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武承嗣, 三思
注+[頭註]承嗣는 元爽之子요 三思는 元慶之子니 元爽, 元慶은 皆武后之兄이라 營求爲太子
하니 太后意未決
이라
狄仁傑
이 每從容言於太后曰 文皇帝
注+[頭註]太宗諡라 櫛風沐雨하시고 親冒鋒鏑注+[原註]鏑은 箭也라 하사 以定天下
하야 傳之子孫
하시고
大帝以二子托陛下
注+[頭註]大帝는 高宗諡요 二子는 中宗, 睿宗이라 어시늘 今乃欲移之他族
하시니 無乃非天意乎
잇가
陛下立子
면 則千秋萬歲後
에 配食太廟
하야 承繼無窮
이요 立姪
이면 則未聞姪爲天子
注+[通鑑要解]太后之於承嗣, 三思에 爲姑姪也요 於中宗, 睿宗에 爲母子라而祔姑於廟
注+[釋義]祔는 謂合食於廟也라 者也
니이다
由是로 遣徐彦伯하야 召廬陵王詣行在하고 九月에 立廬陵王爲皇太子하다
○ 以天官侍郞蘇味道로 爲鳳閣侍郞, 同平章事하다
味道前後在相位數歲
에 依阿取容하야 嘗謂人曰
處事를 不欲明白이요 但
注+[釋義]摸稜은 摸(據)[𢱢]捫搎也라 四方木을 摸之에 可左可右라 僉載曰 味道爲相에 或問其之道한대 無答이요 但以手摸床稜이라하니라[頭註] 摸은 音莫이니 手持也라 持兩端이 可矣
라하니 時人
이 謂之
蘇摸稜이러라
사성嗣聖 15년(무술 698) - 주周나라 무씨武氏성력聖曆원년元年 -
무승사武承嗣와
무삼사武三思가
注+[頭註]무승사武承嗣는 무원상武元爽의 아들이고 무삼사武三思는 무원경武元慶의 아들이니, 무원상武元爽과 무원경武元慶은 모두 무후武后의 오라비이다. 태자가 되기를 구하니, 태후가 뜻을 결정하지 못하였다.
적인걸狄仁傑이 매번 태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
태종太宗문황제文皇帝께서
注+[頭註]문황제文皇帝는 태종太宗의 시호이다.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몸소 적의 칼날과 화살을 무릅쓰고서
注+[原註]적鏑은 화살촉이다. 천하를 평정하여 자손에게 물려주셨습니다.
대제大帝(高宗)께서 두 아들을 폐하에게 맡기셨는데,
注+[頭註]대제大帝는 고종高宗의 시호이고, 두 아들은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이다. 지금 이
제위帝位를 다른 집안에 옮겨주고자 하시니, 이는 하늘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또 고질간姑姪間과 모자간母子間은 어느 쪽이 더 친합니까?
폐하께서 아들을 세우신다면 천추만세 후에
태묘太廟에서
선제先帝와 함께 제사를 받아 무궁하게 이어갈 것이요, 조카를 세우신다면 조카가 천자가 된 뒤에
注+[通鑑要解]태후는 무승사武承嗣‧무삼사武三思와 고모 조카 사이이고, 중종中宗‧예종睿宗과는 모자간母子間이다. 고모를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했다는
注+[釋義]부祔는 사당에 합사合祀함을 이른다.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또 태후太后에게 권하여 여릉왕廬陵王을 소환하게 하니, 태후의 마음에 차츰 깨닫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서언백徐彦伯을 보내서 여릉왕廬陵王을 불러 행재行在로 오게 하고, 9월에 여릉왕廬陵王을 황태자로 삼았다.
천관시랑天官侍郞소미도蘇味道를 봉각시랑鳳閣侍郞‧동평장사同平章事로 삼았다.
소미도蘇味道가 전후에 걸쳐 재상의 자리에 있는 몇 년 동안에 사람들의 뜻을 따라 아첨하고 용납됨을 취해서 일찍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일을 처리할 때에는 입장을 명백히 하려 들지 말고, 다만 애매모호하게
注+[釋義]모릉摸稜은 만지고 더듬는 것이다. 네모진 나무를 만질 때에 왼쪽을 만질 수도 있고 오른쪽을 만질 수도 있다. 《조야첨재朝野僉載》에 이르기를 “소미도蘇味道가 재상이 되었을 때에 혹자가 음양陰陽을 조화시킬 방법을 묻자, 소미도蘇味道가 대답하지 않고 다만 손으로 상床의 모서리만 만졌다.” 하였다. [頭註]막摸은 음이 막이니, 손으로 잡는 것이다. 양쪽 입장을 다 견지하는 것이 좋다.”라고 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소모릉蘇摸稜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