制以所得客戶稅錢
으로 均充所在常平倉本
하고 又委使司
注+[頭註]勸農使司也라 하야 與州縣議
하야 作勸農社
하야 使貧富相恤
하고 耕耘以時
케하다
○
命長從宿衛之士曰
騎
注+[釋義]彍은 滿張弩也니 彍騎는 一曰射騎라 其法이 이라 又擇材勇者하야 爲番頭하야 習弩射하니라 라하고 分隷十二衛
하니 總十二萬人
이라
爲六番
注+[釋義]唐百官志에 八衛各有左右하야 曰左右衛, 曰驍衛, 曰武衛, 曰威衛, 曰領軍, 曰金吾, 曰監門, 曰千牛니 共十六衛라 自左右衛至領軍은 竝掌宮禁宿衛하고 金吾는 掌宮中京城警하고 監門은 掌諸門禁衛하고 千牛는 掌侍衛라 凡之番上者는 十二衛受其名簿而配以職하니 除監門, 千牛凡左右四衛하야 不須라 故로 但十二衛라 每衛萬人이니 分爲六番이라 番者는 代宿衛也라 하다
○ 十一月庚寅
에 上
은 祀昊天上帝於山上
하고 群臣
은 祀五帝
注+[頭註]東方은 靑帝靈威仰이요 南方은 赤帝赤熛怒요 西方은 白帝白招矩요 北方은 黑帝叶光紀요 中央은 黃帝含樞紐라 百神於山下之壇
하고 其餘
는 倣乾封故事
注+[頭註]乾封은 高宗年號니 丙寅年에 封泰山하고 禪社首하니라하다
○ 初
에 隋末國馬 皆爲盜賊及戎狄所掠
이러니 唐初
에 纔得
三千匹於赤岸澤
하야 徙之隴右
하고 命太僕張萬歲
하야 掌之
하다
萬歲善於其職
하야 自貞觀
으로 至麟德
注+[頭註]高宗年號라 히 馬蕃息
하야 及七十萬匹
하니 分爲八坊四十八監
注+[附註]唐制에 凡馬五千匹爲上監이요 三千匹以上爲中監이요 一千匹以上爲下監이라 麟德中에 置八使하야 分總監坊이라 秦, 蘭, 原, 渭四州及河曲之地에 凡監四十八이니 南使有監十五요 西使有監十六이요 北使有監七이요 鹽州使有監八이요 嵐州使有監二라 自京師西屬隴右에 有七坊하니 置隴右三使領之라 歐陽脩曰 置八坊하니 豳, 岐, 涇, 寧間에 地廣千里라 一曰保樂이요 二曰甘露요 三曰南浦閏이요 四曰北普閏이요 五曰岐陽이요 六曰太平이요 七曰宜祿이요 八曰安定이라 八坊之田이 千二百(二)[三]十頃이니 募民耕之하여 以給蒭秣이라 八坊之馬 爲四十八監이로되 而馬多地狹하야 不能容일새 又(折)[析]八監하야 列置河西豊廣之野하니라 하야 各置使以領之
하다
是時
에 天下以一縑易一馬
러니 垂拱
注+[頭註]武后年號라 以後
에 馬潛耗太半
이라
上
이 初卽位
에 牧馬有二十四萬匹
이러니 以太僕卿王毛仲
으로 爲內外閑廐使
注+[頭註]閑은 馬闌也라 內는 謂京師요 外는 謂河隴이라 하고 少卿張景順
으로 副之
하다
上之東封
注+[頭註]泰山이라 에 以牧馬數萬匹從
하야 色別爲群
하니 望之如雲錦이라
上
이 嘉毛仲之功
하야 加毛仲開府儀同三司
注+[頭註]卽三公也라 하다
○ 上還
할새 至宋州
하야 宴從官於樓上
하니 刺史寇泚
注+[頭註]上顧刺史寇泚曰 比亦屢有以酒饌不豐으로 訴於朕者하니 知卿不借譽於左右也라하고 自擧酒賜하니라 預焉
이라
酒酣에 上謂張說曰 曏者에 屢遣使臣하야 分巡諸道하야 察吏善惡이러니 今因封禪하야 歷諸州하니 乃知使臣負我多矣로라
2월에 어사중승御史中丞우문융宇文融에게 호부시랑戶部侍郞을 겸하게 하였다.
