僕固
等
이 追及史朝義於莫州
하야 圍之
하니 朝義屢出戰皆敗
하고 選精騎五千
하야 自北門
으로 犯圍而出
이라
李懷仙
注+[附註]柳城胡也라 僕固懷恩이 奏爲幽州盧龍節度使러니 懷恩叛에 朝廷方勤西師라 故懷仙이 得招散亡하고 治城邑하니 天子不能制하니라 이 遣兵追及之
하니 朝義窮蹙
하야 於林中
이어늘
懷仙이 取其首以獻하니 僕固懷恩이 與諸軍皆還하다
○ 閏月
에 以史朝義降將薛嵩
으로 爲相
注+[頭註]商所都라 , 衛, 邢, 洛, 貝, 磁六州節度使
하고 田承嗣
注+[頭註]亦降將이라 로 爲魏, 博
注+[釋義]魏博藩鎭은 自田承嗣始라 傳五世하야 至田(洪)[弘]正하야 入朝러니 七年復亂하야 更四姓, 傳十世하니라 有州七하니 曰貝, 魏, 相, 磁, 洛, 博, 衛라, 德, 滄, 瀛五州都防禦使
하고 李懷仙
은 仍故地
하야 爲幽州, 盧龍
注+[釋義]盧龍藩鎭은 自李懷仙始라 更三姓, 傳五世하야 至劉總入朝러니 六月에 朱克融反하야 傳十二世하니라 有州九하니 曰幽, 涿, 營, 瀛, 莫, 平, 薊, 嬀, 檀이라 節度使
하니 時
에 河北諸州皆已降
이라
故
로 奏留嵩等及李寶臣
注+[頭註]祿山假子니 歸命於朝어늘 名其軍曰成德이라하고 卽拜節度使하니 有恒, 定, 易, 趙, 深, 冀, 卞州之地하야 雄冠山東하니라 하야 分帥河北
하야 自爲黨援이어늘 朝廷
이 亦厭苦兵革
하고 苟冀無事
하야 因而授之
하니라
使李郭爲將
注+[頭註]李郭은 光弼, 子儀라 이면 肯如是乎
아
自隋煬帝
로 始置進士科
로되 猶試策而已
러니 至高宗時
하야 考功員外郞劉思立
이 始奏
하야 進士
에 加雜文
注+[釋義]進士는 謂所試一에 倂爾雅帖하야 皆通而後에 試文試賦各一篇하고 文賦通而後에 試策凡五條하야 三試皆通者를 爲第하니라 하고 明經
에 加
帖括注+[釋義]明經帖括은 謂所試一大經에 倂孝經, 論語, 爾雅하고 其他有差帖을 皆通而口問之호되 一經에 問十義하야 得六者를 爲通하고 問通而後에 試策凡三條하야 三試皆通者를 爲(策)[第]하니라 [附註] 帖試는 謂以所習經으로 掩其兩端하고 中間에 (推間)[惟開]一行하며 裁紙爲帖하야 凡帖三字호되 隨時增損하야 可否不一하니 或得四得五得六者를 爲通하니라 하니 從此積弊하야 轉而成俗이라
朝之公卿
이 以此待士
하고 家之長老
注+[釋義]長老는 謂年長老成之人이라 以此訓子
하야 其明經則誦帖括
注+[釋義]誦帖括曰帖誦이요 其明經則誦帖이니 括은 謂而誦之니라하야 以求僥倖
하고 又擧人
이 皆令投牒自應
하니 如此
요 欲其返淳朴, 崇廉讓
인들 何可得也
리잇고
請令縣令
으로 察孝廉
하야 取行著鄕閭
하고 學知經術
하야 薦之於州
어든 刺史考試
하야 升之於省
하야 任各占(二)[一]經
하고 朝廷
은 擇儒學之士
하야 問經義二十條
와 對策三道
하야 上第
注+[釋義]謂才優而品第最高者라 는 卽注官
하고 中第
는 得出身
하고 下第
는 罷歸
하소서
又道擧
注+[釋義]唐制取士에 歲擧常選之外에 其天子自詔者曰制擧니 道其所欲問而親策之하니라[頭註] 玄宗尊重道敎하야 置玄學博士하고 每歲에 依明經擧하니 卽道擧也라 는 亦非理國所資望
이니 與明經, 進士
로 竝停
하소서
或이 以爲明經, 進士는 行之已久라 不可遽改라하야 事雖不行이나 識者是之하니라
○ 七月
에 吐蕃
이 入大震關
注+[釋義]隴州汧源縣大震關이니 後改曰安戎이라 하야 盡取河西, 隴右之地
하다
○ 初에 河東節度使辛雲京이 與僕固懷恩으로 構隙하야 奏懷恩謀反이라하야늘 上이 優詔和解之하다
懷恩이 自以兵興以來로 所在力戰하야 一門死王事者 四十六人이요
女嫁絶域
