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에 上이 作帝範十二篇하야 以賜太子하니 曰 君體, 建親, 求賢, 審官, 納諫, 去讒, 戒盈, 崇儉, 賞罰, 務農, 閱武, 崇文이라
且曰 修身治國
이 備在其中
하니 一旦不諱
면 更無所言矣
리라 又曰 汝當更求古之哲王
注+[頭註]哲은 智也라 하야 以爲師
요 如吾
는 不足法也
라
夫取法於上이면 僅得其中이요 取法於中이면 不免爲下라
錦繡珠玉
이 不絶於前
하고 宮室臺榭
注+[釋義]土高曰臺요 有木曰榭라 를 屢有興作
하며 犬馬鷹隼
注+[通鑑要解]隼은 鷙鳥也라 을 無遠不致
하고 行遊四方
하야 供頓煩勞
하니
顧
注+[頭註]念也라 我
弘濟蒼生에 其益이 多하고 肇造區夏에 其功이 大하야 益多損少故로 人不怨하고 功大過微故로 業不注+[通鑑要解]墮는 與隳通이라 나
汝無我之功勤하고 而承我之富貴하니 竭力爲善則國家僅安이요 驕惰奢縱則一身不保리라
且成遲敗速者는 國也요 失易得難者는 位也니 可不惜哉며 可不愼哉아
上謂侍臣曰 漢武帝窮兵三十餘年
에 疲弊中國
이나 所獲無幾
하니 豈如今日
에 綏之以德
하야 使
窮髮之地注+[釋義]地는 以草木爲髮毛하니 北方寒極하야 草木不生이라 故로 曰窮髮이니 所謂不毛之地也라 語出莊子하니라 로 盡爲編戶乎
아
○ 上
이 營玉華宮
할새 務令儉約
하야 惟所居殿
을 覆以瓦
하고 餘皆茅
하다
徐惠
注+[附註]徐孝德之女也니 正二品으로 九嬪之一이요 惠는 名也라 生五月에 能言하고 四歲에 通論語, 詩하고 八歲에 自曉屬文하니 太宗이 召爲才人하고 進爲充容이라 卒에 (諡)[贈]賢妃하니라 以上
이 東征高麗
하고 西討龜玆
注+[原註]音丘慈니 西域國이라하며 翠微, 玉華
에 營繕相繼
하고 又服玩頗華靡
라하야 上疏諫
하니
其略曰 以有盡之農功으로 塡無窮之巨浪하고 圖未獲之他衆하야 喪已成之我軍이니이다
晉武는 奄有三方注+[頭註]魏, 蜀, 吳니 三方鼎峙라가 至晉混一하니라호되 翻成覆敗之業하니
豈非矜功恃大하고 棄德輕邦하고 圖利忘危하고 肆情縱欲之所致乎잇가
又曰 珍玩技巧는 乃喪國之斧斤이요 珠玉錦繡는 實迷心之酖(鴆)毒이라하고
又曰 作法於儉이라도 猶恐其奢어든 作法於奢하면 何以制後리잇고
○ 初
에 左武衛將軍李君羨
이 直玄武門
할새 時
에 太白
이 屢晝
이라
太史占云 女主昌이라하고 民間又傳秘記云 唐三世之後에 女主武王이 代有天下라하야늘 上惡之러라
會
에 與諸武臣宴宮中
할새 行酒令
에 使各言小名
注+[頭註]行酒令者는 一人爲令하고 餘人以次行之니 使各言小名이 卽酒令也라 하니 君羨
이 自言名
이라
上愕然
하고 因笑曰
何物女子乃爾勇健고 又以君羨
의 官稱封邑
이 皆有武字
注+[頭註]左武衛將軍 武連縣公 武安 李君羨이 直玄武門이라 라하야 深惡之
하다
後出爲華州刺史
하니 有布衣
道信
注+[原註]員은 音運이니 姓也라 하야 自言能絶粒
注+[釋義]米食曰粒이니 絶粒은 導引辟穀也라 하고 曉佛法
이라하야늘
御史奏
호되 君羨
이 與妖人交通
하야 謀不軌
注+[頭註]軌는 法度也니 君君臣臣이 所謂法也라 爲人臣而欲圖危社稷을 謂之不軌라 라하니 君羨
이 坐誅
하다
○ 上
이 密問太史令李淳風
호되 秘記所云
이 信有之乎
라 對曰 臣
이 仰稽天象하고 俯察曆數하니 其人
이 已在陛下宮中
하야 爲親屬
