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二月
에 上
이 至鄴
하야 自爲文祭魏太祖
注+[頭註]曹操라 曰
臨危制變하고 料敵設奇하니 一將之智는 有餘하고 萬乘之才는 不足이라하다
知人則易하고 自知則難하나니 太宗之評魏武者는 正所以自狀耳라
或問漢高祖, 光武, 昭烈, 魏武, 唐文皇
注+[頭註]文皇은 太宗이니 諡曰文이라 의 人品如何
오 曰
高祖는 尙矣요 光武, 昭烈은 猶魯, 衛之政也라
魏武, 太宗은 竝驅中原이면 未知鹿死誰手하니 其所長短이 蓋略相當이라
光武, 昭烈
은 才德俱優
하고 魏武, 太宗
은 才優於德
이라 然規模建立
은 皆在漢高範圍
注+[頭註]範은 如鑄金之有模範이요 圍는 匡郭也라 之內耳
니라
三月에 車駕至定州하니 李世勣, 江夏王道宗이 攻高麗蓋牟城하야 拔之하다
上이 自將數百騎하고 至遼東城下하야 見士卒負土塡塹하고 上이 分其尤重者하야 於馬上에 持之러니 及克高麗에 以其城爲遼州하다
○ 丁未
에 車駕發遼東
하야 丙辰
에 至安市城
하야 進兵攻之
하니 高麗北部延壽, 惠眞
注+[釋義]하니라[通鑑要解] 高延壽, 高惠眞은 高麗傳에 云 延壽는 北部大人이요 惠眞은 南部大人也라하니라 이 兵十五萬
하고 救安市
어늘
上
이 勅諸軍
하야 齊出奮擊
하고 因命有司
하야 張受降幕
注+[頭註]張은 設也요 은 平聲이라 於朝堂
注+[頭註]行營備宮省之制라 故亦有朝堂이라 之側
하다
諸軍
이 鼓譟竝進
할새 會
에 有龍門人薛仁貴
注+[頭註]自編戶應募라[通鑑要解] 名禮니 以字行이라 安都之六世孫이라者 大呼陷陳
하니 所向無敵이라
高麗兵披靡어늘 大軍이 乘之하니 高麗兵이 大潰하다
己未에 延壽, 惠眞이 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降하니 高麗擧國大駭라
後黃城, 銀城
注+[通鑑要解]後는 對前之後也라 이 皆自拔遁去
하니 數百里에 無復人煙이러라
上
이 驛書報太子
하고 仍與高士廉等書曰 朕
이 爲將如此
하니 何如
오하고 名所幸山
하여 曰
駐驆山注+[頭註]本名은 六山이라 이라하다
太宗之伐高麗는 非獨恃其四海之富, 兵力之彊也라 本其少時에 奮於布衣하야 志氣英果하야 百戰百勝하야 以取天下라
治安旣久
에 不能深居高拱
하고 猶思所以逞志
하야 扼腕
注+[頭註]扼은 握也요 腕은 掌後節中이라 踴(踊)躍
하야 喜於用兵
이라
如
婦搏虎
注+[釋義]王氏曰 馮婦搏虎로 以喩太宗用兵不已也라 馮婦는 姓名이니 勇而有力하야 善搏虎라 故로 進以爲士러니 後於野外見虎하고 欲復搏之하니 其士之黨이 笑其不知止也라 見孟子盡心下하니라 하야 不能自止
하니 非有禮義以養其心
하고 中和以養其氣
하야 始於勇敢
하고 終於勇敢而已矣
라
天下無事則用之於禮義하고 天下有事則用之於戰勝하나니 用之於戰勝則無敵이요 用之於禮義則順治라하니라
太宗이 於天下無事에 不知用之於禮義하고 而惟以戰勝爲美也라
是故로 以天子之尊으로 而較勝負於遠夷하야 一戰而克하고 自以爲功하야 矜其智能하야 夸(誇)示臣下하니 其器不亦小哉아
上
이 以遼左早寒
하야 草枯水凍
하야 士馬難久留
하고 且粮食將盡
이라하야 勅班師
注+[頭註]見三十四卷이라 하다
上謂薛仁貴曰 朕諸將
이 皆老
하야 思得新進
勇者
하야 將之
러니 無如卿者
라
○ 上
이 以遼左不能成功
이라하야 深悔之
하야 歎曰
魏徵이 若在면 不使朕有是行也
라하고 乃馳驛
하야 하고 復立所製碑
하다
蓋不能愼終如始하야 日新其德하야 而欲功過五帝하고 地廣三王하니 是以失之라
然이나 見危而思直臣하고 知過而能自悔하니 此其所以爲賢也니라
정월에 상上이 직접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낙양을 출발하였다.
