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月
에 以尙書右丞
若水
로 爲汴州刺史兼河南采訪使
하다
上
이 雖欲重都督刺史
하야 選京官才望
注+[頭註]才地聞望이라 者爲之
나 然當時士大夫猶輕外任
이라
若水餞之行할새 立望其行塵하고 久之에 乃返하야 謂官屬曰 班生此行이 何異登仙이리오하니라
○ 山東에 蝗復大起어늘 姚崇이 又命捕之하니 倪若水謂호되 蝗乃天災요 非人力所能及이니 宜修德以禳之라
劉聰
注+[釋義]晉惠時에 劉聰이 據平陽하고 僭號曰漢이라時
에 常捕埋之
호되 爲害益甚
이라하고 拒御史
注+[頭註]上年에 遣御史하야 捕而埋之라하고 不從其命
하다
崇牒若水曰 劉聰은 僞主라 德不勝妖어니와 今日은 聖朝라 妖不勝德하리니
古之良守
는 蝗不入境
注+[頭註]後漢魯恭爲中牟令하야 政有하니 曰 蝗不犯入하고 化及禽獸하고 童子有仁心이라하니라 하니 若其修德可免
인댄 彼豈無德致然
가하니 若水乃不敢違
라
○ 或言於上曰 今歲選敍太濫하야 縣令非才라하야늘
及入謝에 上이 悉召縣令於宣政殿庭하야 試以理人策하니 惟鄄城令韋濟 詞理第一이라 擢爲醴泉令하고 餘二百餘人은 不入第나 且令之官하고 四十五人은 放歸學問하다
○ 十二月
에 姚崇, 源乾曜
注+[頭註]姓名이라 罷
하고 以刑部尙書宋璟, 蘇
으로 同平章事
하다
璟爲相에 務在擇人하고 隨材授任하야 使百官으로 各稱其職하며 刑賞無私하고 敢犯顔正諫하니 上이 甚敬憚之하야 雖不合意나 亦曲從之러라
突厥黙
이 自則天世
로 爲中國患
하야 朝廷
旰食하고 傾天下之力
호되 不能克
이라
靈荃
注+[頭註]郝은 音壑이라 靈荃이 使突厥하야 得其首하니라 이 得其首
하고 自謂
不世之功이러니 璟以天子好武功
하시니 恐好事者競生心徼倖
이라하야
痛抑其賞하고 逾年에 始授郞將하니 靈荃이 慟哭而死하니라
見其始而知其終하고 沮其勝而憂其敗러니 明皇이 卒以黷武로 至於大亂하니 何其智之明歟아
姚, 宋이 相繼爲相에 崇은 善應變成務하고 璟은 善守法持正하야 二人이 志操不同이나 然協心輔佐하야 使賦役寬平하고 刑罰淸省하니 百姓富庶하야 唐世賢相을 前稱房, 杜하고 後稱姚, 宋하야 他人은 莫得比焉이러라
二人每進
에 上輒爲之起
하고 去則臨軒
注+[頭註]檐宇之末曰軒이니 臨軒은 謂近軒階也라 送之
러니 及李林甫爲相
엔 雖寵任
이 過於姚, 宋
이나 然禮遇殊卑薄矣
러라
姚崇
이 以十事
로 要
天子而後
에 輔政
하니 顧不偉哉
리오마는 而舊史不傳
이라
觀開元初에 皆已施行하니 信不誣已요 宋璟은 剛正이 又過於崇하야 玄宗素所尊憚하야 嘗屈意聽納이라
故로 唐史에 稱崇善應變以成天下之務하고 璟善守文以持天下之正이라
二人이 道不同이나 同歸于治하니 此天所以佐唐使中興也라
嗚呼라 崇은 勸天子不求邊功하고 璟은 不肯賞邊臣이어늘 而天寶之亂에 卒蹈其害하니 可謂先見矣라
然이나 唐三百年에 輔弼者不爲少로되 獨前稱房, 杜하고 後稱姚, 宋은 何哉오
三公은 坐而論道하야 天子所與共天位, 治天職者也라
自堯舜으로 至于三代히 尊禮輔相이 詩書著矣요 漢承秦弊하야 崇君卑臣이나 然猶宰相進見에 天子御坐爲起하고 在輿爲下하니 所以禮貌大臣而風厲其節也라
開元之初에 明皇이 勵精政治하고 優禮故老하야 姚宋是師러니 天寶以後로 宴安驕侈하야 倦求賢俊하고 委政群下하니 彼小人者는 惟利是就하야 不顧國體하고 巧言令色하야 以求親昵이어늘 人主甘之하야 薄於禮而厚於情이라
故로 人君이 不敬禮大臣이면 則賢者日退而小人日進矣니라
2월에 상서우승尙書右丞예약수倪若水를 변주자사汴州刺史겸하남채방사兼河南采訪使로 삼았다.
