行儉
이 有
知人之鑑하야 初爲吏部侍郞
에 王
와 咸陽尉蘇味道 皆未知名
이러니
行儉
이 一見
하고 謂之曰 二君
은 後當相次掌詮(銓)衡
注+[釋義]銓官이니 衡은 言其平也라하리라
僕有弱息
注+[釋義]息은 生也니 謂其所生之子라하니 願以爲托
하노라
是時
에 勮弟勃
이 與華陰楊
과 范陽盧照隣
과 義烏駱賓王
注+[原註]駱은 姓也라 이 皆以文章
으로 有盛名
하니 李敬玄
이 尤重之
하야 以爲必顯達
이라호되
行儉曰 士之致遠者는 當先器識而後才藝니 勃等이 雖有文華나 而浮躁淺露하니 豈享爵祿之器耶아
楊子
는 稍沈靜
하니 應至令長
注+[頭註]萬戶以上爲令이요 減萬戶爲長이라이어니와 餘
는 得令終
이면 幸矣
라하더니
○ 上
이 旣封泰山
하고 欲遍封五岳
注+[釋義]五岳은 謂東岳泰山, 南岳衡山, 西岳華山, 北岳常山, 中岳嵩(崇)山也라 하니
監察御史裏行李善感
注+[釋義]監察御史裏行은 李善感之官稱이니 太宗朝에 始有此名이라 初에 馬周起布衣어늘 詔令於監察御史裏行이러니 後專以裏行名官하고 至武后時하여 又置殿中裏行하니라 이 諫曰 數年以來
로 菽粟不稔하야 餓注+[通鑑要解]殍는 音票니 餓死者라 相望하고 四夷交侵하야 兵車歲駕하니
陛下宜
恭黙思道하야 以禳注+[通鑑要解]徐曰 禳之爲言은 攘也니 攘除厲殃也라 災譴이어시늘 乃更
廣營宮室하야 勞役不休하시니 天下莫不失望
이니이다
自褚遂良, 韓瑗之死
注+[頭註]遂良은 諫立武后라가 貶而卒하고 瑗은 諫褚遂良이라가 貶而卒하니라 로 中外以言爲諱
하야 無敢逆意直諫
이 幾二十年
이러니 及善感
하야 始諫
하니 天下皆喜
하야 謂之
鳳鳴朝陽注+[釋義]詩卷阿篇云 鳳凰鳴矣니 于彼高岡이로다 梧桐生矣니 于彼朝陽이라하니라 이러라
高宗卽位之初에 與無忌遂良共政하고 日引刺史하야 問民疾苦하고 尊禮輔相하야 恭己以聽이라
故로 永徽之政이 紀綱設張하고 百姓安阜하야 有貞觀之風이라
奈何로 烝父妾爲妻하야 莫念聚麀之恥하고 縱婦后預政하야 卒招晨牝之凶고
○ 是歲에 突厥餘黨이 入寇幷州어늘 薛仁貴將兵擊之할새 虜問唐大將爲誰오
應之曰 薛仁貴로라 虜曰 吾聞仁貴流象州하야 死久矣어늘 何以紿我오
仁貴免
示之面
하니 虜
相顧失色하야 下馬列拜
하고 稍稍引去
어늘
배행검裴行儉은 사람을 잘 알아보는 식감識鑑이 있어서, 처음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었을 때에 전진사前進士왕거王勮와 함양위咸陽尉소미도蘇味道가 모두 이름이 알려지기 전이었는데,
배행검裴行儉은 이들을 한 번 보고 이르기를 “두
군君은 뒤에 마땅히 서로 뒤이어
전형銓衡을
注+[釋義]전형詮衡은 전형銓衡을 주관하는 관원이니, 형衡은 공평함을 말한 것이다. 맡을 것이다.
내 어린 여식이 있으니
注+[釋義]식息은 낳음이니, 자신이 낳은 자식을 말한다. 맡기기를 원한다.” 하였다.
이때
왕거王勮의 아우
왕발王勃과
화음華陰의
양경楊烱과
범양范陽의
노조린盧照隣과
의오義烏의
낙빈왕駱賓王이
注+[原註]낙駱은 성姓이다. 모두 문장으로 성대한 명망이 있었는데,
이경현李敬玄이 더욱 이들을 소중히 여겨 반드시 현달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배행검裴行儉은 이르기를 “선비가 원대함을 이룩하려면 마땅히 기국器局과 식견識見을 먼저 하고 재예才藝를 뒤에 해야 하니, 왕발王勃 등이 비록 화려한 문장이 있으나 부황하고 조급하고 천박하고 드러나니 어찌 작록爵祿을 누릴 수 있는 기국器局이겠는가.
