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四月에 大將陳仙奇 使醫陳山甫로 毒殺之하고 因擧衆來降이어늘 兵馬使吳少誠이 復殺仙奇하고 自爲留後하다
仙奇
는 爲國誅賊
하니 賞以
이 是也
어니와 少誠
은 黨賊而殺仙奇
어늘 亦以與之
하니 則賞罰混殽
하야 兆
矣
라
禁軍
이 或自脫巾
하고 呼於道曰 拘吾於軍而不給粮
하니 吾
는 罪人也
라하니 上
이 憂之甚
이러니 會
에 韓滉
注+[頭註]江淮轉運使라 이 運米三萬斛
하야 至陝
이어늘
李泌가 卽奏之한대 上喜하야 遽至東宮하야 謂太子曰 米已至陝하니 吾父子得生矣로다
時에 禁中이 不釀이라 命於坊市取酒하야 爲樂하고 又遣中使하야 諭神策六軍하니 軍士皆呼萬歲라
時에 比歲饑饉하야 兵民이 率皆瘦黑이러니 至是에 麥始熟하야 市有醉人하니 當時以爲嘉瑞라
人乍飽食에 死者復五之一이러니 數月에 人膚色이 乃復古하니라
○ 初
에 上
이 與常侍李泌
로 議復府兵
注+[頭註]府는 卽折衝果毅府라 하니 泌因爲上
하야 歷敍府兵自西魏以來興廢之由
하고 且言
호되
折衝以農隙으로 敎習戰陳(陣)하야 國家有徵發이면 則以符契로 下其州及府하야 參驗發之하고
至所期處
어든 將帥按閱
하야 有敎習不精者
면 罪其折衝
하고 甚者
는 罪及刺史
하며 軍還則賜勳加賞
하야 便道罷之
注+[頭註]便道는 便捷之路也라 罷兵하야 使各隨便道歸農이니 不必還至京師而後罷라 하니 行者
近不踰時하고 遠不經歲니이다
高宗
이 以劉仁軌
로 爲
河鎭守使
注+[頭註]洮河는 二州名이라 하야 以圖吐蕃
하니 於是
에 始有久戍之役
이요
武后以來
로 承平日久하야 府兵浸
하야 爲人所賤
하니 百姓恥之
하야 至蒸
手足
하야 以避其役
하니이다
山東戍卒이 多齎繒帛自隨어든 邊將誘之하야 寄於府庫하고 晝則苦役하고 夜縶地牢하야 利其死而沒入其財라
故로 自天寶以後로 山東戍卒이 還者什無二三이니이다
其殘虐如此나 然未嘗有外叛內侮하야 殺帥自擅者는 誠以顧戀田園하고 恐累宗族故也니이다
自開元之末
로 張說
이 始募長征兵
注+[頭註]征은 作從이라 하야 謂之
하고 其後
에 益爲六軍
注+[頭註]分左右하야 爲十二軍이라 이러니 及李林甫爲相
에 奏諸軍皆募人爲之
하니 兵不土著하고 又無宗族
이라
不自重惜
하고 忘身徇利하야 禍亂遂生
하야 至今爲梗注+[頭註]梗은 病也라 하니 曏使府兵之法
이 常存不廢
런들 安有如此
下陵上替之患哉
리잇고
陛下思復府兵하시니 此乃社稷之福이니 太平有日矣리이다
○ 初에 吐蕃이 求和於馬燧어늘 燧信其言하야 爲之請於朝러니
李晟曰 戎狄
이 無信
하니 不如擊之
라한대 燧與張延賞
注+[頭註]左僕射라 이 皆與晟有隙
이라 欲反其謀
하야 爭言和親便
이라하니 上計遂定
하다
人君이 於其所不當疑而疑之면 則於其所不可信而信之矣라
李晟之功은 社稷是賴어늘 而德宗猜忌하야 使憂懼하야 不保朝夕하고 至於讒邪之詭計와 戎狄之甘言하야는 則推誠而信之不疑하니 由其心術顚倒하고 見義不明故也라
延賞이 以私憾으로 敗國殄民하니 罪莫大焉이어늘 德宗이 曾不致詰하야 使之得保首領하야 死於牖下하니 幸矣라
○ 五月
에 渾瑊
이 自咸陽入朝
어늘 以爲淸水會盟使
