正月
에 成德
注+[頭註]가 成德軍이라 節度使李寶臣
이 薨
하다
初에 寶臣이 與淄靑李正己와 魏博田承嗣로 相結하야 期以土地傳之子孫이라
故로 承嗣之死에 寶臣이 力爲之請於朝하야 使以節授田悅한대 代宗이 從之러니
至是하야 悅이 屢爲寶臣子惟岳하야 請繼襲이어늘 上이 欲革前弊하야 不許하다
悅
이 乃與李正己
로 各遣使詣惟岳
하야 謀
勒兵注+[頭註]勒은 猶戒嚴也라 拒命하니 河南士民
이 騷然驚駭러라
○ 御史中丞盧杞
는 弈之子
注+[頭註]弈은 懷愼子也니 謹重寡欲이라 留臺東都라가 被執하여 將殺之할새 卽數祿山罪하고 西向再拜하며 罵賊不絶口하니 逆黨變色하니라 也
라
貌醜하고 色如藍호되 有口辯하니 上이 悅之하야 擢爲京畿觀察使하다
郭子儀每見賓客
에 姬妾不離側
이러니 杞嘗往問疾
할새 子儀悉屛侍妾
하고 獨隱几
注+[頭註]隱은 憑也라 待之
라
或이 問其故한대 子儀曰 杞貌陋而心險하니 婦人輩見之必笑하리니
楊炎이 旣殺劉晏에 朝野側目이어늘 上이 惡之하야 遷炎中書侍郞하고 擢盧杞爲門下侍郞하야 竝同平章事하고 不專任炎矣러라
杞陰狡
注+[頭註]狡는 猾也라 하야 欲
起勢立威하야 小不附者
는 必欲寘(置)之死地
하고 引太常博士裴延齡
注+[附註]性苛刻하야 專剝下附上하고 譎怪辯給이라 帝知其詐로되 但以不隱하야 欲聞外事라 故斷用不疑하니 恃得君하고 少所降下하야 嫚罵近臣하니 人皆仄目이라 及卒에 人語以相安호되 惟帝悼不已하니라 하야 爲集賢直學士
하야 親任之
하니라
子儀爲上將擁兵하니 程元振, 魚朝恩이 讒謗百端이로되 詔書一紙徵之하면 無不卽日就道라
嘗遣使至田承嗣所러니 承嗣西望拜之하고 曰 此膝不屈於人이 若干年矣라하고
李靈曜據汴州作亂하야 公私物過汴者를 皆留之호되 惟子儀物은 不敢近하고 遣兵衛送出境이러라
校中書令考凡二十四
注+[頭註]肅宗乾元戊戌年에 始爲中書令하고 至德宗建中辛酉年하여 薨하니 通二十四年이라 에 月入俸錢
이 二萬緡
이로되 私産
은 不在焉
하고 府庫珍貨山積하다
家人三千人
이요 八子
注+[頭註]曜晞旰𣇕晤曖曙映이라 七婿 皆爲朝廷顯官
하고 諸孫數十人
이 每問安
에 不能盡辨
하고 頷之而已
注+[原註]頷은 五感反이니 首肯也라[釋義] 左傳襄二十六年에 衛侯復歸할새 逆於門者頷之而已라한대 註에 頷은 搖其頭也하니라[頭註] 頷은 點頭而應之라 러라
僕固懷恩
注+[附註]鐵勒部人이라 初에 祿山叛에 從郭子儀하야 討賊雲中하고 代宗時에 拜太保兼中書令, 太寧郡王이러니 德宗二年에 病死靈武하니라 , 李懷光
注+[附註]渤海靺鞨人이라 父茹以功賜姓李하고 爲朔方節度使하다 德宗時에 懷光이 率兵敗朱泚하야 加副元帥러니 爲盧杞阻隔하야 陰連朱泚어늘 帝遣渾瑊討之한대 爲朔方副將所斬하고 傳首以獻하니라, 渾
注+[附註]本之渾部也라 從子儀하야 與慶緖戰하야 功多하야 拜太常卿하고 德宗時에 平朱泚하고 論功拜兼侍中하고 封咸寧郡王이러니 卒諡忠武하니라 輩 皆出麾下
하야 雖貴爲王公
이나 常
頤指役使하야 趨走於前
하고 家人亦以僕隷視之
하니 天下
以其身爲安危者 殆三十年
이라