注+[頭註]十一年에 武氏入後宮하야 爲才人이라[通鑑要解] 按十一年에 武士女 年十四러니 上聞其美하고 入後宮爲才人이라 이라
自今不過三十年에 當王天下하야 殺唐子孫殆盡하리니 其兆旣成矣니이다
上曰 疑似者를 盡殺之 何如오 對曰 天之所命은 人不能違也니 王者不死요 徒多殺無辜니이다
且自今以往三十年이면 其人已老하리니 庶幾頗有慈心하야 爲禍或淺이요
今借使得而殺之라도 天或生壯者하야 肆其怨毒이면 陛下子孫이 無遺類矣리이다
今天下無事요 惟東征未已어늘 群臣이 莫敢諫하니 吾知而不言이면 死有餘責이라하고
乃上表諫
하야 以爲 陛下每決一重囚
에 必令三覆五奏
注+[頭註]覆은 審也라 必令三覆五奏는 見上卷辛卯年이라 하며 進素膳
하고 止音樂者
는 重人命也
니이다
今에 驅無罪之士卒하야 委之鋒刃之下하야 使肝腦塗地하시니 獨不足愍乎잇가
向使高麗違失臣節이면 誅之可也요 侵擾百姓이면 滅之可也요 他日能爲中國患이면 除之可也어니와
今無此三條
어늘 而坐煩中國
하야 內爲前代雪恥
注+[頭註]隋煬帝가 三伐高麗라가 敗還하니 此中國恥也라 하고 外爲新羅報讐
하시니 豈非
所存者小하고 所損者大乎
잇가
儻蒙錄此
注+[通鑑要解]此下에 落哀鳴二字하니 註云 論語鳥之將死에 其鳴也哀하고 人之將死에 其言也善이라하니라 하시면 死且不朽리이다
上이 自臨視하야 握手與訣에 悲不自勝이러니 薨하다
太宗이 以上聖之才로 取孤隋, 攘群盜하고 天下(以)[已]平에 用玄齡, 如晦輔政이라
承大亂之餘
하야 紀綱彫弛
어늘 而能興仆
僵
하야 使號令典刑
으로 燦然罔不完
하야 雖數百年
이라도 猶蒙其功
하니 可謂名宰相矣
라
唐
이 有言
호되 帝定禍亂而房, 杜
注+[釋義]房玄齡과 杜如晦라 不言功
하고
王, 魏
注+[釋義]謂王珪와 魏徵이라 善諫而房, 杜讓其直
하고
英, 衛
注+[釋義]英은 謂英國公李勣이요 衛는 謂衛國公李靖이라 善兵而房, 杜濟以文
하야 持衆美
하야 效之君
이러니
是後
에 新進
用事
어늘 玄齡身處要地
하야 不吝權
하야 善始以終
하니 此其成令名者
라하니 諒其然乎
인저
如晦는 任事日淺이나 觀玄齡許與와 及帝所親款하면 則謀謨果有大過人者라
方君明臣良하야 志協議從하야 相資以成하니 固千載之遇니 蕭, 曹之勛(勳)이 不足進焉이라
雖然
이나 宰相
은 所以代天者也
니 輔贊彌縫
注+[頭註]猶補合也라而
하야 使斯人
으로 由而不知
는 非明哲
이면 曷臻是哉
아
정월正月에 상上이 《제범帝範》 12편을 지어 태자에게 주니, 〈군체君體〉, 〈건친建親〉, 〈구현求賢〉, 〈심관審官〉, 〈납간納諫〉, 〈거참去讒〉, 〈계영戒盈〉, 〈숭검崇儉〉, 〈상벌賞罰〉, 〈무농務農〉, 〈열무閱武〉, 〈숭문崇文〉이었다.
상上이 또 이르기를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이 가운데에 구비되어 있으니, 하루아침에 내가 죽게 되면 다시 말할 수가 없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너는 마땅히 다시 옛날 명철한 왕을
注+[頭註]철哲은 지혜로움이다. 구하여 스승으로 삼아야 할 것이니, 나와 같은 자는 본받을 것이 못 된다.
상등上等에서 법을 취하면 겨우 중등中等을 얻고 중등中等에서 법을 취하면 하등下等이 됨을 면치 못한다.
내가 제위帝位에 거한 뒤로 불선不善함이 많았다.