注+[頭註]淸水는 地名이라 하야 使將二萬餘人
하야 赴盟所
하다
張延賞이 集百官하고 以瑊表示之曰 李太尉謂吐蕃和好必不成이라하더니 此는 渾侍中表也라 盟日定矣니라
晟
이 聞之
하고 泣謂所親曰 吾生長西
하야 備諳虜情하니 所以論奏
는 但恥朝廷爲犬戎所侮爾
로라
辛未에 將盟할새 吐蕃이 伏精騎數萬於壇西어늘 瑊等이 皆不知하고 入幕하야 易禮服이러니 虜伐鼓三聲에 大譟而至하니 瑊이 自幕後出하야 偶得他馬乘之하고 唐將卒이 皆東走라
是日에 上謂諸將曰 今日和戎息兵은 社稷之福이라하니 馬燧曰 然하니이다
非盟誓可結이니 今日之事를 臣竊憂之하노이다 李晟曰 誠如渾言하니이다
上變色曰 柳渾은 書生이라 不知邊計어니와 大臣도 亦爲此言耶아 皆伏地頓首謝하고 因罷朝하다
是夕
에 韓遊瓌
注+[頭註]瓌는 音瑰니 邠寧節度使라 表言虜劫盟
이라하니 上
이 大驚
하야 明日
에 謂渾曰 卿
은 書生
이어늘 乃能
料敵을 如此其審耶
아
○ 初
에 吐蕃尙結贊
注+[頭註]尙結贊은 吐蕃之相也라 吐蕃之俗에 不言姓하고 官族은 皆曰尙이요 王族은 皆曰論이라 結贊은 名也라 이 惡李晟, 馬燧, 渾瑊
하야 曰 去三人
이면 則唐可圖也
라하더니
於是에 離間李晟하고 因馬燧以求和하고 欲執渾瑊以賣燧하야 使幷獲罪하고 因縱兵하야 直犯長安이러니 會失渾瑊而止하니라
泌가 與李晟, 馬燧, 柳渾으로 俱入見한대 上謂泌曰 自今으로 凡軍旅糧儲事는 卿主之하고 吏禮는 委延賞하고 刑法은 委渾하노라
陛下不以臣不才하사 使待罪宰相하시니 宰相之職은 不可分也라
非如給事則有吏過兵過
注+[頭註]唐制에 文은 吏部主之하고 武는 兵部主之하니 已注하야 乃上門下省이어든 給事中讀之하고 黃門侍郞省之하고 侍中審之를 謂이라 하고 舍人則有六押
注+[附註]押은 署也라 分司押事라 故로 舍人을 謂之六押이라하니라 舍人六人이 分署制勑하니 以六員으로 分押尙書六曹하야 佐宰相判案하야 同署乃奏하니라 하니 至於宰相
하야는 天下之事
를 咸共平章
注+[頭註]書之意也라 이니
泌請鑄農器하고 給麥種하야 分賜緣邊軍鎭하고 募戍卒하야 耕荒田而種之하면 關中이 土沃而久荒하니 所收必厚요
戍卒
이 因屯田
注+[頭註]屯은 守而田也라 致富
하면 則安於其土
하야 不復思歸
하리이다
舊制
에 戍卒
을 三年而代
하고 及其將滿
에 下令
하야 有願留者
면 卽以所開田爲永業
하고 家人願來
어든 本貫
注+[頭註]鄕籍也라 이 給
하야 續
而遣之
하니 不過數番
이면 則戍卒皆土
注+[通鑑要解]安土를 謂之土著也라 이라
乃悉以府兵之法으로 理之하시면 是는 變關中之疲弊하야 爲富强也니이다 上喜曰 如此면 天下無復事矣로다
○ 自興元
注+[頭註]德宗甲子年에 稱興元也라 以來
로 至是歲
하야 最爲豐稔
注+[頭註]穀熟曰稔이라 하야 米斗直(値)錢百五十
이요 粟八十
이라
○ 十二月庚辰
에 上
이 於新店
이라가 入民趙光奇家
하야 問 百姓樂乎
아 對曰 不樂
이니이다
前云
之外
에는 悉無他徭
러니 今非稅而誅求
注+[通鑑要解]誅는 責也라 者 殆過於稅
하고 後又云和糴
이나 而實强取之
요 曾不識一錢
이라
始云所糴粟麥을 納於道次러니 今則遣致京西行營하야 動數百里하니 車摧牛斃하야 破産不能支라
每有詔書優恤이나 徒空文耳니 恐聖主深居九重하사 皆未知之也시니이다
