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에 文武官이 復請封禪한대 上曰 卿輩皆以封禪爲帝王盛事나 朕意不然하니
若天下乂安하고 家給人足이면 雖不封禪이나 庸何傷乎아
昔에 秦始皇은 封禪하고 而漢文帝는 不封禪하니 後世에 豈以文帝之賢이 不及始皇耶아
且事天
인댄 掃地而祭
注+[頭註]記郊特牲曰 郊之祭也는 大報天也니 兆於南郊는 就陽位也요 掃地而祭는 於其質也라하니라 니 何必登泰山之巓
하야 封數尺之土然後
에 可以展其誠敬乎
아
群臣이 猶請之不已어늘 上亦欲從之러니 魏徵이 獨以爲不可라
上曰 公不欲朕封禪者는 以功未高耶아 曰 高矣니이다
陛下雖有此六者
나 然承隋末大亂之後
하야 戶口未復
하고 倉廩尙虛
어늘 而車駕東巡
이면 其
供頓注+[頭註]供은 具也요 頓은 宿食所라 勞費를 未易任也
니이다
且陛下封禪
이면 則萬國咸集
하고 遠夷君長
이 皆當扈從
注+[通鑑要解]扈衛侍從也라 하리니
自今伊, 洛以東
으로 至于海, 岱
히 煙火尙希하야 注+[頭註]萑은 葦屬이라 莽는 音姆니 宿草也니 謂冬生不凋者요 又草深茂曰莽라 極目하니 此
는 乃引戎狄入腹中
하야 示之以虛弱也
니이다
況賞賚不貲
注+[頭註]貲는 量也라 라도 未厭
注+[頭註]厭은 平聲이니 足也라遠人之望
이요 給復
注+[頭註]復은 除也니 除免徭役也요 給은 與也니 謂與免徭役也라連年
이라도 不賞百姓之勞
하야 崇虛名而受實害
하리니 陛下將焉用之
리잇고
會河南北數州
에 大水
하야 事遂寢
注+[通鑑要解]寢은 息也라하다
古者天子巡守(狩)
에 至于方嶽
하야 必告祭柴望
注+[原註]燔柴祭天은 告至也라 爾雅曰 祭天曰燔柴라하니 謂天高不可達이라 故로 燔柴以祭之하야 庶高煙上通也라 馬氏曰 祭時에 積柴하고 加牲其上而燔之라하니 先登于位하야 告于天也라 書舜典에 望于山川이라하니 註에 名山大川이라하니라 五嶽四瀆之屬을 不必至其處하고 皆一時遙望其方而祭之라하니 所以尊天而懷柔
注+[頭註]懷는 來요 柔는 安也라百神也
라
後世學禮者 失其傳하고 而諸儒之諂諛者 爲說以希世主하야 謂之封禪이라하니 實自秦始요 古無有也라
太宗方明
하고 朝多賢臣
이로되 而佞者猶倡其議
하고 獨魏徵
이 以爲時未可
라하나 而亦不以其事爲非也
하야 이라
高宗, 明皇이 遂踵而行之하야 終唐之世토록 唯柳宗元이 以封禪爲非하니 嗚呼라
上
이 嘗罷朝
에 怒曰 會
須注+[頭註]會는 要也라 殺此田舍翁이라하야늘
后
注+[頭註]長孫無忌弟也라 問爲誰
잇고 上曰 魏徵
이 每廷辱我
로라
后退하야 具朝服하고 立于庭이어늘 上이 驚하야 問其故한대
○ 宴三品以上於丹霄殿할새 上이 從容言曰 中外乂安은 皆公卿之力이나
然隋煬帝
는 威加夷, 夏
하고 頡利
는 跨有北荒
하고 統
護
注+[頭註]回紇太子之號也라 亦以爲突厥大臣之稱也니 統은 其名也라는 雄據西域
이러니 今皆覆亡
하니 此乃朕與公等所親見
이라
○ 上
이 宴近臣於丹霄殿
할새 長孫無忌曰 王珪, 魏徵
이 昔爲仇讐
注+[通鑑要解]謂其事隱太子할새 勸之圖帝也라하니 不謂今日得同此宴
이니이다
然이나 徵每諫에 我不從하고 我與之言에 輒不應은 何也오 魏徵對曰 臣以事爲不可라 故로 諫이니 若陛下不從而臣應之면 則事遂施行이라
上曰 且應而復諫이면 庸何傷이리오 對曰 昔에 舜戒群臣호되 爾無面從하고 退有後言이라하시니
臣
이 心知其非
하고 而口應陛下
면 乃面從也
니 豈稷,
事舜之意耶
잇가
上大笑曰 人言魏徵擧止疎慢
이라호되 我視之
에 更覺媚注+[頭註]娬亦媚也니 亦作嫵라 娬媚는 悅也라 는 正爲此耳
로다
徵起拜謝曰 陛下開臣使言이라 故로 臣이 得盡其愚하니 若陛下拒而不受하시면 臣何敢數犯顔色乎잇가
○ 秘書少監虞世南이 上聖德論이어늘 上이 賜手詔하야 稱호되 卿論太高라
然이나 卿이 適覩其始하고 未知其終하니 若朕이 能愼終如始면 則此論을 可傳이어니와 如或不然이면 恐徒使後世笑卿也하노라
