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鄧景山으로 爲河東節度使러니 將士作亂하야 殺景山이어늘
上以景山撫御失所以致亂이라하야 不復推究하고 遣使하야 慰諭以安之하다
諸將
이 請以都知兵馬使辛雲京
으로 爲節度使
어늘 建卯月
注+[頭註]上元一年에 改制度하야 以十一月爲歲首하고 하니라 에 以雲京
으로 爲河東節度使
하다
○ 是歲
에 絳州突將注+[頭註]領驍勇馳突之將이라 王元振
이 以儲積不充
이라하야 殺行營都統李國貞
하고 鎭西北庭行營兵
이 亦殺節度使
非元禮
注+[頭註]羌人이니 荔非는 複姓이라 하고 推裨將白孝德
하야 爲節度使
한대 朝廷
이 皆因而授之
하다
○ 絳州諸軍이 剽掠不已어늘 以郭子儀로 爲汾陽王하야 知朔方河中等軍副元帥하다
○ 初에 張后與李輔國相表裏하야 專權用事러니 晩年에 更有隙하야 欲殺輔國하고 廢太子어늘
內射生使
注+[附註]肅宗이 擇善騎射者千人하야 爲內射生手하고 號英武軍이라하야 入禁中하야 淸內難하고 又號寶應軍이라하야 以宦官領之라 故로 曰內射生使라하니라 程元振
이 與輔國謀
하고 遷張后於別殿
이라가 尋殺之
하다
丁卯
에 上崩
하니 代宗
注+[附註]代宗贊曰 高祖以來로 三遜于位하야 以授其子로되 而獨睿宗이 上畏天戒하야 發誠於心이요 若高祖, 玄宗은 豈其志哉아 注에 畏天戒는 謂星官言帝座前星有變이라한대 睿宗曰 傳德避災하리니 吾意決矣라하고 詔皇太子卽皇帝位한대 太子惶恐入請하니 睿宗曰 此吾所以答天戒也라 豈其志는 言高祖因秦王殺建成元吉하야 而授位于太宗하고 玄宗因祿山之亂하야 幸蜀而授位于肅宗하니 皆非其本志也니라 이 卽位
하다
肅宗이 信任李輔國하야 上不保其父하고 中不保其身하고 下不保其妻子하니 此近小人之禍也라
肅宗이 趣(促)取大物而子道悖하고 制於張后而夫道奪하고 脅於輔國而君道失하고 殺齊王倓而父道虧라
綱目에 歷書而深病之하니 倘微郭李런들 唐之克復을 未可知也니라
初에 李國貞이 治軍嚴하니 朔方將士不樂하야 皆思郭子儀라
子儀至軍하니 元振이 自以爲功이어늘 子儀曰 汝臨賊境하야 輒害主將하니 若賊乘其釁이면 無絳州矣리라
吾爲宰相하야 豈受一卒之私耶아하고 七月에 收元振及其同謀四十人하야 皆殺之하다
辛雲京이 聞之하고 亦推案殺鄧景山者數十人하야 誅之하니 由是로 河東諸鎭이 率皆奉法하니라
○ 八月에 郭子儀自河東入朝하니 時에 程元振이 用事라
忌子儀
功高任重하야 譖之於上
이어늘 子儀不自安
하야 表請解副元帥節度使
한대
○ 上
이 在東宮
에 以李輔國專橫
注+[頭註]橫은 去聲이니 不以理也라 이라하야 心甚不平이러니 及嗣位
에 以輔國有殺張后之功
이라하야 不欲顯誅之
러라
十月壬戌夜에 盜入其第하야 竊輔國之首及一臂而去어늘
勑有司捕盜하고 遣中使하야 存問其家하고 爲刻木首하야 葬之하다
不平輔國專橫者는 公心也요 不欲顯誅之者는 私意也니 公與私가 特在利己不利己之間이니
夫張后正位中宮
하니 猶太子之母
注+[頭註]代宗은 章敬皇后吳氏之出이라 也
어늘 輔國
이 遣使者
하야 以太子命
으로 逼后下殿
하야 幽而殺之
하니 其爲太子累大矣
어늘 而猶以爲功乎
아
李輔國이 脅天子하야 遷上皇하고 賊國母하니 其罪大矣라
按法行辟이면 死有餘辜어늘 代宗이 乃遣盜殺矣는 何歟아
九月에 上이 遣中使劉淸潭하야 使于回紇하야 修舊好하고 且徵兵討史朝義하다
先是에 肅宗이 以僕固懷恩女로 妻可汗이러니 可汗이 請與懷恩相見한대 懷恩이 時在涼州라
上이 令往見之러니 懷恩이 爲言唐家恩信을 不可負라한대 可汗이 悅하야 遣使上表하야 請助國討朝義하다
○ 以雍王适
注+[頭註]代宗長子니 是爲德宗이라 로 爲天下兵馬元帥
하고 會諸道節度使及回紇於陝州