上
이 命復其家
注+[釋義]復은 方目反이니 除也라 除免光奇家徭賦라 하다
自古로 所深患者는 人君之澤이 壅而不下達하고 小民之情이 鬱而不上通이라
故로 君勤恤於上而民不懷하고 民愁怨於下而君不知하야 以至於離叛危亡은 凡以此也라
德宗이 幸以遊獵으로 得至民家하야 値光奇敢言하야 而知民疾苦하니 此乃千載之遇也라
固當按有司之廢
注+[通鑑要解]廢는 止也요 格은 音閣이니 阻而不下也라 詔書
와 殘虐下民
과 橫增賦斂
과 盜匿公財
와 及左右諂諛
하야 日稱民間豐樂者
하야 而誅之
니 然後
에 洗心易慮
하고 一新其政
하야 屛浮飾, 廢虛文
하고 謹號令, 敦誠信
하고 察眞僞, 辨忠邪
하고 矜困窮, 伸冤滯
면 則太平之業
을 可致矣
어늘
釋此不爲하고 乃復光奇之家하니 夫以四海之廣과 兆民之衆으로 又安得人人自言於天子而戶戶復其徭賦乎아
이희열李希烈이 채주蔡州에 있으면서 병세兵勢가 날로 위축되었는데 마침 병이 났다.
이희열李希烈의 대장大將 진선기陳仙奇가 의원 진산보陳山甫로 하여금 그를 독살하게 하고는 인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는데, 병마사兵馬使인 오소성吳少誠이 다시 진선기陳仙奇를 죽이고 스스로 유후留後가 되었다.
“진선기陳仙奇는 나라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하였으니 절월節鉞로써 상賞을 주는 것이 옳거니와, 오소성吳少誠은 적의 도당이 되어 진선기陳仙奇를 죽였는데도 절월節鉞을 주었으니, 상賞과 벌罰이 뒤섞여서 회채淮蔡의 반란을 초래한 것이다.
시작에 털끝만한 차이가 종말에 천리나 어긋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類이다.”
금군禁軍 중에 어떤 자가 스스로 두건을 벗고 길가에서 호소하기를 “우리들을 군대에 옭아매 놓고 양식을 지급하지 않으니, 우리들은 죄인이다.” 하니,
상上이 이를 몹시 걱정하였는데, 마침
한황韓滉이
注+[頭註]한황韓滉은 강회전운사江淮轉運使이다. 3만
곡斛의 쌀을 운반하여
섬주陝州에 이르렀다.
이필李泌가 이를 즉시 황제에게 아뢰자, 상上이 기뻐하여 급히 동궁東宮에 이르러 태자太子에게 이르기를 “쌀이 이미 섬주陝州에 도착하였으니, 우리 부자父子가 살게 되었다.” 하였다.
이때 금중禁中에서는 술을 빚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명하여 마을의 시장에서 술을 사오게 하여 즐거워하고, 또 중사中使를 보내서 쌀이 도착한 사실을 신책육군神策六軍에게 유시하게 하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매년 기근이 들어서 군사와 백성들이 대부분 모두 수척하고 얼굴이 흑빛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보리가 비로소 익어서 수확하여 시장에 술 취한 사람이 있으니, 당시에 이것을 아름다운 상서라 여겼다.