2월에
상上이
업성鄴城에 이르러서 직접
제문祭文을 지어
위魏나라
태조太祖에게 제사하기를
注+[頭註]위魏나라 태조太祖는 조조曹操이다. “위기에 임하여 변통을 잘하고 적을 헤아려 기이한 계책을 썼으니, 한 장군으로서의 지혜는 유여하고
제왕帝王으로서의 재주는 부족하다.” 하였다.
“남을 알기는 쉽고 자신을 알기는 어려우니, 태종太宗이 위魏나라 무제武帝를 평한 것은 바로 자신이 기록한 것이다.
혹인이 ‘
한漢나라
고조高祖‧
광무제光武帝‧
소열제昭烈帝‧
위魏나라
무제武帝‧
당唐나라
문황文皇의
注+[頭註]문황文皇은 태종太宗이니, 시호를 문文이라 하였다. 인품이 어떠한가?’ 하고 묻기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고조高祖는 훌륭하고, 광무제光武帝와 소열제昭烈帝는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의 정사와 같다.
위魏나라 무제武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중원中原에서 함께 겨루었다면 제왕帝王의 자리가 누구에게 돌아갔을지 알 수 없으니, 장점과 단점이 대략 서로 비슷하다.
광무제光武帝와
소열제昭烈帝는 재주와 덕이 모두 넉넉하였고
위魏나라
무제武帝와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재주가 덕보다 나았지만 규모와 창업한 것은 모두
한漢나라
고조高祖의 범위 안에 있을 뿐이다.’”
注+[頭註]범範은 쇠를 주조할 때에 거푸집이 있는 것과 같고, 위圍는 테두리이다.
3월에 상上의 거가車駕가 정주定州에 이르니, 이세적李世勣과 강하왕江夏王이도종李道宗이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세적李世勣이 진격하여 요동성 아래에 이르니, 고구려 군대가 대패하였다.
상上이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서, 사졸들이 흙을 져다가 골짜기를 메우는 것을 보고는 상上이 그 중에 가장 무거운 것을 나누어 말 위에 실어 갖다 주었는데, 고구려를 이기자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백암성白巖城에 진군하였는데, 대장군 이사마李思摩가 쇠뇌로 발사한 화살을 맞았다.
상上이 직접 그를 위해 피를 빨아주니, 장병들이 이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정미일丁未日(6월 11일)에
상上의
거가車駕가
요동遼東을 출발하여
병진일丙辰日(6월 20일)에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진군하여 공격하니, 고구려 북부의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注+[釋義]연수延壽와 혜진惠眞은 모두 성姓이 고씨高氏이니, 고연수高延壽는 북부北部를 주관하고 고혜진高惠眞은 남부南部를 주관하였다. [通鑑要解]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은 《신당서新唐書》 〈고려전高麗傳〉에 “고연수高延壽는 북부대인北部大人이고 고혜진高惠眞은 남부대인南部大人이다.” 하였다. 15만의 병력을 인솔하고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하러 왔다.
상上이
제군諸軍에게 명해서 일제히 출동하여 분발해서 공격하게 하고, 이어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수항막受降幕(항복을 받는 장막)을
注+[頭註]장張은 설치함이고, 항降은 평성平聲(항복함)이다. 조당朝堂의
注+[頭註]행영行營에 궁성宮省(궁중의 관서)의 제도를 갖추었기 때문에 또한 조당朝堂이 있는 것이다. 곁에 설치하게 하였다.
제군諸軍이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전진하였는데, 마침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薛仁貴라는
注+[頭註]설인귀薛仁貴는 편호編戶(일반 평민平民)로서 모집에 응하였다. [通鑑要解] 이름은 예禮인데, 자字(仁貴)로써 알려졌다. 설안도薛安都의 6세손이다. 자가 크게 함성을 지르며 적진으로 뛰어드니, 향하는 곳마다 대적할 자가 없었다.
고구려 군사들이 이리저리 쓰러지자 대군大軍이 승세를 타니, 고구려의 군사가 크게 궤멸되었다.
기미일己未日(6월 23일)에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병력 3만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하니, 고구려의 온 나라가 크게 놀랐다.
