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에 安祿山이 自起兵以來로 目漸昏이러니 至是에 不復睹物하야 性益躁暴어늘
嚴莊이 與安慶緖謀하고 夜遣閹豎李猪兒하야 執刀하고 直入帳中하야 斫祿山腹腸하니 流血數斗하고 遂死라
慶緖尋卽帝位
注+[頭註]尋은 俄也라 故로 慶緖弑之하니라하다
祿山은 以臣而叛其君하고 慶緖는 卽以子而叛其父하니 天道好還이라
上이 謂李泌曰 今郭子儀, 李光弼이 已爲宰相하니
若克兩京, 平海內면 則無官以賞之니 奈何오 對曰
漢魏以來
로 雖以郡縣治民
이나 然有功則
錫以茅土注+[釋義]王者封五色土하야 爲社라가 建諸侯면 則하야 使立社호되 燾以黃土하고 苴以白茅하니 茅는 取其潔이니 所以供祭祀縮酒之用이요 黃은 取王者覆燾四方之義니라 하고 傳之子孫
하야 至于周隋
히 皆然
하니이다
唐
은 初未得關東
이라 故
로 封爵
에 皆設虛名
하고 其食實封者
는 給繒布
注+[頭註]唐制에 食實封者 凡一戶면 則以一丁之調로 歲給之也하니라 而已
라
貞觀中에 太宗이 欲復古制나 大臣議論이 不同而止하니 由是로 賞功者多以官하니이다
夫以官賞功이 有二害하니 非才則廢事요 權重則難制라
曏使祿山이 有百里之國이런들 則亦惜之하야 以傳子孫하야 不反矣리이다
爲今之計
컨대 俟天下旣平
하야 莫若疏爵土
注+[釋義]疏는 分也라 하야 以賞功臣
이니 則雖大國
이라도 不過二三百里
라
先是
에 安祿山
이 得兩京
하고 珍貨
를 悉輸范陽
이러니 思明
이 擁彊兵
하고 據富資
하야 益驕橫
注+[釋義]橫은 戶孟反이니 驕縱而暴橫也라 하야 寖不用慶緖之命
하니 慶緖不能制
러라
○ 上皇
이 思張九齡先見
注+[釋義]開元中에 祿山이 討奚, 契丹이라가 敗績한대 九齡曰 祿山이 狼子野心이요 且有逆相하니 宜卽事誅之라호되 玄宗이 不聽하니라하야 爲之流涕하고 遣中使
注+[頭註]唐以宦官爲中使하니라 하야 至曲江祭之
注+[釋義]九齡家在曲江이라 故로 於曲江致祭焉이라 曲江縣은 隷廣東始興郡하니 今韶州是라 하고 厚恤其家하다
○ 是時에 府庫無蓄積하야 朝廷이 專以官爵賞功이라
諸將出征
에 皆給
空名告身注+[釋義]空은 苦貢反이라 唐選擧志에 及則에 皆給以符하고 謂之告身하니 其中에 有褒貶訓戒之辭라 空者는 不塡寫名姓하고 從其臨事에 自也라 할새 自開府, 特進, 列卿, 大將軍
으로 下至中郞, 郞將
히 聽臨事注名
하고 其後
에 又聽以信牒
注+[頭註]未有告身엔 先給牒以爲信하니라 授人官爵
하니 有至異姓王者
라
諸軍
이 但以職任
으로 相統攝
하야 不復計官爵高下
러니 及淸渠之敗
注+[頭註]是年四月에 郭子儀敗績하니라 하야 復以官爵
으로 收散卒
하니 由是
로 官爵輕而貨重
이라
大將軍告身一通
注+[通鑑要解]書首尾曰一通이라 에 纔易一醉
하니
凡應募入軍者 一切衣
하고 至於朝士僮僕
하야는 衣金紫
하고 稱大官
이로되 而執賤役者
하니 之濫
이 至是而極焉
이러라
君以爲貴하야 而加於君子면 則人貴之矣요 君以爲賤하야 而施於小人이면 則人賤之矣라
肅宗이 欲以苟簡成功하야 而濫假名器하야 輕於糞土하니 此亂政之極也라
尹子奇
注+[頭註]慶緖以子奇爲河南節度使하니라 益兵
하야 圍睢陽益急
이어늘 張巡
이 於城中
에 夜鳴鼓嚴隊
하야 若將出擊者
하니 賊聞之
하고 達旦儆備
注+[釋義]儆은 戒也라 러라
旣明
에 巡
이 乃寢兵絶鼓
하니 賊