금수錦繡와
주옥珠玉이 앞에 끊이질 않고
궁실宮室과
대사臺榭를
注+[釋義]흙을 높이 쌓은 것을 대臺라 하고, 대臺 위에 나무를 심은 것을 사榭라 한다. 여러 번 지었으며, 개와 말과 새매를
注+[通鑑要解]준隼은 맹금류(새매)이다. 먼 곳이라 하여 가져오지 않음이 없고 사방을 유람하여 여행에 필요한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이 번거롭고 수고로웠다.
이는 다 나의 큰 잘못이니 이것을 옳다고 여겨 본받지 말아라.
돌아보건대(생각건대)
注+[頭註]고顧는 생각함이다. 내가
창생蒼生들을 크게 구제하여 그들에게 유익함이 많고
대당大唐을 창건함에 그 공이 커서, 유익한 일이 많고 해로운 일이 적기 때문에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으며, 공로가 크고 허물이 적기 때문에
왕업王業이 훼손되지 않은 것이다.
注+[通鑑要解]타墮는 휴隳(무너지다)와 통한다.
그러나 진미진선盡美盡善함에 비교한다면 진실로 부끄러움이 많다.
너는 나와 같은 공로가 없으면서 나의 부귀를 이어받았으니, 힘을 다하여 선을 행하면 국가가 겨우 편안할 것이요, 교만하고 게으르고 사치하고 방종하면 제 몸 하나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다.
또 성공은 더디고 실패는 빠른 것은 나라이고 잃기는 쉽고 얻기는 어려운 것은 지위이니, 아끼지 않을 수 있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결골結骨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신체가 장대하였으며 머리털이 붉고 눈동자가 푸른색이었다.
예로부터 중국과 통하지 않았는데, 〈철륵鐵勒의 여러 부족이 모두 복종했다는 말을 듣고〉이때에 들어와 조회하였다.
상上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30여 년 동안 무력을 남용하여 중국을 피폐하게 하였으나 얻은 것은 얼마 되지 않으니, 어찌 오늘날
덕德으로 편안하게 하여 불모지로
注+[釋義]땅은 풀과 나무를 모발로 삼는데, 북방은 날씨가 매우 추워서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궁발窮髮이라고 한 것이니, 이른바 불모지不毛地라는 것이다. 이 말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에 나온다. 하여금 모두
편호編戶가 되게 한 것만 하겠는가.” 하였다.
상上이 옥화궁玉華宮을 경영할 적에 되도록 검약하게 하여 오직 거처하는 궁전만 기와를 덮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띠풀로 지붕을 덮게 하였다.
서혜徐惠는
注+[附註]서혜徐惠는 서효덕徐孝德의 딸인 충용充容이니, 충용充容은 정2품으로 구빈九嬪의 하나이고 혜惠는 이름이다. 서혜徐惠는 태어난 지 5개월 만에 말을 하고 4세에 《논어論語》와 《시경詩經》을 통달하며 8세에 혼자서 글을 짓는 것을 깨우치니, 태종太宗이 불러서 재인才人으로 삼고 올려서 충용充容으로 삼았다. 서혜徐惠가 죽자 현비賢妃를 추증하였다.상上이 동쪽으로는 고구려를 정벌하고 서쪽으로는
구자龜玆를 토벌하며,
注+[原註]구자龜玆는 음이 구자이니, 서역西域의 나라이다.취미궁翠微宮과
옥화궁玉華宮을
영건營建하고
수선修繕하는 일이 계속 이어지고 또
복식服飾과
완호玩好가 자못 화려하다 하여 상소하여 간하였다.
그 대략에 아뢰기를 “다함이 있는 농사의 수입으로 다함이 없는 큰 물결(토목공사의 큰 비용)을 메우려 하고, 얻지 못할 다른 나라의 무리들을 도모하다가 이미 이루어진 우리나라 군대를 잃었습니다.
옛날 진시황秦始皇은 6국을 병탄하였으나 도리어 나라가 위태롭고 멸망하는 기업基業을 자초하였고,
진晉나라
무제武帝는
위魏‧
촉蜀‧
오吳삼국三國을 곧바로 차지하였으나
注+[頭註]삼방三方은 위魏‧촉蜀‧오吳이니, 삼방三方이 솥의 발처럼 서로 대치하다가 진晉나라 때에 이르러 통일되었다. 도리어 실패하고 멸망하는
기업基業을 이루었으니,
이는 어찌 공업을 자랑하고 강대함을 믿으며, 덕을 버리고 나라를 경시하며, 이익을 도모하고 위태로움을 잊으며, 정욕을 방종하게 부린 소치가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또 이르기를 “진귀한 노리개와 기교는 바로 나라를 망하게 하는 도끼와 자귀이고, 주옥珠玉과 금수錦繡는 실로 마음을 혼미하게 하는 짐독鴆毒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법을 만들 때에 검소하게 하더라도 오히려 사치스럽게 될까 두려운데 법을 만들 때에 사치스럽게 한다면 어떻게 후세를 제재하겠습니까.” 하니,
상上이 그 말을 좋게 여겨서 심히 예우하고 소중히 여겼다.