후황성後黃城과
은성銀城이
注+[通鑑要解]후황성後黃城의 후後는 전前의 상대인 후後이다. 모두 스스로 군영을 거두어 도망하니, 수백리 이내에 다시는 밥 짓는 연기가 없었다.
상上이 파발을 띄워 태자에게 승전을 알리고, 인하여
고사렴高士廉 등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짐이 장수 노릇 함이 이와 같으니, 어떠한가?” 하고는 행차한 산의 이름을 바꾸어서
주필산駐驆山이라고 하였다.
注+[頭註]본래 이름은 육산六山이다.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한 것은 다만 사해四海의 부유함과 병력의 강함을 믿었을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에 평민의 신분으로 떨치고 일어나 뜻과 기운이 영명英明하고 과단성이 있어서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 천하를 취함에 근본을 둔 것이다.
나라가 다스려지고 편안한 지가 오래되자 깊숙이 궁중에 거하여 팔짱을 높이 끼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야심을 펼 것을 생각하여 팔뚝을 걷어붙이고
注+[頭註]액扼은 쥐는 것이고, 완腕은 손바닥 뒤의 관절 부분이다. 날뛰어서
용병用兵하기를 좋아하였다.
이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던
풍부馮婦가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풍부馮婦가 호랑이를 잡는 것으로써 태종太宗이 무력을 끝없이 사용함을 비유하였다. 풍부馮婦는 성명姓名이니, 용감하고 힘이 세어서 호랑이를 잘 잡았다. 그러므로 나아가 선사善士가 되었는데, 뒤에 들에서 호랑이를 보고 다시 호랑이를 잡으려 하니, 사士의 무리들이 그의 그칠 줄 모름을 비웃었다. 《맹자孟子》 〈진심盡心하下〉에 보인다. 옛버릇을 스스로 버리지 못한 것과 같으니,
예의禮義로써 마음을 기르고
중화中和로써 기운을 기르지 못해서 용맹으로 시작하여 용맹으로 끝났을 뿐이다.
《예기禮記》 〈빙의聘義〉에 이르기를 ‘용감하여 강하고 힘이 있음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예의禮義를 용감하게 행함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천하에 일이 없으면 이것을 예의禮義에 쓰고 천하에 일이 있으면 이것을 전승戰勝에 쓰니, 전승戰勝에 쓰면 상대할 자가 없고 예의禮義에 쓰면 순히 다스려진다.’ 하였다.
태종太宗은 천하에 일이 없을 때 이것을 예의禮義에 쓸 줄 모르고 오직 전승戰勝만을 아름답게 여겼다.
이 때문에 존귀한 천자天子의 몸으로 먼 오랑캐와 승부를 겨루어 한 번 싸워 승리하고는 스스로 공이라 여겨 그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여 신하들에게 과시하였으니, 그 그릇이 또한 작지 않은가.”
상上이
요좌遼左(遼東) 지역은 날씨가 일찍 추워져 초목이 말라죽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가 어려우며, 또 양식이 다 떨어지려 한다 하여
반사班師(回軍)하도록 명하였다.
注+[頭註]반사班師는 34권의 〈수기隋紀〉文帝 경술년조庚戌年條(590)에 보인다.
상上이 설인귀薛仁貴에게 이르기를 “짐朕의 제장諸將들이 다 늙어서 신진新進의 날래고 용감한 자를 얻어 장수로 삼을 것을 생각하였는데, 경만한 자가 없다.
짐은 요동遼東을 얻은 것을 기뻐하지 않고 경을 얻은 것을 기뻐하노라.” 하였다.
상上은 요동遼東에서 공을 이루지 못했다 하여 깊이 뉘우치며 한탄하기를 “위징魏徵이 만약 살아있었다면 짐으로 하여금 이번에 출정出征하지 않게 했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파발을 보내어 위징魏徵을 소뢰少牢로 제사하고 자신이 지은 비석을 다시 세웠다.
“태종太宗은 무력을 좋아하기를 마지않아서 약한 오랑캐에게 곤궁하였으니, 수隋나라 양제煬帝와 다를 것이 없다.
이는 끝을 잘 삼가기를 처음과 같이 하여 날로 그 덕德을 새롭게 하지 못하고서 공功은 오제五帝를 능가하고 영토는 삼왕三王보다 넓게 하고자 하였으니, 이 때문에 잃은 것이다.
그러나 위태로울 때에 충직한 신하를 생각하였고 허물을 알고 스스로 뉘우쳤으니, 이 때문에 어진 군주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