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月
에 上幸國子監
하야 觀釋奠
注+[附註]周禮大胥舍菜注에 舞者 皆執芬香之菜라 舍는 讀曰釋이라 或曰 見於師에 以菜(物)[爲]贄하니 卽菜羹之菜로 蘋蘩之屬이라 學記曰 皮弁祭菜 亦敬道也라한대 注에 菜는 芹藻之屬이라 五禮新儀曰 釋奠者는 設祭饌酌奠也라 賈公彦曰 奠之爲言은 停也니 停饌具也라 古釋奠은 山川, 廟社, 學宮에 統言之러니 自宋으로 獨先聖之祭曰 釋奠이라하니 所以別群祀也라 陳祥道云 釋奠(曰)[日]用上丁者는 丁은 陰火也니 火象文敎宣明이라 曲禮曰 이라하니 故로 取陰火也라 鄭玄曰 始入學에 止舍菜는 禮先師也라[通鑑要解] 按唐國子監은 在安上門西라 唐制에 仲春, 仲秋에 釋奠于文宣王호되 皆以上丁, 上戊하고 以祭酒, 司業, 博士三獻이라 할새 命祭酒孔穎達
하야 講孝經
하고 賜祭酒以下至諸生高第
히 帛有差
하다
是時
에 上
이 大徵天下名儒
하야 爲學官
하고 數幸國子監
하야 使之講論
하야 學生
이 能明一大經
注+[附註]唐取士에 以禮記, 春秋左氏傳爲大經하고 詩, 儀禮, 周禮爲中經하고 易, 尙書, 春秋公羊, 穀梁傳爲小經하니라 已上
이면 皆得補官
하고
增築學舍千二百間하고 增學生하야 滿三千二百六十員이라
自屯營
로 亦給博士
하야 使授以經
하고 有能通經者
면 聽得貢擧
하니
於是
에 四方學者
雲集京師하고 乃至高麗, 百濟
注+[釋義]百濟之國은 也니 本扶餘王東明之後라 有仇台者 篤於仁信이러니 始立國於帶方故地하야 遂爲東夷强國하니 初以百家濟〈海〉라하야 因號焉이라 其國이 東極新羅, 高麗하고 西南俱限大海라 其都曰居拔城이요 亦曰固麻城이니 東夷傳云 三韓凡七十八國에 百濟其一也라하니라 , 新羅, 高昌
注+[頭註]西域小國이니 都交河城이라 , 吐蕃諸酋長
히 亦遣子弟
하야 請入國學
하니 升講筵者 至八千餘人
이러라
上이 以師說多門하고 章句繁雜이라하야 命孔穎達하야 與諸儒로 撰定五經疏하고 謂之正義라하야 令學者習之하다
○ 侯君集
注+[頭註]交河行軍大摠管이라 이 滅高昌
하니 以其地
로 爲西州
하다
於是
에 唐地東極于海
하고 西至
하고 南盡
하고 北抵大漠
하야
皆爲州縣하니 東西九千五百一十里요 南北一萬九百一十八里러라
2월에
상上이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하여
석전제釋奠祭를
注+[附註][附註] 《주례周禮》 〈대서大胥〉의 ‘사채舍菜’ 주注에 “춤을 추는 자들이 모두 향기로운 채소를 손에 쥔다. 사舍는 석釋으로 읽는다. 혹자는 이르기를 ‘스승을 뵐 적에 채소를 폐백으로 삼으니, 곧 채갱菜羹의 채菜로 개구리밥과 마름 따위이다.” 하였다.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피변복皮弁服을 입고 나물로 제사함은 도예道藝를 공경함을 보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주注에 “채菜는 미나리와 마름 따위이다.” 하였다. 《오례신의五禮新儀》에 이르기를 “석전釋奠은 제찬祭饌을 진설하고 술을 따라 전奠을 올리는 것이다.” 하였고, 가공언賈公彦은 말하기를 “전奠이라는 말은 차려놓는 것이니, 〈시동尸童을 세우지 않고〉제수만 차려 놓는 것이다.” 하였다. 옛날에 석전釋奠은 산천山川과 묘사廟社와 학궁學宮에 지내는 것을 통틀어 말하였는데, 송宋나라 때부터 오직 선성先聖에게 올리는 제사만을 석전釋奠이라 하였으니, 다른 제사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진상도陳祥道가 이르기를 “석전제釋奠祭를 지내는 날짜는 상정일上丁日을 쓰니, 정丁은 음화陰火이니 화火는 문교文敎가 베풀어져 밝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였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내사內事는 유일柔日을 쓴다.” 하였다. 그러므로 음화陰火를 취한 것이다. 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처음에 태학太學에 들어갈 때에 단지 사채舍菜에 그치는 것은 선사先師를 예우하는 것이다.” 하였다. [通鑑要解] 살펴보건대 당唐나라의 국자감國子監은 안상문安上門 서쪽에 있다. 당唐나라 제도에는 중춘仲春과 중추仲秋에 문선왕文宣王(孔子의 시호)에게 석전釋奠을 올리되 모두 상정上丁과 상무일上戊日에 하고 좨주祭酒‧사업司業‧박사博士가 삼헌三獻을 한다. 살펴볼 적에
