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四月
에 上
이 有疾
에 謂太子曰 李世勣
注+[頭註]本姓徐니 高祖戊寅年에 賜姓李氏하야 附宗籍하고 封英國公이러니 後避太宗諱하야 但名勣이라이 才智有餘
나 然汝與之無恩
호니 恐不能懷服
이라
我今黜之하리니 若其卽行이어든 俟我死하야 汝於後用爲僕射하야 親任之요 若徘徊顧望이어든 當殺之耳니라
五月
에 以同中書門下三品李世勣
으로 爲疊州
注+[釋義]括地志에 疊州는 台州屬郡也니 在隴右라 都督
하니 世勣
이 受詔
하고 不至家而去
하다
以爲愚也인댄 則不可以託孤幼而寄天下矣요 以爲賢也인댄 當任而勿疑니 何乃憂後嗣之不能懷服하야 先黜之而後用耶아
夫欲奪其心而折之以威
하고 欲得其力而懷之以恩
은 此漢祖所以馭黥, 彭
注+[頭註]黥布, 彭越이라 之徒
니 狙詐
注+[頭註]狙는 猿也니 善詐故로 以爲名이라 猶狐疑, 猶豫之類라之術也
라
五伯(霸)之所{以}不爲也니 豈堯, 舜親賢之道乎아
苟以是心而待其臣이면 則利祿之士는 可得而使也어니와 賢者는 不可得而致也라
若夫祿之以天下而不顧
하고 繫馬千駟而不視者
注+[頭註]伊尹也니 라 를 太宗
이 豈得而用之哉
아
君待臣以道면 臣以道報之하고 君待臣以利면 臣以利報之하나니 此는 必然之理也라
太宗이 以勣輔太子에 而爲此詭計하니 勣之機心이 豈不曉以利誘乎아
上
이 苦利(痢)
注+[頭註]利는 痢通하니 泄瀉不禁曰利라 增劇
하니 太子晝夜不離側
하고 或累日不食
하야 髮有變白者
어늘
丁卯에 疾篤이라 詔長孫無忌, 褚遂良하야 入臥內하야 謂之曰 太子仁孝는 公輩所知니 善輔導之하라하고
謂太子曰 無忌, 遂良이 在하니 汝勿憂天下하라하고
又謂遂良曰 無忌盡忠於我하니 我有天下는 多其力也라
我死어든 勿令讒人間之하라하고 仍令遂良으로 草遺詔러니 有頃에 上崩하다
唐有天下
하야 傳世二十
에 其可稱者三君
이로되 玄宗, 憲宗
은 皆不克其終
하니 盛哉
라 太宗之烈
注+[頭註]功之光且盛者를 曰烈이라 也
여
其除隋之亂은 比迹湯, 武요 致治之美는 庶幾成, 康이니 自古功德兼隆이 由漢以來로 未之有也라
至其牽於多愛하야 復立浮圖하고 好大喜功하야 勒兵於遠하니 此는 中材庸主之所常爲라
是以로 後世君子之欲成人之美者는 莫不歎息於斯焉이니라
唐有天下
에 如貞觀, 開元
은 雖號治平
이나 然亦有夷狄之風
하야 三綱不正
하야 無父子君臣夫婦
注+[頭註]謂太宗手刃其弟齊王元吉하고 也라하니 其原
이 皆始於太宗也
라
玄宗
이 纔使肅宗
에 便簒
하고 肅宗
이 纔使永王璘
注+[頭註]肅宗之弟라 에 便反
하야 君不君, 臣不臣
이라
故
로 藩鎭不賓
하고 權臣跋扈
하야 陵夷
注+[頭註]夷는 平也니 言頹替若丘陵之漸平也라 有五代之(風)[亂]
하니 漢之治
는 過於唐
이라
太宗이 有天下之志하고 有天下之才하고 又有治天下之效로되 而不得與先王竝者는 法令之行을 擬之先王하면 未純也요 禮樂之具와 田疇之制와 庠序之敎를 擬之先王하면 未備也일새라
躬親行陣之間하야 戰必勝, 攻必取하야 天下莫不以爲武로되 而非先王之所尙也요 四夷萬古所未及以政者 莫不服從하야 天下莫不以爲盛이로되 而非先王之所務也니 太宗之爲政於天下 得失如此하니라
囚至五覆하고 罪至三訊하고 除斷趾, 禁鞭背나 然一旦乘怒하야 遽斬張蘊古等하며
寇盜甫平
에 首開
하고 樂奏破陣
에 則曰朕終以文德綏海內
나 然志伐高麗
하야 死猶不忘
하며
陳師合
이 上拔士論
하야 意輕房, 杜
어늘 則斥之嶺表
나 然聽褚遂良疑似之譖