○ 九月己酉
에 幸慶善宮
하니 上生時故宅也
注+[頭註]宮在武功縣하니 太宗生於武功之別館이라 라
因與貴臣宴
하고 賦詩
한대 起居郞呂才 被之管絃
하야 命曰
功成慶善樂注+[釋義]王氏曰 以童兒(八)[六]十四人으로 冠하고 紫袴褶長袖로 漆髻屣履而舞하니 進蹈安徐하야 以象文德이라 後更號九功舞하니 取尙書之義라 이라하고
使童子
로 八佾
注+[釋義]行列曰佾이니 一列八人이라 天子八佾이니 八八六十四人이요 諸侯六佾이요 大夫四佾이요 士二佾이니 有命之舞也라 爲九功之舞
하야 大宴會
할새 與破陳舞
로 皆奏於庭
하니라
同州刺史尉遲敬德이 預宴이러니 有班在其上者어늘 敬德怒曰 汝何功이완대 在我上고
任城王道宗
注+[頭註]高祖之祖太祖虎之子也라 後에 改封江夏王하니라 이 次其下
라가 諭解之
한대 敬德
이 拳歐
注+[原註]擊也라 道宗
하야 目幾眇
라
上不
注+[原註]悅也라 而罷
하고 謂敬德曰 朕見漢高祖誅滅功臣
하고 意常尤之라
故로 欲與卿等으로 共保富貴하야 令子孫不絶이로라
然
이나 卿居官
에 數犯法
하니 乃知韓, 彭葅醢
注+[釋義]韓信, 彭越을 漢高帝誅之라 故로 云葅醢也라 切之四寸爲葅요 莝肉爲醢라 非高祖之罪也
라
勉自修飭하야 無貽後悔케하라 敬德
이 由是
로 始懼而自戢
注+[頭註]斂藏也라 이러라
帝謂叔達曰 卿
이 武德
注+[通鑑要解]高祖年號이니 武德九年中에 建成, 元吉謀害世民事라 中
에 有
言
注+[原註]讜은 善言也라 이라 故
로 以此官相報
로라
對曰 臣見隋室이 父子相殘하야 以取亂亡하니 當日之言은 非爲陛下요 乃社稷之計耳니이다
帝與侍臣으로 論安危之本할새 中書令溫彦博曰 伏願陛下常如貞觀初하시면 則善矣리이다
魏徵曰 貞觀之初
엔 陛下
志在節儉하고 求諫不倦이러시니 比來
에 營繕微多
하고 諫者頗有忤旨
注+[原註]忤는 逆也라하니 此其所以異耳
니이다
○ 上謂侍臣曰 朕이 比來決事에 或不能皆如律令이어늘 公輩以爲事小라하야 不復執奏하니
昔
에 關龍
注+[頭註]關은 姓也니 夏之忠臣이라 이 忠諫而死
하니 朕每痛之
하노라
公輩는 常宜爲朕하야 思煬帝之亡하고 朕은 常爲公輩하야 念關龍逄之死면 何患君臣不相保乎아
○ 上이 謂魏徵曰 爲官擇人을 不可造次니 用一君子면 則君子皆至요 用一小人이면 則小人競進矣니라
對曰 然이나 天下未定이면 則專取其才하고 不考其行하며 喪亂旣平이면 則非才行兼備면 不可用也니이다
太宗이 以治亂在庶官이라하야 欲進君子, 退小人하니 此王者之言也니
夫才는 有君子之才하고 有小人之才하니 古之所謂才者는 君子之才也요 後世之所謂才者는 小人之才也라
高陽氏有子八人
에 天下以爲才
하니 其所以爲才者
는 曰忠肅恭懿宣慈
注+[頭註]宣은 通明也라 惠和
요 周公制禮作樂
에 孔子以爲才
하시니 然則古之所謂才者
는 兼德行而言也
라
後世之所謂才者
는 辯給
注+[頭註]給은 捷也라 以禦人
하고 詭詐以用兵
하며 僻邪險陂
注+[頭註]不正也라 하야 趨利就事
라
是以
로 天下多亂
은 職
注+[頭註]主也라 斯人之用於世也
일새라
在易師之上六曰 開國承家에 小人勿用이라한대 象曰 小人勿用은 必亂邦也라하고 旣濟曰 高宗伐鬼方하야 三年克之하니 小人勿用이라하니라
王者創業垂統
에 敷
注+[頭註]廣也라 求哲人
하야 以遺後嗣
라 故能長世也
니 豈其以天下未定
이라하야 而可專用小人之才歟
아
退之라도 猶懼其或進也니 豈可先用而後廢하고 乃取才行兼備之人乎아
정월正月에 문무文武의 관원들이 다시 봉선封禪할 것을 청請하자, 상上이 이르기를 “경卿들은 모두 봉선封禪을 제왕帝王의 거룩한 일이라 하나 짐朕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만약 천하天下가 편안히 다스려지며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마다 풍족하다면 비록 봉선封禪을 하지 않는다 한들 어찌 나쁠 것이 있겠는가.
