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四月
에 上
이 宴近臣
할새 國子祭酒祝欽明
이 自請作八風舞
注+[附註]非春秋所謂者也요 特借八風之名하야 而備諸淫醜之態耳라 後人이 謂淫放不返爲風하니 此則欽明所謂八風也라 하야 搖頭轉目하야 備諸醜態하니 上笑
러라
欽明이 素以儒學著名이라 吏部侍郞盧藏用이 私謂諸學士曰 祝公五經이 掃地盡矣라하니라
○ 安樂公主欲韋后臨朝
하고 自爲皇太女
하야 乃相與合謀
하고 於餠餤
注+[頭註]餤은 杜覽反이라 麪裹菜爲之하고 又麪裹肉爲之라中
에 進毒
이러니 六月壬午
에 中宗
이 崩
하다
太平公主
注+[頭註]高宗女也니 武后之生이라 與上官昭容
注+[頭註]卽上官婕妤라 謀
하고 草遺制
하야 立溫王重茂
注+[頭註]中宗子也니 是爲殤帝라 하야 爲皇太子
하고 皇后臨朝攝政
하다
○ 相王子臨淄王隆基
注+[頭註]玄宗也라謀匡復社稷
할새 微服
으로 與劉幽求等入苑中
注+[頭註]在皇城之北하니 東西二十里요 南北三十里라이러니 向二鼓
注+[頭註]持更者 每一更則鼓一聲하야 五更則鼓五聲이라 故로 五鼓而爲五更이라 에 天星散落如雪이어늘
韋后惶惑하야 走入飛騎營이어늘 有飛騎斬其首하야 獻於隆基하고
安樂公主는 方照鏡畫眉어늘 軍士斬之하니 比曉에 內外皆定이라
是日
에 赦天下
하고 以臨淄王隆基
로 爲平王
注+[通鑑要解]固以平州爲國名이나 實平內亂하야 褒以此名이라하다
○ 上이 將立太子할새 以宋王成器嫡長이요 而平王隆基有大功이라하야 疑不能決이러니
成器辭曰 國家安則先嫡長이요 國家危則先有功이니이다
苟違其宜면 四海失望이니 臣은 死不敢居平王之上이라하고 涕泣固請者累日이요 大臣亦多言 平王功大宜立이라하다
劉幽求曰 臣聞除天下之禍者는 當享天下之福이라하니
平王이 拯社稷之危하고 救君親之難하니 論功莫大요 語德最賢하니
太平公主沈敏多權略하야 與太子共誅韋氏러니 旣立大功에 益尊重하야 上이 常與之圖議大政이러라
○ 以許州刺史姚元之로 爲兵部尙書하고 洛州長史宋璟으로 檢校吏部尙書, 同中書門下三品하다
璟
이 與姚元之
로 協心
하야 革中宗弊政
하야 進忠良
하고 退不肖
하며 賞罰盡公
하고 請託不行하야 綱紀修擧하니 當時
에 翕然以爲復有貞觀, 永徽
注+[頭註]貞觀은 太宗이요 永徽는 高宗也라之風
이러라
然能任姚宋
하야 革中宗弊政
하고 罷斜封官
하고 廢
하야 紀綱修飭
하니 當時翕然
하야 以爲復有貞觀之風
이라
未幾에 天文示變한대 遂以大位로 付之於子하니 實大公之心이요 安社稷之計也어늘
奈何惑於一妹하야 明斷不足하야 雖傳位나 而不授之以政하고 自稱太上皇而猶斷大事하야
卒釀成其妹之惡하야 使奸人黨附하야 幾成逆謀하니 惜哉라
경룡景龍 4년(경술 710) - 예종황제睿宗皇帝경운景雲원년元年 -
여름 4월에
상上이
근신近臣들에게 잔치를 베풀 적에
국자좨주國子祭酒축흠명祝欽明이 스스로
팔풍무八風舞를
注+[附註]팔풍무八風舞는 《춘추좌전春秋左傳》 은공隱公 5년조에 이른바 “춤은 팔음八音의 악기를 절주節奏로 삼아 팔방八方의 풍기風氣를 나타내는 것”이란 것이 아니요, 다만 팔풍八風이라는 이름을 빌려 온갖 음란하고 추한 작태를 보인 것일 뿐이다. 뒷날 사람들이 음란하고 방탕하여 돌아오지 않는 것을 일러 풍風이라 하니, 이것이 축흠명祝欽明이 말한 ‘팔풍八風’이라는 것이다. 출 것을 청하여 머리를 흔들고 눈알을 굴리며 온갖 추태를 다 부리니,
상上이 웃었다.
축흠명祝欽明은 평소 유학儒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으므로 이부시랑吏部侍郞노장용盧藏用이 사사로이 여러 학사學士들에게 말하기를 “축공祝公의 오경五經이 쓸어낸듯 다 없어졌다.” 하였다.
안락공주安樂公主가
위후韋后는 조정에 임어하고 자신은
황태녀皇太女가 되고자 하여 마침내 서로 결탁하여 함께 도모하고 떡 속에
注+[頭註]담餤은 음이 두람반杜覽反(담)이다. 밀가루로 채소를 싸서 만들기도 하고 또 밀가루로 고기를 싸서 만들기도 한다. 독약을 넣어 올렸는데, 6월 임오일(2일)에
중종中宗이 죽었다.