하야 進討朝義
하다
上
이 欲以郭子儀爲适副
러니 程元振, 魚朝恩
注+[頭註]宦官이라 이 沮之而止
하고 加僕固懷恩同平章事
하야 領諸軍節度行營
하야 以副适
하다
○ 戊辰에 諸軍이 發陝州할새 僕固懷恩이 與回紇爲前鋒하야 與李光弼, 李抱玉等으로 數道竝進하다
壬申에 官軍이 至洛陽北郊하니 賊衆數萬이 立柵自固라
朝義將輕騎數百
하고 東走
어늘 懷恩
이 進克東京
하고 使其子
注+[頭註]瑒은 音暢이라 으로 乘勝逐朝義
하야 累戰皆捷
하다
○ 回紇이 入東京하야 肆行殺掠하야 火累旬不滅이라
十一月
에 露布
注+[附註]見四十九卷癸酉年하니 露板不封하야 布諸視聽也라 至京師
하다
○ 郭子儀以懷恩이 有平河朔大功이라하야 請以副元帥讓之어늘 己亥에 以懷恩으로 爲河北副元帥하다
등경산鄧景山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하였는데, 장병將兵들이 난을 일으켜서 등경산鄧景山을 죽였다.
상上은 등경산鄧景山이 부하들을 제대로 어루만지고 어거하지 못하여 난을 야기했다고 하여 난을 일으킨 자의 죄를 더이상 추구推究하지 않고 사자를 보내어 위로하고 타일러서 편안하게 하였다.
제장諸將들이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인
신운경辛雲京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을 것을 청하자, 2월에
注+[頭註]숙종肅宗 상원上元 1년年(760)에 제도制度를 바꾸어서 11월月을 세수歲首(연초)로 삼고 북두칠성 자루가 가리키는 방위를 건묘월建卯月이라고 이름하였다. 신운경辛雲京을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이해에
강주絳州의
돌장突將注+[頭註]돌장突將은 용맹한 군사를 거느리고 치달리는 장수이다. 왕원진王元振이
저적儲積이 충분하지 않다 하여
행영도통行營都統 이국정李國貞을 죽였고,
진서북정鎭西北庭의
행영行營 병사들이 또한
절도사節度使인
여비원례荔非元禮를 죽이고
注+[頭註]여비원례荔非元禮는 오랑캐 사람이니, 여비荔非는 복성複姓이다. 비장裨將인
백효덕白孝德을 추대하여 절도사로 삼자 조정이 모두 그대로 임명하였다.
강주絳州의 여러 군사들이 노략질하기를 그치지 않자, 곽자의郭子儀를 분양왕汾陽王으로 삼고 지삭방하중등군부원수知朔方河中等軍副元帥로 임명하였다.
갑인일甲寅日(4월 5일)에 상황上皇이 신룡전神龍殿에서 별세하니, 나이가 78세였다.
상上은 병환이 깊었으므로 내전內殿에서 발상發喪하였고, 상황上皇을 슬피 사모하여 병환이 더욱 심해졌다.
처음에 장후張后는 이보국李輔國과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권력을 독점하고 용사用事하였는데, 만년에는 다시 틈이 있어서 이보국李輔國을 죽이고 태자를 폐위하고자 하였다.
내사생사內射生使인
注+[附註]숙종肅宗이 말 타고 활쏘기를 잘 하는 자 천 명을 선발하여 내사생수內射生手라 하고 영무군英武軍이라 이름한 다음 금중禁中에 들어오게 해서 내란을 소탕하고 또다시 보응군寶應軍이라 이름하여 환관宦官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내사생사內射生使라 한 것이다. 정원진程元振이
이보국李輔國과 모의하고
장후張后를
별전別殿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에 시해하였다.