注+[頭註]回紇求婚이어늘 肅宗以懷恩女妻하니라 하야 諭回紇
注+[頭註]在上卷壬寅年하니라 하야 再收兩京
하고 平定河南北
하야 功無與比어늘 而爲人所構陷
이라하야
○ 吐蕃之初入寇也에 邊將이 告急호되 程元振이 皆不以聞이러니 冬十月辛未에 寇奉天, 武功하니 京師震駭라
詔以雍王适로 爲關內元帥하고 郭子儀로 爲副元帥하야 出鎭咸陽하야 以禦之하다
子儀閑廢日久
하야 部曲
注+[釋義]將軍領軍에 皆有部曲하야 大將軍營五部니 部校尉一人이요 部有曲하니 曲有軍侯一人하니라 離散
이라
至是
하야 召募得二十騎而行
하야 至咸陽
하니 吐蕃
이 帥吐
渾, 党項
注+[頭註]羌姓之別裔니라 , 氐, 羌二十餘萬衆
하야 彌漫數十里라
子儀使判官王延昌으로 入奏請益兵이러니 程元振이 遏之하야 竟不召見하다
上方治兵에 而吐蕃이 已度便橋하니 倉猝에 不知所爲하야 丙子에 出幸陝州하다
戊寅에 吐蕃이 入長安하야 剽掠府庫市里하고 焚廬舍하니 長安中이 蕭然一空이러라
○ 郭子儀引三十騎
하고 自御宿川
注+[通鑑要解]在長安城南하니라 漢武帝爲離宮別館하고 禁禦人하야 不得往來遊觀하고 止宿其中이라 故로 曰御宿이니 見三輔黃圖記也하니라 으로 循山而東
할새 謂王延昌曰 六軍將士逃潰者 多在商州
하니 今速往收之
호리라하더니
比至商州하야 行收兵하야 合四千人하니 軍勢稍振이라
子儀乃泣諭將士以共雪國恥, 取長安하니 皆感激受約束이라
子儀使張孫, 全緖로 將二百騎하고 出藍田하야 觀虜勢러니
全緖至韓公堆하야 晝則擊鼓張旗幟하고 夜則多燃火하야 以疑吐蕃하고
百姓
이 又紿之曰 郭令公
注+[釋義]郭子儀時爲中書令이라 故로 稱令公하니라 이 自商州
로 將大軍
하야 不知其數至矣
라하니 虜以爲然
하야 悉衆遁去
어늘
郭子儀之德之才는 可以兼任將相이어늘 乃置之閑處라가 及有急難이면 又遽委用之라
代宗이 於閹尹之言에 受命如響하야 進退子儀를 如待奴隸라
獨子儀는 無纖芥于胸中하야 一聞君命이면 不俟駕而行하야 蹈危履險하야 死生以之라
其忠義精誠이 仰貫白日이요 而度量宏偉하야 無所不包하니 眞可以爲人臣之師表矣라
使代宗挈國權兵柄而付之런들 于以復太宗之業이 何難焉이리오마는
程元振이 專權自恣하니 人畏之를 甚於李輔國이요 諸將에 有大功者면 元振이 皆忌疾(嫉)欲害之러라
吐蕃入寇에 元振이 不以時奏하야 致上狼狽出幸하고 上이 發使徵諸道兵호되 李光弼等이 皆忌元振居中하야 莫有至者하니 中外咸切齒로되 而莫敢發言이라
犬戎이 犯關度隴에 不血刃而入京師하야 刦宮闈하고 焚陵寢호되 武士無一人至者하니 此는 將帥叛陛下也요
自十月朔으로 召諸道兵하야 盡四十日호되 無隻輪入關하니 此는 四方叛陛下也라
必欲存宗廟社稷
이신댄 獨斬元振首
하야 馳告天下
하고 悉出內使
注+[頭註]時에 宦官이 皆爲內諸司使라 故曰內史니 言悉出諸宦官하야 隷諸州하니라 하야 隷諸州
하고 持神策兵
하야 付大臣
注+[頭註]謂時魚朝恩領神策軍하니라 하소서
然後
에 削尊號
하고 下詔引咎曰 天下其許朕自新改過
어든 宜卽募士
하야 西赴朝廷
이요 若以朕惡未
이어든 則帝王大器
를 敢妨聖賢
이리오
如此而兵不至, 人不感하고 天下不服이어든 臣은 請闔門寸斬하야 以謝陛下호리이다
上以元振嘗有保護功
注+[頭註]니 見上卷壬寅年하니라 이라하야 十一月
에 削元振官爵
하고 放歸田里하다
○ 十二月甲午
에 上
이 至長安
하니 郭子儀帥城中百官及諸軍
하고 迎於
水東
하야 伏地待罪어늘
