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月
에 安祿山
이 奏請
호되 以蕃將三十二人
으로 代漢將
이어늘 上命立進畫
注+[附註]進畫者는 命中書爲發(目)[日]勅하야 進請御畫而行之라 唐制에 이라 其四曰發(目)[日]勅이니 謂御畫發(目)[日]勅也니 增減官員하고 廢置州縣하며 除免官爵하고 授六品以下官에 則用之하니라 하야 給告身
하다
韋見素謂楊國忠曰 祿山이 久有異志러니 今又有此請하니 其反이 明矣니이다
明日에 見素入見한대 上이 迎謂曰 卿等이 有疑祿山之意耶아
見素因極言호되 祿山이 反已有迹하니 所請을 不可許니이다 上이 不悅하고 竟從其請하다
古之所謂聰明睿智者는 必見人之所不見하고 知人之所未知也라
夫豺狼之不可邇
와 禽獸之不可狎
과 泰阿
注+[頭註]楚有三劍하니 曰龍泉, 泰阿, 工市요 吳有二劍하니 曰干將, 鏌요 越有二劍하니 曰純鉤, 湛盧니 皆良劍이라 之不可倒持
와 帷薄之不可
注+[頭註]賈誼傳에 大臣有坐汚穢淫亂者를 不曰汚穢하고 曰라하니라 溷은 亂濁也라 은 雖愚夫稚子
라도 固能知之
어늘 明皇獨不知
는 何哉
오
祿山
은 요 平盧僨將
注+[頭註]僨은 僵也라 祿山이 爲虜所敗하니 見上丙子年이라 이니 不獨張九齡知其有反相
이요 明皇固已知之矣
라
以智略則卑下凡猥
注+[頭註]鄙也라 하야 不足以籌邊
이요 以器局則淺陋庸愚
하야 不足以辦事
어늘 連組累節
注+[通鑑要解]謂兼領也라 로 極爵崇品
하고 玉食甲第
注+[頭註]玉食은 謂珍寶之食이라 를 濫頒瀆賞
하야 在諸王將相所不能得者
를 一以此施之
는 謂之何哉
오
龍樓雞障
注+[附註]障은 坐(幢)[障]也니 畫金雞爲(節)[飾]이라 上이 嘗宴勤政樓할새 百官列坐樓下하고 獨爲祿山하야 於御座東間에 設金雞障하고 置榻하야 使坐其前하고 仍命捲簾하야 以示榮寵하니라 之嚴
은 尊卑所以定位
요 桂掖椒房
注+[頭註]皇后所居也라 掖은 見上이라 椒房은 以椒和泥塗壁하니 取其溫煖而芳하고 辟除惡氣하며 又取其蕃實之義라之邃
는 內外所以別嫌
이어늘 賜坐而不之疑
하고 出入而不之禁
하야 凡有血氣者 俱爲不平
이로되 明皇獨無怍色
하니 其又何哉
아
夫僭擬無涯之念
이 每啓於權位之極
하고 畔渙
注+[頭註]强恣貌라 不軌之謀
가 多出於才力之雄
이라
今祿山이 養壯士八千餘人과 家僮百餘人하야 皆以一當百하고 且擁三道兵馬矣라
於是에 精兵이 極天下之選하고 財用이 極天下之富하야 爵賞皆出其門하고 將帥皆其私屬이니 其必反之謀는 不特楊國忠知之요 路人無不知之라
而明皇猶不之悟
하야 卒至於竄身失國
注+[頭註]謂也니 見下卷丙申年이라 而不悔
라
詩曰 啜其泣矣
어늘 何嗟及矣
注+[頭註]啜은 泣貌也라 리오하니 明皇之謂歟
인저
安祿山이 專制三道하야 陰畜異志殆將十年이로되 以上待之厚라하야 欲俟上晏駕然後에 作亂이러니
會에 楊國忠이 與祿山不相悅이라 屢言祿山且反호되 上不聽하니 國忠이 數以事激之하야 欲其速反하야 以取信於上이라
會에 有奏事官이 自京師還이어늘 祿山이 詐爲勅書하야 悉召諸將하야 示之하고 曰
有密旨하야 令祿山將兵入朝하야 討楊國忠하니 諸君은 宜卽從軍하라
○ 十一月甲子에 祿山이 發所部十五萬衆하고 反於范陽하야 引兵而南하다
時에 海內久承平하야 百姓이 累世不識兵革이러니 猝聞范陽兵起하고 遠近震駭라