정묘일丁卯日(4월 18일)에
상上이 별세하니,
대종代宗이
注+[附註]《신당서新唐書》 〈대종본기代宗本紀〉贊에 “고조高祖 이래로 세 번 지위를 선양하여 그 아들에게 물려주었는데 홀로 예종睿宗만이 위로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진심에서 나왔고 고조高祖와 현종玄宗 같은 이는 어찌 그의 본뜻이었겠는가.” 하였는데, 그 주注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했다.[畏天戒]’는 것은, 성관星官이 제좌帝座 앞의 별에 변고가 있다고 말하자, 예종睿宗이 ‘덕 있는 자에게 전위하여 재앙을 피할 것이니 내 마음에 결정했다.’ 하고는 황태자(玄宗)가 황제에 즉위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황태자가 황공하여 들어와 청하자, 예종睿宗이 ‘이것은 내가 하늘의 경계에 보답하는 것이다.’라고 한 것을 이른다. ‘어찌 그의 본뜻이겠느냐.[豈其志]’는 것은, 고조高祖는 진왕秦王(太宗)이 건성建成과 원길元吉을 죽임으로 인하여 태종太宗에게 황제의 지위를 물려주었고, 현종玄宗은 안녹산安祿山의 난리를 인하여 촉蜀 지방으로 가면서 숙종肅宗에게 지위를 물려주었으니, 모두 본뜻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즉위하였다.
“숙종肅宗이 이보국李輔國을 신임信任하여 위로는 그 아버지를 보전하지 못하고, 가운데로는 자기 몸을 보전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그 처자를 보전하지 못했으니, 이는 소인小人을 가까이한 화禍이다.
“숙종肅宗은 급히 대물大物(황제의 자리)을 취하려 하여 자식의 도道가 어긋났고, 장후張后에게 제재를 받아서 남편의 도道를 빼앗겼고, 이보국李輔國에게 위협받아서 임금의 도道를 잃었고, 제왕齊王 담倓을 죽여서 아버지의 도道가 손상되었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이것을 차례로 쓰고 깊이 병病으로 여겼으니, 만일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아니었다면 당唐나라가 수복되었을지 알 수 없다.”
처음에 이국정李國貞이 군대를 엄격히 다스리니, 삭방朔方의 장병將兵들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모두 곽자의郭子儀를 그리워하였다.
그러므로 왕원진王元振이 인하여 난리를 일으켰다.
곽자의郭子儀가 군중軍中에 이르니, 왕원진王元振이 스스로 공이 있다고 여겼는데 곽자의郭子儀가 말하기를 “네가 적경賊境에 임하여 곧 주장主將을 살해하였으니, 적이 만약 그 틈을 타고 쳐들어 왔다면 강주絳州를 잃었을 것이다.
내가 재상이 되어서 어찌 일개 병졸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겠는가.” 하고는 7월에 왕원진王元振과 그 동모자 40명을 잡아서 모두 죽였다.
신운경辛雲京이 이 소식을 듣고 또한 등경산鄧景山을 죽인 자 수십 명을 조사해서 죽이니, 이로 말미암아 하동河東의 여러 진영이 모두 법을 받들어 시행하였다.
8월에 곽자의郭子儀가 하동河東으로부터 들어와 조회하니, 이때에 정원진程元振이 용사用事하였다.
정원진程元振은 곽자의郭子儀의 공이 높고 임무가 막중함을 시기하여 자주 상上에게 그를 참소하니, 곽자의郭子儀가 스스로 편안하지 못하여 표문을 올려서 부원수副元帥와 절도사節度使에서 해임해 줄 것을 청하였다.
상上이 어루만져 위로하니, 곽자의郭子儀가 마침내 경사京師에 머물렀다.
상上이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이보국李輔國이
전횡專橫한다 하여
注+[頭註]횡橫은 거성이니 도리道理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몹시 불평하였는데, 황제에 즉위하게 되자
이보국李輔國이
장후張后를 죽인 공이 있다 하여 공개적으로 처형하고자 하지 않았다.
10월 임술일壬戌日(17일) 밤에 도둑(자객)이 이보국李輔國의 집에 들어가 이보국李輔國의 머리와 한쪽 팔을 몰래 잘라 갔다.
상上은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도둑을 체포하게 하고 중사中使를 그의 집에 보내어 위문하고, 나무로 머리를 조각하여 장례하게 하였다.