옛날 진秦나라 시황始皇은 봉선封禪하였고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봉선封禪하지 않았으나 후세後世에 어찌 문제文帝의 어짊이 시황始皇만 못하다고 여기겠는가.
또 하늘을 섬기려면 땅을 쓸고 제사하면 되니,
注+[頭註]《예기禮記》 〈교특생郊特牲〉에 이르기를 “교郊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늘에 크게 보답하는 것이니, 남교南郊에서 단을 만들고 제사함은 양陽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요, 땅을 쓸고 제사함은 그 질박함을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하필
태산泰山의 정상에 올라서 몇 자가 되도록 흙을 높이 쌓은 뒤에야 정성과 공경을 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여전히 간청하여 마지않자 상上도 이를 따르려 하였는데, 위징魏徵이 홀로 불가하다고 하였다.
상上이 묻기를 “공公이 짐朕의 봉선封禪을 바라지 않는 것은 공功이 아직 높지 않아서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높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덕德이 아직 두텁지 않아서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두텁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중국中國이 아직 편안하지 않아서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편안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사방의 오랑캐가 아직 복종하지 않아서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복종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농사가 풍년들지 않아서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풍년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부서符瑞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나왔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그렇다면 어째서 봉선封禪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는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이 여섯 가지를 간직하고 계시지만, 크게 혼란한
수隋나라의 뒤를 이어서
호구戶口가 아직 회복되지 못하였고
창름倉廩이 아직 비어 있는데
어가御駕가 동쪽 지방을
순행巡幸하신다면 숙식을 구비할
注+[頭註]공供은 구비함이요, 돈頓은 숙식하는 곳이다. 인력과 비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 폐하께서
봉선封禪을 하시게 되면
만국萬國이 다 모이고 먼 오랑캐의
군장君長들이 모두
호종扈從할 것입니다.
注+[通鑑要解]호종扈從은 호위하며 모시고 따라가는 것이다.
