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申]嗣聖元年이라 〈二月은 睿宗文明元年이요 九月은 太后光宅元年이라〉
正月에 立妃韋氏하야 爲皇后하고 擢后父玄貞하야 爲豫州刺史하다
晉陽啓唐祚
注+[頭註]高祖는 自晉陽宮監起라 하고
王明紹巢封
注+[頭註]太宗은 納其弟齊王元吉之妃하야 生子明하야 紹巢王之後하고 追封元吉하야 爲巢王이라 이라
垂統已如此
注+[頭註]言垂統之主 其瀆亂綱常이 已如此라 하니
繼體宜昏風
注+[頭註]如高宗者는 昏迷淫亂하야 而有武后之事也라이라
牝晨司禍凶
注+[頭註]牝晨은 牝雞之晨이니 謂武后僭立也라이라
天樞遂崇崇
注+[附註]武后改唐爲周하고 立宗廟하다 鑄銅爲天樞하야 以紀周功德하니 其制若柱라 高百五尺이요 鐵山爲趾하니 周百七十尺이요 (每)[度]二丈이니 用銅이 無慮二百萬斤이라 刻天后功德하야 立於端門之外할새 銅鐵不足이어늘 賦民間農器以之하다 以銅爲蟠龍麒麟하야 縈繞之하고 上爲騰雲承露盤하고 四龍이 人立捧火珠하고 刻百官及四夷酋長名하다 太后自書其榜曰 大周萬國頌德天樞라하다 이라
淫(毒)[
]穢宸極
注+[附註]毐는 卽之毐니 以比張易之, 張昌宗也라 秦始皇卽位에 年少하니 太后與文信侯呂不韋通이러니 王旣壯에 文信侯恐事覺及禍하야 乃以舍人嫪毐로 託爲宦者하고 進之하야 生二子하다 封毐爲長信侯러니 有告毐實非宦者어늘 毐懼하야 矯王御璽하야 發兵爲亂이라가 敗走하니 獲之하야 夷三族하고 遷太后하고 殺其二子하니라 嫪는 音獠니 嫪毐는 姓名也라[頭註] 帝居曰宸이라 하고
誰辦取日功
注+[頭註]은 謂挽回天日而中宗復位라고
秉筆迷至公
注+[頭註]言修唐史할새 乃於帝紀內에 立武后紀하니 是迷至公之道라 以唐之一經이어늘 而亂周紀於其中이라 가
凡例孰(比)[此]容
注+[頭註]孰此容은 又孰可容此耶라 고
侃侃范太史
注+[頭註]侃侃은 剛直也라 范太史는 范祖禹라 受說伊川翁
이라
萬古(聞)[開]群蒙
注+[頭註]每歲에 必書帝在房州라하야 以合春秋書之法하야 開明萬世之群蒙이라 이라
昔에 范公祖禹修唐鑑할새 取法春秋하야 黜武氏之號하고 繫嗣聖之年이어늘 而通鑑則本之唐史하야 列武氏于本紀하고 卽以光宅紀元하니 自後로 盡用武氏之號라
今朱子綱目
이 止以嗣聖紀年
하야 終武氏世者
는 蓋中宗
은 國之正統
이어늘 武氏無故廢之
하고 甚至革命易姓
하야 無異莽, 操
注+[頭註]王莽, 曹操라 所爲
일새라
繫嗣聖而黜光宅은 所以扶三綱, 立人極하야 示天下以正大之義하야 使後世亂賊之徒로 無以自立於天下爾니라
惠帝
는 旣沒
하야 固無年之可紀
요 況呂后
는 又取他人子
하야 名爲惠帝子而立之
注+[頭註]惠帝后張氏無子러니 呂后命張后하야 取他人子하야 殺其母而養之하니라라
니 固不得與中宗尙在者爲比
하야 而得以繫嗣聖之號也
니라
愚讀朱子之詩與尹氏之言하고 益以王先生之所命爲尤信이라
中宗
注+[頭註]武后之生이라 이 欲以
爲侍中
하니 裴炎
이 固爭
한대
中宗怒曰 我以天下與韋玄貞이라도 何不可완대 而惜侍中耶아