“이보국李輔國의 전횡專橫을 불평스럽게 여긴 것은 공정한 마음이요, 공개적으로 처형하고자 하지 않은 것은 사사로운 뜻이니, 공과 사가 다만 자기를 이롭게 하느냐 자기를 이롭게 하지 않느냐 하는 사이에 있을 뿐이다.
장후張后가
중궁中宮에서 바른 자리를 차지하였으니 그래도 태자의 어머니였는데,
注+[頭註]대종代宗은 장경황후章敬皇后 오씨吳氏의 소생이다. 이보국李輔國이 사자를 보내어 태자의 명령으로
장후張后를 핍박하여 궁전 밖으로 내보내 유폐하여 죽였으니, 태자에게 누가 됨이 큰데 오히려 공이라고 여긴단 말인가.”
“이보국李輔國이 천자天子를 협박하여 상황上皇을 옮기고 국모國母를 해쳤으니, 그 죄가 크다.
법을 살펴 형벌을 시행한다면 죽어도 남은 죄가 있는데, 대종代宗이 마침내 도적(자객)을 보내어 죽인 것은 어째서인가?
천자로서 도적의 계책을 행한다면 이 또한 도적일 뿐이다.”
9월에 상上이 중사中使인 유청담劉淸潭을 회흘回紇에 사신으로 보내어 옛 우호를 닦고 또 군대를 징발하여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숙종肅宗이 복고회은僕固懷恩의 딸을 가한可汗에게 시집보냈는데, 가한可汗이 복고회은僕固懷恩과 서로 만나볼 것을 청하자 복고회은僕固懷恩이 이때 양주涼州에 있었다.
상上이 복고회은僕固懷恩으로 하여금 가서 가한可汗을 만나보게 하였는데,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당唐나라의 은혜와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고 말하자, 가한可汗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표문表文을 올려 나라를 도와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할 것을 청하였다.
옹왕雍王 이괄李适을
注+[頭註]옹왕雍王 이괄李适은 대종代宗의 장자長子이니, 이가 바로 덕종德宗이다. 천하병마원수天下兵馬元帥로 임명하고 여러 도의
절도사節度使와
회흘回紇의 군대를
섬주陝州에 모아서 나아가
사조의史朝義를 토벌하게 하였다.
상上은
곽자의郭子儀를
이괄李适의 부원수로 삼고자 하였는데,
정원진程元振과
어조은魚朝恩이
注+[頭註]어조은魚朝恩은 환관宦官이다. 저지하여 그만두고
복고회은僕固懷恩에게
동평장사同平章事를 가하여 여러 군대의
절도사節度使와
행영行營을 거느려
이괄李适의 부원수가 되게 하였다.
무신일戊辰日(10월 23일)에 제군諸軍이 섬주陝州를 출발할 적에 복고회은僕固懷恩이 회흘回紇과 함께 선봉先鋒이 되어서 이광필李光弼과 이포옥李抱玉 등과 몇 갈래 길로 함께 진격하였다.
임신일壬申日(27일)에 관군官軍이 낙양洛陽의 북쪽 교외에 이르니, 적의 무리 수만 명이 목책을 세워 스스로 굳게 지켰다.
관군이 갑자기 공격하니, 적군들이 크게 패하였다.
사조의史朝義가 경무장한 기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도망하자,
복고회은僕固懷恩이 전진하여
동경東京을 이기고 그 아들
창瑒으로 하여금
注+[頭註]창瑒은 음이 창이다. 승세를 타고
사조의史朝義를 추격하여 여러 번 싸워 모두 승리하였다.
회흘回紇이 동경東京에 들어가 멋대로 살육과 노략질을 자행하고 불을 놓아 수십 일이 되어도 꺼지지 않았다.
11월에
노포露布가
注+[附註]노포露布는 49권卷 계유년癸酉年(913)에 보이니, 판자에 드러내어 쓰고 봉함하지 않아서 여러 사람들이 보고 듣게 하는 것이다. 경사京師에 이르렀다.
곽자의郭子儀가 복고회은僕固懷恩이 하삭河朔을 평정한 큰 공이 있다 하여 부원수副元帥 자리를 그에게 양보할 것을 청하자, 기해일己亥日(11월 24일)에 복고회은僕固懷恩을 하북부원수河北副元帥로 임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