지금
이수伊水와
낙수洛水이동以東으로부터
동해東海와
대산岱山(泰山)에 이르기까지는 불을 지펴 밥을 해 먹는 집이 아직 드물어서 시야 가득히 갈대가 자라고 풀이 우거져 있으니,
注+[頭註]추萑은 갈대 종류이고, 망莽는 음이 무이니 두해살이풀이다. 겨울에 살아있고 시들지 않는 것을 이르고, 또 풀이 매우 우거진 것을 망莽라 한다. 이는 오랑캐를 인도하여 뱃속까지 들어오게 해서 허약함을 저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더구나
상賞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주어도
注+[頭註]자貲는 헤아림이다. 멀리서 온 사람들의 바람을 만족시킬 수 없고,
注+[頭註]염厭은 평성平聲이니, 만족함이다. 부역을 수년간 면제해 주어도
注+[頭註]복復은 제함이니 요역徭役을 면제하는 것이요, 급給은 줌이니 요역徭役을 면제해줌을 이른다. 백성들의 수고를 보상할 수 없어, 헛된 명성만 높이고 실질적인 손해를 입게 될 것이니,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이것을 따르려 하십니까.”
마침
하남河南과
하북河北 몇 고을에 큰 홍수가 나서
봉선封禪하는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다.
注+[通鑑要解]침寢은 중지함이다.
“옛날 천자가
순수巡狩할 적에
방악方嶽에 이르러 반드시 제사를 올리고 나무를 태워 하늘에
시柴제사를 지내고
산천山川을 멀리서 바라보며
망望제사를
注+[原註]섶을 태워 하늘에 제사함은 이곳에 이르렀음을 아뢰는 것이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하늘에 제사하는 것을 번시燔柴라 한다.” 하였으니, 하늘이 높아 도달할 수가 없으므로 섶을 태워 제사하여 높이 피어오르는 연기가 위로 하늘에 도달하기를 바람을 이른다. 마융馬融이 말하기를 “제사할 때에 섶을 쌓아 놓고 그 위에 희생을 올려 굽는다.” 하였으니, 먼저 자리에 올라가 하늘에 고하는 것이다.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산천에 망望제사를 지낸다.” 하였는데, 주註에 “명산대천名山大川이다.” 하였다. 오악五嶽과 사독四瀆 등은 굳이 그곳에 가지 않고 그 방면을 멀리서 바라보고 모두 한꺼번에 제사한다. 지냈으니, 이는 하늘을 높이고 온갖
신神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다.
注+[頭註]회懷는 오게 하는 것이요, 유柔는 편안히 하는 것이다.
후세에 예禮를 배우는 자가 그 전해옴을 잃고 여러 아첨하는 유학자들이 말을 지어내어 세상의 군주의 비위를 맞추어서 이를 봉선封禪이라 하였으니, 실로 진秦나라 때부터 시작되었고 옛날에는 없던 것이다.
인군人君이 삼대三代를 본받지 않고 진秦나라를 본받았으니, 또한 이미 잘못되었다.
태종太宗은 대단히 현명하였고 조정에 어진 신하가 많았으나 아첨하는 자들이 오히려 봉선封禪하자는 의논을 제창하였고, 유독 위징魏徵만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하였으나 또한 이 일을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아서 그 뒤에 이 예禮를 의논할 때에 위징魏徵 또한 참여하였다.
고종高宗과 명황明皇(玄宗)이 마침내 이를 뒤따라 행해서 당唐나라가 끝날 때까지 오직 유종원柳宗元만이 봉선封禪을 그르다고 하였으니, 아!
세속의 미혹됨을 이루 바로잡을 수가 있겠는가.”
상上이 일찍이 조회를 파하고 노하여 이르기를 “반드시
注+[頭註]회會는 반드시이다. 이 시골 영감을 죽이고 말겠다.” 하였다.
장손황후長孫皇后가
注+[頭註]장손황후長孫皇后는 장손무기長孫無忌의 동생이다. “누구 말입니까?” 하고 묻자,
상上이 이르기를 “
위징魏徵이 매번 조정에서 나를 욕보인다.” 하였다.
황후가 물러가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뜰에 서 있자, 상上이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다.
