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志益驕
하야 求兼領三川
注+[釋義]謂東川, 西川, 山南西道也라 이어늘
上이 不許러니 闢이 遂發兵하야 圍東川節度使李康於梓州하다
上이 欲討闢而重於用兵하고 公卿議者 亦以爲蜀險固難取라하야늘
杜黃裳
注+[頭註]門下侍郞이라[通鑑要解] 字는 遵素也라 이 獨曰 闢
은 狂書生注+[原註]戇은 直降反이니 愚也라 이니 取之如芥爾
니이다
臣知神策軍使高崇文이 勇略可用하니 願陛下專以軍事委之하고 勿置監軍하시면 闢必可擒이니이다 上從하다
翰林學士李吉甫亦勸上討蜀
하니 上
이 由是器之
注+[頭註]器는 所以適用이니 器之者는 知其可用이라 러라
戊子에 命高崇文하야 將步騎五千하야 爲前軍하고 與兵馬使李元奕과 山南西道節度使嚴礪로 同討闢하다
上
이 與杜黃裳
으로 論及藩鎭
하니 黃裳曰
으로 務爲姑息하야 不生除節帥
注+[頭註]除는 授也라 하고
有物故者
注+[頭註]는 謂死也니 言其同於鬼物而故也라 一說에 不欲斥言하고 但云其所服用之物이 皆已故耳라 어든 先遣中使
하야 察軍情所與
하야 則授之
하시니 中使或私受大將賂
하야 歸而譽之
하면 卽降旄鉞
注+[釋義]旄者는 毛幢也요 鉞은 音曰이니 大斧也라 行節制者持之하니 書에 武王이 左仗黃鉞하고 右秉白旄以麾라하니라 하야
陛下必欲振擧紀綱인댄 宜稍以法度로 裁制藩鎭이니 然後에 天下를 可得而理也리이다 上이 深以爲然하다
於是에 始用兵討蜀하야 以至威行兩河는 皆黃裳啓之也러라
○ 上이 與宰相論할새 自古帝王이 或勤勞庶政하고 或端拱無爲하야 互有得失하니 何爲而可오 杜黃裳이 對曰
王者는 上承天地宗廟하고 下撫百姓四夷하니 夙夜憂勤하야 固不可自暇自逸이니이다
然이나 上下有分하고 紀綱有序하니 苟愼選天下賢才而委任之하야 有功則賞하고 有罪則刑하야 選用以公하고 賞刑以信이면 則誰不盡力이며 何求不獲哉리잇가
明主는 勞於求賢而逸於任人하나니 此는 虞舜所以能無爲而治者也라
至於簿書獄市煩細之事하야는 各有司存하니 非人主所宜親也니이다
昔
에 秦始皇
은 以
衡石程書注+[釋義]秦始皇本紀에 以衡石量書하야 日夜有程이라한대 註云 衡은 稱衡也요 石은 百二十斤이라 言表箋奏請을 稱取一石호되 日夜有程하야 期不滿이면 不得休息이라하니라 하고 魏明帝
는 自按行尙書事
注+[釋義]魏明帝 一日에 卒至尙書門한대 陳矯跪請曰 陛下欲何之잇고 帝曰 欲按行文書耳로라 矯曰 此는 自臣職分이니 非陛下所宜臨也니이다하니 帝慙回車하니라 하고 隋文帝
는 衛士傳餐注+[釋義]隋文帝每臨朝에 或至日仄(昃)하야 未暇이어든 令侍衛者傳餐하니라 호되
皆無補於當時하고 取譏於後來하니 其耳目形神이 非不勤且勞也로되 所務非其道也니이다
夫人主는 患不推誠이요 人臣은 患不竭忠이니 苟上疑其下하고 下欺其上이면 將以求理나 不亦難乎잇가
上이 深然其言이러라 〈又本傳云 黃裳이 知帝銳於治로되 恐不得其要하야
因推言王者之道 在修己任賢하고 操執綱領하야 得其大者而已하니라〉
○ 三月
에 高崇文
이 引兵
하고 自閬州
로 趣(趨)梓州
하니 劉闢將
引兵遁去
어늘 崇文
이 入屯梓州
하다
自劉晏之後
로 居財賦之職
이 莫能繼之
러니 巽
이 掌使一年
에 征課所入
이 類晏之多
요 明年
에 過之
하고 又一年
에 이러라
○ 九月
에 高崇文
이 又敗劉闢之衆於鹿頭關
注+[釋義]漢地志에 廣漢郡德陽縣에 有鹿頭山하니 其關이 以山得名也라하고 長驅直指成都
하니 所向崩潰하야 軍不留行이라
辛亥에 克成都하니 劉闢이 帥數十騎하고 西奔吐蕃이어늘
崇文
이 入成都
하야 屯於通衢
하고 休息士卒
하니 市肆不驚하고 珍寶山積호되 秋毫不犯
하고 檻劉闢
注+[釋義]檻은 通作轞하니 圈也니 謂以檻車送劉闢也라 하야 送京師
하다
幷獲其黨
하야 誅之
하고 餘無所問