사람들이 갑자기 배불리 먹게 되자 이로 인하여 죽는 자가 다시 5분의 1이 되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의 피부색이 비로소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처음에
상上이
상시常侍 이필李泌와
부병府兵을 회복시키는 문제를 의논하니,
注+[頭註]부府는 곧 절충과의부折衝果毅府이다. 이필李泌가 인하여
상上을 위해서
서위西魏 이래로
부병府兵이 흥기하고 폐지된 이유를 차례로 서술하고,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부병府兵은 평소에는 모두 전묘田畝에서 편안히 거주하고 매 부府마다 절충부折衝府가 있어 이들을 통솔했습니다.
절충부折衝府는 농한기에 이들에게 전투와 진치는 방법을 가르치고 익히게 하여 국가에서 부병府兵을 징발하는 일이 있으면 군대를 조발調發하는 부계符契(신표)를 그 주州와 절충부折衝府에 내려서 규정과 대조하여 맞으면 부병府兵을 징발하였습니다.
부병府兵들이 기약한 곳에 도착하면 장수가 이들을 살펴보고 검열하여, 전투와 진치는 방법을 가르치고 익힌 것이 정밀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그
절충부折衝府의
장관長官을 처벌하고 심한 경우에는 죄가
자사刺史에게까지 미치며, 징발했던 군사가 돌아오면 공로에 따라
상賞을 내린 뒤에 중도에서 편리하고 빠른 길로 해산하게 하니,
注+[頭註]편도便道는 편리하고 빠른 길이다. 군대를 파하여 각각 편하고 빠른 길을 따라서 귀농歸農하게 한 것이니, 굳이 도로 경사京師에 이른 뒤에 해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징발당했던
부병府兵들이 빠르면 한 철을 넘기지 않고 늦어도 1년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고종高宗이
유인궤劉仁軌를
조하진수사洮河鎭守使로
注+[頭註]조洮, 하河는 두 주州의 이름이다. 삼아서
토번吐蕃을 도모하게 하니, 이에 비로소 오랫동안 수자리 사는 부역이 있게 되었습니다.
측천무후則天武后 이래로 천하가 태평한 지가 오래되어 부병府兵이 점점 무너져서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니, 백성들이 부병府兵을 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 심지어 손과 발을 물로 찌고 불로 지져서 부역을 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또 우선객牛仙客이 재물을 모아 재상의 지위를 얻으니, 변방의 장수들이 이것을 본받았습니다.
산동山東 지방의 수졸戍卒들이 몸에 증백繒帛을 지니고 오면 변방의 장수들이 그들을 유인해서 그것을 부고府庫에 맡기게 하고는 낮에는 괴롭게 노역을 시키고 밤에는 지하의 움속에 가두어 두어, 그들이 죽어서 그들의 재물을 몰수하여 빼앗는 것을 이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천보天寶 연간 이후로 산동山東 지방의 수졸戍卒들이 살아서 집으로 돌아간 자가 열에 두세 명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잔학함이 이와 같았으나 일찍이 밖에서 배반하고 안에서 업신여겨 장수를 죽이고 제멋대로 행동한 자가 있지 않았던 것은 진실로 자신의 전원田園을 돌아보고 연연해하며 종족들에게 누가 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원開元 말기로부터
장열張說이 처음
장정병長征兵(오랫동안
정수征戍하는 군대)을
注+[頭註]정征은 종從으로 되어 있다. 모집해서 이들을 일러
확기彍騎라 이름하고 그 뒤에
확기彍騎를 늘려서
육군六軍을 만들었는데,
注+[頭註]좌군과 우군을 나누어 12군軍이다. 이임보李林甫가 재상이 되자 아뢰어서 모든 군대를 다 백성을 모집하여 만드니, 군사들이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살지 않고 또
종족宗族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기 몸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지 않아서 자기 몸을 잊고 이익을 따라 화와 난이 마침내 생겨서 지금에 이르러 병들게 하였으니,
注+[頭註]경梗은 병드는 것이다. 그때 만일
부병府兵의 법이 항상 보존되고 폐지되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처럼 아랫사람이 능멸하고 윗사람이 침체하는 근심이 있었겠습니까?
폐하陛下께서 부병府兵을 회복시킬 것을 생각하시니, 이는 곧 사직社稷의 복福이니 태평할 날이 있게 될 것입니다.”