功盖天下而主不疑하고 位極人臣而衆不疾하고 窮奢極欲而人不非之하니라
天寶之末
에 盜發幽陵
注+[頭註]盜는 謂安祿山이라 하야 外阻內訌
注+[頭註]訌은 亂也라 이러니 子儀自朔方
으로 提孤軍
하고 轉戰逐
하야 誓不還顧
라
當是時
하야 天子西走
하야 唐祚若綴旒
注+[通鑑要解]旒는 旗之垂者니 旗之縿이 爲旒所綴者也라러니 而能輔太子
하야 再造王室
하고 及大難略平
에 遭讒
注+[通鑑要解]惎는 音忌이니 毒也라 하야 詭奪兵柄
이나 然朝聞命
이면 夕引道
하야 無纖芥自嫌
이라
及被圍涇陽
에 單騎見虜
하야 壓以至誠
하야 猜忍沮謀
注+[頭註]猜忍은 謂回紇也라 하니 雖唐命方永
이나 亦由忠貫日月
하야 神明扶持者哉
인저
及光弼等
은 畏偪不終
注+[附註]光弼與子儀齊名하야 世稱李, 郭이러니 卒爲魚朝恩, 程元振所忌하야 日謀有以中傷之하니 光弼恐이라 會에 吐蕃寇京師어늘 代宗이 詔入援한대 光弼이 畏禍(還)[遷]延하니 見上卷甲辰年하니라 이로되 而子儀完名高節
하야 爛然
注+[頭註]爛은 明也라 獨著
하야 福祿永終
하니 雖齊桓晉文
이라도 比之爲褊
注+[頭註]褊은 陜陋也라 이라
唐史臣裴(洎)[垍]가 稱權傾天下而朝不忌하고 功蓋一世而上不疑하고 侈窮人欲而議者不之貶이라하니 嗚呼라
功蓋天下而上不疑하고 位極人臣而衆不疾은 此漢唐以來將相所難者어늘 子儀以何道而能然고
窮奢極欲은 小人處富貴者之所爲也니 曾謂子儀之賢而有是哉아
七月
에 詔馬燧
注+[頭註]河東節度使라 하야 將步騎二萬
하야 與李抱眞
注+[頭註]昭義節度使라 으로 討田悅
하고 又遣李晟
注+[頭註]神策都將이라 하야 將神策兵
注+[頭註]天子禁軍이라 하야 與之俱
하다
○ 盧杞譖楊炎하야 十月에 貶崖州司馬하고 遣中使護送이러니 未至崖州하야 縊殺之하다
정월에
성덕군成德軍注+[頭註]항기진恒冀鎭이 성덕군成德軍이다. 節度使
이보신李寶臣이 죽었다.
처음에 이보신李寶臣은 치청절도사淄靑節度使 이정기李正己, 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승사田承嗣와 서로 결탁하여 토지土地를 자손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전승사田承嗣가 죽었을 때에 이보신李寶臣이 전승사田承嗣를 위해 강력히 조정에 청해서 절월節鉞을 전열田悅에게 주게 하였는데, 대종代宗이 그의 청원을 따랐다.
이때에 이르러 전열田悅이 이보신李寶臣의 아들 유악惟岳을 위하여 이보신李寶臣의 뒤를 이어 세습시킬 것을 여러 번 청하였으나 상上이 예전의 폐습을 개혁하고자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전열田悅이 마침내
이정기李正己와 함께 각각
이유악李惟岳에게 사자를 보내어 군대를 계엄해서
注+[頭註]늑勒은 계엄과 같다.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것을 모의하니,
하남河南 지방의
사민士民들이 소요하여 놀랐다.