복고창僕固瑒 등이 사조의史朝義를 막주莫州로 추격하여 따라잡아서 포위하니, 사조의史朝義가 여러 번 나와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는 정예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북문北門으로부터 포위를 뚫고 나갔다.
이회선李懷仙이
注+[附註]이회선李懷仙은 유성柳城의 오랑캐이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이 아뢰어 그를 유주幽州와 노룡盧龍의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는데,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배반하자 조정에서 막 서쪽 지방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러므로 이회선李懷仙이 흩어지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모으고 성읍城邑을 다스리니, 천자天子가 제재하지 못하였다. 군대를 보내어 따라잡게 하니,
사조의史朝義가 곤궁하고 위축되어 숲 속에서 목을 매어 죽었다.
이회선李懷仙이 그의 머리를 취하여 바치니, 복고회은僕固懷恩이 여러 군대와 함께 모두 돌아왔다.
윤달에
사조의史朝義의 항복한 장수
설숭薛嵩을
상주相州,
注+[頭註]상주相州는 상商나라의 도읍터이다. 위주衛州,
형주邢州,
낙주洛州,
패주貝州,
자주磁州 여섯 주의 절도사로 삼고,
전승사田承嗣를
注+[頭註]전승사田承嗣 또한 항복한 장수이다. 위주魏州,
박주博州,
注+[釋義]위주魏州와 박주博州의 번진藩鎭은 전승사田承嗣로부터 시작되었다. 5대代를 전하여 전홍정田弘正에 이르러 들어와 조회하였는데, 7년 만에 다시 반란하여 네 성姓을 거치고 10대代를 전하였다. 일곱 주州를 소유하였으니, 패주貝州, 위주魏州, 상주相州, 자주磁州, 낙주洛州, 박주博州, 위주衛州이다.덕주德州,
창주滄州,
영주瀛州 다섯 주의
도방어사都防禦使로 삼았으며,
이회선李懷仙은 옛 땅을 그대로 차지하여
유주幽州와
노룡盧龍의
注+[釋義]노룡盧龍의 번진藩鎭은 이회선李懷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세 성姓을 거치고 5대를 전하여 유총劉總에 이르러 들어와 조회하였는데, 6월에 주극융朱克融이 배반하여 12대를 전하였다. 아홉 주州를 소유하였으니, 유주幽州, 탁주涿州, 영주營州, 영주瀛州, 막주莫州, 평주平州, 계주薊州, 규주嬀州, 단주檀州이다. 절도사節度使로 삼으니, 이때에
하북河北의 여러
주州가 다 이미 항복하였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은 적이 평정되면 자신의 총애가 쇠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임금께 아뢰어
설숭薛嵩 등과
이보신李寶臣을
注+[頭註]이보신李寶臣은 안녹산安祿山의 가자假子(양자)이다. 조정에 귀명歸命(歸順)하였으므로 그 군대를 성덕군成德軍이라 이름하고 곧바로 절도사節度使를 제수하니, 항주恒州‧정주定州‧역주易州‧조주趙州‧심주深州‧기주冀州‧변주卞州의 땅을 보유하여 세력이 산동山東 지방에 으뜸이었다. 남겨 두어
하북河北 지방을 나누어 통솔하게 해서 스스로
당원黨援이 되게 하였는데, 조정에서도 전란을 싫어하고 괴롭게 여기고는 구차히 무사함을 바라서 그대로 제수하였다.