상上이 말하기를 “하중河中이 평정되기를 기다려 마땅히 경과 의논하겠다.” 하였다.
처음에 토번吐蕃이 마수馬燧에게 화친을 요구하자, 마수馬燧가 그 말을 믿고서 토번吐蕃을 위해 조정에 화친할 것을 청하였다.
이성李晟이 말하기를 “
융적戎狄은 신의가 없으니, 그들을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는데,
마수馬燧와
장연상張延賞은
注+[頭註]장연상張延賞은 좌복야이다. 모두
이성李晟과 틈이 있어, 이들이 그의 계책을 반대하고자 하여 화친함이 편리하다고 다투어 말하니,
상上의 계책이 마침내 화친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임금이 마땅히 의심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의심하면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게 된다.
이성李晟의 공功에 힘입어 종묘사직宗廟社稷이 보존되었는데도 덕종德宗이 그를 시기하여 근심하고 두려워해서 조석朝夕도 보존하지 못하게 하였고, 아첨하고 간사한 자들의 잘못된 계책과 융적戎狄의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이르러서는 성심誠心을 미루어 믿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그 심술心術이 전도되고 의義를 봄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장연상張延賞이 사감私憾으로 국가를 패망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혔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는데도 덕종德宗이 일찍이 따져 묻지 않아서 그로 하여금 목을 보존하고 창문 아래에서 편안히 죽게 하였으니, 요행이다.”
5월에
혼감渾瑊이
함양咸陽으로부터 들어와 조회하자, 그를
청수회맹사淸水會盟使로 임명하여
注+[頭註]청수淸水는 지명이다. 2만여 명을 거느리고 회맹하는 장소로 달려가게 하였다.
혼감渾瑊이 토번吐蕃이 신미일辛未日(19일)에 우리와 맹약하기로 결정했다고 보고하자,
장연상張延賞이 백관百官들을 모아놓고 혼감渾瑊이 올린 표문表文을 보이며 말하기를 “이태위李太尉(李晟)가 토번吐蕃과 우리의 화호和好하는 맹약은 반드시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이것은 혼시중渾侍中의 표문이니, 회맹할 날짜가 정해졌다.”고 하였다.
이성李晟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서쪽 변경에서 생장하여 토번吐藩의 사정을 자세히 아니, 내가 토번吐藩과의 맹약을 반대하여 상주上奏한 까닭은 다만 우리 조정이 토번吐藩에게 업신여김을 당함을 부끄러워해서일 뿐이었다.” 하였다.
신미일辛未日(19일)에 장차 맹약하려 할 적에 토번吐蕃이 정예기병 수만 명을 맹약하는 단壇의 서쪽에 매복시켜 놓았으나 혼감渾瑊 등이 이를 알지 못하고 장막으로 들어가 군복을 벗고 예복으로 갈아입었는데, 북소리가 세 번 울리자 토번吐藩의 기병이 크게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니, 혼감渾瑊이 장막 뒤로 탈출하여 우연히 다른 말을 얻어타고 탈출하였으며, 당唐나라 병사들이 모두 동쪽으로 달아났다.
토번吐藩이 병사를 풀어 추격하여 당唐나라 병사를 혹은 죽이고 혹은 사로잡았다.
이날 상上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날 토번吐藩과 화친하여 전란을 그치게 함은 사직社稷의 복이다.” 하니, 마수馬燧가 “맞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유혼柳渾이
注+[頭註]유혼柳渾은 동평장사同平章事이다. 말하기를 “
토번吐藩은
시랑豺狼과 같습니다.
맹약으로 우호를 맺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 오늘날의 일이 신은 적이 걱정됩니다.” 하자, 이성李晟이 말하기를 “진실로 유혼柳渾의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얼굴색을 변하며 말하기를 “유혼柳渾은 서생書生이어서 변방의 계책을 모르거니와 대신도 이러한 말을 하는가?” 하니, 모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고 인하여 조회를 파하였다.
