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夏王道宗
과 薛萬徹等
이 招諭勅勒
注+[附註]時에 號高車部러니 其後分散하야 曰薛延陀, 曰回紇, 曰都播, 曰骨利幹, 曰多覽葛, 曰同羅, 曰僕固, 曰拔野古, 曰思結, 曰渾, 曰解薛, 曰奚結, 曰阿趺, 曰契苾, 曰白하야 別爲十五部하니 總號勅勒이요 又號鐵勒이라 諸部
하니 其酋長皆喜
하야 頓首請入朝
라
上大喜
하야 詔以戎, 狄
이 與天地俱生
하야 上皇竝列
注+[頭註]上皇은 謂伏羲니 三皇之最先者라 故曰上皇이라이러니 流殃構禍 乃自運初
注+[頭註]謂唐興運之初也라 라
朕이 聊命偏師하야 遂擒頡利하고 始弘廟略하야 已滅延陀라
鐵勒百餘萬戶 散處北溟
이러니 遠遣使人
하야 委身內屬
하고 請同編列
注+[頭註]編戶之列이니 謂列次名籍也라 하야 竝爲州郡
하니 混元注+[頭註]太古之時에 元氣混然이라 故曰混元이라 以降으로 殊未前聞
이라
太宗이 不得志於東夷하고 而欲收功於北荒하야 因延陀破亡하야 以兵臨之에 勢如振槁하야
左袵之民
이 解辮
注+[頭註]辮은 音變이니 通作編이라 漢終軍傳解編髮이라內屬
하니 自以爲開闢以來
로 未之有也
라
殊不思中國之與夷狄은 山川之所限이요 風氣之所移라
言語不通하고 嗜欲不同하야 得其地라도 不可居요 得其民이라도 不可使也니
且得之를 旣以爲功이면 則失之를 必以爲恥니 其失이 不在於己면 則在於子孫이라
故有征討之勞, 饋餉之擾에 民不堪命하야 而繼之以亡하니 隋煬帝是也라
太宗이 矜其功能하고 好大無窮하야 華夷中外를 欲其爲一하니 非所以遺後嗣, 安中國之道니
九月에 車駕幸靈州하니 勅勒諸部 相繼詣靈州者 數千人이라
上이 爲詩하야 序其事曰 雪恥酬百王이요 除兇報千古라
○ 蕭瑀性狷介
注+[頭註]狷은 有所不爲也요 介는 特也라[通鑑要解] 狷은 褊急이요 介는 耿介也라 하야 與同僚多不合
이라
嘗言於上曰 房玄齡이 與中書門下衆臣으로 朋黨不忠하고 執權膠固어늘 陛下不詳知하시니 但未反耳니이다 上曰 卿言이 得無太甚가
人君이 選賢才하야 以爲股肱心膂인댄 當推誠任之요
朕雖不能聰明
이나 何至頓迷
注+[頭註]頓은 邃也라 臧
乃至於是
리오
今
君臨天下하고 富有四海로되 而
承歡膝下注+[釋義]孝經에 故親生之膝下라한대 注에 膝下는 謂孩幼時라하니라 를 永不可得하니 此
는 子路所以有
負米之恨注+[釋義]子路曰 昔者에 由也事二親之時에 常食藜藿之實하고 爲親負米於百里之外러니 親沒之後에 南遊於楚하야 從車百乘하고 積粟萬鍾하니 欲食藜藿하고 爲親負米나 不可復得也로라 也
라
褚遂良
이 上疏
하야 以爲玄齡
이 自義旗之始
로 翼贊聖功
注+[通鑑要解]謂謁見於軍門하야 署爲記室之時也라 하야
武德
注+[頭註]高祖라 之季
에 冒死決策注+[通鑑要解]謂誅建成之時也라 하고 貞觀之初
에 選賢立政注+[通鑑要解]謂選王, 魏하고 在朝文武를 隨能收敍之時也라 하야 人臣之勤
이 玄齡爲最
하니 不可遐棄
니이다
陛下若以其衰老
면 亦當諷諭
하야 使之致仕
하야 退之以禮
요 不可以淺鮮之過
注+[釋義]鮮은 上聲이니 少也라 로 棄數十年之勳舊
니이다
上이 遽召出之러니 頃之에 玄齡이 復避位還家하다
久之
에 上
이 幸芙蓉園
이어늘 玄齡
이 勅子弟
하야 掃門庭
注+[釋義]汛은 灑也요 掃는 除也라 하고 曰 乘輿且至
하리라 有頃
에 上
이 果幸其第
하야 因載玄齡還宮
하다
3월 기사일己巳日(7일)에 상上의 거가車駕가 경사京師로 돌아왔다.