황후가 대답하기를 “첩이 들으니, ‘군주가 현명하면 신하가 정직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위징魏徵이 직언하는 것은 폐하가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첩妾이 감히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上이 마침내 기뻐하였다.
3품 이상의 관원에게 단소전丹霄殿에서 연회宴會를 베풀 적에 상上이 조용히 이르기를 “중외中外가 다스려지고 편안함은 다 공경公卿의 덕분이다.
그러나
수隋나라
양제煬帝는 위엄이 오랑캐와
중하中夏에 진동하였고
힐리가한頡利可汗은 먼 북쪽 지방을 점령하였으며
통섭호가한統葉護可汗은
注+[頭註]섭호葉護는 회흘回紇(위구르) 태자太子의 칭호이다. 또 돌궐突厥대신大臣의 칭호라 하기도 하니, 통統은 그 이름이다. 서역에 웅거하였는데, 지금은 모두 전복되어 멸망하였으니, 이는 바로
짐朕이
공公들과 함께 직접 눈으로 본 바이다.
상上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단소전丹霄殿에서 연회를 베풀 적에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기를 “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은 옛날 원수였으니,
注+[通鑑要解]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이 은태자隱太子(李建成)를 섬길 적에 태종太宗을 도모할 것을 권했던 일을 이른다. 오늘 이 연회를 함께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위징魏徵과 왕규王珪는 자신이 섬기던 주군主君에게 마음을 다하였기 때문에 내가 등용한 것이다.
그런데 위징魏徵이 간할 때마다 내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내가 그와 더불어 말할 때마다 나의 말에 호응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에 그 일이 불가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간하는 것이니, 만약 폐하께서 간언을 따라주지 않으시는데 신이 그 말에 호응한다면 그 일이 마침내 시행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호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우선 호응하고 나중에 다시 간한다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옛날에 순舜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너희들은 면전에서 복종하는 체하고 물러가서 뒷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였습니다.
신이 마음속으로 그릇됨을 알면서 입으로 폐하에게 호응한다면 이것이 바로 면전에서 복종하는 체하는 것이니, 어찌 후직后稷과 설契이 순舜임금을 섬긴 뜻이겠습니까.” 하였다.
상上이 크게 웃으며 이르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
위징魏徵의 행동거지가 설면하고 거만하다’고 하지만 내가 그를 보고는 더욱 기쁘다고 여기는 것은
注+[頭註]무娬 또한 미媚의 뜻이니 무嫵로도 쓴다. 무미娬媚는 기뻐함이다. 바로 이 때문이다.” 하였다.
위징魏徵이 일어나 절하고 사례하여 아뢰기를 “폐하께서 신을 개도開導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셨기에 신이 어리석은 충심忠心을 다 바칠 수 있었던 것이니, 만약 폐하께서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으셨다면 신이 어찌 감히 폐하의 안색을 자주 범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비서소감秘書少監우세남虞世南이 ‘성덕론聖德論’을 올리자, 상上이 손수 쓴 조서詔書를 내려 칭하기를 “경卿의 의론이 너무 높다.
짐朕이 어찌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비견될 수 있겠는가.
다만 근세의 제왕帝王들에 견주어 조금 나을 뿐이다.
그러나 경卿은 다만 시작만 보고 아직 그 종말은 보지 못하였으니, 만약 짐朕이 끝을 삼가 시작과 같이 한다면 이 의론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단지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경卿을 비웃게 할까 두렵다.” 하였다.
9월
기유일己酉日(29일)에
상上이
경선궁慶善宮에 행차하니,
경선궁慶善宮은
상上이 태어난 집이다.
注+[頭註]경선궁慶善宮은 섬서성陝西省무공현武功縣에 있으니, 태종太宗은 무공현武功縣의 별관別館에서 태어났다.