- 《구당서舊唐書 복고회은전僕固懷恩傳》에 나옴 -
“당唐나라가 하북河北 지방을 잃은 것은 실로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는 번이蕃夷 출신에게 맡겨서 제장制將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가령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가 장수가 되었다면
注+[頭註]이곽李郭은 이광필李光弼과 곽자의郭子儀이다. 기꺼이 이와 같이 하였겠는가.”
6월에 예부시랑禮部侍郞 양관楊綰이 상소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선비를 뽑을 때에 반드시 행실을 취하였는데, 근세에는 오로지 문장만을 일삼습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로부터 처음으로
진사과進士科를 설치하였으나 오히려
책문策問으로 시험할 뿐이었는데,
고종高宗 때에 이르러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인
유사립劉思立이 처음 아뢰어
진사과進士科에
잡문雜文을 가하고
注+[釋義]진사進士는 시험하는 한 대경大經에 《이아爾雅》의 첩帖까지 아울러서 모두 통과한 뒤에 문文과 부賦를 각각 한 편씩 시험하고, 문文과 부賦를 통과한 뒤에 책문策文을 모두 다섯 조항 시험하여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자를 급제로 하는 것을 이른다. 명경과明經科에
첩괄帖括을 가하였으니,
注+[釋義]명경과明經科의 첩괄帖括은 시험하는 한 가지 대경大經에 《효경孝經》과 《논어論語》와 《이아爾雅》를 겸하고 기타 차첩差帖이 있는 것을 다 통틀어 구두로 묻되 한 가지 경經에 열 가지 뜻을 물어서 여섯 가지 이상을 아는 자를 통通이라 하고, 물음에 통과한 뒤에 책문策文을 모두 세 조항 시험하여 세 번의 시험을 모두 통과한 자를 급제로 하는 것을 이른다. [附註] 첩시帖試는 거인擧人이 익힌 경經을 가지고 양쪽을 가리고 중간에 오직 한 행을 열어 보여주며, 종이를 잘라 첩帖을 만들어서 무릇 첩帖에 세 글자를 쓰되 때에 따라 가감하여 가부가 똑같지 않으니, 혹 넷을 알고, 혹 다섯을 알고, 혹 여섯을 아는 자를 통通이라 함을 이른다. 이로부터 폐단이 쌓여 전전하여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정의
공경公卿들은 이로써 선비를 대하고 집안의
장로長老들은
注+[釋義]장로長老는 나이가 많고 노성老成한 사람을 이른다. 이로써 자제들을 가르쳐서
명경과明經科를 치르는 사람은
첩괄帖括을 외게 하여
注+[釋義]첩괄帖括을 외는 것을 첩송帖誦이라 한다. 명경과明經科는 첩帖을 외웠으니, 괄括은 기괄機括을 맞추어서 외우는 것을 이른다. 요행으로 급제하기를 바라고, 또
거인擧人(응시생)들은 다
첩牒을 바쳐 스스로 응시하게 하니, 이와 같이 하고서 그들로 하여금
순박淳朴한 데로 돌아가고 청렴과 겸양을 숭상하게 하고자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현령縣令으로 하여금 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을 살펴서 행실이
향려鄕閭에 드러나고 학문이
경술經術(經學)을 아는 자를 취하여
주州에 천거하게 하면
자사刺史는
고시考試하여
상서성尙書省으로 올려보내어 각각 자기 마음대로 한 가지
경經을
구술口述하게 하고, 조정에서는
유학儒學하는 선비들을 가려서
경의經義 20
조條와
대책문對策文 세 가지를 물어서
상제上第는
注+[釋義]상제上第는 재주가 뛰어나 품평한 등급이 가장 높은 자를 이른다. 바로 관직을 제수하고,
중제中第는
출신出身하게 하고,
하제下第는 파하여 돌아가게 하소서.