이 以
로 瞰城中
注+[釋義]瞰은 古監反이니 視也라 호되 無所見
이어늘 遂
解甲休息하다
巡이 與將軍南霽雲과 郞將雷萬春等十餘將으로 各將五十騎하고 開門突出하야 直衝賊營하야 至子奇麾下하니 營中이 大亂이라
巡
이 欲射子奇而不識
하여 乃
蒿爲矢
하니 中者喜
注+[釋義]剡은 以冉反이니 銳利之也라 蒿는 呼高反이요 中은 去聲이라 易繫云 剡木爲矢라하니라하야 謂巡矢盡
이라하고 走白子奇
어늘
乃得其狀하고 使霽雲으로 射之하야 喪其左目하야 幾獲之라
○ 九月
에 元帥廣平王
이 將朔方等軍及回
西域之衆
하야 與郭子儀等
으로 克復西京
하다
○ 冬十月에 尹子奇久圍睢陽하니 城中이 食盡이라
議棄城東走
어늘 張巡, 許遠
注+[附註]張巡이 辟雍丘하야 保寧陵이러니 子奇以兵十三萬來어늘 遠爲睢陽守하야 告急於巡하니 巡이 引兵入睢陽하다 遠曰 遠은 (揣)[懦]不知兵하고 公은 智勇兼濟하니 公爲遠戰하라 遠爲公守하리라 賊以巡善用兵하니 畏巡爲後患이라 故로 不滅巡이면 則不得越過而南也하니라[頭註] 許遠은 敬宗曾孫이라 이 謀以爲 睢陽
은 江淮之保障注+[頭註]一卷戊寅年注에 指藩籬而言이라하니라 이니 若棄之去
면 賊必乘勝長驅
하리니 是
는 無江淮也
라
始與士卒
로 同食茶紙
하고 旣盡
에 遂食馬
하고 馬盡
에 羅雀掘鼠하고 雀鼠旣盡
에 巡
이 出愛妾
하야 殺以
士
注+[通鑑要解]食는 音嗣라 하고 遠亦殺其奴然後
에 括城中婦人
注+[頭註]括은 拾也라 하야 食之
하고 旣盡
에 繼以男子老弱
하니 人知必死호되 莫有叛者
요 所餘纔四百人
이러라
生旣無以報陛下
호니 死當爲厲鬼
注+[通鑑要解]無所歸者爲厲니라 하야 以殺賊
호리이다
城遂陷하니 巡, 遠이 俱被執하고 幷南霽雲, 雷萬春等三十六人하야 皆斬之하고 生致許遠於洛陽하다
巡이 初守睢陽時에 卒僅萬人이요 城中居人이 亦且數萬이로되 巡이 一見問姓名이면 其後에 無不識者요 前後大小戰이 凡四百餘에 殺賊卒十二萬人이러라
巡
이 行兵
에 不依古法敎戰陳
하고 令本將
注+[通鑑要解]本部之將이라 으로 各以其意敎之
라
人이 或問其故한대 巡曰 今與胡虜戰에 雲合鳥散하야 變態不常하야
數步之間에 勢有同異하고 臨機應猝이 在於呼吸之間이어늘 而動詢大將이면 事不相及이니 非知兵之變者也라
故로 吾使兵識將意하고 將識士情하야 投之而往에 如手之使指하노니 兵將相習하야 人自爲戰이 不亦可乎아
自興兵으로 器械甲仗을 皆取之於敵하고 未嘗自修러라
每戰에 將士或退散이면 巡이 立於戰所하야 謂將士曰 我不離此호니 汝는 爲我還決之하라하니 將士莫敢不還死戰하야 卒破敵이러라
又推誠待人하야 無所疑隱하고 臨敵應變에 出奇無窮하며
○ 河南節度使張鎬 聞睢陽圍急하고 倍道亟進이러니 比鎬至睢陽하야 城已陷三日이러라
張巡許遠
이 可謂烈丈夫
注+[頭註]剛直曰烈이라 矣
라
以疲卒數萬
으로 嬰孤墉
注+[頭註]嬰은 繞라 하야 抗方張不制之虜
하고 鯁其喉牙
注+[頭註]鯁은 與骾通하니 食骨留喉也라 하야 使不得摶食東南
하고 牽掣首尾
하야 小大數百戰
이라
雖力盡乃死나 而唐得全江淮財用하야 以濟中興하니 引利償害하면 以百易萬이라도 可矣라
天以完節로 付二人하야 畀名無窮하니 不待留生而後顯也니라
十月
에 廣平王俶
이 與回紇
護
注+[釋義]回紇君主號라 , 郭子儀等
으로 克復東京
하니 安慶緖奔河北
하다
○ 十一月에 廣平王俶과 郭子儀來自東京하니 上이 勞之曰 吾之家國이 由卿再造라하니라