二月戊午에 太后廢中宗하야 爲廬陵王하야 幽於別所하다
立豫王旦
하야 爲皇帝
호되 政事
를 決於太后
하고 居睿宗
注+[原註]睿宗은 卽豫王也니 中宗之弟라 於別殿
하야 不得有所預
하다
○ 時
에 諸武用事
하니 唐宗室
이 人人自危하고 衆心이 憤이러라 會
에 眉州刺史英公李敬業
注+[頭註]李勣之孫也라 本姓徐氏니 見上卷이라 武后討敬業할새 追削其祖考官爵하고 發塚斲棺하고 復姓徐氏하니라 과 及弟敬猷, 唐之奇, 駱賓王, 杜求仁, 魏思溫
이 各坐事遭貶
이라
皆會於揚州하야 各自以失職怨望하고 乃謀作亂하야 以匡復廬陵王爲辭하니 思溫이 爲之謀主러라
於是
에 驅囚徒工匠數百
하야 授以甲
하고 遂起一州之兵
하야 復稱嗣聖元年
하고 開三府
注+[附註]一曰 匡復府요 二曰 英府요 三曰 揚州大都督府니 敬業이 自稱匡復府將하고 領揚州大都督하야 以之奇, 求仁으로 爲左右長史하고 思溫爲軍師하고 賓王爲記室하니라 하니 旬日間
에 得勝兵十餘萬
이라
하니 略曰 僞臨朝武氏者
는 包藏禍心하고 竊窺神器하야 君之愛子를 幽之於別宮注+[通鑑要解]謂居睿宗於別殿이라 하고 賊之宗盟注+[頭註]宗은 同姓也니 謂輩라 을 委之以重任이라하고
又曰
一之土注+[通鑑要解]抔는 音裒니 手掬之土也라 今人讀杯爵之杯하니 非也라未乾에 何在오하고
太后見檄하고 問曰 誰所爲오 或對曰 駱賓王이니이다
人有如此才
어늘 而使之流落不偶(遇)
注+[釋義]猶言不遇也라 乎
아
○ 甲申에 遣大將軍李孝逸하야 將兵(二)[三]十萬하야 以討李敬業敗之하니 其將王那相이 斬敬業, 敬猷及駱賓王首하야 來降하다
사성嗣聖원년元年(갑신 684) - 2월은 예종睿宗문명文明원년元年이고, 9월은 태후太后광택光宅원년元年이다. -
정월에 태자비太子妃위씨韋氏를 세워 황후로 삼고, 황후의 아버지인 위현정韋玄貞을 발탁하여 예주자사豫州刺史로 삼았다.
[新增]朱文公(朱熹)의 감흥시感興詩에 말하였다.
“
진양晉陽에서
당唐나라
왕조王朝를 열었고
注+[頭註]고조高祖(李淵)는 수隋나라의 진양궁감晉陽宮監으로 있다가 발신하였다.
왕자王子이명李明은
소랄왕巢剌王의
봉작封爵을 이었네.
注+[頭註]태종太宗은 동생인 제왕齊王이원길李元吉의 비妃(楊氏)를 맞이하여 아들 이명李明을 낳아 소왕巢王의 뒤를 잇게 하고, 이원길李元吉을 소랄왕巢剌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전통을 드리운 군주가 이미 이와 같으니
注+[頭註]전통을 후손에게 물려준 군주가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어지럽힘이 이미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뒤를 이은 자손은 혼미한 풍조가 당연하였네.
注+[頭註]고종高宗과 같은 자는 혼미하고 음란하여 무후武后의 일이 있었던 것이다.
부자父子가 한 여자를 함께 취하여 천륜天倫을 더럽히고
암탉이 새벽에 울어
화흉禍凶을 주관하였도다.