강하왕江夏王이도종李道宗과
설만철薛萬徹 등이 사신을 보내어
칙륵勅勒의
注+[附註]칙륵勅勒은 원위元魏(北魏) 때에 고차부高車部라고 이름하였는데, 그 뒤에 나누어 흩어져서 설연타薛延陀‧회흘回紇‧도파都播‧골리간骨利幹‧다람갈多覽葛‧동라同羅‧복고僕固‧발야고拔野古‧사결思結‧혼渾‧해설解薛‧해결奚結‧아부阿趺‧걸필契苾‧백습白霫 등 15부部가 되었으니, 이를 총칭하기를 칙륵勅勒이라 하고 또 철륵鐵勒이라고도 하였다. 여러 부족들을 불러 타이르니, 그 추장들이 모두 기뻐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들어와 조회할 것을 청하였다.
상上이 크게 기뻐하여
조명詔命을 내리기를 “
융戎과
적狄이 천지와 함께 태어나서 태고적의
황제皇帝와 함께 나열되니,
注+[頭註]상황上皇은 복희伏羲를 이르니, 복희伏羲가 삼황三皇 중에 가장 먼저이기 때문에 상황上皇이라 부른다. 그들이
앙화殃禍를 남긴 것이 마침내 개국한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注+[頭註]운초運初는 당唐나라 국운이 일어난 초기를 이른다.
짐朕이 겨우 편사偏師에게 명하여 마침내 힐리頡利를 사로잡고 비로소 국가의 계략計略을 크게 하여 이미 설연타薛延陀를 멸망시켰다.
철륵鐵勒의 백여만 호가
북명北溟(사막 북쪽)에 흩어져 살았는데, 멀리 사신을 보내어 몸을 바쳐 우리나라에 복속하고
편호編戶에 나열되어
注+[頭註]편열編列은 민호民戶의 대열에 편입하는 것이니, 차례로 나열하여 이름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을 이른다. 함께
주군州郡이 되기를 청하니, 천지가 개벽한
注+[頭註]태고적에는 원기元氣가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혼원混元이라고 이른 것이다. 이후로 듣지 못했던 일이다.
마땅히 예를 갖추어 종묘宗廟에 고하고 인하여 온 천하에 반포해서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태종太宗이 동이東夷에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북쪽 변방에서 공을 거두고자 하여 설연타薛延陀의 패망을 계기로 군대를 거느리고 임함에 형세가 마치 마른 낙엽을 흔들어 떨어뜨리는 것처럼 쉬웠다.
그리하여
좌임左袵한 오랑캐 백성들이 변발한 머리를 풀고
注+[頭註]변辮은 음이 변이니, 통용하여 편編으로 쓴다. 《전한서前漢書》 〈종군전終軍傳〉에 “편발編髮을 풀었다.”라고 하였다. 중국에 복속하자,
태종太宗이 스스로 ‘천지가 개벽한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던 일이다.’라고 여겼으니,
이는 중국中國과 이적夷狄은 산천이 한계지은 바이고, 풍속이 서로 달라서
언어가 통하지 않고 기욕嗜慾이 달라서 그 땅을 얻더라도 살 수 없고 그 백성을 얻더라도 부릴 수 없으니,
이들을 나열하여 군현郡縣으로 삼는 것은 헛된 명성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폐해를 받는 것임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또 얻는 것을 이미 공으로 여겼다면 잃는 것을 반드시 수치로 여길 것이니, 잃는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으면 자손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정벌하는 수고로움과 군량을 공급하는 소요가 있어서 백성들이 명령을 견디지 못하여 멸망으로 뒤를 잇게 된 것이니,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태종太宗은 공과 재능을 자랑하고 큰 체하기를 좋아함이 끝이 없어서 사이四夷와 중외中外를 하나로 만들고자 하였으니, 이는 후사에게 물려주고 중국中國을 편안히 하는 방도가 아니다.
이는 마땅히 경계로 삼아야 하고 사모해서는 안 된다.”
9월에 상上의 거가車駕가 영주靈州에 행차하니, 칙륵勅勒의 여러 부족 중에 서로 이어 영주靈州에 오는 자가 수천 명이었다.
상上이 시詩를 지어 이 일을 서술하기를 “치욕을 설욕하여 백왕百王에게 보답하였고 흉적을 제거하여 천고千古에 보답했다.” 하였다.
공경公卿들이 영주靈州에 비석을 새길 것을 청하자 상上이 따랐다.
