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月
에 詔曰 隋故擊鷹郞將
注+[頭註]擊鷹은 本傳及資治에 竝作鷹擊이라 堯君素
는 雖
堯하야 有乖
倒戈之志注+[釋義]紂之衆이 服周仁政하야 無有戰心하야 前徒倒戈하야 自攻于後也라 나 而
는 實表
이라
○ 三月에 著作佐郞鄧世隆이 表請集上文章한대 上曰 朕之辭令이 有益於民者는 史皆書之하니 足爲不朽요 若其無益이면 集之何用이리오
梁武帝父子와 陳後主, 隋煬帝가 皆有文集行於世나 何救於亡이리오
爲人主하야는 患無德政이니 文章을 何爲리오하고 遂不許하다
貞觀之前
에 從朕
經營天下는 玄齡之功也
요 貞觀以來
로 繩愆糾繆는 魏徵之功也
라하고 皆賜之佩刀
注+[通鑑要解]上親所佩者也라 하다
○ 上謂徵曰 朕政事何如往年고 對曰 威德所加는 比貞觀之初則遠矣나 人悅服則不逮也니이다
上曰 遠方이 畏威慕德이라 故로 來服이니 若其不逮면 何以致之오
對曰 陛下往以未治爲憂라 故로 德義日新이러니 今以旣治爲安이라 故로 不逮니이다
對曰 陛下貞觀之初엔 恐人不諫하야 常導之使言하고 中間엔 悅而從之러시니
今則不然하야 雖勉從之나 猶有難色하시니 所以異也니이다
上曰 其事可聞歟
아 對曰 陛下昔欲殺元律師
라가 孫伏伽以爲法不當死
어늘 陛下賜以蘭陵公主
注+[頭註]上之女也라 園
하시니 直(値)百萬
이라
或云賞太厚어늘 陛下云 朕卽位以來로 未有諫者라 故로 賞之라하시니 此는 導之使言也요
司戶柳雄
이 妄訴隋資
注+[釋義]王氏曰 隋資는 仕於隋朝之資級也라 時에 選者盛集하야 有詭冒牒取調者어늘 詔許自首하고 不首者罪死하니라어늘 陛下欲誅之
라가 納戴冑之諫而止
하시니 是
는 悅而從之也
요
近
에 皇甫德參
이 上書諫修洛陽宮
이어늘 陛下
之
하시니 雖以臣言而罷
注+[頭註]右上甲午年이라 나 勉從之也
니이다
○ 上
이 問侍臣
호되 帝王創業
注+[頭註]創은 與刱通하니 始也, 造也라 與守成
이 孰難
고
房玄齡曰 草昧之初
注+[釋義]王氏曰 草昧之初는 謂開創之始也라[通鑑要解] 草는 雜亂也요 昧는 晦冥也니 謂天下未定하여 名分未明之時也라 엔 與群雄竝起
하야 角力而後臣之
注+[釋義]角은 校也니 校其材力也라 前賈誼傳云 非親角材而臣之라하니라 하니 創業
이 難矣
니이다
魏徵曰 自古帝王이 莫不得之於艱難하야 失之於安逸하니 守成이 難矣니이다
上曰 玄齡은 與吾共取天下하야 出百死하야 得一生이라
故로 知創業之難이요 魏徵은 與吾共安天下하야 常恐驕奢生於富貴하고 禍亂生於所忽이라
然創業之難은 旣已往矣어니와 守成之難은 方當與諸公愼之하리라
玄齡等이 拜曰 陛下及此言하시니 四海之福也니이다
馬君論事
에 援引事類하야 揚注+[頭註]揚은 擧也요 搉은 引也라 古今하고 擧要刪煩
하야 會文切理하니 一字不可增이요 亦不可減이라
聽之靡靡注+[頭註]亹亹通하니 不厭之意라 하야 令人忘倦이라하더라
由一介草茅
로 言天下事
에 若素宦于朝
하야 明習憲章
하니 非王佐才
면 疇
注+[頭註]誰也라 以及玆
며 其自視與築巖釣渭
注+[頭註]築巖은 傅說이요 釣渭는 太公이라 로 亦何以異迹
이리오
夫帝銳于立事어늘 而周所建이 皆切一時하야 以明佐聖이라
然周才不逮傅說
注+[附註]傅氏之巖에 有(間)[澗]水壞道면 常使胥靡築之러니 說이 賢而隱하야 代築以供食이라 孟子亦云 傅說이 擧於版築之間이어늘 而蔡氏不取하고 又以築爲卜築하니라 胥靡는 拘縛之也라 胥는 相이요 靡는 隨也니 輕刑之名이라, 呂望
注+[附註]姓姜이요 名牙라 或曰 牙是字요 而尙名也라 其先祖封呂하니 從其姓曰呂라 文王出獵이라가 遇之하야 歸立爲師하고 言吾先君太公이 望子久矣라하야 因號太公望하니라 하야 使後世未有述焉
하니 惜乎
라
2
월月에
조명詔命을 내리기를 “
수隋나라의
고故응격낭장鷹擊郎將注+[頭註]격응擊鷹은 《수서隋書》 〈요군소전堯君素傳〉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모두 응격鷹擊으로 되어 있다.요군소堯君素는 비록
걸왕桀王의 개가
요堯임금을 향하여 짖는 것처럼 자신의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여 창을 거꾸로 향하고 투항하는 뜻에는 위배됨이 있으나
注+[釋義]주왕紂王의 군대가 주周나라의 어진 정사에 감복하여 싸울 마음이 없어서 군대의 선두에 있는 군사들이 창을 거꾸로 들고 스스로 후미를 공격하였다. 빠른 바람 앞에서도 쏠리지 않는 풀처럼 지조가 굳셈은 실로 날씨가 추워도 변치 않는 마음을 나타내었다.