조령을 내리기를, 징수한
객호客戶의
세전稅錢으로 소재지
상평창常平倉의 본전을 채우고, 또
권농사사勸農使司에 맡겨서
注+[頭註]사사使司는 권농사사勸農使司이다. 주현州縣과 의논하여
권농사勸農社를 만들어서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들로 하여금 서로 구휼하게 하며 밭 갈고 김매는 것을 제때에 하게 하였다.
황제가
장종숙위長從宿衛하는
친군親軍의 이름을 바꾸어
확기彍騎라 하고
注+[釋義]확彍은 쇠뇌를 잔뜩 당긴 것이니, 확기彍騎는 일명 사기射騎이다. 그 법이 10명을 화火라 하고 5화火를 단團이라 하는데, 모두 우두머리가 있다. 또 재주 있고 용감한 자를 뽑아 번두番頭로 삼아 쇠뇌로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다. 나누어 12
위衛에 예속시키니, 모두 12만 명이었다.
여섯으로 나누어
注+[釋義]《신당서新唐書》 〈백관지百官志〉에 “8위衛에 모두 좌左‧우右가 있어서 좌위左衛와 우위右衛, 좌효위左驍衛와 우효위右驍衛, 좌무위左武衛와 우무위右武衛, 좌위위左威衛와 우위위右威衛, 좌영군위左領軍衛와 우령군위右領軍衛, 좌금오위左金吾衛와 우금오위右金吾衛, 좌감문위左監門衛와 우감문위右監門衛, 좌천우위左千牛衛와 우천우위右千牛衛이니, 모두 16위衛이다. 좌위左衛와 우위右衛부터 좌영군위左領軍衛와 우령군위右領軍衛까지는 모두 궁금宮禁의 숙위宿衛를 관장하고, 좌금오위左金吾衛와 우금오위右金吾衛는 궁중宮中과 경성京城의 경비를 관장하고, 좌감문위左監門衛와 우감문위右監門衛는 여러 문의 금위禁衛를 관장하고, 좌천우위左千牛衛와 우천우위右千牛衛는 시위侍衛를 관장한다. 무릇 오부五府와 외부外府에서 상번上番하는 자는 12위衛에서 그 명부名簿를 받아 직무를 배속시키니, 좌감문위左監門衛‧우감문위右監門衛와 좌천우위左千牛衛‧우천우위右千牛衛 4위衛를 제하여 대기시키지 않기 때문에 다만 12위衛인 것이다. 매 위衛마다 만 명이니, 이것을 여섯으로 나누어 번갈아 번番을 서게 하였다. 번番은 번갈아 교대하여 숙위宿衛하는 것이다. 번갈아
번番을 서게 하였다.
11월 경인일(10일)에
상上은
태산泰山의
정상頂上에서
호천昊天과
상제上帝를 제사하고 여러 신하들은
태산泰山 아래의 단에서
오제五帝와
注+[頭註]동방東方은 청제靑帝영위앙靈威仰이고, 남방南方은 적제赤帝적표노赤熛怒이고, 서방西方은 백제白帝백초구白招矩이고, 북방北方은 흑제黑帝협광기叶光紀이고, 중앙中央은 황제黃帝함추뉴含樞紐이다. 백신百神을 제사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한漢나라
건봉乾封 연간의
고사故事를 따랐다.
注+[頭註]건봉乾封은 고종高宗의 연호이니, 고종高宗이 병인년(666)에 태산泰山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사수산社首山에서 땅에 제사하였다.