또
도거과道擧科는
注+[釋義]당唐나라 제도에 선비를 뽑을 적에 해마다 천거하여 항상 선발하는 것 외에 천자가 직접 조명詔命하는 것을 제거制擧라 하였으니, 그 묻고자 하는 바를 말하게 하여 천자가 친히 책문策問을 행하는 것이다. [頭註]현종玄宗이 도교道敎를 존중하여 현학박사玄學博士를 설치하고 매년 명경과明經科에 따라 시험보이니, 이것이 바로 도거道擧이다. 또한 나라를 다스림에 의지하고 기대할 바가 아니니,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와 함께 모두 정지하소서.”
혹자는 말하기를 “명경과明經科와 진사과進士科는 행한 지가 이미 오래여서 갑자기 고칠 수 없다.” 하여 일이 비록 시행되지 못하였으나 식자識者들이 옳게 여겼다.
7월에
토번吐蕃이
대진관大震關으로 침입하여
注+[釋義]농주隴州 견원현汧源縣의 대진관大震關이니, 뒤에 이름을 고쳐 안융安戎이라 하였다. 하서河西와
농우隴右 땅을 모두 점령하였다.
처음에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 신운경辛雲京이 복고회은僕固懷恩과 틈이 있어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반역을 도모한다고 아뢰자, 상上이 우대하는 조서를 내려 이들을 화해시켰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병란이 일어난 뒤로 이르는 곳마다 힘껏 싸워 한 가문에서 왕사王事에 죽은 자가 46명이며,
딸을 먼 이역인
회흘回紇로 시집보내어
注+[頭註]회흘回紇에서 혼인을 요구하자, 숙종肅宗이 복고회은僕固懷恩의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회흘回紇을 설득하고 타일러서
注+[頭註]회흘回紇을 설득하고 타이른 일은 상권上卷의 임인년壬寅年(762)에 있다. 〈출병하게 하여〉다시
동경東京과
서경西京을 수복하고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을 평정하여, 공이 〈나와〉견줄 자가 없는데 사람들에게 모함을 당했다.’ 하여, 분노하고 원망함이 특별히 심하였다.
그리하여 글을 올려 자책하였는데, 말이 몹시 간절하고 지극하였다.
상上이 그에게 사자를 보내 위로하고 타일렀다.
토번吐蕃이 처음 쳐들어와 침략할 적에 변방의 장수들이 조정에 위급함을 알렸으나 정원진程元振이 모두 보고하지 않았는데, 겨울 10월 신미일辛未日(2일)에 봉천奉天과 무공武功을 침략하니, 경사京師가 진동하고 놀랐다.
조칙을 내려 옹왕雍王 이괄李适을 관내원수關內元帥로 삼고 곽자의郭子儀를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출병하여 함양咸陽에 진주해서 토번吐蕃을 막게 하였다.