상上이 인하여
귀신貴臣들과 연회하고 시를 지었는데,
기거랑起居郎여재呂才가 이것을
관현악管絃樂에 실어 ‘
공성경선악功成慶善樂’이라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동자童子 64명에게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자주색 바지와 긴 소매 차림에 검은 머리를 틀어올리고 짚신을 끌고 춤을 추게 하니, 전진하고 뛰는 것이 조용하고 느려서 문덕文德을 상징하였다. 공성경선악功成慶善樂은 뒤에 이름을 고쳐 구공무九功舞라고 하였으니, 《상서尙書》 〈대우모大禹謨〉의 ‘아홉 가지 공이 펴졌다.[九功惟敍]’는 뜻을 취한 것이다.” 명명하고는
동자童子들로 하여금
팔일八佾로
注+[釋義]항렬을 일佾이라고 하니, 1열은 8명이다. 천자天子는 8일佾이니 8명씩 8일佾이어서 64명이요, 제후諸侯는 6일佾이요, 대부大夫는 4일佾이요, 사士는 2일佾이니, 명수命數(관원의 품계)에 따른 춤이다. 구공무九功舞를 추게 해서 크게 연회할 적에 ‘
파진악破陳樂’과 함께 모두 뜰에서 연주하였다.
동주자사同州刺史위지경덕尉遲敬德이 연회에 참여하였는데, 반열班列이 그의 위에 있는 자가 있자, 위지경덕尉遲敬德이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슨 공功이 있기에 내 위에 있는가.” 하였다.
임성왕任城王이도종李道宗이
注+[頭註]도종道宗은 고조高祖의 조부祖父인 태조太祖이호李虎의 아들이다. 뒤에 강하왕江夏王에 개봉改封되었다. 그 아래에 있다가 알아듣도록 해명하였는데,
위지경덕尉遲敬德이
이도종李道宗을 주먹으로 쳐서
注+[原註]구歐는 때림이다. 눈이 거의 애꾸가 될 뻔하였다.
상上이 흥이 깨져
注+[原註]역懌은 기뻐함이다. 잔치를 파하고
위지경덕尉遲敬德에게 이르기를 “
짐朕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공신功臣들을 죽이고 멸망시킨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항상 이를 허물하였다.
그러므로 〈이를 경계하여〉卿들과 함께 부귀를 보전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경卿이 관직에 있으면서 자주
법法을 범하니, 나는 이제서야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이 김치 담가지고 젓 담가진 것이
注+[釋義]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한漢나라 고제高帝가 죽였다. 그러므로 김치와 젓갈을 담았다고 이른 것이다. 4촌寸 길이로 자른 것을 저葅라 하고 고기를 잘게 썬 것을 해醢라 한다.고조高祖의 죄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국가國家의 기강紀綱은 오직 상賞과 벌罰에 있으니, 분수에 맞지 않은 은혜는 자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힘써 자신을 닦고 삼가서 후회를 남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니,
위지경덕尉遲敬德이 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두려워하고 스스로 단속하였다.
注+[頭註]집戢은 거두어 감추는 것이다.
- 《신당서新唐書울지경덕전尉遲敬德傳》에 나옴 -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진숙달陳叔達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삼았다.
황제가
진숙달陳叔達에게 이르기를 “
경卿이
무덕武德 연간에
注+[通鑑要解]무덕武德은 고조高祖의 연호이니, 무덕武德 9년年(626)에 이건성李建成과 이원길李元吉이 이세민李世民(太宗)을 해치려던 일을 가리킨다. 충직한 말이
注+[原註]당讜은 좋은 말이다. 있었기 때문에 이 관직으로 보답하는 것이다.” 하였다.
진숙달陳叔達이 대답하기를 “신이 보건대 수隋나라 황실은 부자간에 서로 해쳐서 혼란과 멸망을 취하였으니, 당시에 올렸던 말씀은 폐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직社稷을 위한 계책일 뿐이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시신侍臣들과 안위安危의 근본을 논할 적에 중서령中書令온언박溫彦博이 아뢰기를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께서 항상 정관貞觀 초년과 같이 하신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르기를 “짐朕이 근래에 정사에 태만하였는가?” 하니,
위징魏徵이 아뢰기를 “
정관貞觀 초년에는 폐하께서 절약하고 검소함에 뜻이 있고
간언諫言을 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셨는데, 근래에는
영선營繕(궁궐을 새로 짓고 수리함)하는 일이 약간 많아지고 간언하는 자들이 자못 상의 뜻에 거슬리니,
注+[原註]오忤는 거슬림이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이러한 일이 있었다.” 하였다.