하고 從容指撝注+[釋義]指撝는 謂手指披斥事務也라[頭註] 撝는 與揮同이라 하니 一境皆平이러라
○ 杜黃裳이 建議征蜀하고 及指授高崇文方略에 皆懸合事宜라
及蜀平에 宰相入賀한대 上目黃裳曰 卿之功也라하니라
유벽劉闢이 이미
서천절도사西川節度使에 임명되자, 마음이 더욱 교만해져서
삼천三川을 겸하여 관할할 것을 요구하였다.
注+[釋義]삼천三川은 검남劍南의 동천東川과 서천西川, 산남山南의 서도西道 등지를 이른다.
상上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유벽劉闢은 마침내 군대를 조발調發하여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 이강李康을 재주梓州에서 포위하였다.
상上은 유벽劉闢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군대를 사용하는 것을 신중히 하였고, 공경公卿 중에 의논하는 자들도 “촉蜀(四川) 지방은 험고險固하여 취하기가 어렵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두황상杜黃裳이
注+[頭註]두황상杜黃裳은 문하시랑門下侍郞이다. [通鑑要解] 그의 자字는 준소遵素이다. 홀로 말하기를 “
유벽劉闢은
광망狂妄하고 어리석은
서생書生이니,
注+[原註]당戇은 직강반直降反(당)이니, 어리석은 것이다. 그를 패배시키는 것은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쉽습니다.
신은 신책군사神策軍使 고숭문高崇文이 용맹하고 지략이 있어 쓸 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군사軍事를 오로지 그에게 맡기고 감군監軍을 두지 않으신다면 유벽劉闢을 반드시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그의 말을 따랐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길보李吉甫도
상上에게
촉蜀 지방을 토벌할 것을 권하니,
상上이 이로 인하여 그를 중하게 여겼다.
注+[頭註]기器는 용도에 적합한 것이니, 그릇으로 여긴다는 것은 그가 쓸 만한 인물임을 아는 것이다.
무자일戊子日(1월 23일)에 고숭문高崇文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전군前軍(선봉부대)이 되어 병마사兵馬使 이원혁李元奕,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 엄려嚴礪와 함께 유벽劉闢을 토벌하게 하였다.
- 《신당서新唐書 두황상전杜黃裳傳》 등에 나옴 -
상上이
두황상杜黃裳과 의논하다가
번진藩鎭에 대한 문제에 이르니,
두황상杜黃裳이 아뢰기를 “
덕종德宗이 우환을 겪은 뒤로 되도록
고식姑息을 힘써 절도사가 살아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을 절도사로 제수하지 않고,
注+[頭註]제除는 제수하는 것이다.
절도사가 죽으면
注+[頭註]물고物故는 죽음을 이르니, 귀물鬼物과 똑같게 되어 죽음을 말한다. 일설一說에는 “죽었다고 지척하여 말하지 않고, 다만 사용하던 물건이 모두 옛 것이 되었다고 이른 것이다.” 하였다. 중사中使(宦官)를 보내어
군중軍中의
정세情勢를 살펴서
인심人心이 귀결되는 사람을
절도사節度使로 제수하였으며,
중사中使가 혹 사사로이
대장大將의 뇌물을 받고 돌아와서 칭찬하면 곧바로 그에게
절도사節度使의 깃발과
부월斧鉞을 내렸습니다.
