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謂魏徵曰 齊後主, 周天元
注+[頭註]後主는 高緯요 天元은 宣帝宇文贇이라이 皆重斂百姓
하야 厚自奉養
이라가 力竭而亡
이라
譬如
人
注+[頭註]은 也니 貪嗜飮食曰饕也라 이 自噉其肉
이라가 肉盡而斃
하니 何其愚也
오
然이나 二主孰爲優劣고 對曰 齊後主는 懦弱하야 政出多門하고 周天元은 驕暴하야 威福在己하니 雖同爲亡國이나 齊主尤劣也니이다
○ 以光祿大夫蕭瑀로 爲特進하고 復令參預政事하다
上曰 武德六年以後로 高祖有廢立之心而未定하고 我不爲兄弟所容하니 實有功高不賞之懼라
斯人也
不可以利誘하고 不可以死脅하니 眞社稷臣也
라하고 因賜瑀詩曰
疾風知勁草注+[釋義]疾은 急也라 勁健之草는 雖被疾風이라도 亦不隨之而靡라 요 板蕩識誠臣注+[釋義]詩에 上帝板板과 (上帝蕩蕩)[蕩蕩上帝] 註에 上帝는 稱君王也요 板板은 反也라하니 王爲政에 反先王與天之道也라 蕩蕩은 法度廢壞貌니 言誠臣不以板蕩而易其介也라 이라하다
魏徵曰 瑀違衆孤立이어늘 唯陛下知其忠勁하시니 曏不遇聖明이면 求免難矣리이다
常與上
으로 從容商略古事
할새 因而
하야 裨益
注+[通鑑要解]裨亦益也라弘多
라
上
이 或以非罪
로 譴怒宮人
이면 后亦陽怒
하야 請自推鞠
注+[通鑑要解]鞠은 與鞫同하니 推窮也라 하고 因命囚繫
라가 俟上怒息
하야 徐爲申理
하니 由是
로 宮
注+[通鑑要解]壼은 音困이니 爾雅에 宮中衖(巷)이라하니라之中
에 刑無枉濫이러라
及疾篤
에 與上訣
注+[頭註]訣은 別也니 與死者辭曰訣이라할새 時
에 房玄齡以譴歸第
라
后言於上曰 玄齡이 事陛下久하고 小心愼密하야 奇謀秘計를 未嘗宣泄하니 苟無大故어든 願勿棄之하소서
仍願陛下
親君子,
遠小人하고 納忠諫,
屛讒慝注+[頭註]屛은 斥也라 하며 徭役,
止遊하시면 妾雖沒於九泉
이나 誠無所恨
이라하고 崩于立政殿
하다
及崩
에 奏之
한대 上
이 覽之悲慟
하야 以示近臣曰 皇后此書 足以爲範百世
로다
朕
이 非不知天命
하야 而爲無益之悲
라 但入宮
에 不復聞規諫
注+[頭註]正君曰規라之言
하야 失一良佐
라 故
로 不能忘懷耳
로라
○ 葬文德皇后於昭陵
하고 上
이 念后不已
하야 乃於苑中
에 作層觀
注+[通鑑要解]層은 重屋也라 觀은 去聲이니 登之則可遠觀故也라하야 以望昭陵
하다
嘗引魏徵同登
하야 使視之
한대 徵
이 熟視之
하고 曰 臣昏眊
注+[通鑑要解]徵이 屢以目疾辭位라 하야 不能見
이니이다
上
이 指示之
한대 徵曰 臣以爲陛下望獻陵
注+[原註]高祖陵이라 이니이다
若昭陵則臣固見之矣니이다 上이 泣하고 爲之毁觀하다
○ 朱俱波, 甘棠
注+[通鑑要解]幷西域國名이라 이 遣使入貢
하다
朱俱波는 在蔥嶺之北하야 去瓜州三千八百里요 甘棠은 在大海南이라
然이나 朕不能無懼者는 秦始皇이 威振胡, 越이로되 二世而亡하니 惟諸公은 匡其不逮耳니라
○ 治書侍御史權萬紀上言
호되 宣, 饒二州
注+[釋義]宣, 饒는 二州名이니 在江東이라 宣은 本漢丹陽郡이요 饒는 本漢陽郡이라 銀
을 大發采之
면 歲可得數百萬緡
이니이다
上曰 朕이 貴爲天子하니 所乏者는 非財也요 但恨無嘉言可以利民耳라
卿이 未嘗進一賢, 退不肖하고 而專言稅銀之利로다
昔
에 堯, 舜
은 抵璧於山하고 投珠於谷注+[附註]陸賈新語曰 聖人은 不用珠玉而寶其身이라 故로 舜棄黃金於巉巖之山하고 捐珠玉於五湖之川하야 以杜淫邪之欲也라하니라 이러니 漢之桓, 靈
은 乃聚錢爲私藏
하니 卿
이 欲以桓, 靈俟我耶
아하고 是日
에 黜萬紀
하야 使還家
하다
○ 是歲
에 命
하야 爲折衝都尉
하고 別將爲果毅都尉
하다
凡當宿衛者