어사중승御史中丞 노기盧杞는
노혁盧弈의 아들이다.
注+[頭註]노혁盧弈은 노회신盧懷愼의 아들이니, 근후하고 욕심이 적었다. 동도東都에서 유대留臺(留守)로 있다가 붙잡혀 살해될 적에 곧 안녹산安祿山의 죄를 열거하고 서쪽을 향하여 재배하였으며 적을 꾸짖는 말이 입에서 끊이지 않으니, 역당들이 낯빛이 변하였다.
모습이 추악하고 낯빛이 쪽빛과 같았으나 구변口辯이 있으니, 상上이 그를 좋아해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로 발탁하였다.
곽자의郭子儀가 빈객들을 만나볼 때마다
희첩姬妾들이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노기盧杞가 일찍이
곽자의郭子儀를 찾아가서 문병할 적에
곽자의郭子儀가
시첩侍妾들을 다 물리치고 홀로 안석에 기대어
注+[頭註]은隱은 기댐이다. 그를 접대하였다.
혹자가 그 까닭을 묻자, 곽자의郭子儀가 말하기를 “노기盧杞는 모습이 추악하고 마음이 음험하니, 부인들이 그를 보면 반드시 웃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훗날 노기盧杞가 뜻을 얻을 경우 우리 집안은 살아남는 무리가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양염楊炎이 유안劉晏을 죽인 뒤에 조야朝野가 곁눈질하면서 똑바로 보지 못하니, 상上이 양염楊炎을 미워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옮기고 노기盧杞를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발탁하여 함께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게 하고 양염楊炎에게 전적으로 맡기지 않았다.
노기盧杞는 음흉하고 교활하여
注+[頭註]교狡는 교활함이다. 세력을 일으켜 위엄을 세우고자 해서 조금이라도 자신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를
사지死地에 두고자 하였고,
태상박사太常博士인
배연령裴延齡을
注+[附註]배연령裴延齡은 성질이 까다롭고 각박하여 오로지 아랫사람에게 깎아내어 윗사람에게 붙이며 허탄하고 기이하며 말을 잘하였다. 황제가 그의 속임수를 알았으나 다만 숨기지 아니하여 바깥일을 듣고자 하였기 때문에 결단하여 등용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배연령裴延齡은 군주의 신임을 얻은 것을 믿고는 자기 몸을 낮추는 경우가 드물어서 근신들을 업신여기고 꾸짖으니, 사람들이 모두 눈을 흘겼다. 그가 죽자 사람들이 서로 편안하다고 말하였으나 오직 황제만은 슬퍼하여 마지 않았다. 끌어들여
집현전직학사集賢殿直學士로 삼아 그를 친애하고 신임하였다.
6월에 분양汾陽 충무왕忠武王 곽자의郭子儀가 별세하였다.
곽자의郭子儀가 상장上將이 되어 병력을 보유하니, 정원진程元振과 어조은魚朝恩이 백방으로 참소하고 비방하였으나 한 장의 조서詔書로 부르면 당일로 길에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참소와 비방이 행해지지 못하였다.
곽자의郭子儀가 일찍이 전승사田承嗣가 있는 곳에 사자를 보내었는데, 전승사田承嗣가 서쪽을 바라보고 절하며 말하기를 “이 무릎을 남에게 꿇지 않은 지가 약간 년이 되었다.” 하였으며,
이령요李靈曜가 변주汴州를 점거하고 난을 일으키고서 변주汴州를 통과하는 것은 공사간의 물건을 막론하고 모두 억류하였으나 오직 곽자의郭子儀의 물건만은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고 군사들을 보내 호위하여 경내를 나가게 하였다.
