僕固懷恩이 反이어늘 上이 謂郭子儀曰 懷恩父子 負朕實深이라
聞朔方將士思公
을 如枯旱之望雨라하니 公爲朕
하야 鎭撫河東
이면 汾上之師
注+[頭註]汾上은 謂汾州하니 時에 朔方軍多在焉하니라 必不爲變
하리라하고
懷恩將士聞之
하고 皆曰 吾輩從懷恩爲不義
하니 何面目
으로 見汾陽王
注+[頭註]卽子儀라 이리오
僕固瑒
이 圍楡次
注+[頭註]楡次는 縣名이라 에 旬餘不拔
이러니 其將白玉, 焦暉
注+[頭註]二人이라 率衆攻瑒殺之
하다
子儀傳瑒首詣闕하니 群臣入賀호되 上이 慘然不悅曰
朕이 信不及人하야 致勳臣顚越하니 深用爲愧로니 又何賀焉이리오하고 命輦懷恩母하야 至長安하야 給待優厚러니
月餘에 以壽終이어늘 以禮葬之하니 功臣이 皆感歎이러라
郭子儀如汾州하니 懷恩之衆數萬이 悉歸之하야 咸鼓舞涕泣하고 喜其來而悲其晩也러라
○ 上之幸陝也
에 李光弼
이 竟遷延不至
注+[頭註]遷延은 淹久也라 라
上
이 恐遂成嫌隙
하야 其母在河中
이어늘 數遣中使存問之
注+[頭註]存은 恤問也라 하고 吐蕃退
에 除光弼東都留守
하야 以察其去就
러니
上
이 迎其母
하야 至長安
하야 厚加供給
하고 使其弟光進
으로 掌禁兵
하야 遇之加厚
注+[頭註]加厚는 所以懷來光弼이라 하니라
○ 自喪亂以來
로 汴水湮廢
注+[頭註]湮은 塞也라 하니 漕運者自江漢
으로 抵梁洋
하야 道險勞費라
三月에 以太子賓客劉晏으로 爲河南江淮以東轉運使하다
時
에 兵火之後
注+[頭註]兵火는 吐蕃入長安하야 焚廬舍하니 見上年十月이라 라 中外艱食하야 關中
에 米斗千錢
하니 百姓
은 注+[釋義]挼는 奴禾反이니 手縈摩也요 穗는 徐醉反이니 禾成秀也라 以給禁軍
하고 宮廚
엔 無兼時之積
이라
晏
이 乃疏浚
注+[頭註]疏는 通也라 汴水
하고 遺元載
注+[頭註]肅宗末年에 以載爲度支鹽鐵轉運使한대 載乃悉以天下錢穀으로 委之劉晏하니라 時에 載爲相하니라 書
하야 具陳漕運利病
하니 中外相應이라
自是로 每歲에 運米數十萬石하야 以給關中하니 唐世에 稱漕運之能者 推晏爲首요 後來者皆遵其法度云이러라
○ 五月에 懷恩이 至靈武하야 收合散亡하니 其衆이 復振이러라
○ 七月
에 稅天下靑苗錢
注+[附註]唐租庸調之法壞하니 代宗이 以畝定稅하야 斂以夏秋러니 時又以國用急이라하여 不及秋하야 苗方靑이면 卽征之하니 號靑苗錢이라 食貨志에 苗一畝에 稅錢十五라 又有地頭錢하야 每畝二十五니 通名爲靑苗錢이라하니라 하야 以給百官俸
하다
○ 李光弼이 治軍嚴重하야 指顧號令에 諸將이 莫敢仰視하며 謀定而後戰하야 能以少制衆하니 與郭子儀齊名이러니
及在徐州
에 擁兵不朝하니 諸將田神功等
이 不復
畏
라
會에 涇原이 奏호되 僕固懷恩이 引回紇, 吐蕃十萬衆하야 將入寇라하니 京師震駭라
詔子儀하야 帥諸將하야 出鎭奉天하고 上이 召問方略한대 對曰 懷恩이 無能爲也니이다
上曰 何故오 對曰 懷恩이 勇而少恩하야 士心不附하니 所以能入寇者는 因思歸之士耳라
必不忍以鋒刃相向하리니 以此로 知其無能爲也니이다
十月에 懷恩이 與回紇, 吐蕃으로 進逼奉天하니 京師戒嚴이라
諸將請戰이어늘 郭子儀不許曰 虜深入吾地하니 利於速戰이라
吾堅壁以待之면 彼以吾爲怯하야 必不戒하리니 乃可破也요
若遽戰而不利면 則衆心離矣리니 敢言戰者는 斬호리라
子儀夜出陳於乾陵之南
注+[頭註]乾陵은 高宗陵이니 在奉天하니라 이러니 未明
에 虜衆
이 大至
라
虜始以子儀爲無備라하야 欲襲之러니 忽見大軍하고 驚愕하야 遂涉涇而遯하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배반하자, 상上은 곽자의郭子儀에게 이르기를 “복고회은僕固懷恩 부자父子가 짐을 저버림이 실로 깊다.