곽자의郭子儀는 한직으로 폐출 당한 지가 오래되어
부部‧
곡曲들이
注+[釋義]장군將軍이 군대를 거느릴 적에 모두 부部와 곡曲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장군大將軍의 영營은 5부部가 있으니 부部에 교위校尉 1명이 있고, 부部에 곡曲이 있으니 곡曲에 군후軍侯 1명이 있었다. 모두 이산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사들을 불러 모집하여 20명의 기병을 얻고 길을 떠나
함양咸陽에 이르니,
토번吐蕃이
토욕혼吐谷渾과
당항党項,
注+[頭註]당항党項은 삼묘족三苗族인 오랑캐 성씨의 후예이다. 저족氐族과
강족羌族 등 20여 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군대가 수십 리에 널려 있었다.
곽자의郭子儀가 판관判官인 왕연창王延昌으로 하여금 궁중에 들어가 군대를 더 증원해 줄 것을 주청奏請하게 하였는데, 정원진程元振이 이를 저지하여 상上이 끝내 불러 만나보지 않았다.
상上이 막 군대를 다스릴 적에 토번吐蕃이 이미 편교便橋를 건너오니,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병자일丙子日(7일)에 성을 나가 섬주陝州로 행차하였다.
무인일戊寅日(9일)에 토번吐蕃이 장안長安에 들어와서 부고府庫와 시장과 마을을 노략질하고 여사廬舍를 불태우니, 장안長安이 쓸쓸하게 모두 비었다.
곽자의郭子儀가 30명의 기병을 이끌고
어숙천御宿川으로부터
注+[通鑑要解]어숙천御宿川은 장안성長安城 남쪽에 있다. 한무제漢武帝가 이궁離宮의 별관別館을 만들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여, 왕래하며 구경하거나 이 가운데에서 유숙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어숙천御宿川이라 하였으니, 《삼보황도기三輔黃圖記》에 보인다. 산을 따라 동쪽으로 갈 적에
왕연창王延昌에게 이르기를 “
육군六軍의 장병 중에 도망하여 궤멸된 자들이 대부분
상주商州에 있으니, 지금 속히 가서 수습하겠다.” 하였는데,
상주商州에 이르렀을 무렵 가면서 군대를 수습한 것이 도합 4천 명이니, 군세가 약간 떨쳐졌다.
곽자의郭子儀가 마침내 울면서 장병들에게 함께 국가의 치욕을 씻고 장안長安을 탈환할 것을 간곡히 타이르니, 모두 감격하여 약속約束(지휘)을 받았다.
곽자의郭子儀가 장손張孫과 전서全緖로 하여금 2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남전藍田으로 나가서 오랑캐의 군세를 관찰하게 하였는데,
전서全緖가 한공퇴韓公堆에 이르러 낮에는 북을 치고 기치旗幟를 늘어세우고, 밤이면 불을 많이 피워서 토번吐蕃을 의심하게 하였으며,
백성들이 또한 거짓말하기를 “
곽령공郭令公이
注+[釋義]곽자의郭子儀가 당시 중서령中書令이 되었으므로 영공令公이라 칭한 것이다. 상주商州로부터 대군을 거느리고 오는데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숫자가 몰려온다.” 하니, 오랑캐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군대를 모두 거느리고 도망하였다.
조칙을 내려 곽자의郭子儀를 서경유수西京留守로 임명하였다.
“곽자의郭子儀의 덕과 재주는 장수와 재상을 겸하여 맡길 만하였는데 마침내 한직에 두었다가 국가가 위급하고 난리가 나면 또 급히 벼슬을 맡겨 등용하였다.
대종代宗이 환관의 말에는 메아리가 응하듯이 지시를 따라서 곽자의郭子儀를 내고 물리기를 노예를 대하듯이 하였다.
이광필李光弼로부터 이하는 자신의 공을 믿고 자신의 기상을 자부하였으니, 어찌 이것을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홀로 곽자의郭子儀만은 가슴 속에 조금도 서운한 마음이 없어서 한 번 임금의 명령을 들으면 수레에 멍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길을 떠나서 위험함을 밟아 죽고 사는 것을 여기에 맡겼다.
