 신이 온언박溫彦博만 못하고,
번거로운 것을 처리하고 어려운 일을 다스려서
注+[頭註]극劇은 어려움이다. 모든 사무를 다 거행함은 신이
대주戴冑만 못하고,
자신이 섬기는 군주가 요堯‧순舜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간쟁을 자신의 임무로 삼음은 신이 위징魏徵만 못합니다.
그러나
탁류濁流를 쳐 내고
注+[頭註]격激은 물이 막힌 것이니, 《맹자孟子》 〈고자告子 상上〉에 “물을 격激하여 흘러가게 하면 산山에 있게 할 수 있다.” 하였다. 청류淸流를 옹호하며
악惡을 미워하고
선善을 좋아함에 있어서는 신이 이 몇 사람에 비하여 또한 약간 낫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고 사람들 또한 확실한 의논
注+[釋義]확確은 극각반克角反(각, 확)이니, 확론確論은 의론이 확고하여 깨뜨릴 수 없음을 말한다.이라고 탄복하였다.
○ 상上이 처음 즉위했을 적에 일찍이 여러 신하들과 교화敎化를 언급하였는데, 상上이 말하기를 “지금 큰 난리의 뒤를 이었으니 이 백성들이 쉽게 교화되지 않을까 두렵다”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편안한 백성은 교만하고 방탕하니 교만하고 방탕하면 교화시키기 어려우며, 난리를 겪은 백성들은 근심하고 괴로워하니 근심하고 괴로워하면 교화시키기가 쉽습니다.
비유하면 굶주린 자에게는 음식 되기가 쉽고 목마른 자에게는 음료 되기가 쉬운 것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그 말을 깊이 옳게 여겼으나
봉덕이封德彛가 비난하기를 “
삼대三代 이후로 사람들이 점점 경박해지고 속이게 되었습니다.
注+[原註]교澆는 堅堯反(교)이고 와訛는 五禾反(와)이니, 요와澆訛는 잘못된 것이다.
이 때문에 진秦나라는 법률에 맡겼고 한漢나라는 패도霸道를 섞어 썼으니, 이는 교화시키고자 하였으나 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찌 할 수 있는데도 하고자 하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위징魏徵은 서생書生이라서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니, 만약 그의 헛된 의론을 믿으신다면 반드시 국가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하였다.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오제五帝와 삼왕三王이 백성을 바꾸지 않고 교화시켜서 오제五帝의 도道를 행하면 오제五帝의 백성이 되었고 삼왕三王의 도道를 행하면 삼왕三王의 백성이 되었으니, 다만 행하기를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옛날에 황제黃帝는 치우蚩尤를 정벌하고 전욱顓頊은 구려九黎를 토벌하고 탕湯임금은 걸桀을 추방하고 무왕武王은 주紂를 정벌하여 모두 몸소 태평성대를 이룩하였으니, 어찌 큰 난리의 뒤를 이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옛사람은 순박했었는데 점점 경박해지고 속이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모두 변화하여 귀신과 도깨비
注+[頭註]매魅는 오래된 물건의 정령이다. 사람의 얼굴에 귀신의 몸이고 발이 네 개이다. 사람을 홀리기를 좋아하니, 산림의 이상한 기운이 낳은 것이다. 가 되었어야 할 것이니,
군주君主가 어떻게 이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上이 끝내
위징魏徵의 말을 따랐다.
즉위한 원년元年에는 관중關中 지방이 흉년이 들어서 쌀 한 말의 값이 비단 한 필이었고, 2년年에는 천하天下에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었고, 3년年에는 큰 홍수가 있었으나 상上이 부지런히 위무하니 백성들이 비록 동쪽과 서쪽으로 가서 먹었으나 일찍이 한탄하고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해에 천하에 크게 풍년이 들어서
注+[頭註]임稔은 익음이다. 뿔뿔이 흩어졌던 자들이 모두
향리鄕里로 돌아오고 쌀 한 말의 값이 3, 4
전錢에 불과하였으며, 일 년 동안
사형死刑을 판결한 것이 겨우 29명이었다.
동쪽으로는 동해東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오령五嶺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깥문을 닫지 않았으며, 여행자들이 양식을 휴대하지 않고 도로에서 공급받았다.
황제皇帝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는 위징魏徵이 나에게 인의仁義를 행하도록 권하여 이미 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봉덕이封德彛가 이미 죽어 그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애석하다.” 하였다.
- 《당서唐書 위징전魏徵傳》과 《위정공간록魏鄭公諫錄》에 나옴 -
“
봉륜封倫(封德彛)
注+[頭註]윤倫은 이름이고 자字는 덕이德彛이다. 이 말하기를 ‘
삼대三代 이후로 사람들이 점점 경박해지고 속이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이는 크게 잘못한 말이 아닌데,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만일 과연 경박해지고 속여서 교화시키기 어렵다면 마땅히 귀신과 도깨비가 되었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이다.
서계書契(文字)가 있은 이후로 관찰해보면 삼대三代 시대는 진실로 당唐‧우虞 시대에 미치지 못하였고, 주周나라의 문文이 우세함은 또 우虞‧하夏의 질박함만 못하였다.
양한兩漢의 풍속이 어찌 감히 주周나라를 바라볼 수 있겠으며, 당唐나라의 풍속이 또 어찌 한漢나라에 미칠 수 있겠는가.
만약 백성들이 항상 순박해서 경박하고 속임이 없다고 말한다면
결승結繩의 정치가
약자約劑(文券)
注+[附註]《주례周禮》 〈지관地官 사시司市〉에 “대시大市에는 질質을 쓰고 소시小市에는 자劑를 쓴다.” 하였는데, 주注에 “질質과 자劑는 문권文券을 만들어 보관하는 것이다. 두 문서가 한 통이니 똑같이 써서 나눈다.” 하였고, 《주례周禮》 〈소재小宰〉 주注에 “긴 것을 질質이라 하고 짧은 것을 자劑라 한다.” 하였다. 를 바꿀 수 있고,
토고土鼓(흙으로 빚은 북)의 음악이
사죽絲竹(관현악)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