상上이 비록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를 중시하여
경관京官 중에 재주와 명망이 있는 자를 뽑아
注+[頭註]재망才望은 재능과 지벌地閥과 명망이다. 임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의 사대부들이 여전히 지방관의 임무를 경시하였다.
양주채방사揚州采訪使반경천班景倩이 들어가 대리시大理寺소경少卿이 되어 대량大梁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약수倪若水가 그를 위하여 전별할 적에 떠나는 행렬의 먼지를 서서 바라보고는 한참 뒤에 비로소 돌아와 관속들에게 이르기를 “반생班生의 이번 걸음이 어찌 하늘에 올라가 신선이 되는 것과 다르겠는가.” 하였다.
산동山東 지방에 황충蝗蟲의 재앙이 다시 크게 일어나자 요숭姚崇이 또다시 명하여 잡게 하니, 예약수倪若水가 이르기를 “황충은 바로 천재天災이고 인력人力으로 미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덕德을 닦아 물리쳐야 합니다.
전조前趙의
유총劉聰注+[釋義]진晉나라 혜제惠帝 때에 유총劉聰이 평양平陽을 점거하고 참람하게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 하였다. 때에 항상 황충을 잡아 죽였으나 폐해가 더욱 심하였습니다.” 하고는
어사御史를 막고
注+[頭註]지난해에 어사御史를 보내어 황충을 잡아서 묻게 하였다.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요숭姚崇은 예약수倪若水에게 통첩하기를 “유총劉聰은 가짜 군주이므로 덕이 요망함을 이기지 못했지만 오늘날은 성군聖君이 조정에 임어하셨으니 요망함이 덕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옛날 훌륭한 수령이 다스리는 곳에는 황충이 그 경내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注+[頭註]후한後漢 때 노공魯恭이 중모현령中牟縣令이 되어 정사에 세 가지 기이한 일이 있었으니, 황충이 경내에 들어오지 않고 교화가 금수에까지 미치고 어린아이가 인자한 마음이 있었다 한다. 만약 덕을 닦아 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저 황충은 어찌 그대가 덕이 없는 소치가 아니겠는가.” 하니,
예약수倪若水가 마침내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이로 인하여 수년 동안 계속하여 황충의 재앙이 있었으나 큰 기근에는 이르지 않았다.
혹자가 상上에게 아뢰기를 “금년에 관원을 선발하여 서용敍用한 것이 너무 지나쳐서 현령縣令이 적임자가 아닙니다.” 하였다.
새로 임명된 관원이 조정에 들어와 사례할 적에 상上이 현령縣令들을 선정전宣政殿의 뜰로 모두 불러서 백성을 다스리는 계책을 가지고 시험해보니, 오직 견성령鄄城令위제韋濟가 문장과 이론이 제일이므로 발탁하여 예천령醴泉令으로 삼고, 나머지 200여 명은 합격하지 못하였으나 우선 맡은 고을로 돌아가게 하고, 45명은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익히게 하였다.
6월 계해일(19일)에 상황上皇이 붕崩하였다.
12월에
요숭姚崇과
원건요源乾曜를
注+[頭註]원건요源乾曜는 성명姓名이다. 파면(면직)하고
형부상서刑部尙書송경宋璟과
소정蘇頲을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삼았다.
송경宋璟이 정승이 되자, 인재를 가려 뽑음에 힘쓰고 재능에 따라 임무를 맡겨서 백관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직책에 걸맞게 하며, 형벌과 상을 줌에 사정私情을 따르지 않고 감히 황제의 얼굴을 범하면서 정직하게 간하니, 상上이 매우 공경하고 조심하여 비록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더라도 굽혀 그의 뜻을 따랐다.
돌궐突厥의 묵철黙啜이 측천무후則天武后 때로부터 대대로 중국의 걱정거리가 되어 조정에서 이 때문에 정무를 보느라 늦게서야 밥을 먹고 천하의 힘을 기울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학령전郝靈荃이
注+[頭註]학郝은 음이 학이다. 학령전郝靈荃이 돌궐突厥에 사신으로 갔다가 묵철黙啜의 수급首級을 얻었다. 묵철黙啜의
수급首級을 얻고는 스스로 전무후무한 공이라고 여겼는데,
송경宋璟이 “황제가
무공武功을 좋아하시니 일을 좋아하는 자들이 다투어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낼까 두렵다.” 하여,
그의 상賞을 통렬히 억제하고 해를 넘기고야 비로소 낭장郎將에 제수하니, 학령전郝靈荃이 통곡하다가 죽었다.
