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燧等諸軍
이 直趨魏州
하니 田悅
이 率軍四萬
하고 踰橋
注+[頭註]燧與悅夾洹水而軍이러니 燧爲三橋하야 踰洹水하야 日往挑戰하니라 掩其後
어늘
燧與李抱眞不協
하야 頓兵平邑浮圖
注+[頭註]佛寺也니 在魏州南하니라 浮圖는 見二十九卷하니라하고 遷延不進이러니
悅이 入城旬餘日에 燧等諸軍이 始至城下하야 攻之不克하다
○ 三月
에 上
이 遣中使
하야 發盧龍, 恒冀, 易定
注+[頭註]盧龍은 朱滔요 恒冀는 王武俊이요 易定은 이라 兵萬人
하야 詣魏州
하야 討田悅
이러니 王武俊
은 不受詔
하고 朱滔亦擧兵而南
하야 以救魏州
하다
○ 時
에 兩河
注+[附註]河南北이니 河南은 淄靑李正己요 河北은 魏博田悅, 盧龍朱滔, 成德王武俊, 鎭冀李惟岳也라 共謀拒命하니 見上辛酉年하니라[通鑑要解] 兩河는 河南北也라 用兵
에 月費百餘萬緡
하니 府庫不支數月
이라
太常博士韋都賓, 陳京
注+[通鑑要解]陳宣帝子叔明之五世孫也라 이 建議
하야 以爲貨利所聚
는 皆在富商
하니 請括富商錢
注+[頭註]括은 檢也라 하야 出萬緡者
는 借其餘
하야 以供軍
하소서
計天下컨대 不過借一二千商이면 則數年之用이 足矣리이다
上
이 從之
하야 詔借商人錢
할새 令度支杜佑
로 大索長安中商賈所有貨
호되 意其不實이면 輒加榜
하니 人不勝苦하야 有
死者
라
又括
質錢
注+[釋義]僦는 卽就反이니 賃也요 質은 物相贅也라[通鑑要解] 僦는 賃借也라 民間에 以物質錢이라가 異時贖出하되 於母錢之外에 復還子錢하니 謂之僦櫃라 質은 贅以物質錢也니 質은 之日切이라 又音致니 信也라 하야 凡蓄積錢帛粟麥者
를 皆借四分之一
하고 封其櫃
하니 百姓
이 爲之罷市
라
○ 朱滔, 王武俊軍이 至魏州하니 是日에 李懷光軍亦至라
馬燧等이 盛軍容迎之하니 滔以爲襲己라하야 遽出陳이러니 懷光이 勇而無謀하야
故
로 當時政聲
然
하야 以爲有
貞觀之風이라하더니 及盧杞爲相
에 知上性多忌
하고 因以疑似
로 離間群臣
하고 始勸上以
嚴刻御下하니 中外失望하니라
○ 十一月
에 田悅
이 德朱滔之救
하야 與王武俊議
하야 奉滔爲王
하고 稱臣事之
한대 滔不可
注+[附註]幽州判官李子千等이 共議하야 以爲如此면 則常爲叛臣하야 用兵無名이라 使將吏無所依歸하니 請與鄆州爲四國하야 俱稱王이라한대 滔等이 皆以爲然하야 於是에 各稱王하니라 鄆州는 淄靑所領이라 라
於是에 滔自稱冀王하고 田悅稱魏王하고 王武俊稱趙王하고 李納稱齊王하다
마수馬燧 등
제군諸軍이 곧바로
위주魏州로 달려가니,
전열田悅이 군대 4만 명을 거느리고 다리를 건너와
注+[頭註]마수馬燧가 전열田悅과 원수洹水를 끼고 주둔하였는데, 마수馬燧가 세 개의 교량을 만들어 원수洹水를 건너가 날마다 가서 도전하였다. 그 후미를 엄습하였다.
마수馬燧가 진을 치고 정예병을 풀어 공격하니, 전열田悅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전열田悅은 남은 군사 천여 명을 수습하여 위주魏州로 달아났다.
마수馬燧가
이포진李抱眞과 화합하지 못하여
평읍平邑의 사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注+[頭註]부도浮圖는 불교의 사찰이니, 위주魏州 남쪽에 있다. 부도浮圖는 29권에 보인다. 지체하여 전진하지 않았다.
전열田悅이 성에 들어간 지 10여 일이 지나서야 마수馬燧 등 제군諸軍이 비로소 성 아래에 이르러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3월에
상上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노룡盧龍‧
항기恒冀‧
역정易定注+[頭註]노룡盧龍, 항기恒冀, 역정易定:노룡진盧龍鎭은 주도朱滔이고, 항기진恒冀鎭(成德軍)은 왕무준王武俊이고, 역정진易定鎭(義武軍)은 장효충張孝忠이니, 본래 해족奚族의 걸실활乞失活 종족이다. 삼진三鎭의 병력 만 명을 징발하여
위주魏州에 나아가
전열田悅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왕무준王武俊은
조명詔命을 받지 않았고
주도朱滔 또한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와서
위주魏州(田悅)를 구원하였다.