중서령中書令을 맡은 것이 모두 24년인데,
注+[頭註]곽자의郭子儀가 숙종肅宗 건원乾元 무술년(758)에 처음 중서령中書令이 되고 덕종德宗 건중建中 신유년(781)에 이르러 죽으니, 통틀어 24년이다. 매월 봉급으로 들어오는 돈이 2만
민緡이었으나 사사로운 재산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부고府庫의 진귀한 재화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집안 식구가 3천 명이었고, 여덟 명의 아들과
注+[頭註]곽자의郭子儀의 여덟 아들은 곽요郭曜, 곽희郭晞, 곽간郭旰, 곽아郭𣇕, 곽오郭晤, 곽애郭曖, 곽서郭曙, 곽영郭映이다. 일곱 명의 사위가 모두 조정의 현달한 관원이 되었으며, 몇십 명의 손자들이 문안할 때마다 다 구별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注+[原註]함頷은 오감반五感反(함)이니, 머리를 끄덕여 응하는 것이다. [釋義]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26년조에 “위후衛侯가 다시 돌아올 적에 문에서 맞이하는 자가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하였는데, 주註에 “함頷은 머리를 아래위로 흔드는 것이다.” 하였다. [頭註]함頷은 머리를 끄덕거려 응대하는 것이다.
복고회은僕固懷恩,
注+[附註]복고회은僕固懷恩은 철륵부鐵勒部 사람이다. 처음에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적에 곽자의郭子儀를 따라 운중雲中에서 적을 토벌하였고, 대종代宗 때에 태보太保 겸兼 중서령中書令에 제수되고 태령군왕太寧郡王에 봉해졌는데, 덕종德宗 2년에 영무靈武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회광李懷光,
注+[附註]이회광李懷光은 발해渤海 말갈靺鞨 사람이다. 아버지 여茹가 공功으로 이씨성李氏姓을 하사받고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었다. 덕종德宗 때에 이회광李懷光이 군사를 거느리고 주체朱泚를 패퇴시켜 부원수에 임명되었는데, 노기盧杞에게 저지당하자 은밀히 주체朱泚와 연합하였다. 황제가 혼감渾瑊을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삭방부장朔方副將에게 참수당하고 머리를 파발마로 전달하여 바쳤다. 혼감渾瑊注+[附註]혼감渾瑊은 본래 철륵구성鐵勒九姓의 혼부渾部이다. 곽자의郭子儀를 따라 안경서安慶緖와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태상경太常卿에 제수되었으며, 덕종德宗 때에 주체朱泚를 평정하고는 공을 논하여 겸시중兼侍中에 제수되고 함녕군왕咸寧郡王에 봉해졌는데, 죽자 충무忠武라고 시호하였다. 등이 모두
곽자의郭子儀의 휘하에서 나와 비록
왕공王公의 귀함에 이르렀으나
곽자의郭子儀가 항상 턱으로 부리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면 급히 앞으로 달려 나왔고,
곽자의郭子儀의 집안 사람들 역시 그들을 노비로 여기니, 천하의
안위安危가 그의 한 몸에 달려 있은 지가 거의 30년이었다.
공功이 천하를 덮을 정도로 큰데도 군주가 의심하지 않고,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에 도달했는데도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고, 사치와 욕망을 극도로 누렸는데도 사람들이 비난하지 않았다.
그의 장수와 보좌로서 대관大官에 이르고 명신名臣이 된 자가 매우 많았다.
《신당서新唐書》 〈곽자의열전郭子儀列傳〉贊에 말하였다.
“
천보天寶 말년에 도둑이
유릉幽陵에서 일어나
注+[頭註]도둑은 안녹산安祿山을 이른다. 밖에서 막고 안으로 어지러웠는데,
注+[頭註]홍訌은 어지러움이다. 곽자의郭子儀가
삭방朔方에서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전전하면서 싸워 패주하는 적들을 추격하고 맹세코 그대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를 당하여 천자가 서쪽으로 도망하여
당唐나라 국운이 깃술[綴旒]처럼 위태로웠는데,
注+[通鑑要解]유旒는 기旗의 술이 아래로 늘어져 있는 것이니, 기旗의 기폭이 기의 술에 매여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곽자의郭子儀가 태자를 보필하여 다시 왕실을 재건하였고, 큰 난리가 대략 평정되자 참소와 시기를 당하여
注+[通鑑要解]기惎는 음이 기이니, 해독을 끼치는 것이다. 속임수로
병권兵權을 빼앗겼으나 아침에 명령을 들으면 저녁에 길을 떠나서 털끝만큼도 스스로 혐의함이 없었다.