처음을 보고 끝을 알았으며 승리를 억제하고 패배를 우려하였는데, 명황明皇이 끝내 무력을 남용함으로써 큰 혼란에 이르렀으니, 어쩌면 그리도 지혜가 밝은가.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이 서로 이어서 정승이 되었는데, 요숭姚崇은 임기응변을 잘하여 일을 이루었고 송경宋璟은 법을 잘 지켜 공정公正함을 유지하여, 두 사람이 뜻과 소행은 같지 않았으나 합심하여 보좌해서 부역賦役이 너그럽고 공평하며 형벌이 투명하고 줄어들게 하니, 백성들이 부유하고 많아져서 당唐나라 때의 어진 재상 중에 전에는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일컫고 뒤에는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일컬어서 다른 사람은 이들에게 견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두 사람이 매번 나아가 뵐 때마다
상上이 번번이 그들을 위해 일어났으며 그들이 떠날 때면
전殿 앞에까지 나가
注+[頭註]추녀 끝을 헌軒이라 이르니, 임헌臨軒은 헌계軒階(堂 앞의 계단)와 가까움을 이른다. 몸소 전송하곤 하였는데, 뒤에
이임보李林甫가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비록 총애하고 위임함이
요숭姚崇과
송경宋璟보다 더하였으나 예우함은 현저히 낮고 박하였다.
- 《신당서新唐書요숭송경전姚崇宋璟傳》에 나옴 -
《신당서新唐書》 〈요숭姚崇‧송경열전宋璟列傳〉贊에 말하였다.
“요숭姚崇이 열 가지 일을 천자에게 요구하고 설득한 뒤에 정사를 보필하였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마는 《구당서舊唐書》에는 이것이 전하지 않는다.
살펴보건대 개원開元 초기에 모두 이미 시행되었으니, 참으로 거짓이 아니요, 송경宋璟은 강직하고 바름이 또 요숭姚崇보다 더하여 현종玄宗이 평소에 높이고 공경하는 바여서 일찍이 뜻을 굽히고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러므로 당사唐史(《新唐書》)에 ‘요숭姚崇은 임기응변을 잘하여 천하의 일을 이루었고, 송경宋璟은 법을 잘 지켜 천하의 공정公正함을 유지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두 사람이 도道는 같지 않으나 똑같이 다스려지는 데로 귀결하였으니, 이는 하늘이 당唐나라를 도와서 중흥中興하게 한 것이다.
아, 요숭姚崇은 천자에게 변방의 공功을 구하지 말 것을 권하였고, 송경宋璟은 변방의 신하에게 상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천보天寶 연간의 난리에 끝내 그 폐해를 입었으니, 선견지명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당唐나라 300년 동안 보필한 자가 적지 않았으나 다만 앞에는 방현령房玄齡과 두여회杜如晦를 칭하고 뒤에는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칭함은 어째서인가?
훌륭한 군주와 어진 신하가 만나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삼공三公은 앉아서 도道를 논하여 천자天子가 천위天位를 함께 하고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 예禮가 높지 않을 수 없고 그 맡김이 무겁지 않을 수 없다.
요堯‧순舜으로부터 삼대三代에 이르기까지 보상輔相을 높이고 예우한 것이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 분명히 드러나 있으며, 한漢나라는 진秦나라의 폐단을 인습하여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었으나 오히려 재상이 나아가 뵐 때에 천자天子가 어좌御座에서 일어났고 수레에 있을 때에는 수레에서 내렸으니, 이는 대신大臣을 예우하여 절개를 권면하기 위해서였다.
개원開元 초기에는 명황明皇이 마음을 가다듬고 오로지 정사에 힘을 쏟아 원로대신元老大臣들을 우대하여 요숭姚崇과 송경宋璟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천보天寶 이후에는 안일에 빠지고 교만하고 사치하여 현자와 준걸들을 구하기를 게을리 하고 정사를 아랫사람들에게 맡기니, 저 소인小人들은 오직 이로움을 따라서 국가의 체통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듣기 좋게 하고 얼굴빛을 꾸며서 군주와 친하기를 구하는데, 군주가 이것을 좋게 여겨서 예禮를 박하게 하고 정情을 후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이임보李林甫가 그 간악함을 부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이 대신大臣을 공경하고 예우하지 않으면 현자가 날로 물러가고 소인들이 날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