注+[釋義]모旄는 털로 만든 당幢이요, 월鉞은 음이 왈(월)이니 큰 도끼이다. 모월旄鉞은 절제節制을 행하는 자(節度使)가 이것을 가지고 가니, 《서경書經》 〈목서牧誓〉에 “무왕武王이 왼쪽에는 황월黃鉞을 잡고 오른쪽에는 백모白旄를 잡고 지휘했다.” 하였다.
그리하여 절도사節度使의 임명이 일찍이 조정의 뜻에서 나온 적이 없었습니다.
폐하陛下께서 반드시 기강紀綱을 떨쳐 일으키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점점 법도法度로써 번진藩鎭을 재제하신 뒤에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깊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이에 군대를 출동하여 촉蜀 지방을 토벌해서 조정의 위엄이 양하兩河(河南과 하북河北) 지방에 행해진 것은 모두 두황상杜黃裳이 계도한 것이었다.
- 《신당서新唐書 두황상전杜黃裳傳》에 나옴 -
유벽劉闢이 재주梓州를 함락시키고 동천절도사東川節度使 이원강李元康을 사로잡았다.
2월에 엄려嚴礪가 검주劍州를 함락시키고 검남자사劍南刺史 문덕소文德昭의 목을 베었다.
상上이 재상들과 의논할 적에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혹자는 국가의 정무政務를 처리하느라 수고롭기도 하고, 혹자는 단정히 팔짱을 끼고 하는 일이 없기도 하여 서로 잘함과 잘못함이 있었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고 물으니, 이에 두황상杜黃裳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왕자王者는 위로는 천지天地와 종묘宗廟를 받들고 아래로는 천하의 백성들과 사방 오랑캐를 어루만지니,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근심하고 수고하여 진실로 스스로 한가롭게 지내고 스스로 편안하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하간(君臣間)에는 분별이 있고 기강紀綱에는 일정한 차례가 있으니, 진실로 천하의 어진 자와 재주 있는 자를 신중히 선발하여 그에게 책임을 맡겨서 공이 있으면 상을 주고 죄가 있으면 벌을 주어 선발하고 등용하기를 공정하게 하고 상과 벌을 시행하기를 신의있게 한다면 누군들 힘을 다하지 않겠으며 무엇을 바란들 얻지 못하겠습니까?
현명한 군주는 어진 이를 구하느라 수고롭지만 적임자에게 맡긴 뒤에는 편안하니, 이것이 우虞나라 순舜임금이 무위無爲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문서와 옥송獄訟과 시장 등의 번거롭고 자질구레한 일에 이르러서는 각각 유사有司(담당관)가 있으니, 군주가 직접 처리할 바가 아닙니다.
옛날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는
형석衡石으로 문서를 달아서
일과日課로 삼았고,
注+[釋義]《사기史記》 〈진시황기秦始皇紀〉에 “형석衡石(저울대와 저울추)으로 문서의 무게를 달아서 문서를 처리하되 밤이고 낮이고 정해진 분량이 있었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형衡은 저울이고, 석石은 120근斤이다. 표문表文, 전문箋文, 주청奏請 등의 문서를 저울로 달아 1석石을 취하되 밤이고 낮이고 정해진 분량이 있어서 결재한 문서가 정해놓은 분량에 차지 않으면 쉬지 않았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위魏나라
명제明帝는
상서성尙書省의 일을 몸소 조사하여 시행하려 하였고,
注+[釋義]위魏나라 명제明帝가 어느날 갑자기 상서성尙書省의 문에 이르자, 진교陳矯가 무릎을 꿇고 묻기를 “폐하께서는 어디로 가고자 하십니까?” 하니, 명제明帝가 말하기를 “내 문서의 차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하였다. 진교陳矯가 아뢰기를 “이는 본래 신의 직분이니, 폐하께서 임어하실 바가 아닙니다.” 하니, 명제明帝가 부끄러워하여 수레를 돌렸다.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밥먹을 시간이 없어
위사衛士들이 음식을 날라 왔습니다.