태평공주太平公主가
注+[頭註]태평공주太平公主는 고종高宗의 딸이니, 무후武后의 소생이다. 상관소용上官昭容과
注+[頭註]상관소용上官昭容은 바로 상관첩여上官婕妤(上官婉兒)이다. 모의하고
유제遺制를 초안하여
온왕溫王이중무李重茂를
注+[頭註]이중무李重茂는 중종中宗의 아들이니, 바로 상제殤帝이다.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고, 황후가 조정에 임어하여 섭정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상제殤帝(李重茂)가 즉위하니 이때 나이가 16세였다.
상왕相王(睿宗
이단李旦)의 아들
임치왕臨淄王이융기李隆基가
注+[頭註]이융기李隆基는 현종玄宗이다.사직社稷을 광복할 것을 도모할 적에
미복微服 차림으로
유유구劉幽求 등과
궁원宮苑 가운데에
注+[頭註]궁원宮苑이 황성皇城의 북쪽에 있으니, 동서로 20리이고 남북으로 30리이다. 들어갔는데, 2
경更이 될 무렵
注+[頭註]밤에 숙직하는 자가 매 1경更마다 북을 한 번 쳐서 5경更이면 북을 다섯 번 친다. 그러므로 다섯 번 북이 울리면 5경更이다. 하늘의 별이 눈발처럼 떨어졌다.
유유구劉幽求가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 이와 같으니 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마침내 백수문白獸門을 공격하여 문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갔다.
위후韋后가 두려워하고 당혹하여 달아나서 비기영飛騎營으로 들어가자, 비기飛騎가 그의 목을 베어 이융기李隆基에게 바쳤다.
안락공주安樂公主는 막 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고 있었는데 군사가 그녀의 목을 베니, 새벽에 이르러 안팎이 다 안정되었다.
이 날(6월 1일)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임치왕臨淄王이융기李隆基를
평왕平王으로 삼았다.
注+[通鑑要解]평왕平王은 본래 평주平州를 나라 이름으로 삼은 것이나 실로 내란을 평정했다 하여 이 평왕平王이란 명호名號로써 기린 것이다.
갑진일(6월 24일)에 소제少帝가 조서를 내려 상왕相王에게 전위傳位하니,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였다.
상上이 장차 태자를 세우려 할 적에 송왕宋王이성기李成器는 적장자嫡長子이고 평왕平王이융기李隆基는 큰 공이 있다 하여 망설이고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이성기李成器가 사양하기를 “국가가 편안하면 적장자嫡長子를 우선 하고, 국가가 위태로우면 공이 있는 자를 우선 하여 태자로 삼아야 합니다.
만일 마땅함을 잃으면 온 천하가 실망할 것이니, 신은 죽어도 감히 평왕平王의 위에 있을 수 없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여러 날 동안 굳이 청하였으며, 대신들 또한 “평왕의 공이 크니 마땅히 세워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유유구劉幽求가 아뢰기를 “신이 들으니, 천하의 화禍를 제거한 자는 마땅히 천하의 복福을 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평왕平王이 사직社稷의 위태로움을 구원하고 군주와 어버이의 환난患難을 구원하였으니, 공을 논하면 이보다 더 클 수가 없고 덕을 논하면 가장 어집니다.
상上이 그 말을 따라 평왕平王이융기李隆基를 세워 황태자로 삼았다.
태평공주太平公主는 침착하고 민첩하며 권모가 많아 태자와 함께 위씨韋氏를 주살하였는데, 큰 공을 세운 뒤에 지위가 더욱 중요해져서 상上이 항상 그녀와 큰 정사를 도모하고 의논하였다.
허주자사許州刺史요원지姚元之를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삼고, 낙주장사洛州長史송경宋璟을 검교이부상서檢校吏部尙書‧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으로 삼았다.
송경宋璟이
요원지姚元之와 합심하여
중종中宗의 잘못된 정사를 개혁하여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등용하고 불초한 이를 물리치며,
상벌賞罰이 모두 공정하고 청탁이 행해지지 아니하여 기강이 닦여지고 거행되니, 당시에 사람들이 모두들 다시
정관貞觀과
영휘永徽注+[頭註]정관貞觀은 태종太宗의 연호이고, 영휘永徽는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연간의 유풍이 있다고 하였다.
“예종睿宗은 아들(玄宗)의 공을 인하고 재위한 지가 오래지 아니하여 칭찬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명재상인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에게 맡겨서 중종中宗의 나쁜 정사를 개혁하였고, 사봉관斜封官을 파하고 숭은묘崇恩廟를 폐하여 기강紀綱이 닦여지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들 다시 정관貞觀의 유풍遺風이 있다고 하였다.
얼마 안 있다가 천문天文이 변고를 보이자 마침내 대위大位를 아들에게 맡겼으니, 이는 실로 공정한 마음이요 사직社稷을 편안히 하려는 계책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한 누이에게 혹해서 분명하게 결단함이 부족하여 비록 아들에게 전위傳位하였으나 정권을 맡겨주지 않고 스스로 태상황太上皇이라 칭하면서 오히려 큰 일을 결단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누이의 악惡을 양성釀成해서 간사한 자들이 따르게 하여 거의 역모逆謀를 이룰 뻔하였으니, 애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