이때에
양하兩河 지방에서
注+[附註][附註] 양하兩河는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이니, 하남河南은 치청군淄靑軍의 이정기李正己이고, 하북河北은 위박군魏博軍의 전열田悅, 노룡군盧龍軍의 주도朱滔, 성덕군成德軍의 왕무준王武俊, 진기군鎭冀軍의 이유악李惟岳이다. 이들은 조정의 명령을 거역할 것을 함께 모의하였으니, 앞의 신유년辛酉年(781)에 보인다. [通鑑要解]양하兩河는 하남河南과 하북河北이다. 군대를 운용함에 매월 백여 만
민緡을 허비하니, 국가의
부고府庫가 고갈되어서 지급하지 못한 지가 몇 달이었다.
태상박사太常博士 위도빈韋都賓과
진경陳京이
注+[通鑑要解]진선제陳宣帝의 아들인 숙명叔明의 5세손이다. 건의하여 이르기를 “재화의 이익은 모두 부유한 장사꾼에게 모여 있으니, 청컨대 부유한 상인들의 재화를 조사하여
注+[頭註]괄括은 조사하는 것이다. 만
민緡을 넘는 자는 그 남는 것을 빌려서 군대에 공급하도록 하소서.
천하를 계산해보건대 불과 1, 2천 명의 상인에게 빌리면 수년의 비용이 충분해질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그 말을 따라 조칙을 내려 상인들의 돈을 빌릴 적에 탁지度支의 일을 맡은 두우杜佑로 하여금 장안長安에 있는 장사꾼들이 소유한 재화를 대대적으로 조사하게 하되 보고한 숫자가 진실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번번이 곤장을 치니, 사람들이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목을 매달아 죽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장안長安이 시끄러워 도둑의 폐해를 입은 것과 같았다.
또 얻은 재화를 계산해보니, 겨우 80여만 민緡이었다.
또
추궤僦櫃의
질전質錢(전당잡힌 돈)을 조사하여
注+[釋義]추僦는 즉취반卽就反(취)이니 빌리는 것이요, 질質은 물건을 서로 저당잡히는 것이다. [通鑑要解]추僦는 빌리는 것이다. 민간民間에서 물건을 저당잡히고 돈을 빌렸다가 후일에 갚되 본전本錢 이외에 다시 이자를 상환하니, 이를 일러 추궤僦櫃라고 한다. 질質은 물건을 저당잡히고 돈을 빌리는 것이니, 질質은 지일절之日切(질)이다. 또 다른 음은 지이니 진실함이다. 무릇 돈과 비단과 곡식과 보리를 저축한 자들에게는 모두 저축한 숫자의 4분의 1을 빌리고
추궤僦櫃와
질전質錢와
교窖(지하창고)를 봉함하니, 백성들이 이 때문에 시장을 파하였다.
상인들에게서 빌린 것을 계산해보니, 겨우 2백여 만 민緡이었으나 백성들은 이미 재정이 고갈되었다.
주도朱滔와 왕무준王武俊의 군대가 위주魏州에 이르니, 이날 이회광李懷光의 군대 역시 도착하였다.
마수馬燧 등이 군용軍容을 성대히 하여 이들을 맞이하니 주도朱滔는 자신들을 기습하는 것이라고 여기고는 급히 나와서 진을 쳤는데, 이회광李懷光은 용감하기만 하고 지모智謀가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주도朱滔를 협산愜山 서쪽에서 공격하다가 관군官軍이 대패하였다.
이에 후퇴하여 위현魏縣을 지키면서 주도朱滔를 막았다.
상上이 처음 즉위했을 때에 최우보崔祐甫가 재상이 되어 힘써 관대함을 숭상하였다.
그러므로 당시에 정치를 잘한다는 명성이 크게 나서 정관지치貞觀之治의 유풍이 있다고 여겼는데, 노기盧杞가 재상이 되자 상上의 성품이 시기가 많음을 알고는 인하여 의심스럽고 유사한 일로써 군신群臣들을 이간질하였으며, 처음으로 상上에게 엄하고 각박한 방법으로 아랫사람들을 어거할 것을 권하니, 중외中外가 실망하였다.
11월에
전열田悅은
주도朱滔가 구원해 준 것을 고맙게 여겨
왕무준王武俊과 의논하여
주도朱滔를 받들어 왕으로 삼고 자신은
신臣을 칭하여 그를 섬겼는데,
주도朱滔가 허락하지 않았다.
注+[附註]유주판관幽州判官 이자천李子千 등이 함께 의논하여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면 항상 반역한 신하가 되어서 군대를 출동할 적에 명분이 없다. 장수와 관리들로 하여금 의지하여 돌아갈 곳이 없게 하니, 운주鄆州와 함께 네 나라가 되어서 함께 왕을 칭하기를 청한다.” 하니, 주도朱滔 등이 모두 그 말을 옳게 여겨서 이에 각각 왕을 칭하였다. 운주鄆州는 치청淄靑의 이정기李正己가 관할하는 곳이다.
이에 주도朱滔는 스스로 기왕冀王을 칭하고, 전열田悅은 위왕魏王을 칭하고, 왕무준王武俊은 조왕趙王을 칭하고, 이납李納은 제왕齊王을 칭하였다.
12월에 이희열李希烈도 스스로 천하도원수天下都元帥라 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