注+[頭註]빈신牝晨은 암탉이 새벽에 우는 것이니, 무후武后가 참람하게 제위帝位에 선 것을 이른다.
군주의 기강이 한번 실추되니
注+[頭註]건강乾綱은 군주의 기강이다.
천추天樞가 마침내 높이 솟았구나.
注+[附註]무후武后는 당唐나라를 고쳐 주周라 하고 종묘宗廟를 세웠다. 구리를 주조하여 천추天樞를 만들어서 주周나라의 공덕을 기록하니, 그 제도가 기둥과 비슷하였다. 높이가 105척이고, 쇠를 주조하여 산山 모양을 본떠 받침을 만들었는데 둘레가 170척이며, 도度(넓이)가 2장丈이니, 구리를 사용한 것이 무려 200만 근이나 되었다. 천후天后의 공덕을 새겨 단문端門 밖에 세웠는데, 구리와 쇠가 부족하자 민간의 농기구를 징발하여 보태었다. 구리로 서린 용과 기린을 만들어 둘러싸게 하고, 위에는 날아가는 구름 모양의 승로반承露盤을 만들고 네 마리 용이 사람처럼 서서 화주火珠를 받들게 하였으며, 백관 및 사방 오랑캐 추장酋長의 이름을 새겼다. 태후太后가 직접 그 방榜에 쓰기를 대주만국송덕천추大周萬國頌德天樞라 하였다. 이 내용은 《신당서新唐書》 〈후비전后妃傳〉에 보인다.
음란한
장씨張氏 형제가 황제의 처소를 더럽히고
注+[附註]애毐는 바로 노애嫪毐의 애毐자이니, 장역지張易之와 장창종張昌宗을 비유한 것이다. 진시황秦始皇이 즉위했을 때에 나이가 어리니, 태후太后가 문신후文信侯여불위呂不韋와 간통하였는데, 왕이 장성한 뒤에 문신후文信侯는 일이 발각되어 화禍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사인舍人노애嫪毐를 환관이라 칭탁하고 태후太后에게 올려 두 아들을 낳았다. 노애嫪毐를 봉하여 장신후長信侯로 삼았는데, 노애嫪毐가 환관이 아니라고 고발하는 자가 있자, 노애嫪毐가 두려워하여 왕의 옥새를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해서 난을 일으켰다. 노애嫪毐가 패하여 달아나니, 그를 사로잡아 삼족三族을 멸하고 태후는 별궁으로 옮겼으며 그 두 아들을 죽였다. 노嫪는 음이 료(로)이니 노애嫪毐는 성명姓名이다. [頭註] 황제가 거처하는 곳을 신宸이라 한다.
그때 만일
적인걸狄仁傑과
장간지張柬之 등이 아니었으면
注+[頭註]적장狄張은 적인걸狄仁傑과 장간지張柬之이다.
누가
제위帝位를 바로잡아 되돌리는 공을 이루었을까.
注+[頭註]취일공取日功은 하늘의 해를 바로잡아 되돌려서 중종中宗이 복위復位하였음을 이른다.
어찌하여
구양자歐陽子는
注+[頭註]구양자歐陽子는 문충공文忠公구양수歐陽脩이다.
붓을 잡아 역사를 기록함에 지극히 공평함을 잃었는가.
注+[頭註]구양수歐陽脩가 《신당서新唐書》를 편수할 적에 제기帝紀 안에 측천순성무황후본기則天順聖武皇后本紀라 하여 무후기武后紀를 끼워 넣었으니, 이는 지극히 공정한 도를 잃은 것이다. 당唐나라는 한 역통歷統인데 그 안에 주기周紀를 넣어 당唐나라의 역통歷統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당唐나라 역통歷統에 주기周紀를 끼워 넣어 어지럽혔으니,
이러한 범례를 누가 용납할 수 있겠는가.
注+[頭註]숙차용孰此容은 또 누가 이것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강직한
범태사范太史는
注+[頭註]간간侃侃은 강직함이다. 범태사范太史는 범조우范祖禹이다.