처음에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이군선李君羨이 현무문玄武門에서 숙직하였는데, 이때 태백성太白星이 자주 낮에 나타났다.
태사太史가 점을 치기를 “여주女主가 흥왕할 것이다.” 하였고, 또 민간에 전하는 《비기秘記》에 이르기를 “당唐나라는 삼대三代가 지난 뒤에 여주女主무왕武王이 이씨李氏를 대신하여 천하를 소유할 것이다.” 하니, 상上이 이를 싫어하였다.
마침 여러 무신들과 궁중에서 연회할 적에
주령酒令을 행하여 각각 자신의 어렸을 적 이름을 말하게 하니,
注+[頭註]행주령行酒令사각언소명행주령使各言小名行酒令사각언소명使各言小名:주령酒令을 행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영관令官(총감독)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순서대로 이 영관令官의 영을 행하는 것이니, 각각 어렸을 적의 이름을 말하게 한 것이 바로 주령酒令이다. 이군선李君羨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이
오랑五娘이라고 말하였다.
상上이 놀라고 인하여 웃으며 말하기를 “무슨 놈의 여자가 마침내 너와 같이 용맹하고 건장한가.” 하고, 또
이군선李君羨의
관칭官稱과
봉읍封邑에 모두 ‘
무武’字가 있다 해서
注+[頭註]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 무련현공武連縣公, 무안武安 사람, 이군선李君羨이 현무문玄武門을 맡고 있었다. 그를 깊이 미워하였다.
뒤에
이군선李君羨이
화주자사華州刺史로 나갔는데,
포의布衣(평민)인
운도신員道信이라는
注+[原註]원員은 음이 운이니, 성姓이다. 자가 있어 곡기를 끊고 살 수 있으며
注+[釋義]쌀을 먹는 것을 입粒이라고 하니, 절립絶粒은 도인술導引術의 벽곡辟穀과 같은 것이다. 불법을 깨달았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이군선李君羨이 그를 깊이 존경하여 믿고 자주 서로 어울려 사람을 물리치고 말을 나누곤 하였다.
어사御史가
상주上奏하기를 ‘
이군선李君羨이 요망한 자와 결탁하여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자,
注+[頭註]궤軌는 법도이니, 임금은 임금 노릇 하고 신하는 신하 노릇 하는 것이 이른바 법이다. 신하가 되어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기를 도모하는 것을 불궤不軌라고 한다. 이군선李君羨이 죄에 걸려 멸족당하였다.
상上이
태사령太史令이순풍李淳風에게 “《
비기秘記》에 말한 것이 사실인가?” 하고 은밀히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이 위로
천상天象을 상고하고 아래로
역수曆數를 살펴보니, 이 사람이 이미 폐하의 궁중에 있어 폐하의 친속이 되었습니다.
注+[頭註]정관貞觀 11년(637)에 무씨武氏가 후궁後宮으로 들어와 재인才人이 되었다. [通鑑要解] 살펴보건대 정관貞觀 11년에 무사확武士彠의 딸이 14세였는데 상上이 그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후궁으로 들여 재인才人을 삼았다.
지금부터 30년이 지나지 않아 마땅히 천하에 왕이 되어서 당唐나라 자손들을 죽여서 거의 다 없앨 것이니, 그 조짐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르기를 “의심스러운 자를 다 죽이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하늘이 명하는 바는 사람이 어길 수 없으니, 왕王이 될 자는 죽지 않고 다만 죄 없는 자만 많이 죽일 뿐입니다.
또 지금 이후로 30년이 지나면 그 사람도 이미 늙을 것이니 행여 인자한 마음이 있어서 화됨이 혹 적을 것이요,
지금 가령 그를 잡아 죽인다 해도 하늘이 혹 건장한 자를 낳아서 원독怨毒을 부리게 하면 폐하의 자손은 남는 무리가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였다.
방현령房玄齡이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아들들에게 이르기를 “내 주상主上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다.