河北
은 皆祿山統內
라 所過州縣이 望風瓦解注+[釋義]言自分散也라 하야 守令
이 或
開門出迎하고 或
棄城竄匿하고 或爲所擒戮
하야 無敢拒之者
러라
明皇至是하야 知祿山必反而不爲備하니 可謂愚而不悟者矣로다
曰 顔
卿,
之徒 以一縣一郡
으로도 尙能倉卒立功
이어든 況據四海全盛之勢乎
아
苟變易其思慮
하고 澡雪其精神
하야 兵擇將
하야 立有區處
런들 比其稱兵
이 尙在數月之後
하니 縱河北俶擾
나 亦安有播遷之辱哉
리오
蓋其
惑之深
하야 神志昏奪
하야 以至於此
하니 可不戒哉
며 可不懼哉
아
○ 上이 聞祿山已反하고 乃使封常淸으로 乘驛하고 詣東京募兵하야 旬日에 得六萬餘人하야 乃斷河橋하고 爲守禦之備하다
祿山
이 至藁城
하니 常山太守
이 力不能拒
하야 與長史袁履謙
으로 往迎之
한대 祿山
이 輒賜杲卿金紫
注+[頭註]金章紫綬也라 하고 質其子弟
하야 使仍守常山
하다
杲卿
이 歸
할새 途中
에 指其衣
하고 謂履謙曰 何爲
此
注+[釋義]謂著祿山所賜金紫也라 리오
履謙이 悟其意하고 乃陰與杲卿으로 謀起兵討祿山하다
○ 丙子에 以郭子儀로 爲朔方節度大使하고 出內府錢帛하야 於京師募兵하야 十一萬이 旬日而集하니 皆市井子弟也러라
○ 初에 平原太守顔眞卿이 知祿山且反하고 因霖雨하야 完城浚濠하고 料丁壯하고 實倉廩이러라
祿山이 以其書生易之러니 及祿山反牒에 眞卿이 以平原, 博平兵七千人으로 防河津하다
上이 始聞祿山反에 河北郡縣이 皆風靡하고 歎曰 二十四郡에 曾無一人義士耶아하더니
及平至
에 大喜曰 朕
이 不識顔眞卿作何狀
이러니 乃能如是
注+[頭註]本傳에 不識眞卿何如人 所爲乃若此也라 로다하다
眞卿이 使親客으로 密懷購賊牒하야 詣諸郡하니 由是로 諸郡에 多應者라
眞卿
은 杲卿之從弟
注+[頭註]兄弟之子가 相謂爲從父昆弟니 言本同祖어늘 從父而別也라 也
라
封常淸所募兵
이 皆白徒
注+[頭註]素非軍旅니 猶曰이라 로 未經訓練이라
屯武牢하야 以拒賊이러니 賊以鐵騎蹂之하니 官軍이 大敗라
○ 是時에 朝廷이 徵兵호되 諸道皆未至라 關中이 恟懼러니 會에 祿山이 方謀稱帝하야 留東京不進이라
諭以擧兵討安祿山하고 繼以涕泣하니 士皆感憤이러라
○ 以哥舒翰으로 爲兵馬副元帥하야 將八萬하고 軍于潼關하다
○ 顔杲卿
이 將起兵
할새 命崔安石等
하야 徇諸郡
注+[頭註]巡師宣令也라 云
호되 大軍
이 已下井
하니 朝夕當至
하야 先平河北諸郡
하리니
於是에 河北諸郡이 響應하야 凡十七郡이 皆歸朝廷하야 兵合二十餘萬이라
其附祿山者는 唯范陽, 盧龍, 密雲, 漁陽, 汲, 鄴六郡而已러라
2월에
안녹산安祿山이
번장蕃將 32
인人으로
한인漢人 장수를 대신할 것을
주청奏請하자,
상上이
중서성中書省에 명하여 즉시
발칙發勅을 만들어서 나아가
어화御畫을 청하여
注+[附註]진화進畫은 중서성中書省에 명하여 발일칙發日勅을 만들어서 나아가 어화御畫을 청하여 행하는 것이다. 당唐나라 제도에 중서성中書省에서 임금의 말씀을 관장하였으니, 그 제도가 일곱 가지가 있다. 그 네 번째가 발일칙發日勅이니 어화발일칙御畫發日勅을 이르는 바, 관원을 늘리거나 줄이며 주현을 폐하거나 설치하며 관작을 제수하고 면직하며 6품 이하의 관직을 제수할 때에 이것을 사용하였다.고신첩告身帖을 주게 하였다.