○ 十二月에 上皇이 至咸陽하니 上이 備法駕하야 迎於望賢宮하다
上皇이 卽日에 幸興慶宮하야 遂居之어늘 上表하야 累請避位還東宮호되 上皇이 不許하다
○ 安慶緖忌史思明之强하야 欲圖之어늘 思明이 遂以所部十三州로 來降하다
滄, 瀛, 安, 深, 德, 棣等州皆降
하고 雖相州未下
注+[頭註]相州未下는 謂慶緖據鄴也라 나 河北
이 率爲唐有矣
러라
정월에 안녹산安祿山이 군대를 일으킨 이후로 눈이 점점 어두워졌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는 물건을 보지 못하여 성질이 더욱 조급하고 포악해졌다.
엄장嚴莊이 안경서安慶緖와 함께 모의하고 밤중에 환관인 이저아李猪兒를 보내어 칼을 잡고 곧바로 장막 안으로 들어가서 안녹산安祿山의 배와 창자를 찌르니, 안녹산安祿山이 피 몇 말을 흘리고 마침내 죽었다.
안경서安慶緖가 얼마 후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注+[頭註]심尋은 얼마 후이다. 안녹산安祿山은 총애하는 첩妾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안경서安慶緖가 그를 시해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은 신하로서 그 군주를 배반하였고 안경서安慶緖는 자식으로서 그 아버지를 배반하였으니, 천도天道는 돌려주기를 좋아한다.
어찌 분명하여 만세의 경계가 될 만하지 않겠는가.”
상上이 이필李泌에게 이르기를 “지금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이미 재상이 되었다.
만약 이들이 양경兩京을 수복하고 해내海內를 평정한다면 상줄만한 벼슬이 없으니, 어찌해야겠는가?” 하니, 이필李泌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옛날에는 재능이 있는 자에게 벼슬을 맡기고 공로가 있는 자에게 관작으로써 보답하였습니다.
한漢‧
위魏 이래로 비록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백성을 다스렸으나 공이 있으면
모토茅土를
注+[釋義]왕자王者가 다섯 가지 색깔의 흙을 쌓아 사社를 만들었다가 제후들을 세우게 되면 각각 방위의 색깔에 따른 흙을 떼어 주어서 사社를 세우게 하였는데, 황토黃土를 덮고 흰 띠풀로 흙을 쌌다. 띠풀은 그 깨끗함을 취한 것이니 제사에 술 거르는 용도로 제공하고, 황색은 왕자王者가 사방을 덮어주는 뜻을 취한 것이다. 내려주고 자손에게 전하게 하여,
주周나라와
수隋나라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였습니다.
당唐나라는 처음
관동關東 지방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관작을 봉해줄 때에는 다
허명虛名을 쓰고, 실제 봉지를 받은 자에게는
증繒과
포布를 줄 뿐이었습니다.
注+[頭註]당唐나라 제도에 실제 봉읍封邑을 받은 자는 무릇 1호戶당 1정丁의 조調를 해마다 주었다.