포주자사蒲州刺史에 추증하고, 인하여 그 자손을 찾아내어 보고하라.” 하였다.
3월에 저작좌랑著作佐郞등세륭鄧世隆이 표문表文을 올려 상上의 문장文章을 수집하여 간행할 것을 청하자, 상上이 이르기를 “짐朕의 문사文辭와 조령詔令 중에 백성들에게 유익한 것은 사관史官이 모두 기록하였으니 충분히 불후不朽의 문자文字가 될 것이요, 만일 유익함이 없다면 모아서 어디에 쓰겠는가.
양梁나라 무제武帝부자父子, 진陳나라 후주後主,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모두 문집文集이 있어 세상에 행해지고 있으나 나라가 멸망함을 어찌 구원할 수 있었는가.
군주가 되어서는 덕스런 정사가 없음을 근심할 뿐이니 문장文章을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마침내 허락하지 않았다.
황손皇孫이 출생하자, 5품 이상의 관원에게 동궁東宮에서 연회를 베풀 적에 상上이 이르기를
“
정관貞觀 이전에
짐朕을 따라 천하를 경영한 것은
방현령房玄齡의 공이요,
정관貞觀 이후에 잘못을 바로잡고 그릇됨을 규찰한 것은
위징魏徵의 공이다.” 하고, 모두 이들에게
패도佩刀를 하사하였다.
注+[通鑑要解]패도佩刀는 상上이 친히 찼던 것이다.
상上이 위징魏徵에게 이르기를 “짐朕의 정사가 지난해에 비하여 어떠한가?” 하자,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위엄과 덕德이 가해지는 것은 정관貞觀 초기에 비해 월등하나 인심人心이 기뻐하고 복종하는 것은 미치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德을 사모하기 때문에 와서 복종하는 것이니, 만일 미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이를 이루었겠는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예전에는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셨기 때문에 덕의德義가 날로 새로웠는데, 지금은 이미 다스려졌다고 생각하여 편안히 여기시기 때문에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지금 하는 바가 지난해와 같은데,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정관貞觀 초기에는 사람들이 간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항상 사람들을 인도해서 간하게 하셨고 중간에는 간하는 것을 기뻐하여 따르셨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비록 억지로 따르시나 오히려 꺼려하는 기색이 있으시니, 이 때문에 다른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해서 들려 주겠는가?” 하니,
위징魏徵이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옛날에
원율사元律師를 죽이려고 하시다가
손복가孫伏伽가 법률에 비추어 보건대
사형死刑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폐하께서는 그에게
난릉공주蘭陵公主의
注+[頭註]난릉공주蘭陵公主는 상上(太宗)의 딸이다. 동산을 하사하셨으니 값어치가 백만이었습니다.
혹자가 상이 너무 지나치다고 아뢰자, 폐하께서는 ‘짐朕이 즉위한 이래로 간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상을 준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사람들을 인도하여 말하게 한 것입니다.
사호司戶유웅柳雄이
수隋나라에서 받은 품계를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수자隋資는 수隋나라 조정에서 벼슬한 자급資級이다. 이때에 선발된 자가 한꺼번에 모여들어 자음資蔭을 속이고 몰래 문서를 위조하여 조용調用된 자가 있으므로 조명詔命을 내려 자수自首하도록 허락해 주고 자수自首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사칭하자 폐하께서 그를 죽이려고 하시다가
대주戴冑의 간언을 받아들여 중지하셨으니, 이는 기뻐하여 따르신 것입니다.
근년에
황보덕참皇甫德參이 글을 올려
낙양궁洛陽宮을 수리하는 것을 간하자 폐하께서 노하셨다가 비록 신의 말을 따라 그만두셨으나
注+[頭註]앞의 갑오년조甲午年條(634)에 보인다. 이는 억지로 따르신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공公이 아니면 이에 미칠 수가 없다.