위견소韋見素가 양국충楊國忠에게 말하기를 “안녹산安祿山이 오랫동안 딴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 또다시 이러한 청이 있으니, 배반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다음 날 위견소韋見素가 들어가 뵙자 상이 맞이하여 이르기를 “경들이 안녹산安祿山의 뜻을 의심함이 있는가?” 하였다.
위견소韋見素가 인하여 지극히 간하기를 “안녹산安祿山이 이미 배반한 자취가 있으니 그가 청하는 바를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으나 상上이 기뻐하지 않고 끝내 안녹산安祿山의 청을 따랐다.
“옛날에 이른바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란 반드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바를 보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바를 알았다.
시랑豺狼을 가까이할 수 없음과
금수禽獸를 친압할 수 없음과
태아泰阿를
注+[頭註]초楚나라에 세 자루의 명검名劍이 있었으니 용천龍泉‧태아泰阿‧공시工市이고, 오吳나라에 두 자루의 명검名劍이 있었으니 간장干將과 막사鏌邪이고, 월越나라에 두 자루의 명검名劍이 있었으니 순구純鉤와 담로湛盧인 바, 모두 좋은 명검이다. 거꾸로 잡을 수 없음과
유박帷薄을 더럽히고 설만할 수 없음은
注+[頭註]《한서漢書》 〈가의전賈誼傳〉에 “대신大臣 중에 더럽고 음란하여 남녀간에 분별이 없는 죄에 걸린 자를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않고 ‘유박帷薄(휘장)이 닦여지지 못했다’고 한다.” 하였다. 혼溷은 어지럽고 혼탁함이다. 비록 어리석은 지아비와 어린아이라도 진실로 아는 것인데,
명황明皇이 유독 알지 못함은 어째서인가?
안녹산安祿山은
유성柳城의
얼호孼胡이고
평로부平盧府의 패한 장수이니,
注+[頭註]분僨은 실패함이다. 녹산祿山이 오랑캐에게 패하였으니, 상문上文의 병자년丙子年(736)에 보인다. 유독
장구령張九齡이 그에게 배반할
상相이 있음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명황明皇도 진실로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다.
지략으로 말하면 낮고 범속해서
注+[頭註]외猥는 비루함이다. 변경을 개척할 수가 없고, 기국으로 말하면 비루하고 용렬해서 일을 다스릴 수가 없는데, 연달아
인수印綬를 차고 여러 개의
절도사節度使를 겸하여
注+[通鑑要解]연조루절連組累節은 3개의 진鎭을 겸임함을 이른다. 관작을 지극히 하고 품계를 높였으며,
옥식玉食과
갑제甲第를
注+[頭註]옥식玉食은 진귀한 음식을 이른다. 함부로 나누어 주고 상을 남발하여
제왕諸王과
장상將相도 얻지 못하는 것을 한결같이 그에게 베풀어줌은 어째서인가?