을 兵部以遠近給番
하야 遠疎近
注+[附註]兵志에 五百里爲五番하고 千里七番하고 (二)[一]千五百里八番하고 (三)[二]千里十番하고 外爲十二番호되 皆一月上이라하니라 하니 皆一月而更
이러라
는 無事則耕於野
하고 有事則命將以出師
라가 還則兵散于府
하고 將歸于衛
하니 國無養兵之費
하고 臣無專兵之患
이라
故로 先儒謂三代而下兵制之善이 惟唐之府兵耳라하니 以爲猶得寓兵於農之意니
[史略 史評]愚按 唐以遠近分番하야 皆一月而更하니 恐太紛擾하야 不若漢以一歲更代者爲善也로다
상上이
위징魏徵에게 이르기를 “
북제北齊의
후주後主와
북주北周의
천원天元이
注+[頭註]후주는 고위高緯이고, 천원은 선제宣帝인 우문빈宇文贇이다. 모두 백성들에게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서 자신을 후하게 봉양하다가 힘이 다하자 망하였다.
비유하면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
注+[頭註]참饞은 도饕이니, 음식을 탐내어 즐기는 것을 도饕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살을 먹다가 살점이 다하면 죽는 것과 같으니, 어쩌면 그리도 어리석은가.
그러나 두 군주 중에 누가 낫고 못한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북제北齊의 후주後主는 나약하여 정사가 여러 문門에서 나왔고 북주北周의 천원天元은 교만하고 포악하여 위엄과 복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었으니, 비록 똑같이 나라를 멸망시켰지만 북제北齊의 군주가 더욱 용렬합니다.” 하였다.
4월 경자일庚子日에 상황上皇이 붕어崩御하였다.
광록대부光祿大夫소우蕭瑀를 특진特進으로 삼고 다시 정사政事에 참여하게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무덕武德 6년(623) 이후로 고조高祖께서 태자太子를 폐하고 새로 세울 마음이 있었으나 결정하지 못하였고 나는 형제간에 용납받지 못하니, 실로 공이 높으나 상을 받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소우蕭瑀 이 사람은 이익으로 유인할 수 없고 죽음으로 위협할 수 없었으니, 진실로
사직社稷의 신하이다.” 하고, 인하여
소우蕭瑀에게 지어준
시詩에 이르기를 “빠른(세찬) 바람에 굳센 풀을 알고
注+[釋義]질疾은 급함이다. 굳세고 강한 풀은 비록 빠른 바람을 맞더라도 따라서 쓰러지지 않는다. 세상이 혼란할 때 충성스러운 신하를 안다.” 하였다.
注+[釋義]《시경詩經》 〈대아大雅판板〉에 “상제上帝가 상도常道를 뒤집는다.[上帝板板]”라 하고, 〈대아大雅탕蕩〉에 “상제가 법도를 파괴한다.[蕩蕩上帝]”라 하였는데, 주註에 “상제上帝는 군왕君王을 칭한 것이요, 판판板板은 뒤집는 것이다.” 하였으니, 왕王이 정사를 함에 선왕先王과 하늘의 도道를 뒤집은(위반하는) 것이다. 탕탕蕩蕩은 법도가 파괴된 모습이니, 충성스러운 신하는 나라가 어지럽다 하여 절개를 바꾸지 않음을 말한다.
또 소우蕭瑀에게 이르기를 “경卿의 충직함은 옛사람도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선악善惡이 너무 분명하여 또한 때로 잘못할 때가 있다.” 하니, 소우蕭瑀가 재배再拜하고 사례하였다.