이천옹伊川翁에게 말씀을 받았다네. 《춘추春秋》의 두세 마디 말로
만고萬古에 여러 몽매함을 열었도다.”
注+[頭註]춘추이삼책만고개군몽春秋二三策萬古開群蒙:해마다 반드시 “황제가 방주房州에 있었다.[帝在房州]”라고 써서 《춘추春秋》에서 “노魯나라 소공昭公이 건후乾侯에 있었다.[公在乾侯]”라고 쓴 법에 부합하였으니, 이로써 만대의 여러 몽매한 자들을 밝게 깨우쳐준 것이다.
“범공范公조우祖禹가 《당감唐鑑》을 편수編修할 적에 《춘추春秋》의 법을 취하여 무씨武氏의 연호를 버리고 중종中宗의 사성嗣聖이라는 연호로 표시하였는데, 《자치통감資治通鑑》은 당사唐史에 근본하여 무씨武氏를 본기本紀에 끼워 넣고 바로 광택光宅으로 기원紀元하니, 이후로 모두 무씨武氏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주자朱子의 《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는 단지
중종中宗의
사성嗣聖이라는 연호로 연대를 표시하여
무씨武氏의 대가 끝날 때까지 이렇게 하였으니, 이는
중종中宗이 나라의 정통인데
무씨武氏가 연고없이 폐위하고, 심지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하여
왕조王朝를 바꾸어서
왕망王莽과
조조曹操의
注+[頭註]망조莽操는 왕망王莽과 조조曹操이다. 행위와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하는 여전히 당唐나라의 천하이니, 무씨武氏가 어떻게 이것을 끊을 수 있단 말인가.
사성嗣聖으로 표시하고 광택光宅을 버린 것은 삼강三綱을 붙들고 인극人極(人道)을 세워 천하에 공명정대한 의리를 보여줌으로써 후세의 난신적자들로 하여금 천하에 스스로 설 수 없게 한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여후呂后가 조정에서 칭제稱制한 것은 어찌하여 혜제惠帝의 연호를 표시하지 않았는가?’ 하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혜제惠帝는 이미 죽어서 진실로 기록할 만한 연도가 없었고, 더구나
여후呂后는 또 다른 사람의 자식을 데려다가
혜제惠帝의 아들이라고 이름하여 세웠다.
注+[頭註]황려후況呂后……名爲惠帝子而立之:혜제惠帝의 후비后妃인 장씨張氏가 자식이 없었는데, 여후呂后가 장후張后에게 명하여 다른 사람의 자식을 데려다가 그 어미를 죽이고 기르게 하였다.
그러므로 다만 2행行으로 분주分註하여 여씨呂氏의 연호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정통이 아니라는 뜻을 충분히 나타낸 것이니, 진실로 아직 살아있었던 중종中宗과 나란히 놓아 사성嗣聖의 연호를 그대로 다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劉剡) 주자朱子의 시詩와 윤씨尹氏의 말을 읽고서 왕선생王先生(王逢)의 가르침을 더욱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감히 광망狂妄하고 참람하게 이것을 바로잡았다.
중종中宗이
注+[頭註]중종中宗은 무후武后의 소생이다. 위현정韋玄貞을
시중侍中으로 삼고자 하니
배염裴炎이 굳이 간쟁하니,
중종中宗이 노하여 이르기를 “내가 천하를 위현정韋玄貞에게 준다 한들 무엇이 불가하기에 시중侍中 자리를 아까워하겠는가.” 하니,
배염裴炎이 두려워하여 태후太后에게 아뢰어 은밀히 중종中宗을 폐위하고 다른 사람을 세울 것을 도모하였다.
2월 무오일戊午日(6일)에 태후太后가 중종中宗을 폐위하여 여릉왕廬陵王으로 삼아서 별궁別宮에 유폐시켰다.