용루龍樓와
계장鷄幛을
注+[附註]장障은 좌장坐障이니, 금계金鷄를 그려 꾸몄다. 상上이 일찍이 근정루勤政樓에서 잔치할 적에 백관들은 누각 아래에 죽 벌여서 앉고 오직 안녹산安祿山을 위해서 어좌御座의 동쪽 사이에 금계장金鷄障을 설치하고 탑榻을 두어 그 앞에 앉게 한 다음 명하여 주렴을 걷게 함으로써 은총을 보였다. 엄격하게 함은 존비가 자리를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요,
계액桂掖과
초방椒房을
注+[頭註]계액초방桂掖椒房은 황후皇后가 거처하는 곳이다. 액掖은 상문上文에 보인다. 초방椒房은 산초를 진흙에 섞어 벽에 바르니, 산초의 따뜻하고 향기로움을 취하고 나쁜 기운을 물리쳐 없애며, 또 산초는 열매가 많이 열리므로 자녀子女를 많이 생육生育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깊숙하게 함은 내외가 혐의를 구별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안녹산安祿山에게 자리에 앉게 허락하고 의심하지 않으며 궁중을 출입해도 금하지 않아서 모든
혈기血氣가 있는 자들이 다 불평하는데,
명황明皇만은 홀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이는 또 어째서인가?
참람하여 넘치게 윗사람과 견주는 끝없는 생각은 언제나 권세와 지위가 지극한 데에서 나오고, 강하고 방자하여
注+[頭註]반환畔渙은 세력이 강하고 방자한 모양이다. 반역을 꾀함은 대부분 재주와 힘이 강대한 데에서 나온다.
지금 안녹산安祿山이 장사壯士 8천여 명과 가동家僮 1백여 명을 길러 모두 한 명이 백 명을 당해내고 또 3도道의 병마兵馬를 보유하였다.
이에 정예병은 천하의 선발을 지극히 하고 재용財用은 천하의 부유함을 지극히 하여, 관작과 상이 모두 그의 문에서 나오고 장수가 모두 그의 사속私屬이었으니, 그가 반드시 배반할 계책을 세우리라는 것을 비단 양국충楊國忠이 알았을 뿐만 아니라 길 가는 사람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또다시 번장蕃將으로 한장漢將을 대신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의 간악한 계책이 모두 드러났다.
그런데도
명황明皇은 오히려 이를 깨닫지 못하여 마침내 몸을 도망하고 나라를 잃기까지 하였으나
注+[頭註]찬신실국竄身失國은 촉蜀으로 행차한 것을 이르니, 하권下卷의 병신년조丙申年條(756)에 보인다. 뉘우치지 않았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줄줄 눈물을 흘리니, 슬퍼한들 어찌 미칠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으니,
注+[頭註]철기읍의啜其泣矣하차급의철기읍의何嗟及矣啜其泣矣하차급의何嗟及矣:철啜은 우는 모양이다. 이는
명황明皇을 두고 말한 것이다.”
안녹산安祿山이 하동河東‧범양范陽‧평로平盧 3도道를 마음대로 통제하여 은밀히 딴마음을 품은 지가 거의 10년이 되었으나, 상上이 후하게 대우한다 하여 상上이 별세하기를 기다린 뒤에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그런데 마침 양국충楊國忠이 안녹산安祿山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안녹산安祿山이 장차 반란할 것이라고 자주 말했으나 상上이 듣지 않자, 양국충楊國忠은 여러 번 일로써 안녹산安祿山을 격노시켜 그가 빨리 배반하게 해서 자신이 상上에게 신임을 받고자 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이로 인해 속히 모반할 것을 결심하였다.