좨주祭酒공영달孔潁達에게 명하여 《
효경孝經》을 강하게 하고
좨주祭酒 이하로부터
국자감國子監의
제생諸生 중 성적이 우수한 자에 이르기까지 〈차등을 두어〉비단을 하사하였다.
이때
상上이 천하에 이름난
유자儒者를 크게 불러
학관學官으로 삼고 자주
국자감國子監에 행차해서 그들로 하여금
경학經學을 강론하게 하여, 학생 중에
대경大經 한 가지
注+[附註]당唐나라 때 선비를 뽑을 적에 《예기禮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을 대경大經으로 삼고, 《시詩》‧《의례儀禮》‧《주례周禮》를 중경中經으로 삼고, 《역易》‧《상서尙書》‧《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을 소경小經으로 삼았다. 이상을 통달하면 모두 관직에
보임補任하게 하였다.
학사學舍 1200칸을 증축增築하였으며 학생 3260명을 증원하였다.
둔영屯營의 비기飛騎에게도 박사博士를 파견해서 그들로 하여금 경전經傳을 전수해 주게 하였고, 그 중에 경전을 통달한 자가 있으면 공거貢擧(科擧)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이에 사방의 배우는 자들이
경사京師로 떼 지어 모여들고, 급기야는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注+[釋義]백제국百濟國은 마한馬韓의 하나이니, 본래 부여왕扶餘王동명東明의 후손이다. 뒤에 구태仇台라는 자가 인仁와 신信을 돈독히 힘썼는데, 처음으로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워 마침내 동이東夷의 강국强國이 되었다. 처음에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왔다 하여 이로써 호칭하였다. 이 나라는 동쪽으로는 신라新羅와 고구려高句麗에 이르고, 서쪽과 남쪽은 모두 큰 바다와 경계하였다. 도읍을 거발성居拔城이라 하고 또한 고마성固麻城이라고도 하니,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이르기를 “삼한三韓이 모두 78개국이니 백제百濟는 그 중의 하나이다.” 하였다. 新羅‧
고창高昌‧
注+[頭註]고창高昌은 서역西域의 작은 나라이니, 교하성交河城에 도읍하였다. 吐蕃의 여러
추장酋長에 이르기까지 또한
자제子弟를 보내어서
국학國學에 들어올 것을 청하니,
강석講席에 오른 자가 8천여 명에 이르렀다.
상上은 사문師門의 학설이 많고 장구章句가 번잡하다 하여 공영달孔潁達에게 명해서 여러 학자들과 오경五經의 소주疏註를 찬정撰定하게 하고 이를 일러 《정의正義》라 이름하여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이것을 익히게 하였다.
- 《신당서新唐書》의 〈선거지選擧志〉와 〈유학전儒學傳〉序에 나옴 -
후군집侯君集이
注+[頭註]후군집侯君集은 교하행군대총관交河行軍大摠管이다. 고창高昌을 멸망시키니, 그곳을
서주西州로 만들었다.
이에 당唐나라 영지가 동쪽으로는 동해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언기焉耆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임읍林邑에 다하고 북쪽으로는 대막大漠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모두 주현州縣을 만드니, 동서가 9510리요 남북이 1만 918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