위징魏徵이 아뢰기를 “소우蕭瑀가 여러 사람들의 뜻을 어겨 혼자서 고립되었는데 오직 폐하께서 그의 충성스럽고 꿋꿋함을 아시니, 만일 성명聖明한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면 화를 면하기를 구하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였다.
장손황후長孫皇后는 성품이 인자하고 효성스럽고 검소하였으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다.
항상
상上과 조용히 옛날 일을 상의할 적이면 인하여 행해야 할 일은 과감하게 건의하고 행해서는 안 될 일은 그만두도록 간해서 보익함이
注+[通鑑要解]비裨도 돕는 것이다. 매우 많았다.
상上이 혹 죄가 아닌 것으로
궁인宮人들을 견책하고 성내면
후后도 거짓으로 노한 체하여 자신이 직접
추고推考하여
국문鞠問할 것을 청하고
注+[通鑑要解]국鞠은 국鞫과 같으니, 추국推鞠은 추궁하는 것이다. 인하여 가두어 두라고 명하였다가
상上의 노여움이 그치기를 기다려 서서히 그 이유를 진술하니, 이로 말미암아 궁중에
注+[通鑑要解]곤壼은 음이 곤이니, 《이아爾雅》 〈석궁釋宮〉에 “곤壼은 궁궐의 길이다.” 하였다. 억울하거나 형벌을 남용하는 일이 없었다.
황후가 병이 위독해져
상上과 결별할 적에,
注+[頭註]결訣은 이별함이니, 죽은 사람과 헤어지는 것을 결訣이라 한다. 이때
방현령房玄齡이 견책을 받아 집에 돌아가 있었다.
황후가 상上에게 아뢰기를 “방현령房玄齡은 폐하를 오랫동안 섬겼고, 조심하고 신밀愼密해서 기이한 모책과 비밀스런 계책을 일찍이 누설한 적이 없으니, 만일 큰 연고가 없거든 버리지 마소서.
그리고 폐하께서 군자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하시며 충성스러운 간언을 받아들이고 간사한 말을 물리치시며
注+[頭註]병屛은 물리침이다. 부역을 줄이고 유람과 사냥을 그치신다면
첩妾은 비록 죽어
구천九泉에 묻히더라도 진실로 여한이 없겠습니다.” 하고는
입정전立政殿에서 승하하였다.
황후는 일찍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부인婦人들의 득실得失에 관한 일을 채집하여 《여칙女則》 30권을 만들었다.
황후가 승하하자 궁사宮司가 아뢰니, 상上이 이 책을 보고 비통해하며 가까운 신하에게 보여주고 이르기를 “황후皇后의 이 책은 충분히 백세百世의 모범이 될 만하다.
짐朕이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여 아무 소용이 없는데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궁중宮中에 들어와도 다시는
규간規諫하는
注+[頭註]임금을 바로잡는 것을 규規라 한다.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어 한 어진 보좌를 잃었기 때문에 가슴속에 잊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방현령房玄齡을 불러서 다시 그의 지위地位를 회복시켰다.
- 《신당서新唐書후비전后妃傳태종문덕황후장손씨太宗文德皇后長孫氏》에 나옴 -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소릉昭陵에 장례하고,
상上이 황후를 그리워하여 마지않아서 마침내 동산 안에 층층으로 된
관觀을 지어
注+[通鑑要解]층層은 지붕을 겹으로 하여 지은 집이다. 관觀(高樓)은 거성去聲이니, 여기에 올라가면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릉昭陵을 바라보았다.
일찍이
위징魏徵을 데리고 함께
층관層觀에 올라가
소릉昭陵을 바라보게 하였는데,
위징魏徵이 눈여겨 자세히 보고는 아뢰기를 “
신臣은 눈이 침침해서
注+[通鑑要解]위징魏徵은 자주 눈병으로 지위를 사양했었다. 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여주자,
위징魏徵이 아뢰기를 “신은 폐하께서
헌릉獻陵을
注+[原註]헌릉獻陵은 고조高祖의 능陵이다. 바라보시는 줄 알았습니다.
만약 소릉昭陵이라면 신臣이 진즉에 보았습니다.” 하니, 상上이 눈물을 흘리고 이로 인하여 층관層觀을 부수었다.