마침 주사관奏事官이 경사京師로부터 돌아오자, 안녹산安祿山이 거짓으로 칙서를 만들어 여러 장수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칙서를 보이고 이르기를
“상上의 밀지密旨가 있어서 나로 하여금 병력을 인솔하고 조정에 들어가 양국충楊國忠을 토벌하게 하였으니, 제군들은 마땅히 즉시 종군하라.”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놀라 서로 돌아보고 감히 딴말을 하지 못하였다.
11월 갑자일甲子日(9일)에 안녹산安祿山이 자신이 통솔하고 있는 15만의 병력을 징발하여 범양范陽에서 배반하여 병력을 인솔하고 남진南進하였다.
이때 온 천하가 오랫동안 태평하여 백성들이 여러 대 동안 병혁兵革(전쟁)을 알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범양范陽에서 병력을 일으켜 반란했다는 말을 듣고는 원근이 진동하고 놀랐다.
하북河北은
안녹산安祿山이 관할하는 지역이므로 그들이 지나는 곳의
주州와
현縣이 모두 소문만 듣고도 스스로 와해되어
注+[釋義]와해瓦解는 저절로 분산됨을 말한다. 수령守令들이 혹은 성문을 열고 나와 맞이하고 혹은 성을 버리고 도망해 숨고 혹은 사로잡히고 죽임을 당하여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명황明皇이 이때에 이르러 안녹산安祿山이 반드시 배반할 줄 알았으면서도 대비하지 않았으니, 어리석어서 깨닫지 못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혹자가 말하기를 ‘안녹산安祿山의 군대가 정예하니, 비록 대비를 했더라도 또한 어찌 그를 막을 수 있겠는가.’ 하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안고경顔杲卿과 장순張巡의 무리는 한 현縣과 한 군郡을 가지고도 오히려 창졸간에 공을 세웠는데, 더구나 사해四海가 전성全盛한 형세를 점거함에 있어서랴.
만일 생각을 바꾸고 정신을 깨끗하게 하여 군대를 모으고 장수를 가려서 당장 변통하여 조처하였더라면 안녹산安祿山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한 것이 오히려 몇 달 뒤에 있었으니, 비록 하북河北 지방이 첫 번째로 소요하였으나 또한 어찌 파천播遷하는 치욕이 있었겠는가.
명황明皇이 고혹蠱惑됨이 깊어서 정신이 어둡고 뜻을 빼앗겨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상上이 안녹산安祿山이 이미 배반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봉상청封常淸으로 하여금 역말(파발마)을 타고 동경東京인 낙양洛陽에 가서 병력을 모집하게 하였는데, 열흘 만에 6만 명을 얻어 마침내 황하의 다리를 끊고 수어守禦할 대비를 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고성藁城에 이르니,
상산태수常山太守안고경顔杲卿이 힘으로 항거할 수 없으므로
장사長史원이겸袁履謙과 함께 가서 맞이하였는데,
안녹산安祿山이 곧
안고경顔杲卿에게
금장金章(金印)과
자수紫綬를 하사하고
注+[頭註]금자金紫는 〈고관대작들이 사용하는〉금으로 만든 인장印章과 붉은색의 인끈이다. 자제子弟들을 인질로 삼은 다음 그대로
상산常山을 지키게 하였다.
안고경顔杲卿이 돌아올 때 자신의 옷을 가리키며
원이겸袁履謙에게 말하기를 “내 어찌 이런 것을 착용하겠는가.” 하였다.
注+[釋義]안녹산安祿山이 하사한 금장金章과 자수紫綬을 착용함을 이른다.
원이겸袁履謙이 그 뜻을 깨닫고 마침내 은밀히 안고경顔杲卿과 함께 병력을 일으켜 안녹산安祿山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다.
병자일(21일)에 곽자의郭子儀를 삭방절도대사朔方節度大使로 삼고 내부內府에 있는 돈과 비단을 내어 경사京師에서 병력을 모집해서 11만 명이 열흘 만에 모이니, 모두 시정市井의 자제들이었다.