하야 而誅劉洎
注+[附註]帝征遼東할새 詔洎輔太子이러니 與褚遂良不相叶(協)하다 帝還하야 不豫한대 遂良誣奏호되 洎曰 國家事不足憂니 但當輔少主하야 行伊, 霍事하고 大臣有異者를 誅之라하니이다 帝惑之하야 乃賜死하다 하며
親平建成, 元吉之難
하니 可以鑑矣
로되 而寵泰嬖恪
注+[附註]恪은 吳王이니 皆太宗之子라 泰事는 見上癸卯年이라 初에 欲以晉王爲太子나 疑其柔弱하고 以恪英果라하야 欲立之러니 無忌固諍하야 乃止하니라[頭註] 泰는 魏王也라 하야 幾危嗣位
하며
知謹刑矣로되 而復濫殺하고 知尙文矣로되 而復黷武하며 知任賢矣로되 而復信讒하고 知斷恩矣로되 而復牽愛라
太宗
이 値隋喪亂
하야 糾合同志
하고 誘
慈父
하야 起兵晉陽
하야 遂
洪業
이러니 尋受父禪
하야 首用讐臣
하고 放出宮女
하며 因山東旱而
租稅
하고 覩畿內蝗而抑祥瑞
라
自是로 夙夜聽覽하야 宵旰忘疲하고 大召名儒하야 增廣學舍라
行鄕飮以勵風俗
하고 躬釋奠而崇文敎
하며 封比干墓
하고 하야 以勸忠孝
하며 又錄刺史之名
하야 以擬廢置
하고 重縣令之選
하야 以謹薦擧
하며 樂聞直諫
하고 好用善謀
하며 囚至五覆
하고 罪至三訊
이라
戒秦皇之營繕은 恐其奢也요 懲桓, 靈之私藏은 懼其侈也니 制度紀綱이 粲然畢擧라
是以로 賊盜化成君子하고 呻吟이 轉爲謳歌하야 衣食有餘하고 刑措不用이라
突厥之渠 繫頸闕庭하고 北海之濱이 悉爲州縣하야 四夷賓服하야 號稱太平하니 三代以還으로 中國之盛이 未之有也라
然이나 惜其首復浮屠하야 而政敎乖하고 志伐高麗하야 迄死不忘하야 而武事黷하고 殺張蘊古하고 誅李君羨하야 而刑獄濫하고 仇田舍翁하고 停婚仆碑하야 而君臣之好不終하고 上皇이 徙居大安에 略無尊奉之禮하야 十年之間에 未央置酒 寥寥一會하야 而父子之恩이 太簡하고
甚者는 劫父臣虜하고 弑兄殺弟하고 滅其十子하야 至駭君親而奪其位하고 他日亂弟之婦하야 與之生子하야 使繼元吉之後하니 其瀆人倫을 可勝算哉아
故로 程子曰 唐有天下三百年에 雖號治平이나 然三綱不正하야 無父子君臣夫婦는 其原이 始於太宗이라
故로 其後世子孫이 皆君不君, 臣不臣하야 藩鎭不賓하고 權臣跋扈하야 陵遲有五代之亂라하고
後世에 以太宗爲明聖之主로되 不可法也라하니 大哉라 斯言이여
여름 4월에
상上이 병이 있자, 태자에게 이르기를 “
이세적李世勣은
注+[頭註]이세적李世勣은 본래의 성姓이 서徐이니, 고조高祖가 무인년戊寅年(618)에 이씨성李氏姓을 하사하여 종친적宗親籍에 올리고 영국공英國公에 봉하였다. 뒤에 태종太宗의 휘諱인 이세민李世民을 피하여 다만 적勣이라고 이름하였다. 재주와 지혜가 충분하나 네가 그와 더불어 은혜가 없으니 네가 그를 심복시키지 못할까 두렵다.
내가 지금 그를 내칠 것이니, 그가 만약 즉시 떠나거든 내가 죽기를 기다려 네가 뒤에 그를 등용해서 복야僕射로 삼아 친애하고 신임할 것이요, 그가 만약 배회하고 관망하거든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다.” 하였다.
5월에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인
이세적李世勣을
첩주도독疊州都督으로 삼았는데,
注+[釋義]《괄지지括地志》에 “첩주疊州는 태주台州에 속한 군郡이니, 농우隴右(隴西) 지방에 있었다.” 하였다. 이세적李世勣이 명령을 받고는 집에 가지 않고 곧바로 떠났다.
“태종太宗은 이적李勣을 어떤 사람이라고 여겼는가.