처음에 수隋나라 말기에 나라에서 기르던 말이 모두 도적과 오랑캐에게 약탈당하였는데, 당唐나라 초기에 겨우 암수 3천 필을 적안택赤岸澤에서 얻어 농우隴右(隴西)로 옮기고 태복太僕장만세張萬歲에게 명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장만세張萬歲가 그 직분을 잘 수행하여
정관貞觀부터
인덕麟德 연간에 이르기까지
注+[頭註]인덕麟德은 고종高宗의 연호이다. 말이 번식하여 70만 필에 이르자, 8
방坊 48
감監에 분속시켜
注+[附註]당唐나라 제도에 무릇 말 5000필을 상감上監이라 하고 3000필 이상을 중감中監이라 하고, 1000필 이상을 하감下監이라 하였다. 인덕麟德 연간에 팔사八使를 두어서 감監과 방坊을 나누어 관할하였다. 진주秦州‧난주蘭州‧원주原州‧위주渭州 등 네 주州와 하곡河曲 지방에 감監이 48명이었으니, 남사南使는 15명의 감監이 있고, 서사西使는 16명의 감監이 있고, 북사北使는 7명의 감監이 있고, 염주사鹽州使는 8명의 감監이 있고, 남주사嵐州使는 2명의 감監이 있었다. 경사京師로부터 서쪽으로 농우隴右에 이르기까지 7개의 마방馬坊이 있었는데, 농우삼사隴右三使를 두어 통솔하게 하였다.
구양수歐陽脩가 말하기를 “8방坊을 두었으니, 빈주豳州‧기주岐州‧경주涇州‧영주寧州 지역인데 땅의 넓이가 천 리였다. 첫 번째는 보락保樂, 두 번째는 감로甘露, 세 번째는 남포윤南浦閏, 네 번째는 북보윤北普閏, 다섯 번째는 기양岐陽, 여섯 번째는 태평太平, 일곱 번째는 의록宜祿, 여덟 번째는 안정安定이다. 8방坊의 토지가 1230경頃이니, 백성을 모집하여 경작해서 꼴과 말먹이를 공급하였다. 8방坊의 말을 48감監으로 만들었으나 말은 많고 땅은 좁아 수용할 수가 없으므로 또다시 8감監을 쪼개어 하서河西의 풍요롭고 넓은 들에 두었다. 각각
방사坊使와
감사監使를 두어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 천하에서는 비단 한 필로 말 한 마리와 바꿀 정도였는데,
수공垂拱 연간
注+[頭註]수공垂拱은 무후武后의 연호이다. 이후로는 말이 점점 감소되어 태반이 없어졌다.
상上이 처음 즉위하였을 때 국가에서 기르는 말이 24만 필이었는데,
태복경太僕卿왕모중王毛仲을
내외한구사內外閑廐使로 삼고
注+[頭註]한閑은 마구간이다. 내內는 경사京師를 이르고, 외外는 하서河西와 농우隴右를 이른다. 소경少卿장경순張景順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이때에 이르러 말이 43만 필이었고 소와 양도 이와 비슷하였다.
상上이 동쪽으로
태산泰山에 가서
봉선封禪할 때에
注+[頭註]동봉東封은 태산泰山이다. 기르는 말 수만 필을 데리고 갔는데, 말의 색깔에 따라 구별하여 무리를 만드니,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구름 비단과 같았다.
상上이
왕모중王毛仲의 공을 가상히 여겨
왕모중王毛仲에게
개부開府의동삼사儀同三司를 가하였다.
注+[頭註]삼사三司는 즉 삼공三公이다.
상上이 돌아오는 도중에
송주宋州에 이르러 수행한 관원들에게 누대 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자사刺史구자寇泚가
注+[頭註]상上이 송주자사宋州刺史구자寇泚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근래에 또한 술자리가 풍성하지 않다는 이유로 여러 번 짐에게 경卿을 헐뜯는 자가 있었으니, 경卿이 좌우의 측근들에게 칭찬을 구하지 않아서임을 알겠다.” 하고, 직접 술잔을 들어 하사하였다. 연회에 참여하였다.
주흥이 무르익었을 때 상上이 장열張說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내가 사신使臣을 자주 파견해서 여러 도를 순행하여 관리의 우열을 고찰하게 하였는데, 지금 봉선封禪하는 기회에 여러 주州를 지나면서 보니, 이제 사신使臣이 나를 많이 기만하였음을 알겠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