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武氏旣廢中宗이어늘 而朱子猶書帝者는 不予武氏之廢也니 雖因范氏나 亦本春秋之法이라
故로 今此書에 每歲添載帝之所在者는 本朱子綱目之法也니라
或曰 太后廢帝爲廬陵王하고 立豫王旦矣니 今此謂帝者는 安疑其非豫王耶아 曰 非也라
武后之僞立者를 又稱爲帝면 則名實亂而無別矣니 其可乎아
三月
에 太后命鑄銅爲匭
注+[釋義]朝堂四匭에 塗以方色하야 靑曰延恩이라하야 在東하고 丹曰招諫이라하야 在南하고 白曰伸寃이라하야 在西하고 黑曰通玄이라하야 在北하니라[通鑑要解] 太后自知內行不正하야 人心不服하고 開告密之門하야 有告密者면 不次除官이라 有者 請鑄銅爲匭하야 以受天下密奏하니 其器一室四隔하고 上各有竅하야 可入不可出이라 太后善之하니라 하야 置之朝堂
하야 以受天下表疏
하다
○ 太后自徐敬業之反으로 疑天下人이 多圖己하고 又自以久專國事하고 內行不正하야 知宗室大臣이 怨望心不服하고 欲大誅殺以威之하야
乃盛開告密之門
하고 有告密者言或稱旨
면 則
하고 無實者
는 不問
하니 於是
에 四方告密者蜂起
하야 人皆
重足注+[頭註]謂重累其足跡하고 不敢亂行이니 言畏之甚也라 屛息이러라
有胡人
元禮 知太后意
하고 因告密
이어늘 召見
하고 擢爲游擊將軍
하야 令按
하니
俊臣이 與萬國俊으로 共撰羅織經數千言하야 敎其徒호되 網羅無辜하야 織成反狀하니 構造布置皆有支節이라
太后得告密者
면 輒令元禮等推之
하니 競爲訊囚酷法
하고 作大枷
라 有
等名號
하니
사성嗣聖 3년(병술 686) - 태후太后수공垂拱 2년 -
[新增]옛날(春秋時代)에 계씨季氏가 그 군주를 축출하자 《춘추春秋》에 ‘공公이 건후乾侯에 있었다.[公在乾侯]’라고 써서 반드시 소공昭公이 있는 곳을 기록하였다.
지금 무씨武氏가 이미 중종中宗을 폐위하였는데 주자朱子가 아직도 제帝라고 쓴 것은 무씨武氏가 폐위시킨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니, 비록 범씨范氏(范祖禹)를 따른 것이나 또한 《춘추春秋》의 필법에 근본한 것이다.
지금 이 《통감절요通鑑節要》에서 매년 황제가 있는 곳을 덧붙여 기재한 것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필법에 근본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태후太后가 황제(중종)를 폐위하여 여릉왕廬陵王으로 삼고 예왕豫王이단李旦을 세웠으니, 지금 여기서 제帝라고 이른 것은 예왕豫王이 아니라고 어찌 의심하겠는가.”라고 하니,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무후武后가 불법으로 세운 자를 또 황제라고 칭한다면 이름과 실제가 문란하여 분별이 없게 되니, 어찌 가하겠는가.” 하였다.
3월에
태후太后가 명하여 구리를 주조하여 궤를 만들어서
注+[釋義]조당朝堂의 네 궤에 각각 방위에 따라 색을 칠하여, 푸른색 궤는 연은延恩이라 하여 동쪽에 두고, 붉은색 궤는 초간招諫이라 하여 남쪽에 두고, 흰색 궤는 신원伸寃이라 하여 서쪽에 두고, 검은색 궤는 통현通玄이라 하여 북쪽에 두었다. [通鑑要解] 〈이경업李敬業(徐敬業)의 반란 이후로〉太后는 스스로 내행內行(평소 집안에 있을 때의 조행操行)이 바르지 않아서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밀고하는 문로를 열어 놓아 밀고하는 자가 있으면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을 제수하였다. 어보가魚保家라는 자가 구리를 주조하여 궤를 만들어서 천하의 밀주密奏를 받아들일 것을 청하였다. 이 기물은 한 방을 네 칸으로 나누고 위에 각각 구멍이 있어서 넣을 수는 있으나 꺼낼 수는 없었는데, 태후太后가 좋게 여겼다. 조당朝堂에 두고 천하의
표문表文과 상소문을 받게 하였다.
태후太后가 서경업徐敬業이 반란을 일으킨 뒤로 천하 사람들 중에 자신을 도모하는 자가 많은가 의심하고, 또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랫동안 국사를 전횡하고 내행內行이 바르지 못하여 종실 대신들이 원망하고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죄를 가하여 죽여서 위엄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밀고하는 문로를 크게 열어 놓고, 밀고하는 자의 말이 혹 자신의 뜻에 맞으면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을 제수하고 사실 무근인 것은 불문에 부치니, 이에 사방에서 밀고하는 자가 벌떼처럼 일어나서 사람들마다 모두 두려워하여 발을 포개어 서고
注+[頭註]중족重足은 발자국을 포개고 감히 어지럽게 걷지 못하는 것을 이르니, 두려움이 심함을 말한다. 숨을 죽였다.
오랑캐 사람 삭원례索元禮가 태후의 뜻을 알고 밀고하자, 태후가 불러 보고 발탁하여 유격장군游擊將軍을 삼아서 제옥制獄(詔獄)을 심리하게 하였다.
삭원례索元禮는 성질이 잔인하여 한 사람을 추고할 때에 반드시 수십 명 내지 백 명을 끌어들였다.
이에 주흥周興과 내준신來俊臣의 무리가 이를 본받아서 옥사獄事가 분분히 계속 일어났다.
내준신來俊臣은 만국준萬國俊과 함께 《나직경羅織經》를 지으니 내용이 수천 자였는데, 그 도당들로 하여금 무고한 자의 언행을 널리 수집하여 모반한 죄상을 엮어서 만들고, 게다가 허구로 위조하고 안배하여 늘어놓아서 죄상을 변조시켜 모두 지절支節(曲折)이 있게 하였다.
태후太后가 밀고한 자들을 잡으면 번번이 삭원례索元禮 등으로 하여금 추고推考하게 하자, 삭원례索元禮 등이 앞다투어 서로 죄수를 심문하는 가혹한 법을 만들고 큰 형틀을 만드니, 정백맥定百脈, 돌지후突地吼, 사저수死猪愁, 구파가求破家, 반시실反是實 등의 명칭이 있었다.
중외中外에서 이 몇 사람을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