그 충의와 정성이 위로 백일白日(太陽)을 꿰뚫고, 도량度量이 크고 넓어서 포함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니, 참으로 인신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
만일 대종代宗이 국권國權과 병권兵權을 가져다가 그에게 맡겼던들 이에 태종太宗의 공업功業을 회복하는 것이 어찌 어려웠겠는가.
그런데도 이렇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루 탄식할 수 있겠는가.”
정원진程元振이 권력을 독점하여 제멋대로 방자하니 사람들이 그를 이보국李輔國보다도 더 심하게 두려워하였으며, 제장諸將 중에 큰 공이 있는 자는 정원진程元振이 모두 시기하고 미워하여 살해하고자 하였다.
토번吐蕃이 쳐들어와 침략했을 적에 정원진程元振이 제때에 아뢰지 않아서 상上이 낭패하여 파천하도록 만들었고, 상上이 사자를 보내어 여러 도의 군대를 징발하였으나 이광필李光弼 등이 모두 정원진程元振이 중앙에 있는 것을 꺼려 아무도 달려온 자가 없으니, 중외中外가 모두 이를 갈았으나 감히 발언하지 못하였다.
태상박사太常博士 유항柳伉이 상소上疏하여 아뢰기를
“견융犬戎이 관문을 범하고 농隴 지방을 건너왔는데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 경사京師에 들어와서 궁위宮闈를 위협하고 능침陵寢을 불태웠으나 무사武士 중에 한 사람도 달려온 자가 없으니 이는 장수將帥가 폐하陛下를 배반한 것이요,
10월 초하루 이후로 여러 도의 군대를 불러 40일이 다 지나도록 단 한 대의 수레도 관문에 들어온 것이 없으니 이는 사방이 폐하를 배반한 것입니다.
내외內外가 이반離叛하였으니, 폐하陛下께서는 금일의 형세를 편안하다고 여기십니까?
만약 위태롭다고 여기신다면 어찌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만 자고〉천하를 위하여 죄인을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폐하陛下께서 반드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보존하고자 하신다면 오직
정원진程元振의 머리를 베어 급히 천하에 고하시고,
내사內史(宦官)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
注+[頭註]이때 환관宦官들이 모두 궁내宮內에 있는 제사諸司의 사使가 되었다. 그러므로 내사內史라 칭하였으니, 실출내사悉出內史는 환관宦官들을 모두 궁 밖으로 내보내 여러 주州에 예속시킴을 말한 것이다. 여러
주州에 예속시키고
신책군神策軍을 가져다가
대신大臣에게 맡기소서.
注+[頭註]이때에 어조은魚朝恩이 신책군神策軍을 거느리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런 뒤에 존호尊號를 삭제하고 조서를 내려 자책하시기를 ‘천하 사람들이 짐이 스스로 새로워져 허물을 고치는 것을 허락하거든 마땅히 즉시 군대를 모집하여 서쪽으로 달려와 조정을 구원할 것이요, 만약 짐의 악을 고칠 수 없다고 여기거든 제왕帝王의 지위를 가지고 내 감히 성현聖賢을 방해하겠는가.
이와 같이 하여 구원하는 군사들이 오지 않고 사람들이 감동하지 않고 천하가 복종하지 않거든, 신은 온 가문사람을 한 치 한 치 베어 죽여서 폐하께 사죄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상上은
정원진程元振이 일찍이
보호保護한 공로가 있다 하여
注+[頭註]보호保護한 공은 장후張后를 죽인 일이니, 상권上卷 임인년壬寅年(762)에 보인다. 11월에
정원진程元振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추방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12월 갑오일甲午日(26일)에 상上이 장안長安에 이르니, 곽자의郭子儀가 성중城中의 백관百官과 제군諸軍들을 거느리고 산수滻水 동쪽에서 대가大駕를 맞이하여 땅에 엎드려 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상上은 위로하기를 “경을 일찍 등용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렀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