注+[釋義]수隋나라 문제文帝는 매번 조정에 임어할 때에 혹 날이 저물어서 성찬을 먹을 겨를이 없으면 시위侍衛하는 자로 하여금 음식을 날라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당대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고 후대에 비난을 받았으니, 이목耳目과 형체形體와 정신精神이 부지런하고 또 수고롭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힘쓴 바가 올바른 도道가 아니었습니다.
군주는 신하에게 성심誠心을 미루지 못할까 염려해야 하고,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해야 하니, 만약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의심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속인다면 장차 나라가 잘 다스려지기를 바라나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상上이 그의 말을 매우 옳게 여겼다. - 또 《신당서新唐書 두황상전杜黃裳傳》에 이르기를 “두황상杜黃裳은 황제가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요점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인하여 ‘왕자王者의 도道는 몸을 닦고 어진 이에게 맡기며 강령綱領을 잡아서 대체大體를 얻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라고 미루어 말했다.” 하였다. -
3월에 고숭문高崇文이 군대를 이끌고 낭주閬州로부터 재주梓州로 달려가니, 유벽劉闢의 장수 형자邢泚가 군대를 이끌고 도망가므로 고숭문高崇文이 재주梓州에 들어가 주둔하였다.
이손李巽을 판탁지判度支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로 임명하였다.
유안劉晏 이후로 재부財賦의 직책을 맡은 자가 한 사람도 유안劉晏을 계승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손李巽은 직위에 있은 지 1년 만에 징수한 세금이 유안劉晏처럼 많았고, 그 다음해에는 유안劉晏이 거두어 들인 것을 초과하였고, 또 그 다음해에는 유안劉晏보다 180만 민緡을 더 거두었다.
9월에
고숭문高崇文이 또다시
유벽劉闢의 군대를
녹두관鹿頭關에서
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광한군廣漢郡 덕양현德陽縣에 녹두산鹿頭山이 있으니, 그 관문이 이 산 때문에 녹두관鹿頭關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였다. 패퇴시키고 승승장구하여 곧바로
성도成都로 향하니, 이르는 곳마다
유벽劉闢의 군대가 궤멸되어
고숭문高崇文의 군대가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신해일辛亥日(21일)에 성도成都를 점령하니, 유벽劉闢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하여 토번吐蕃으로 도망하였다.
고숭문高崇文이 고하우高霞寓 등으로 하여금 그를 추격하여 사로잡았다.
고숭문高崇文은
성도成都에 들어간 다음 사방으로 통하는 길거리에 군대를 주둔하고
사졸士卒들을 휴식하게 하니 시장의 상인들이 놀라지 않았으며, 진기한 보물이 산처럼 쌓여 있었으나 추호도 범하지 않고
유벽劉闢을
함거檻車에 실어
注+[釋義]함檻은 함轞과 통하니, 짐승을 가두는 우리이니, 함거檻車로 유벽劉闢을 압송함을 이른다. 경사京師로 보냈다.
유벽劉闢의 무리들을 함께 사로잡아 죽인 다음 나머지는 일체 죄를 묻지 않고 조용히 지휘하니,
注+[釋義]지휘指撝는 손가락으로 일을 지시함을 이른다. [頭註]휘撝는 휘揮와 같다. 온 경내가 모두 편안하였다.
- 《신당서新唐書 고숭문전高崇文傳》에 나옴 -
두황상杜黃裳이 촉蜀 지방을 정벌할 것을 건의하고 고숭문高崇文에게 방략方略을 지시해 줄 적에 모두 멀리 내다보고 예측하여 사의事宜에 부합하였다.
촉蜀 지방이 평정된 뒤에 재상들이 들어와 하례하니, 상上이 두황상杜黃裳을 지목하며 말하기를 “모두 경卿의 공로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