내 들으니 ‘
삭방朔方의 장병들이 공을 그리워하기를 마르고 가물 때에 비를 바라듯이 한다.’ 하니, 공이 짐을 위하여
하동河東 지방을 진무하면
분주汾州의
삭방朔方 군사들이
注+[頭註]분상汾上은 분주汾州를 이르니, 이때에 삭방군朔方軍이 분주汾州에 많이 있었다. 반드시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곽자의郭子儀를 관내하동부원수關內河東副元帥와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로 임명하니,
복고회은僕固懷恩의 장병들이 이 소식을 듣고는 모두 말하기를 “우리들이
복고회은僕固懷恩을 따라
불의不義를 저질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분양왕汾陽王(郭子儀)을 뵙겠는가.” 하였다.
注+[頭註]분양왕汾陽王은 바로 곽자의郭子儀이다.
복고창僕固瑒이
유차현楡次縣을 포위하였으나
注+[頭註]유차楡次는 현縣의 이름이다. 열흘이 넘도록 함락하지 못하자, 그의 장수인
백옥白玉과
초휘焦暉가
注+[頭註]백옥白玉과 초휘焦暉는 두 사람이다. 무리를 거느리고
복고창僕固瑒을 공격하여 죽였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이 이 소식을 듣고 휘하 병사 300명과 함께 황하黃河를 건너 북쪽으로 도망하였다.
곽자의郭子儀가 복고창僕固瑒의 머리를 전달하여 대궐에 이르니, 군신群臣들이 들어와 축하하였으나 상上은 서글퍼하고 기뻐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짐이 신의가 남에게 미치지 못하여 훈신勳臣이 전복하게 만들었으니, 깊이 부끄러워하노니 또 어찌 축하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명하여 복고회은僕固懷恩의 어머니를 연輦을 태워 장안長安으로 오게 하여 물건을 지급하여 특별히 후대하였으며,
한 달이 넘어 천수로 죽자 예로 장례하니, 공신功臣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곽자의郭子儀가 분주汾州로 가니, 복고회은僕固懷恩의 무리 수만 명이 다 그에게 귀의하여 모두 북을 치고 춤을 추고 눈물을 흘리며, 곽자의郭子儀가 온 것을 기뻐하고 그가 늦게 온 것을 슬퍼하였다.
상上이
섬주陝州로 파천할 적에
이광필李光弼이 끝내 지체하고 오지 않았다.
注+[頭註]천연遷延은 오래 지체하는 것이다.
상上은 마침내 이로 인해 틈이 생길까 염려하여, 그의 어머니가
하중河中에 있었는데 여러 번
중사中使를 보내 위문하였으며,
注+[頭註]존存은 구휼하여 위문하는 것이다. 토번吐蕃이 물러가자
이광필李光弼을
동도유수東都留守로 제수하여 그의 거취를 관찰하였다.
이광필李光弼은 강회江淮에 나아가 양식을 운반해온다는 구실로 군대를 이끌고 서주徐州로 돌아갔다.
상上이 그의 어머니를 맞이하여
장안長安에 이르게 하여 후하게 물건을 공급해주고 그의 아우
광진光進으로 하여금
금병禁兵을 관장하게 하여 대우하기를 더욱 후하게 하였다.
注+[頭註]이광필李光弼을 더욱 후대한 것은 이광필李光弼을 회유하여 오게 하기 위해서이다.
상란喪亂이 있은 뒤로부터
변수汴水가 막혀서 뱃길이 폐지되니,
注+[頭註]인湮은 막힘이다. 조운漕運하는 자들이
양자강揚子江과
한수漢水로부터
양주梁州와
양주洋州에 이르러서 길이 험하여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
3월에 태자빈객太子賓客 유안劉晏을 하남강회이동河南江淮以東 전운사轉運使로 임명하였다.
당시에
병화兵火를 겪은 뒤라서
注+[頭註]병화兵火는 토번吐蕃이 장안長安에 들어와서 여사廬舍에 불을 지른 것을 가리키니, 상년上年 10월조에 보인다. 중외中外가 식량을 구하기가 어려워
관중關中 지방의 쌀 한 말 값이 천
전錢을 하니, 백성들이 곡식의 푸른 이삭을 훑어
注+[釋義]뇌挼는 노화반奴禾反(나)이니 손으로 훑어 만지는 것이고, 수穗는 서취반徐醉反(수)이니 벼가 팸을 이른다. 금군禁軍에게 공급하고, 궁궐의 부엌에는 한 철을 보존할 수 있는 양식이 없었다.