예왕豫王이단李旦을 세워 황제로 삼았으나 정사를 태후에게서 결정하게 하고,
예종睿宗을
注+[原註]예종睿宗이 바로 예왕豫王이니, 중종中宗의 아우이다. 별전別殿에 거처하게 하여 정사에 관여하는 바가 있지 못하게 하였다.
9월 갑인일甲寅日(6일)에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광택光宅으로 개원改元하였다.
이때에 여러
무씨武氏들이
용사用事하니,
당唐나라 종친들이 사람들마다 위태롭게 여기고 여러 사람의 마음이 분개하였는데, 마침
미주자사眉州刺史영공英公이경업李敬業과
注+[頭註]이경업李敬業은 이적李勣(李世勣)의 손자이다. 이적李勣은 본래 서씨徐氏이니, 상권上卷에 보인다. 무후武后가 이경업李敬業을 토벌할 때에 먼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작官爵을 추탈追奪하고 무덤을 파서 관을 쪼갰으며, 원래의 성姓인 서씨徐氏로 회복시켰다. 그의 아우
이경유李敬猷와
당지기唐之奇‧
낙빈왕駱賓王‧
두구인杜求仁‧
위사온魏思溫이 각각 일에 걸려 좌천되었다.
이들이 모두 양주揚州에 모여 각자 지위를 잃은 것을 원망하고 마침내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면서 여릉왕廬陵王(中宗)을 복위시킬 것을 구실로 삼으니, 위사온魏思溫이 모주謀主가 되었다.
이에 죄수들과
공인工人과
장인匠人 수백 명을 몰아서 갑옷을 주고, 마침내 한
주州의 군대를 일으켜 다시
사성嗣聖원년元年이라고 칭하고
삼부三府를 여니,
注+[附註]첫 번째는 광복부匡復府요, 두 번째는 영부英府요, 세 번째는 양주대도독부揚州大都督府이다. 서경업徐敬業이 스스로 광복부匡復府의 상장上將이라 자칭하고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을 거느려서 당지기唐之奇와 두구인杜求仁을 좌우左右장사長史로 삼고 위사온魏思溫을 군사軍師를 삼고 낙빈왕駱賓王을 기실記室로 삼았다. 10일 사이에
승병勝兵(정예병) 10여 만 명을 얻었다.
주州와
현縣에
격문檄文을 돌렸는데, 그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거짓(불법)으로 조정에 임어한
무씨武氏는 천하에 화를 끼치려는 마음을 품고 남몰래
신기神器(帝位)를 엿보아 임금님의 사랑하는 아들을 별궁에 유폐하고
注+[通鑑要解]군지애자君之愛子유지어별궁幽之於別宮:예종睿宗을 별전別殿에 거처하게 하였음을 이른다. 적의 종족에게
注+[頭註]종맹宗盟의 종宗은 동성同姓이니, 무승사武承嗣 무리를 이른다. 중임을 맡겼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
고종高宗의 무덤의 흙이
注+[通鑑要解]부抔는 음이 부이니, 일부지토一抔之土는 손으로 움켜쥘 정도의 흙이다. 지금 사람들은 배작杯爵의 ‘배杯’자로 읽으니, 잘못이다.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6
척尺의 어린 군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한 번 오늘날의 역내域內를 살펴보라.
마침내 어느 집안의 천하란 말인가.” 하였다.
태후太后가 격문을 보고 묻기를 “누가 지었는가?” 하니, 혹자가 대답하기를 “낙빈왕駱賓王입니다.” 하였다.
이 사람이 이와 같이 훌륭한 재주가 있는데, 그로 하여금
유락流落하여 불우하게 하였단 말인가.” 하였다.
注+[釋義]불우不偶는 불우不遇라고 말함과 같다.
갑신일(10월 6일)에 대장군 이효일李孝逸을 보내어 병력 30만을 거느리고 이경업李敬業을 토벌하여 패주시키니, 〈11월 18일에〉그의 장수 왕나상王那相이 이경업李敬業과 이경유李敬猷 및 낙빈왕駱賓王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