정관貞觀 연간에 태종太宗이 옛 제도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대신大臣들의 의론議論이 똑같지 않아서 중지하였으니, 이로부터 공 있는 자에게 상줄 적에 관직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관직을 가지고 공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두 가지 폐해가 있으니, 재능이 있는 자가 아니면 정사를 망치고 권력이 중하면 제재하기 어렵습니다.
지난번 안녹산安祿山이 백 리의 나라가 있었더라면 또한 그것을 아까워하여 자손에게 물려주어서 배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을 생각하건대
천하天下가 평정되기를 기다려서 작위와 토지를 나누어
注+[釋義]소疏는 나눔이다. 공신에게 상 주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비록
대국大國이라도 2, 3백 리를 넘지 못합니다.
지금의 작은 군郡에 견줄 수 있으니, 어찌 제재하기 어렵겠습니까?”
안경서安慶緖가 사사명史思明을 범양절도사范陽節度使로 삼았다.
이에 앞서
안녹산安祿山이
양경兩京을 얻고는 진기한 보화를 모두
범양范陽으로 실어갔는데,
사사명史思明이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풍족한 물자를 점거하여 더욱 교만하고 멋대로 행동하여
注+[釋義]횡橫은 호맹반戶孟反(횡)이니, 교횡驕橫은 교만하고 방종하여 횡포를 부리는 것이다. 점점
안경서安慶緖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안경서安慶緖가 그를 제재하지 못하였다.
상황上皇이
장구령張九齡이 선견지명이 있음을 생각해서
注+[釋義]개원開元 연간에 안녹산安祿山이 해奚와 거란契丹을 토벌하다가 패전하자, 장구령張九齡이 말하기를 “안녹산安祿山은 이리의 야심을 품고 있고 또 반역할 상이니, 마땅히 이 패전한 일을 가지고 죽여야 합니다.” 하였으나 현종玄宗이 듣지 않았다.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는
중사中使를 보내어
注+[頭註]당唐나라는 환관宦官을 중사中使로 삼았다. 곡강曲江에 가서 제사하게 하고
注+[釋義]장구령張九齡의 집이 곡강曲江에 있었다. 그러므로 곡강曲江에 가서 제사를 올린 것이다. 곡강현曲江縣은 광동성廣東省 시흥군始興郡에 예속되었으니, 지금의 소주韶州가 이곳이다. 그 집안을 후대하고 구휼하였다.
곽자의郭子儀를 천하병마부원수天下兵馬副元帥로 삼았다.
이때 조정의 부고府庫에 저축된 것이 없어서 조정에서 오로지 관작을 가지고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었다.
제장諸將들이 출정할 적에 이들에게 모두
공명空名의
고신첩告身牒을
注+[釋義]공空은 고공반苦貢反(공)이다. 당唐나라 〈선거지選擧志〉에 시품視品과 유외流外는 판보判補할 때에 다 부符를 지급하고 이것을 고신첩告身牒이라 일렀으니, 이 가운데에는 포폄褒貶과 훈계訓戒하는 말이 있었다. 공空이라는 것은 이름과 성을 써서 채워 넣지 않고 일에 임했을 때에 스스로 이름을 써넣어 주는 것이다. 지급하였는데, 위로
개부開府,
특진特進,
열경列卿,
대장군大將軍으로부터 아래로
중랑中郞,
낭장郞將에 이르기까지 일에 임하여 이름을 써넣는 것을 허락하고, 그 뒤에 또
신첩信牒을 가지고
注+[頭註]고신告身이 있기 전에는 먼저 첩牒을 주어서 신표로 삼았다. 사람들에게 관작을 주도록 허락하니,
이성異姓으로서
왕王이 되는 자가 있기까지 하였다.
여러 군대가 다만
직임職任으로 서로 통솔하여 다시는 관작의 높고 낮음을 따지지 않았는데,
청거淸渠에서 패전하게 되자
注+[頭註]이해 4월에 곽자의郭子儀가 청거淸渠에서 패전하였다. 다시 관작으로써 흩어진 군졸들을 수습하니, 이로 말미암아 관작이 가벼워지고 재화가 중하게 되었다.