어리석다고 여겼다면 어린 고아를 부탁하여 천하를 맡길 수가 없고, 어질다고 여겼다면 마땅히 신임하고 의심하지 말았어야 하니, 어찌 후사가 심복시키지 못할까 근심하여 먼저 내친 뒤에 등용하게 한단 말인가.
그 마음을 빼앗고자 하여 위엄으로써 꺾고 그 힘을 얻고자 하여 은혜로써 품어준 것은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경포黥布와
팽월彭越의
注+[頭註]경팽黥彭은 경포黥布와 팽월彭越이다. 무리를 어거한 것이니, 교활하게 속이는
注+[頭註]저狙는 원숭이이니, 원숭이는 속이기를 잘하므로 이름한 것이다. 호의狐疑(여우가 의심함), 유예猶豫(개가 망설임) 따위와 같은 말이다. 술수이다.
오패五霸도 하지 않은 것이니, 어찌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현자賢者를 친애한 도道이겠는가.
만약 이러한 마음으로 신하를 대한다면 이익과 녹봉을 구하는 선비는 부릴 수 있지만 현자는 이르게 할 수가 없다.
천하로써 녹봉을 주어도 돌아보지 않고 말 4천 필을 묶어 놓아도 보지 않는 자를
注+[頭註]녹지이천하이불고祿之以天下而不顧계마천사이불시자繫馬千駟而不視者:천하天下로써 녹봉을 주더라도 돌아보지 않고 말 천사千駟를 매어놓아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이윤伊尹이니, 《맹자孟子》에 보인다. 태종太宗이 어찌 얻어 쓸 수 있었겠는가.”
“군주가 신하를 도리로 대하면 신하가 군주에게 도리로 보답하고, 군주가 신하를 이익으로 대하면 신하가 군주에게 이익으로 보답하니, 이는 필연적인 이치이다.
태종太宗이 이적李勣으로 태자太子를 보필하게 할 때에 이러한 속임수를 썼으니, 이적李勣의 기심機心(간교하게 속이는 마음)이 어찌 이익으로써 유인함을 깨닫지 못하였겠는가.
황후를 폐하고 무후武后를 새로 세울 때에 이적李勣이 충성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이적李勣이 대신大臣의 절개가 없으나 또한 태종太宗이 이익으로써 그의 마음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상上이
이질痢疾의
注+[頭註]이利는 이痢와 통하니, 설사가 그치지 않는 것을 이利라 한다. 고통이 더욱 심해지자, 태자가 밤낮으로 곁을 지키고 떠나지 않았으며 혹은 여러 날 동안 먹지 못하여 머리털이 희게 센 것이 있었다.
상上이 눈물을 흘리며 이르기를 “네가 나에게 효도하고 사랑함이 이와 같으니, 내가 죽은들 무슨 한이 있겠는가.” 하였다.
정묘일丁卯日(5월 24일)에 병이 위독해지자,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褚遂良에게 명하여 침실 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이들에게 이르기를 “태자가 인자하고 효성스러움은 공들이 아는 바이니 잘 보좌하라.” 하고,
태자에게 이르기를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褚遂良이 있으니, 너는 천하를 걱정하지 말라.” 하였다.
또다시 저수량褚遂良에게 이르기를 “장손무기長孫無忌가 나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니, 내가 천하를 소유한 것은 그의 힘이 많다.
내가 죽거든 참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간질하지 못하게 하라.” 하고, 인하여 저수량褚遂良으로 하여금 유조遺詔를 초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상上이 승하하였다.
6월에 태자가 즉위하여 요동遼東의 부역과 여러 토목공사를 중지하였다.
《신당서新唐書》 〈태종본기太宗本紀〉贊에 말하였다.
지극히 잘 다스린 군주가 세상에 나오지 않음이여.
당唐나라가 천하를 소유하여 20대를 전함에 칭송할 만한 군주가 셋이나 그 중에
현종玄宗과
헌종憲宗은 모두 끝을 잘 마치지 못하였으니, 훌륭하다,
태종太宗의 공렬이여!
注+[頭註]공功이 빛나고 성대한 것을 열烈이라 한다.
수隋나라의 난리를 제거함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게 자취를 견줄 만하고, 훌륭한 정치를 이룩한 아름다움은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에 가까웠으니, 예로부터 태종太宗처럼 공功과 덕德이 모두 높은 군주는 한漢나라 이래로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정情에 끌려서 다시 부도浮圖(佛敎)를 세우고, 큰 체하기를 좋아하고 공功을 좋아하여 먼 외국에 군대를 동원하였으니, 이는 중등의 재주를 가진 자와 용렬한 군주가 항상 하는 바이다.