이날 밤에
한유괴韓遊瓌가
注+[頭註]괴瓌는 음이 괴이니, 빈녕절도사邠寧節度使이다. 표문을 올려
토번吐藩이 회맹하려는
당唐나라 관원을 위협했다고 말하니,
상上이 크게 놀라고 다음날
유혼柳渾에게 말하기를 “
경卿은
서생書生인데 마침내 적을 헤아리기를 이와 같이 자세히 하였단 말인가.” 하였다.
처음에
토번吐蕃의 재상인
상결찬尙結贊이
注+[頭註]상결찬尙結贊은 토번吐蕃의 재상이다. 토번吐蕃의 풍속에 성姓을 말하지 않고 관족官族은 모두 상尙이라 하고 왕족王族은 모두 논論이라 한다. 결찬結贊은 이름이다. 이성李晟,
마수馬燧,
혼감渾瑊을 미워하여 말하기를 “이 세 사람을 제거하면
당唐나라를 도모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조정과 이성李晟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마수馬燧를 이용하여 당나라에 화친을 요구하였으며, 혼감渾瑊을 사로잡아 마수馬燧를 속여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 죄를 얻게 하고 인하여 군대를 풀어 곧바로 장안長安을 침범하고자 하였는데, 마침 혼감渾瑊을 놓치고는 이 계획을 중지하였다.
이필李泌를 중서시랑中書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삼았다.
이필李泌가 이성李晟, 마수馬燧, 유혼柳渾과 함께 모두 들어와 뵙자, 상上이 이필李泌에게 말하기를 “지금부터 모든 군대와 양식을 저축하는데 관계된 일은 경卿이 주관하고, 이부吏部와 예부禮部의 일은 장연상張延賞에게 맡기고 형법刑法은 유혼柳渾에게 맡긴다.” 하였다.
폐하陛下께서 신을 재주 없다고 여기지 않으시고 신으로 하여금 재상의 직책에 머물게 하시니, 재상의 직책은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급사중給事中은
이과吏過와
병과兵過가 있고
注+[頭註]당나라 제도에 문文은 이부吏部가 주관하고 무武는 병부兵部가 주관하니, 이미 주의注擬하여 문하성門下省에 올리면 급사중給事中이 읽고 황문시랑黃門侍郞이 살펴보고 시중侍中이 자세히 조사하는 것을 과관過官이라 이른다. 중서사인中書舍人은
육압六押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으니,
注+[附註]압押은 서명하는 것이다. 급사중給事中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이 사司를 나누어 일에 서명하였다. 그러므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육압六押이라 하였다. 중서사인中書舍人 6명이 제서制書와 칙서勑書에 나누어 서명하니, 중서사인中書舍人 6원으로 상서尙書의 6조曹를 나누어 맡아서 재상을 도와 공문을 처리해서 함께 서명하여야 비로소 황제에게 아뢰었다. 재상宰相의 직책에 이르러서는 천하의 일을 모두 함께 고르게 다스려야 합니다.
注+[頭註]평장平章은 《서경書經》의 ‘평장백성平章百姓(백성을 고루 밝힌다)’의 뜻이다.
만약 재상이 각자 주장하는 바가 있으면 이는 바로 한 가지 일을 주관하는 유사有司이지 재상宰相이 아닙니다.” 하였다.
상上이 웃으며 말하기를 “짐朕이 마침 실언을 하였다.
상上이 다시 이필李泌에게 부병府兵을 복구할 계책을 묻자,
이필李泌가 청하기를 “농기구를 주조하고 보리 종자를 지급해서 변경에 있는 군진軍鎭에 나누어 주고 수졸戍卒들을 모집해서 황폐한 밭을 경작하여 곡식을 심게 하면 관중關中은 땅이 비옥한데 오래 황폐하였으니 수확하는 것이 반드시 많을 것이요,
수졸戍卒들이
둔전屯田으로 인하여
注+[頭註]둔屯은 변경을 지키면서 농사짓는 것이다. 부유하게 되면 그 땅을 편안히 여겨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옛 제도에
수졸戍卒들을 3년마다 교대하고, 장차 교대할 시기가 되면 명령을 내려서 이곳에 그대로 머물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즉시 개간한 밭을
영업전永業田으로 삼게 하고, 집안 식구들이 오기를 원하면 본적지에서
注+[頭註]본관本貫은 향적鄕籍이다. 그들에게
장첩長牒을 발급하여 먹을 것을 대주어 변방으로 보내는데, 몇 번 지나지 않아
수졸戍卒들이 모두 토착하게 되었습니다.