대장군大將軍의
고신첩告身牒 한 통을 팔아
注+[通鑑要解]앞뒤로 온전히 쓴 것을 일통一通이라 한다. 겨우 한 번 취할 정도의 술과 바꿀 수 있었다.
무릇 응모하여 군에 들어온 자가 일체 금장金章(金印)과 자수紫綬를 착용하였으며 조사朝士와 동복僮僕에 이르러는 금장金章과 자수紫綬를 착용하고 대관大官이라 칭하면서 천역賤役을 잡는 자가 있으니, 명기名器의 범람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
“관작官爵이라는 것은 인군人君이 천하를 어거하는 것이니, 빈 이름을 가지고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군주가 관작을 귀하게 여겨서 관작을 군자君子에게 가하면 사람들이 그것을 귀하게 여기고, 군주가 관작을 천하게 여겨서 소인小人에게 베풀면 사람들이 천하게 여긴다.
숙종肅宗은 일시적인 미봉책으로 공을 이루어 함부로 명기名器를 빌려주어서 거름흙보다도 가볍게 여겼으니, 이것이 혼란한 정사가 극에 달한 것이다.
당唐나라가 강하지 못함이
注+[頭註]경競은 강强함이다. 마땅하지 않겠는가.”
윤자기尹子奇가
注+[頭註]안경서安慶緖는 윤자기尹子奇를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로 임명하였다. 병력을 증가하여
수양성睢陽城을 포위하여 더욱 맹렬하게 공격하자,
장순張巡이 성 안에서 밤중에 북을 울리고 대오를 정돈하여 장차 성을 나가 공격할 것처럼 하니, 적이 이 말을 듣고 날이 새도록 경계하고 대비하였다.
注+[釋義]경儆은 경계하는 것이다.
날이 밝은 뒤에,
장순張巡이 마침내 군사들을 자게 하고 북소리를 그치니, 적이
비루飛樓를 가지고 성 안을 엿보았으나
注+[釋義]감瞰은 고감반古監反(감)이니, 살펴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갑옷을 벗고 휴식하였다.
장순張巡은 장군將軍 남제운南霽雲과 낭장郞將 뇌만춘雷萬春 등 10여 명의 장군과 함께 각각 5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는 성문을 열고 돌격하여 곧장 적의 진영을 무찔러서 윤자기尹子奇의 휘하에 이르니, 적의 진영 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그리하여 적장 50여 명을 목 베고, 사졸 5천여 명을 죽였다.
장순張巡이
윤자기尹子奇를 쏘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므로 마침내 쑥대를 깎아 화살을 만들어 쏘니, 화살을 맞은 적병이 기뻐하여
注+[釋義]염剡은 이염반以冉反(염)이니, 뾰족하게 만드는 것이다. 호蒿는 호고반呼高反(호)이고, 중中은 거성去聲(맞춤)이다. 《주역周易》 〈계사전繫辭傳〉에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든다.” 하였다. 장순張巡의 화살이 다 떨어졌다고 생각하고는 달려가
윤자기尹子奇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장순張巡이 비로소 그의 얼굴 모습을 알아내고는 남제운南霽雲으로 하여금 활을 쏘아 그의 왼쪽 눈을 잃게 해서 거의 사로잡을 뻔 하였다.
윤자기尹子奇가 마침내 군대를 거두어 돌아갔다.
9월에 원수元帥인 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이 삭방등朔方等의 군대 및 회흘回紇과 서역西域의 병력을 거느리고 곽자의郭子儀 등과 함께 서경西京을 이겨 수복收復하였다.
겨울 10월에 윤자기尹子奇가 오랫동안 수양성睢陽城을 포위하니, 성 안에 식량이 다 떨어졌다.