경양涇陽에서 포위당하자
단기單騎로 오랑캐를 만나
지성至誠으로 진압하여 시기심 많고 잔인한
회흘回紇의 계책을 막았으니,
注+[頭註]시기심 많고 잔인한 것은 회흘回紇을 이른다. 비록
당唐나라의 국운이 장구하였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의 충성심이 해와 달을 꿰뚫어
신명神明이 보호하였기 때문이다.
이광필李光弼 등은 핍박함을 두려워하여 잘 끝마치지 못하였으나
注+[附註]이광필李光弼은 곽자의郭子儀와 명성이 똑같아서 세상에서는 이李‧곽郭이라고 일컬었는데, 끝내 어조은魚朝恩과 정원진程元振에게 시기를 당하여 이들이 날마다 이광필李光弼을 중상모략할 것을 모의하니, 이광필李光弼이 이들을 두려워하였다. 마침 토번吐蕃이 경사京師를 침략하자 대종代宗이 그에게 조칙을 내려 구원하게 하였는데, 이광필李光弼은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머뭇거렸다. 이 내용은 상권上卷 갑진년조甲辰年條에 보인다.곽자의郭子儀는 명예를 온전히 보전하고 절개를 드높여 찬란하게
注+[頭註]난爛은 밝음이다. 홀로 드러나서 복록을 누려 길이 잘 마쳤으니, 비록
제齊나라
환공桓公과
진晉나라
문공文公에게 견준다 해도 부족하다.
注+[頭註]편褊은 누추하고 좁음이다.
당唐나라 사신史臣 배기裴垍(기)가 그를 칭찬하여 ‘권세가 천하를 휩쓸었으나 조정에서 시기하지 않았고, 공功이 온 세상을 덮을 정도로 컸으나 임금이 의심하지 않았고, 사치함이 사람의 욕망을 다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폄하하지 않았다.’ 하였으니, 아!
그 자손들이 공명功名으로 현달한 자가 많았으니, 이는 성덕盛德을 쌓은 뒤이기 때문이다.”
“곽자의郭子儀는 공功이 천하를 뒤덮을 정도로 큰데도 임금이 의심하지 않고 지위가 신하로서 최고의 자리에 도달하였는데도 사람들이 미워하지 않았으니, 이는 한漢‧당唐 이래로 장수와 재상이 어렵게 여기는 것이었는데 곽자의郭子儀가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하였는가.
이는 오직 충신忠信에 의거하고 의리와 천명을 편안히 여겼기 때문일 뿐이다.
사신史臣이 또 ‘그가 사치함과 욕망을 지극히 하였다.’고 칭하였으니, 내 생각에는 이 말이 지나친 듯하다.
사치함과 욕망을 지극히 하는 것은 소인으로서 부귀에 처한 자가 하는 짓이니, 곽자의郭子儀와 같이 어진 사람이면서 이런 일이 있다고 이를 수 있겠는가.”
7월에
마수馬燧에게 명하여
注+[頭註]마수馬燧는 하동군절도사河東軍節度使이다.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이포진李抱眞과 함께
注+[頭註]이포진李抱眞은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이다. 전열田悅을 토벌하게 하고, 또
이성李晟을 보내어
注+[頭註]이성李晟은 신책군神策軍 도장都將이다. 신책군神策軍을 거느리고
注+[頭註]신책병神策兵은 천자의 금군禁軍이다. 그와 함께
전열田悅을 공격하게 하였다.
노기盧杞가 양염楊炎을 참소하여 10월에 애주사마崖州司馬로 좌천시키고 중사中使를 보내어 호송하였는데, 애주崖州에 이르기 전에 그를 목졸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