상上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짐朕이 요사이 일을 결단할 적에 간혹 모두 율령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도 공公들은 작은 일이라 하여 다시 논집論執하여 아뢰지 않는다.
일은 작은 일로부터 큰 일이 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이것이 바로 위태롭고 멸망하게 되는 단서이다.
옛날에
관룡방關龍逄이
注+[頭註]관關은 성姓이니, 하夏나라 걸왕桀王의 충신이다. 충성으로 간하다가 죽었으니,
짐朕은 매양 이를 애통하게 여기노라.
양제煬帝는 교만하고 포악하여 망하였으니 공公들이 직접 본 바이다.
공公들은 항상 짐朕을 위하여 양제煬帝가 멸망한 것을 생각하고, 짐朕은 항상 공公들을 위하여 관룡방關龍逄이 죽은 것을 생각한다면, 군주와 신하가 서로 보존하지 못함을 어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상上이 위징魏徵에게 이르기를 “관직官職을 위하여 인재를 선택하는 것을 대충대충 할 수 없으니, 한 군자君子를 등용하면 군자君子가 다 이르고 한 소인小人을 등용하면 소인小人이 다투어 나오기 때문이다.”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그렇기는 하나 천하가 아직 안정되기 전에는 오로지 그의 재능만 취하고 그의 행실은 상고하지 않으며, 상란喪亂이 이미 평정된 뒤에는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자가 아니면 쓸 수 없습니다.” 하였다.
“태종太宗은 국가의 치란治亂이 백관百官에 달려있다 하여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물리치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왕자王者의 말이다.
그런데 위징魏徵의 이른바 재주와 행실이라는 것은 또한 괴이하지 않은가.
재주는 군자의 재주가 있고 소인의 재주가 있으니, 옛날의 이른바 재주라는 것은 군자의 재주이고, 후세의 이른바 재주라는 것은 소인의 재주이다.
고양씨高陽氏는 아들 8명이 있었는데 천하 사람들이 이들을 인재라고 여겼으니 인재라고 여긴 이유는 충성스럽고 엄숙하고 공손하고 아름답고 밝고 인자하고
注+[頭註]선宣은 통명通明함이다. 은혜롭고 온화하기 때문이었으며,
주공周公이
예禮를 정하고 음악을 만들자
공자孔子가 인재라고 하셨으니, 그렇다면 옛날의 이른바 재주라는 것은 덕과 행실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후세의 이른바 재주는
구변口辯으로
注+[頭註]급給은 민첩함이다. 남의 말을 막고 속임수로 군대를 동원하며, 편벽되고 간사하고 음험하고
注+[頭註]험피險陂는 바르지 않은 것이다. 이익을 쫓아서 일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천하가 혼란할 때가 많은 것은
注+[頭註]직職은 주장함이다. 이들이 세상에 쓰여지기 때문이다.
《주역周易》 사괘師卦상육효사上六爻辭에 ‘제후諸侯를 봉하고 경대부卿大夫를 삼을 적에 소인을 쓰지 말아야 한다.’ 하였는데, 〈상전象傳〉에 ‘소인을 쓰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나라를 어지럽히기 때문이다.’ 하였고, 기제괘旣濟卦구삼효사九三爻辭에 ‘고종高宗이 귀방鬼方을 정벌하여 3년 만에 이겼으니, 소인을 쓰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왕자王者가
왕조王朝를 창업하여 전통을 자손에게 남겨줄 적에 명철한 사람을 널리
注+[頭註]부敷는 넓음이다. 구하여 후사에게 물려주기 때문에 세대를 영구히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니, 어찌 천하가 아직 평정되지 않았다 하여 오로지 소인의 재주를 쓴단 말인가.
재주만 있고 행실이 없는 소인은 어느 때고 쓸 수 있을 때가 없다.
이들을 물리치더라도 혹시라도 나올까 두려운데, 어찌 이들을 먼저는 등용했다가 뒤에는 폐하고 마침내 재주와 행실을 겸비한 사람을 취한단 말인가.
위징魏徵의 학문이 잡박하고 순수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군주를 보도輔導한 것이 끝내 삼왕三王의 다스려짐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