사람들이
수양성睢陽城을 버리고 동쪽으로 달아날 것을 의논하자,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注+[附註][附註] 장순張巡이 옹구雍丘를 맡아 영릉寧陵을 보전하고 있었는데, 윤자기尹子奇가 13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몰려오자 허원許遠이 수양태수睢陽太守로 있으면서 장순張巡에게 위급함을 알리니, 장순張巡이 군대를 이끌고 수양睢陽으로 들어왔다. 허원許遠이 말하기를 “나는 나약하여 병법을 알지 못하고 공은 지혜와 용맹을 겸하여 소유하였으니, 공은 나를 위하여 싸우라. 나는 공을 위하여 지키겠다.” 하였다. 적들은 장순張巡이 용병을 잘하니 장순張巡이 후환後患이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장순張巡을 멸망시키지 않고서는 이곳을 넘어 남쪽으로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頭註]허원許遠은 허경종許敬宗의 증손曾孫이다. 상의하여 이르기를 “
수양睢陽은
강회江淮 지방의 보루이니,
注+[頭註]보장保障은 1권卷 무인년戊寅年(B.C.401) 주注에 “울타리를 가리켜 말한다.” 하였다 만약 이곳을 버리고 떠나면 적이 반드시 승세를 타고 크게 몰려올 것이니, 이는
강회江淮 지방을 잃게 될 것이다.
이곳을 굳게 지키면서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그리하여 〈식량이 없으므로〉처음에는 병졸들과 함께 차와 종이를 먹고, 이것이 떨어진 뒤에는 마침내 말을 잡아먹고, 말이 떨어지자 그물로 참새를 잡고 쥐구멍을 파서 쥐를 잡아 먹었으며, 참새와 쥐가 떨어진 뒤에는
장순張巡이 애첩을 내어 죽여서 군사들을 먹였고,
注+[通鑑要解]사食는 음이 사이다. 허원許遠 또한 그의 종을 죽여서 먹은 다음 성 안의 부녀자들을 찾아내어
注+[頭註]괄括은 찾아 모으는 것이다. 죽여서 먹었고, 이들이 다한 뒤에는 뒤이어 늙고 약한 남자들을 잡아 먹으니, 사람들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을 알았지만 배반하는 자가 없었으며, 남은 자가 겨우 4백 명이었다.
계축일癸丑日(9일)에 적賊이 성에 올라보니, 장병들이 병들어서 더 이상 싸우지 못하였다.
장순張巡이 서쪽을 향하여 재배하고 말하기를 “신은 힘이 다하여 성을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살아서 이미 폐하께 보답하지 못했으니, 죽어서 마땅히
여귀厲鬼가 되어
注+[通鑑要解]죽어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를 여귀厲鬼라 한다. 적을 죽이겠습니다.” 하였다.
성이 마침내 함락되니,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이 모두 사로잡히고 남제운南霽雲, 뇌만춘雷萬春 등 36명이 모두 목이 베어졌으며, 허원許遠은 산 채로 낙양洛陽으로 보내졌다.
장순張巡이 처음 수양성睢陽城을 지킬 적에 병졸이 겨우 만 명이었고 성 안에 살던 사람이 또한 수만 명이었는데, 장순張巡이 이들을 한 번 보고 성명을 물으면 그 뒤에 알지 못하는 자가 없었으며, 전후로 크고 작은 전투가 400여 차례였는데, 적병을 죽인 것이 12만 명이었다.
장순張巡은 군대를 운용할 적에 옛 병법을 따라 싸우거나
진陣 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본부本部의
장수將帥로 하여금
注+[通鑑要解]본장本將은 본부本部의 장수이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가르치게 하였다.
사람이 혹 그 이유를 묻자, 장순張巡이 말하기를 “지금 오랑캐와 싸움에 구름처럼 모이고 새처럼 흩어져서 변하는 태도가 일정하지 않다.
그리하여 몇 걸음 사이에도 형세의 동이同異가 있고 임기응변함이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달려 있는데, 번번이 대장에게 물으면 제때에 일에 미칠 수가 없으니, 이는 병법의 변화를 아는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병사들로 하여금 장수의 생각을 알고 장수들로 하여금 병사들의 실정을 알게 해서 장수가 병졸을 데리고 감에 손이 손가락을 부리듯이 하게 하노니, 병사들과 장수가 서로 익숙하여 사람마다 각자 싸우게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장순張巡은 군대를 일으킨 이래로 병기와 갑옷과 의장을 다 적에게서 취하여 사용하였고, 일찍이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매번 싸울 때마다 장병들이 혹 후퇴하고 흩어지면 장순張巡이 전쟁터에 서서 장병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은 나를 위하여 다시 결전하라.” 하니, 장병들이 감히 돌아가 결사적으로 싸우지 않는 자가 없어서 끝내 적을 격파하였다.