평원태수平原太守안진경顔眞卿은 안녹산安祿山이 장차 배반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는 장마로 인해 성을 완전히 보수하고 참호를 깊이 파고 장정을 헤아려서 배치하고 창고를 충실하게 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은 그를 일개 서생書生이라 여겨 하찮게 대하였는데,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하자 안진경顔眞卿에게 통첩을 보내어 평원平原과 박평博平에 있는 7천 명의 병력으로 하수河水의 나루를 막게 하였다.
안진경顔眞卿이 평원사병平原司兵이평李平을 보내어 샛길로 가서 이 사실을 아뢰었다.
상上은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함에 하북河北의 군현郡縣들이 모두 바람에 휩쓸리듯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한탄하기를 “24개 군郡 중에 일찍이 한 명의 의사도 없단 말인가?” 하였는데,
이평李平이 이르자
상上이 크게 기뻐하며 이르기를 “
짐朕은
안진경顔眞卿이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는 마침내 이와 같이 훌륭한 일을 하는구나.” 하였다.
注+[頭註]불식안진경작하장不識顔眞卿作何狀내능여시乃能如是:본전本傳에는 ‘안진경顔眞卿이 어떠한 인물인지 몰랐는데, 하는 바가 마침내 이와 같단 말인가.[不識眞卿何如人 所爲乃若此]’로 되어 있다.
안진경顔眞卿이 친한 문객으로 하여금 은밀히 역적을 잡는 일에 현상을 내건 문서를 품고서 여러 군郡에 나아가게 하니, 여러 군郡에서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안진경顔眞卿은
안고경顔杲卿의
종제從弟이다.
注+[頭註]형제의 자식들이 서로 이르기를 종부곤제從父昆弟라고 하니, 본래 할아버지는 같은데 아버지를 따라서 나누어짐을 말한다.
봉상청封常淸이 모집한 병사는 모두
백도白徒들로서
注+[頭註]백도白徒는 본래 군인이 아니니, 백정白丁이란 말과 같다. 훈련을 거치지 않았다.
무뢰武牢에 주둔하여 적을 막았는데, 적이 철기병鐵騎兵으로 유린하니, 관군官軍이 대패하였다.
정유일丁酉日(12월 12일)에 안녹산安祿山이 동경東京인 낙양洛陽을 함락하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병사를 징발하였는데 여러 도道에서 모두 이르지 않으므로 관중關中 지방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는데, 마침 안녹산安祿山이 막 황제를 칭할 것을 도모하여 동경東京에 머물고 전진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대비할 수가 있었고 병력도 다소 모였다.
안진경顔眞卿이 용사勇士를 불러 모으니, 열흘 만에 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들에게 군대를 일으켜 안녹산安祿山을 토벌할 것을 설득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분발하였다.
가서한哥舒翰을 병마부원수兵馬副元帥로 삼아 8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관潼關에 주둔하게 하였다.
안고경顔杲卿이 군대를 일으키려 할 적에
최안석崔安石 등에게 명하여 여러
군郡을 순행하며
注+[頭註]군대를 순행하고 명령을 베푸는 것이다. 이르기를 “
대군大軍이 이미
정형井陘을 함락하였으니, 머지않아 마땅히 도착하여 먼저
하북河北의 여러
군郡을 평정할 것이다.
먼저 이르는 자는 상을 주고 뒤늦게 오는 자는 죽이겠다.” 하였다.
이에 하북河北의 여러 군郡이 메아리처럼 호응해서 무릇 17개의 군郡이 모두 조정에 귀부歸附하여 병사가 도합 20여 만이었다.
안녹산安祿山에게 붙은 것은 다만 범양范陽, 노룡盧龍, 밀운密雲, 어양漁陽, 급군汲郡, 업군鄴郡 여섯 군郡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