지금 천하가 무사하고 오직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는 일이 끝나지 않고 있는데 여러 신하들 중에 누구도 감히 간하는 이가 없으니, 내가 이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죽어서도 남은 책임이 있다.” 하고,
마침내
표문表文을 올려 간하여 아뢰기를 “폐하께서 매번 죄가 중한 죄수 한 명을 판결할 때마다 반드시 세 번 반복하여
심리審理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注+[頭註]복覆은 살핌이다. 반드시 세 번 반복해서 심리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한 것은 상권上卷신묘년조辛卯年條(631)에 보인다. 소찬素饌을 올리고 음악을 그치게 하시니, 이는
인명人命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죄 없는 사졸들을 내몰아 적의 칼날에 죽임을 당하여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게 하시니, 이것은 유독 가엽게 여길 만하지 않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신하의 예절을 위배하였다면 주벌하는 것이 가하고, 만약 우리나라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멸하는 것이 가하고, 만약 후일에 중국의 후환이 될 수 있다면 제거하는 것이 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 가지가 없는데도 아무 연고 없이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는
전대前代(隋나라)를 위하여 설욕하고
注+[頭註]수隋나라 양제煬帝가 세 번 고구려를 정벌했다가 모두 패하고 돌아왔으니, 이것이 중국의 치욕이라는 것이다. 밖으로는
신라新羅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려 하시니, 어찌 보존되는 것은 적고 손해되는 것은 크지 않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스스로 허물을 고쳐 새롭게 하도록 허락하소서.
만약 제가 마지막으로 올리는 말을
채납採納해 주시는 은혜를 입는다면
注+[通鑑要解]이 아래에 ‘애명哀鳴’ 두 글자가 빠졌다. 주註에 이르기를 “《논어論語》 〈태백泰伯〉에 ‘새가 장차 죽으려 할 때에는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장차 죽으려 할 때에는 그 말이 착한 법’이라고 했다.” 하였다. 신은 죽어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직접 가서 보고는(문병하고는) 손을 잡고 방현령房玄齡과 영결하며 슬픈 마음을 금치 못하였는데, 방현령房玄齡이 죽었다.
《신당서新唐書》 〈방현령房玄齡‧두여회열전杜如晦列傳〉贊에 말하였다.
“태종太宗은 상성上聖의 재주로 외로운 수隋나라를 점령하고 여러 도둑들을 물리쳤으며 천하가 평정된 뒤에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등용하여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큰 난리의 뒤를 이어서 기강이 해이해졌는데, 쓰러진 것을 일으키고 넘어진 것을 세워 호령號令과 전형典刑으로 하여금 찬란하여 완전하지 않음이 없게 해서 비록 수백 년 뒤에도 오히려 그 공을 입게 하였으니, 명재상이라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룩하게 된 자취를 찾아보면 거의 볼 수가 없음은 어째서인가?
당唐나라
유방柳芳이 말하기를 ‘황제가
화란禍亂을 평정하니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注+[釋義]방두房杜는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이다. 공을 말하지 않았고,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이
注+[釋義]왕위王魏는 왕규王珪와 위징魏徵을 이른다. 간언을 잘하니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그 정직함을 사양하였고,
영공英公과
위공衛公이
注+[釋義]영英은 영국공英國公이적李勣(李世勣)이고, 위衛는 위국공衛國公이정李靖이다. 용병用兵을 잘하니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문文으로써 구제하여, 여러 아름다운 공적을 가져다가 군주에게 바쳤는데,
이 뒤에 신진新進이 번갈아 용사用事하자 방현령房玄齡은 자신이 요직에 있으면서 권력權力을 아끼지 아니하여 시작을 잘하고 끝을 잘 마쳤으니, 이것이 훌륭한 명성을 이루게 된 이유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이다.
두여회杜如晦는 정사를 맡은 날짜가 얼마 되지 않으나 방현령房玄齡이 허여한 것과 황제가 친히 하고 가까이한 바를 살펴보면 계책이 과연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남이 있었다.
군주는 밝고 신하는 어질어서 뜻이 합하고 의논을 따라주어서 서로 도와 이루었으니, 이는 진실로 천 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드문 기회로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의 공로도 이보다 더 낫지 못하였다.
그러나 재상은 하늘을 대신하는 자이니, 군주를 보필하고 이리저리 주선함에
注+[頭註]미봉彌縫은 보합補合과 같다.용用에 간직해 두어서 이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면서도 알지 못하게 한 것은 명철한 자가 아니면 어찌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저 자신을 드날리고 명예를 취하여 가가호호로 하여금 분명히 알게 하는 자들은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가 하찮게 여기는 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