유안劉晏은 마침내
변수汴水를 소통하여 준설하고,
注+[頭註]소疏는 통함이다. 원재元載에게
注+[頭註]숙종肅宗 말년末年에 원재元載를 탁지度支‧염철鹽鐵‧전운사轉運使로 삼았는데, 원재元載가 마침내 모든 천하天下의 전곡錢穀을 유안劉晏에게 맡겼다. 당시에 원재元載가 재상이었다. 편지를 보내어
조운漕運의 이해를 자세히 말하니, 중외가 서로 호응하였다.
이로부터 매년 쌀 수십만 석을 운반하여 관중關中에 공급하니, 당唐나라 때의 조운漕運에 능한 자를 칭할 적에 유안劉晏을 첫 번째로 추대하였고, 뒤에 온 자들도 다 그의 법도를 따랐다.
5월에 복고회은僕固懷恩이 영무靈武에 이르러 흩어지고 도망한 자들을 수합하니, 그의 무리가 다시 떨쳐졌다.
7월에 천하에
청묘전靑苗錢을 거두어서
注+[附註]당唐나라 조租‧용庸‧조調의 법이 파괴되니, 대종代宗이 묘畝에 따라 세금을 정하여 여름과 가을에 거두었는데, 당시에 또 국가의 재용이 급하다 하여 가을이 되기 전에 벼의 싹이 막 푸르기만 하면 바로 세금을 거두니, 이것을 청묘전靑苗錢이라 이름하였다. 《신당서新唐書》 〈식화지食貨志〉에 “묘苗 1묘畝에 10전錢 5분分을 세금으로 냈다. 또 지두전地頭錢이 있어 매 묘畝에 25전이니, 이것을 통칭하여 청묘전靑苗錢이라 한다.” 하였다. 백관들의 봉급을 지급하였다.
이광필李光弼이 군대를 다스리는 것이 엄격하고 신중하여 지휘하고 호령함에 여러 장수들이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으며, 계책을 결정한 뒤에 싸워서 소수의 병력으로 많은 적을 제압하니, 곽자의郭子儀와 명성이 똑같았다.
그러다가 서주徐州에 있게 되자 병력을 보유하고 조회하지 않으니, 제장諸將인 전신공田神功 등이 다시는 지시를 받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광필李光弼이 부끄러워하고 한하다가 병을 이루어서 죽었다.
8월에 곽자의郭子儀가 하중河中으로부터 들어와 조회하였다.
마침 경원涇原 지방에서 아뢰기를 “복고회은僕固懷恩이 회흘回紇과 토번吐蕃의 군사 10여만 명을 이끌고 장차 들어와 침략할 것입니다.” 하니, 경사京師가 놀라고 진동하였다.
곽자의郭子儀에게 명하여 제장諸將들을 거느리고 나가 봉천奉天에 진주하게 하고, 상上이 곽자의郭子儀를 불러 방략方略을 묻자, 곽자의郭子儀가 대답하기를 “복고회은僕固懷恩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무슨 이유에서인가?” 하고 묻자, 대답하기를 “복고회은僕固懷恩은 용맹하기만 하고 은혜가 적어서 군사들의 마음이 따르지 않으니, 그가 쳐들어와 침략할 수 있었던 것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는 군사들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복고회은僕固懷恩은 본래 신의 편비偏裨였고 그의 휘하는 실제 모두 신의 부部‧곡曲입니다.
반드시 칼날을 가지고 차마 서로 향하지 못할 것이니, 이로써 그가 아무 일도 하지 못할 줄을 아는 것입니다.” 하였다.
10월에 복고회은僕固懷恩이 회흘回紇‧토번吐蕃과 함께 전진하여 봉천奉天을 핍박하니, 경사京師가 계엄戒嚴하였다.
제장諸將들이 싸울 것을 청했으나 곽자의郭子儀는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오랑캐가 우리 땅에 깊이 쳐들어왔으니, 속전速戰하는 것이 이롭다.
우리가 성벽을 굳게 지키고 기다리면 저들은 우리가 겁먹는다고 여겨서 반드시 경계하지 않을 것이니 그제야 격파할 수 있다.
만약 갑자기 싸우다가 승리하지 못하면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이산離散될 것이니, 감히 싸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겠다.” 하였다.
곽자의郭子儀가 밤에 나가
건릉乾陵의 남쪽에
注+[頭註]건릉乾陵은 고종高宗의 능陵이니, 봉천奉天에 있다. 진을 쳤는데, 날이 새기 전에 오랑캐 무리가 크게 몰려왔다.
오랑캐들이 처음에는 곽자의郭子儀가 대비가 없다고 여겨 습격하고자 하였는데, 갑자기 대군大軍이 있는 것을 보고는 놀라 마침내 경수涇水를 건너 도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