주구파朱俱波와
감당甘棠이
注+[通鑑要解]주구파朱俱波와 감당甘棠은 모두 서역西域의 나라 이름이다. 사신을 보내어 들어와 공물을 바쳤다.
주구파朱俱波는 총령蔥嶺의 북쪽에 있어 과주瓜州와 3800리 떨어져 있었고 감당甘棠은 대해大海의 남쪽에 있었다.
상上이 이르기를 “중국中國이 이미 안정되자 사방 오랑캐들이 자연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나 짐朕이 두려운 마음이 없지 못한 것은 예전에 진시황秦始皇이 호胡와 월越에 위엄을 떨쳤으나 2대 만에 망하였으니, 제공諸公들은 짐朕의 미치지 못하는 점을 바로잡아 주기 바란다.” 하였다.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권만기權萬紀가
상언上言하기를 “
선주宣州와
요주饒州 두
주州의
注+[釋義]선주宣州와 요주饒州는 두 주州의 이름이니, 강동江東에 있다. 선주宣州는 본래 한漢나라 단양군丹陽郡이요, 요주饒州는 본래 한漢나라 파양군鄱陽郡이다. 은광銀鑛을 많이 채굴하면 1년에 수백만 꿰미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짐朕은 귀함이 천자天子가 되었으니 부족한 것은 재물이 아니요, 다만 백성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말이 없음을 한할 뿐이다.
수백만 꿰미의 은을 많이 얻는 것이 어찌 한 어진 이와 재주 있는 이를 얻는 것만 하겠는가.
경卿은 일찍이 한 명의 현자를 등용하거나 한 명의 불초한 자를 물리친 적은 없고, 오로지 은銀을 채굴하면 거둘 세금의 이익만을 말하는구나.
옛날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벽옥璧玉을 산에 던져버리고 진주를 골짝에 던졌는데,
注+[附註]육가陸賈의 《신어新語》에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주옥珠玉을 사용하지 않고 자기 몸을 보배롭게 여겼다. 그러므로 순舜임금은 황금黃金을 깎아지른 듯한 험한 산에 버리고 주옥珠玉을 오호五湖의 냇물에 버려서 자신의 음란하고 간사한 욕심을 막았다.” 하였다. 한漢나라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는 마침내 돈을 모아 사사로운 창고를 만들었으니,
경卿은
환제桓帝와
영제靈帝로 나를 대하고자 하는가.” 하고는 이날로
권만기權萬紀를 내쳐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해에 통군統軍을 고쳐서 명명命名하여 절충도위折衝都尉라 하고 별장別將을 과의도위果毅都尉라 하였다.
모두 10도道에 634부府를 설치하였는데, 관내關內의 261부府는 모두 여러 위衛에 소속되었다.
무릇
숙위宿衛해야 할 자들이
번상番上하는 차례를
병부兵部에서
경사京師와의
원근遠近에 따라
번番을 정해 주어서, 먼 자는 드물게 하고 가까운 자들은 자주하되
注+[附註]《신당서新唐書》 〈병지兵志〉에 “1개 절충부折衝府의 병사를 500리는 5번番으로, 1000리는 7번番으로, 1500리는 8번番으로, 2000리는 10번番으로, 그 밖은 12번番으로 나누어 번갈아 상번上番하게 하되, 모두 1개월을 기한으로 상번上番하게 했다.” 하였다. 모두 한 달이면 바꾸게 하였다.
“부병府兵의 제도는 일이 없으면 들에서 농사짓고 일이 있으면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하였다가 돌아오면 군사들은 부府로 해산하고 장수들은 위衛로 돌아가니, 국가에서는 군대를 기르는 비용이 없고 신하들은 병권을 독점할 근심이 없다.
그러므로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삼대三代 이후로 병제兵制 중에 좋은 것은 오직 당唐나라의 부병제府兵制뿐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군대를 농사에 붙여두는 뜻을 얻었다고 여긴 것이다.
근고近古의 좋은 법인데 애석하게도 그 자손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다.”
[史略 사평史評]“내가 살펴보건대 당唐나라는 원근遠近에 따라 번番을 나누어서 모두 한 달 만에 번番을 바꾸었으니, 너무 분분하여 한漢나라가 1년 만에 번番을 교대한 것만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