사람이 가장 괴로운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상上이
시신侍臣에게 묻기를 “
제왕帝王이
창업創業(基業을
창건創建)하는 것과
注+[頭註]창創은 창刱과 통하니, 처음이며 만듦이다. 공업功業을
수성守成하는 것은 어느 것이 어려운가?” 하니,
방현령房玄齡은 아뢰기를 “창업하는 초기에는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초매草昧의 초기는 왕조王朝를 창건創建하는 초기를 이른다.” [通鑑要解]초草는 혼란함이고 매昧는 어두움이니, 초매草昧는 천하가 아직 정해지지 않아서 명분이 분명하지 않은 때를 이른다. 여러
영웅英雄들과 함께 일어나서 힘을 겨룬 뒤에 그들을 신하로 삼으니,
注+[釋義]각角은 겨루는 것이니, 재주와 힘을 겨루는 것이다. 《전한서前漢書》 〈가의전賈誼傳〉에 “직접 재주를 겨루어 그들을 신하로 삼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창업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였고,
위징魏徵은 아뢰기를 “예로부터 제왕帝王들이 험난한 가운데에서 천하를 얻어 안일한 가운데에서 천하를 잃지 않은 자가 없으니, 수성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방현령房玄齡은 나와 함께 천하를 취하여 백 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한 번 살아났다.
그러므로 창업創業의 어려움을 아는 것이요, 위징魏徵은 나와 함께 천하를 편안히 하여 항상 교만함과 사치가 부귀富貴에서 생겨나고 화禍와 난亂이 소홀히 여기는 바에서 생길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창업創業의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거니와 수성守成의 어려움은 내 이제 제공諸公들과 함께 삼가겠다.” 하였다.
방현령房玄齡 등이 절하고 아뢰기를 “폐하께서 이에 대해 언급하시니 이는 사해四海의 복福입니다.” 하였다.
급사중給事中마주馬周를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삼았다.
마주馬周는 기지機智와 구변口辯이 있으니, 중서시랑中書侍郞잠문본岑文本이 항상 칭찬하기를
“
마군馬君은 일을 논할 때에 같은 종류의 일을 인용해서
고금古今의
사례事例를 들고,
注+[頭註]양揚은 드는 것이고, 각搉은 인용하는 것이다. 요점을 들고 번잡한 것을 삭제하여 모아서 문장을 이루고 이치에 절실하니, 한 글자를 더할 수도 없고 한 글자를 뺄 수도 없다.
들으면 마음이 쏠려서
注+[頭註]미미靡靡는 미미亹亹와 통하니, 싫증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권태감을 잊게 한다.” 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마주전馬周傳〉의 찬贊에 말하였다.
“마주馬周가 태종太宗을 만난 것이 돌아보건대 기이하지 않은가.
일개 초야의 선비로 천하의 일을 말할 적에 마치 평소 조정에서 벼슬하여
전장典章과
제도制度를 밝게 익힌 것처럼 하였으니,
왕자王者를 보필할 만한 재주가 아니라면 누가
注+[頭註]주疇는 누구이다. 여기에 미칠 수 있겠으며, 자신을 보기를
부암傅巖에서 담장을 쌓은
부열傅說이나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한
여망呂望과
注+[頭註]부암傅巖에서 담장을 쌓은 것은 부열傅說이고,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한 것은 태공太公이다. 또한 어찌 다른 자취라고 여기겠는가.
황제가 일을 세움에 예의銳意하였는데, 마주馬周가 건의한 것이 모두 한때에 간절하여 현명함으로써 성군聖君을 보좌하였다.
그러므로 군주와 재상이 아교로 붙이지 않아도 견고하여 서로 늦게 만남을 한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마주馬周는 재주가
부열傅說과
注+[附註]부암傅巖에서 골짜기에 흐르는 물이 길을 무너뜨리면 항상 죄수들로 하여금 제방을 쌓게 하였는데, 부열傅說이 현자賢者로서 은둔하여 제방을 쌓는 일을 대신하고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맹자孟子 또한 이르기를 “부열傅說이 판축版築의 사이에서 등용되었다.” 하였는데, 채씨蔡氏(蔡沈)는 맹자孟子의 설說을 취하지 않고, 또 축築을 복축卜築(살 곳을 가려서 정함)이라고 하였다. 서미胥靡는 구금하여 속박하는 것이다. 서胥는 서로이고 미靡는 따름이니, 가벼운 형벌의 명칭이다. 여망呂望에게
注+[附註]여망呂望은 성姓이 강姜이고 이름이 아牙이다. 혹자는 이르기를 “아牙는 자字이고 상尙이 이름이다.”라고 한다. 그 선조先祖가 여呂 땅에 봉해지자 이를 따라 성姓(氏)을 여呂라고 하였다. 문왕文王이 사냥하러 나갔다가 만나 데리고 돌아와서 그를 세워 스승으로 삼고,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인 태공太公께서 그대를 기다린 지가 오래이다.’라고 하여, 인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이름하였다. 미치지 못하여 후세로 하여금 칭술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애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