장순張巡은 또 정성을 미루어 사람들을 대우하여 의심하고 숨기는 바가 없었으며, 적을 대하여 변화에 응함에 기이한 계책을 내어 다함이 없었다.
호령이 분명하고 상벌이 진실하며 무리들과 달고 쓴 음식과 춥고 더운 고통을 함께 하였다.
그러므로 아랫사람들이 다투어 사력死力을 바쳤다.
하남절도사河南節度使 장호張鎬는 수양성睢陽城의 포위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행군 속도를 배가하여 급히 전진하였는데, 장호張鎬가 수양성睢陽城에 이르자 성이 이미 함락된 지 3일이었다.
《신당서新唐書》 〈충의열전忠義列傳〉의 찬贊에 말하였다.
“
장순張巡과
허원許遠은
열렬烈烈한 장부라고
注+[頭註]강직剛直한 것을 열烈이라 한다. 이를 만하다.
피폐한 병졸 수만 명으로 외로운 성을 둘러싸고 지키면서
注+[頭註]영嬰은 둘러싸는 것이다. 막 확장하여 제재할 수 없는 오랑캐에 항거하고 그들의 목구멍과 이빨을 막아서
注+[頭註]경鯁은 경骾과 통하니, 뼈를 삼켜 목구멍에 걸려있는 것이다. 적으로 하여금 멋대로 동남 지방을 집어 삼키지 못하게 하고 앞과 뒤를 견제하여 크고 작은 싸움을 수백 번이나 하였다.
비록 힘이 다하여 죽었으나 당唐나라가 강회江淮 지방의 재용財用을 온전히 보전하여 중흥을 이룩하였으니, 이로움을 이끌어 해로움을 보상해 보면 백百으로 만萬과 바꾸었다 하더라도 가할 것이다.
장순張巡이 먼저 죽은 것이 급함이 되지 않고, 허원許遠이 뒤에 죽은 것이 뒤늦음이 되지 않는다.
장순張巡이 죽은 지 3일 만에 구원병이 이르렀고, 10일 만에 적이 망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이 완전한 절개를 두 사람에게 주어 무궁한 후세에 명예를 남기게 하였으니, 살아남기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름이 뒤에 드러나는 것이다.”
10월에
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이
회흘回紇의
섭호葉護와
注+[釋義]섭호葉護는 회흘回紇의 군주君主 이름이다. 곽자의郭子儀 등과 함께
동경東京을
수복收復하니,
안경서安慶緖가
하북河北으로 도망하였다.
정묘일丁卯日(23일)에 상上이 서경西京(長安)으로 들어갔다.
11월에 광평왕廣平王 이숙李俶과 곽자의郭子儀가 동경東京에서 오니, 상上이 이들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나의 집과 나라가 경들로 말미암아 다시 만들어졌다.” 하였다.
12월에 상황上皇이 함양咸陽에 이르니, 상上이 법가法駕를 갖추어 망현궁望賢宮에서 맞이하였다.
상황上皇이 당일에 흥경궁興慶宮으로 가서 마침내 거처하였는데, 상上이 표문을 올려서 여러 번 황제의 자리를 피하여 동궁東宮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상황上皇이 허락하지 않았다.
안경서安慶緖가 사사명史思明의 강성함을 시기하여 도모하고자 하니, 사사명史思明이 마침내 자기가 거느리고 있던 13주州를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창주滄州,
영주瀛州,
안주安州,
심주深州,
덕주德州,
체주棣州 등은 모두 항복하였고,
상주相州는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나
注+[頭註]상주相州가 항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안경서安慶緖가 업성鄴城을 점거하고 있음을 이른다. 하북河北 지방이 대체로
당唐나라의 소유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