양자楊子는 세 사람에 비해 약간 침착하고 고요하니 응당
현령縣令‧
현장縣長에 이를 것이요,
注+[頭註]만호萬戶 이상의 현縣은 영令이라 하고, 만호萬戶 이하는 장長이라 한다. 나머지는 제 명에 죽으면 다행이다.” 하였는데,
얼마 뒤에 왕발王勃은 바다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죽었고, 양경楊烱은 영천령盈川令으로 생을 마쳤고,
노조린盧照隣은 몹쓸 병이 낫지 않아 물에 투신하여 죽었고, 낙빈왕駱賓王은 모반하다가 죽임을 당하였고,
왕거王勮와 소미도蘇味道는 선거選擧를 주관하여 배행검裴行儉의 말과 같이 되었다.
상上이 이미
태산泰山에
봉선封禪한 뒤에 다시
오악五岳에 두루 봉선하고자 하니,
注+[釋義]오악五岳은 동악東岳인 태산泰山‧남악南岳인 형산衡山‧서악西岳인 화산華山‧북악北岳인 상산常山(恒山)‧중악中岳인 숭산嵩山을 이른다.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이선감李善感이
注+[釋義]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은 이선감李善感의 관직명이니, 태종조太宗朝에 처음으로 이러한 명칭이 있게 되었다. 처음에 마주馬周가 평민으로 발신發身하자 조령詔令을 내려 감찰어사이행監察御史裏行으로 삼았는데, 이 뒤로는 오로지 ‘이행裏行’으로 관직을 이름하였고, 무후武后 때에 이르러서는 또 전중이행殿中裏行을 두었다. 간하기를 “수년 이래로 콩과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아니하여 굶어 죽는 자가
注+[通鑑要解]표殍는 음이 표이니, 굶어 죽은 자이다. 서로 이어지고, 사방의 오랑캐들이 번갈아 침입하여
병거兵車가 해마다 출동하니,
폐하께서는 마땅히 공손하고 묵묵히 다스리는 방도를 생각하여 재앙과 견책을
注+[通鑑要解]서씨徐氏가 말하기를 “양禳이란 말은 물리친다는 뜻이니, 재앙을 물리쳐 없애는 것이다.” 하였다. 물리치셔야 할 터인데, 도리어 다시 크게
궁실宮室을 경영하여
노역勞役이 그치지 않으니 천하가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비록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또한 관대하게 용납하였다.
저수량褚遂良과
한원韓瑗이 죽은 뒤로
注+[頭註]저수량褚遂良은 무씨武氏를 황후로 세우는 일을 간하다가 폄직되어 죽었고, 한원韓瑗은 저수량褚遂良이 폄직된 것을 간하다가 죽었다. 중외中外에서 간언하는 것을 꺼려서 감히 임금의 뜻을 거역하며
직간直諫하는 자가 없은 지가 거의 20여 년이었는데,
이선감李善感에 이르러 비로소 간하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봉황이
조양朝陽에서 운다.”고 말하였다.
注+[釋義]《시경詩經》 〈대아大雅권아卷阿〉에 이르기를 “봉황이 우니 저 높은 언덕에서 하도다. 오동나무가 자라니 저 아침 해가 뜨는 동산에서 하도다.” 하였다.
“고종高宗은 즉위한 초기에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褚遂良과 함께 정사를 하고 날마다 자사刺史를 인견해서 백성들의 고통을 물었으며, 보필하는 재상을 높이고 예우하여 자기 몸을 공손히 하고 따랐다.
그러므로 영휘연간永徽年間의 정사는 기강紀綱이 잘 펴지고 백성百姓이 편안하고 부유해서 정관貞觀의 유풍이 있었다.
이도유李道裕가 임금의 뜻에 맞추는 것을 살피고는 자신의 몸가짐이 신뢰를 받을 수 없음을 자책하였고, 오랑캐 사람들이 올린 놀이를 보고는 하는 바를 삼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았으니, 이러한 방도를 따랐다면 어찌 어진 군주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무슨 이유로 아버지의 첩을 간음하여 아내로 삼아서 인륜을 어지럽히는 수치를 생각하지 않으며, 지어미인 무후武后를 내버려두어 정사에 관여하게 해서 끝내 암탉이 새벽에 우는 화를 불렀는가.
이해에 돌궐突厥의 잔당이 병주幷州를 침략하였는데, 설인귀薛仁貴가 장차 그들을 치려 할 적에 오랑캐가 묻기를 “당唐나라 대장이 누구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설인귀薛仁貴이다.” 하니, 오랑캐가 말하기를 “내 들으니 설인귀薛仁貴는 상주象州로 유배가서 죽은 지가 오래되었는데 어찌 우리를 속이는가.” 하였다.
설인귀薛仁貴가 투구를 벗고 얼굴을 보여주니, 오랑캐가 보고 아연실색하여 말에서 내려 늘어서서 절을 하고는 이윽고 병사들을 데리고 떠나갔다.
설인귀薛仁貴가 이 틈을 타고 진격해서 이들을 크게 격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