注+[通鑑要解]처한 곳을 편안히 여기는 것을 토착土著이라고 한다.
이에 부병府兵의 법法으로 이들을 다스린다면 이는 관중關中의 피폐함을 바꾸어 부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천하에 다시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흥원興元 연간
注+[頭註]덕종德宗 갑자년(784)에 흥원興元이라고 칭하였다. 이래로 이 해에 이르러 가장 풍년이 들어서
注+[頭註]곡식이 잘 성숙한 것을 임稔이라 한다. 쌀 한 말의 값이 150전이었고,
속粟(粗穀)은 80전이었다.
12월 경신일庚辰日(1일)에 상上이 신점新店에서 사냥하다가 백성인 조광기趙光奇의 집에 들어가서 묻기를 “백성들의 생활이 즐거운가?” 하니, 대답하기를 “즐겁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금년에 자못 곡식이 잘 여물었는데, 어찌하여 즐겁지 않은가?”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전에는 ‘
양세兩稅 외에는 다른 부역이 모두 없다.’고 하였는데, 지금
양세兩稅에 속하지 않으면서 관부에서 가렴주구하는 것이
注+[通鑑要解]주誅는 독책督責하는 것이다. 양세보다 더 많고, 이후에는 또 ‘
화적和糴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관부에서 강제로 탈취해 가고 우리들에게 1전도 준 적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관부에서 사들이는 곡식과 보리를 연도沿道에서 바치게 한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경서행영京西行營으로 보내게 하여 번번이 수백 리 거리가 되니, 이것을 운반하느라 수레가 부서지고 소가 죽어서 파산破産하여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근심과 괴로움이 이와 같은데,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매번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백성들을 우대하고 구휼한다고 하나 한갓 빈 문서일 뿐이니, 성상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거처하시어 이러한 사정을 다 알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상上이
조광기趙光奇의 집을
복호復戶하도록 명하였다.
注+[釋義]복復은 방목반方目反(복)이니 면제하는 것이다. 조광기趙光奇의 집에 대한 요역과 부세를 면제해 준 것이다.
예로부터 깊이 염려하는 것은 임금의 은택이 막혀서 아래로 백성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실정이 답답하여 위로 임금에게 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주가 위에서 부지런히 구휼하는데도 백성들이 은혜를 받지 못하고, 백성들이 아래에서 신음하고 원망하는데도 군주가 이것을 알지 못하여, 백성들이 이반하고 나라가 위망危亡한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이 때문이다.
덕종德宗이 다행히 유람하고 사냥함으로 인하여 민가民家에 이르러 과감히 말하는 조광기趙光奇를 만나 백성들의 고통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바로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기회였다.
진실로
유사有司들 중에
조서詔書를 폐지하고
注+[通鑑要解]폐廢는 폐지하는 것이요, 격格은 음이 각이니 막혀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잔학하게 굴며, 멋대로 부세를 늘리고 국가의 재물을 도둑질하거나 숨기며, 좌우에서 아첨하여 날마다 민간에 풍년이 들어 즐겁다고 말한 자들을 조사하여 진정 죽였어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바꾸며 정사를
일신一新해서 부화한 형식을 없애고 빈 문식을 폐지하며,
호령號令을 삼가고
성신誠信을 돈독히 하며, 사정의
진위眞僞를 살피고 관리의
충사忠邪를 구별하며, 곤궁한 백성을 구휼하고 원통하고 답답한 자들을 씻어주었다면 태평한 기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일을 버리고 하지 않고 마침내 조광기趙光奇의 집을 복호復戶하도록 하였으니, 사해는 넓고 억조 백성은 많은데, 또 어떻게 사람마다 천자에게 말해서 가가호호마다 그 요역과 부세를 면제받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