소우蕭瑀는 성품이 고집스럽고 꼿꼿하여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아서
注+[頭註]견狷은 하지 않는 바가 있는 것이요, 개介는 홀로이다. [通鑑要解]견狷은 도량이 좁고 성정性情이 조급한 것이고, 개介는 꼿꼿하여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는 것이다. 동료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찍이 상上에게 아뢰기를 “방현령房玄齡이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여러 신하들과 붕당朋黨을 지어서 군주에게 충성하지 않고 권력을 잡아서 견고히 하려는데도 폐하께서 자세히 알지 못하시니, 단지 아직 배반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니, 상上이 이르기를 “경卿의 말이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인군人君이 어질고 재능 있는 사람을 뽑아서 고굉股肱과 심려心膂로 삼았다면 마땅히 정성을 미루어 그에게 맡겨야 한다.
사람에게 완비되기를 구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취해야 한다.
짐朕이 비록 총명하지는 못하나 어찌 선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호도함이
注+[頭註]돈頓은 깊음이다. 마침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겠는가.” 하였다.
상上이 장손무기長孫無忌 등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세속에서는 모두 생일을 즐거워하나 짐朕에게는 도리어 서글픈 감회가 인다.
지금 천하에 군림하고 부유함은 온 천하를 소유하였으나 어버이 슬하에서
注+[釋義]《효경孝經》 〈성치장聖治章〉에 “그러므로 애친愛親하는 마음이 어려서 슬하膝下에 있을 때 생겨난다.” 하였는데, 주注에 “슬하膝下는 어린아이였을 때를 이른다.” 하였다. 어버이를 받들며 기쁘게 해드리는 일을 영원히 할 수가 없으니, 이는
자로子路가 어버이를 위해 쌀을 져 오고자 하나 할 수 없음을 한탄한 것과 같다.
注+[釋義]자로子路가 말하기를 “옛날에 내가 양친을 섬길 적에는 가난하여 항상 명아주잎과 콩잎국을 먹었으며, 어버이를 위해 백리 밖에서 쌀을 져 왔다. 어버이가 돌아가신 뒤에 남쪽으로 초楚나라에 가서 벼슬하여 뒤따르는 수레가 백 대나 되고 쌓인 곡식이 만종萬鍾이나 되니, 이제 비록 명아주와 콩잎을 먹고 부모를 위하여 쌀을 져 오고자 하나 다시는 할 수가 없다.”하였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슬프고 슬프다, 부모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 몹시 수고하셨다.’ 하였으니, 어찌 부모가 수고한 날에 다시 잔치를 열고 즐거워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방현령房玄齡이 일찍이 작은 허물로 견책을 받아 집에 돌아가 있었다.
저수량褚遂良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
방현령房玄齡은 의로운 깃발을 높이 들었던 초창기부터
성상聖上의 공을 도왔고,
注+[通鑑要解]방현령房玄齡이 위북渭北에 있던 태종太宗의 군문軍門을 찾아가서 위북도행군기실참군渭北道行軍記室參軍으로 임명되었을 때를 이른다.
무덕武德注+[頭註]무덕武德은 고조高祖의 연호이다. 말년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결단하였으며,
注+[通鑑要解]죽음을 무릅쓰고 계책을 결단하였다는 것은 이건성李建成을 주벌했을 때를 이른다.정관貞觀 초기에는
현자賢者를 선발해서 정사를 확립하여
注+[通鑑要解]현자賢者를 선발하여 정사를 확립한 것은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을 선발하고 조정의 문관과 무관을 능력에 따라 거두어 임용했을 때를 이른다. 신하로서 근로한 것은
방현령房玄齡이 가장 으뜸이니, 멀리 버려서는 안 됩니다.
폐하께서 만약 그가 노쇠했다고 여기신다면 또한 마땅히 넌지시 타일러서 그로 하여금
치사致仕하여 예로써 물러나게 해야 할 것이요, 하찮은 과실로
注+[釋義]선鮮은 상성上聲이니, 적음이다. 수십 년의
구훈舊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上이 급히 불러서 나오게 하였는데, 얼마 후 방현령房玄齡이 다시 지위를 피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오랜 뒤에
상上이
부용원芙蓉園에 행차하자,
방현령房玄齡이 자제들에게 명하여 문과 뜰을 청소하게 하고
注+[釋義]신汛은 물을 뿌리는 것이고, 소掃는 소제함이다. 이르기를 “
상上의
승여乘輿가 장차 이를 것이다.” 하였는데, 얼마 후
상上이 과연 그의 집에 행차하고 인하여
방현령房玄齡을 수레에 태워 궁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