그러나 춘추春秋의 법은 항상 현자賢者에게 완비하기를 요구한다.
이 때문에 후세의 군자로서 남의 아름다움을 이루어주고자 하는 자가 이에 대해서 탄식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
당唐나라가 천하를 소유함에
정관貞觀과
개원開元 연간은 비록 잘 다스려졌다고 이름하나 또한 오랑캐의 풍속이 있어
삼강三綱이 바르지 못해서 부자‧군신‧부부간의 윤리가 없었으니,
注+[頭註]태종太宗이 아우인 제왕齊王이원길李元吉을 직접 칼로 찔러 죽이고 그 비妃를 맞아들인 것을 이른다. 그 근원은 모두
태종太宗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의 자제들을 모두 부릴 수 없었던 것이다.
현종玄宗이 잠시
숙종肅宗을 부리자 곧 찬탈하고,
숙종肅宗이 잠시
영왕永王이린李璘을 부리자
注+[頭註]영왕永王이린李璘은 숙종肅宗의 아우이다. 곧 배반하여,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번진藩鎭이 복종하지 않고
권신權臣이 발호해서 점차 침체(쇠퇴)하여
注+[頭註]이夷는 평평함이니, 쇠퇴하여 마치 구릉이 점점 평평해지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오대五代의
난세亂世가 있었으니,
한漢나라의 다스림이
당唐나라보다 나았다.
한漢나라는 큰 강령綱領이 발랐고 당唐나라는 여러 가지 조목이 거행되었다.”
“태종太宗이 천하를 편안히 하려는 뜻이 있고 천하에 뛰어난 재주가 있고 또 천하를 다스린 공효가 있었으나 선왕先王과 함께 나란히 견주어질 수 없으니, 이는 법령의 시행을 선왕에 비하면 순수하지 못하고 예악禮樂의 도구와 전주田疇의 제도와 상서庠序의 가르침을 선왕에 비하면 완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항오行伍(항오) 사이를 몸소 다녀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해서 천하가 용맹하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나 선왕이 숭상한 바가 아니요, 만고 이래로 미처 정벌하지 못했던 사이四夷가 복종하지 않음이 없어서 천하 사람들이 성대하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나 선왕이 힘쓴 바가 아니니, 태종太宗이 천하에 정사를 함에 그 득실이 이와 같았다.”
“태종太宗은 무력을 사용하면서 인仁을 가탁한 자이니, 어째서 그러한 줄을 아는가.
죄수를 다섯 번 반복하여 심리하고 세 번 심문하기까지 하였으며 발 자르는 형벌을 제거하고 등에 채찍질하는 형벌을 금하였으나 하루아침에 노여움을 타서 대번에 장온고張蘊古 등을 목 베었다.
도둑이 겨우 평정되자 첫 번째로 숭문관崇文館을 열고 진왕秦王의 파진악破陣樂을 연주할 적에 이르기를 ‘짐은 끝내 문덕文德으로 온 천하를 편안하게 하겠다.’고 하였으나 고구려 정벌에 뜻을 두어 죽으면서도 오히려 잊지 못하였다.
진사합陳師合이
발사론拔士論을 올려 마음에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경시하자 그를
영외嶺外로 배척(좌천)하였으나
저수량褚遂良의 그럴듯한
참언譖言을 듣고서
유계劉洎를 죽였다.
注+[附註]태종太宗이 요동遼東을 정벌할 적에 유계劉洎에게 명하여 태자太子가 감국監國하는 것을 돕게 하였는데, 저수량褚遂良과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 태종太宗이 돌아와 기뻐하지 않자, 저수량褚遂良이 무함하여 아뢰기를 “유계劉洎가 ‘국가의 일은 굳이 근심할 것이 없으니, 다만 어린 군주(太子)를 보좌하여 상商나라 이윤伊尹과 한漢나라 곽광霍光이 군주를 바꿔 세운 고사故事를 행하고 대신大臣 중에 두마음을 품은 자를 주벌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니, 태종太宗이 의혹하여 유계劉洎를 사사賜死하였다.
이건성李建成과
이원길李元吉의 난을 직접 평정하였으니, 이것을 거울로 삼을 수 있었으나
이태李泰를 총애하고
이각李恪을 사랑하여
注+[附註][附註] 이각李恪은 오왕吳王이니, 이태李泰와 이각李恪은 모두 태종太宗의 아들이다. 이태李泰의 일은 앞의 계묘년조癸卯年條(643)에 보인다. 처음에 진왕晉王이치李治를 태자太子로 삼으려 하였으나 유약柔弱할까 의심하고, 이각李恪은 영민하고 과단성이 있다 하여 이각李恪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장손무기長孫無忌가 굳이 간쟁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頭註]이태李泰는 위왕魏王이다. 후계자를 위태롭게 할 뻔하였다.
형벌을 삼갈 줄 알았으나 다시 함부로 죽였고, 문文을 숭상할 줄 알았으나 다시 무武를 지나치게 사용하였으며, 현자에게 맡길 줄 알았으나 다시 참언譖言을 믿었고, 은혜를 끊을 줄 알았으나 다시 애정에 끌렸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태종太宗은 인仁을 가탁한 자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태종太宗은 수隋나라가 망하고 혼란할 때를 만나 동지同志들을 규합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진양晉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마침내 큰 기업基業을 세웠는데, 얼마 후 아버지의 선양禪讓을 받고서 제일 먼저 원수의 신하(王珪와 위징魏徵)를 등용하고 궁녀들을 방출하였으며, 산동山東 지방의 가뭄으로 인하여 조세를 경감하고, 기내畿內의 충해蟲害를 보고서 상서祥瑞를 아룀을 억제하였다.
이후로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정사를 보살펴 밤낮으로 피로함을 잊고 이름난 학자들을 크게 불러 학궁學宮을 넓혔다.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여 풍속을 장려하고 몸소 석전제釋奠祭를 올려 문교文敎를 숭상하였으며, 비간比干의 묘墓를 봉분하고 효의孝義의 집안에 곡식을 하사하여 충효忠孝를 권장하였으며, 또 자사刺史의 이름을 기록하여 폐출하고 세울 것을 미리 생각하였고, 현령縣令의 선발을 삼가 천거를 신중히 하였으며, 직간直諫을 듣기 좋아하고 좋은 계책을 따르기를 좋아하였으며, 죄수는 다섯 번 반복하여 심리하고 죄를 세 번 신문訊問함에 이르렀다.
진시황秦始皇의 토목공사를 경계함은 사치할까 두려워해서였고 환제桓帝와 영제靈帝가 사사로이 창고를 지음을 징계함은 사치할까 두려워해서이니, 제도와 기강이 찬란하게 모두 갖추어졌다.
이 때문에 도적이 화하여 군자君子가 되고 신음하는 자들이 바꾸어 즐거운 노래를 부르게 되어서 의식衣食이 충분하고 형벌을 버려두어 쓰지 않았다.
돌궐突厥의 수령이 대궐의 뜰에서 목에 올가미를 매고 복종하고, 북해北海의 물가가 모두 주현州縣이 되어서 사방오랑캐들이 복종하여 태평시대라고 일컬어졌으니, 삼대三代 이후로 중국中國의 성대함은 일찍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장 먼저 부도浮屠를 회복하여 정교政敎가 어그러졌고, 고구려를 정벌할 것을 생각하여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해 전쟁하는 일이 번다하였고, 장온고張蘊古를 살해하고 이군선李君羨을 죽여서 형옥刑獄이 지나쳤고, 전사옹田舍翁(魏徵)을 원수로 여기며 그의 아들(叔玉)과의 혼인을 중지하고 그(魏徵)를 위해 세운 비석을 쓰러뜨려서 군신간君臣間의 우호가 끝까지 가지 못하였고, 상황上皇이 대안궁大安宮으로 옮겨 거처함에 조금도 높이고 받드는 예禮가 없어서 10년 동안 미앙궁未央宮에서 술자리를 베푼 것이 딱 한 번뿐이었으니, 부자父子의 은혜가 너무나도 소략하였다.
심지어는 아버지를 위협하여 오랑캐에게 신하 노릇 하게 하였으며, 형을 시해하고 아우를 죽이며 열 명의 아들을 죽여 군부君父를 놀라게 하고 심지어 그 지위를 빼앗기까지 하였으며, 후일 아우의 부인을 데리고 살면서 그와 자식을 낳아 이원길李元吉의 뒤를 잇게 하였으니, 인륜人倫을 모독함을 이루 다 셀 수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정자程子(伊川)가 말하기를 ‘당唐나라가 천하天下를 소유한 300년 동안을 태평성대라고 부르지만 삼강三綱이 바르지 못해서 부자父子‧군신君臣‧부부간夫婦間의 윤리가 없었으니, 그 근원은 모두 태종太宗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그 후세의 자손들이 모두 군주는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여 번진藩鎭이 복종하지 않고 권신權臣이 발호跋扈해서 점점 쇠퇴하여 오대五代의 난이 있게 되었으니,
후세에 태종太宗은 밝고 성스러운 군주이지만 본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으니, 훌륭하다 이 말씀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