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太子詹事李
注+[釋義]愬는 李晟之子라 로 爲唐, 鄧, 隨節度使
하다
淮西人이 自以嘗敗高袁二帥라하야 輕愬名位素微하야 遂不爲備라
愬謀襲蔡州
하고 遣馬少良
하야 將十餘騎巡
注+[頭註]邏는 游兵이라 할새 遇吳元濟捉生虞候丁士良
하야 與戰擒之
하다
愬命釋其縛
하고 給其衣服器械
하고 署爲捉生將
注+[頭註]署는 除也라 한대
士良
이 言於愬曰 吳秀琳
이 擁三千之衆
하고 據文城柵
注+[釋義]柵은 側革反이니 寨柵也니 立木爲之라 하야 爲賊左臂
하니 官軍不敢近者
는 有陳光洽爲之謀主也
라
光洽
이 勇而輕
注+[頭註]輕은 去聲이니 不持重也라 輕則寡謀라 하야 好自出戰하니 請爲公先擒光洽
이면
○ 三月에 吳秀琳이 以文城柵으로 降于李愬하니 愬慰勞之하고 降其衆三千人하다
秀琳將李憲이 有材勇이어늘 愬更其名曰忠義라하야 而用之하다
愬與秀琳으로 謀取蔡할새 秀琳曰 公欲取蔡인댄 非得李祐면 不可하니 如秀琳은 無能爲也니이다
會
에 祐帥士卒
하고 刈麥於張柴村
注+[通鑑要解]在文城柵六十里라 이어늘 愬使廂虞候
注+[頭註]掌左右廂之兵이라 史用誠
으로 擒之
하다
○ 諸軍
이 討淮西
하야 四年不克
하니 饋運疲弊하야 民至有以
耕者
라
上亦病之하야 以問宰相한대 李逢吉等이 競言師老財竭하야 意欲罷兵호되 裴度獨無言이라
上이 問之한대 對曰 臣請自往督戰하야 誓不與此賊俱生이니이다
臣觀元濟호니 勢實窘蹙이나 但諸將心不壹하야 不倂力迫之라 故로 未降爾니
若臣自詣行營이면 諸將이 恐臣奪其功하야 必爭進破賊矣리이다
六月에 以度爲門下侍郞同平章事兼彰義節度使하고 仍充淮西宣慰招討處置使하다
度將行할새 言於上曰 臣若賊滅이면 則朝天有期어니와 賊在면 則歸闕無日이니이다 上이 爲之流涕러라
李愬將攻吳房
注+[釋義]地志에 汝南에 有吳房縣이라 註에 吳王闔廬弟夫槩奔楚어늘 楚封於此하야 爲堂谿氏라 本房子國이러니 以其封吳라 故로 名吳房이라하니라 할새 諸將曰 今日往亡
注+[附註]立春後七日, 驚蟄後十四日, 淸明後二十一日, 立夏後八日, 芒種後十六日, 小暑後二十四日, 立秋後九日, 白露後十八日, 寒露後二十七日, 立冬後(十)[七]日, 大雪後二十日, 小寒後(二)[三]十也라 又正寅, 二巳, 三申, 四亥, 五卯, 六午, 七酉, 八子, 九辰, 十未, 十一戌, 十二丑也라이니이다
彼以往亡
이라하야 不吾虞
注+[釋義]猶言不料我也라 左傳註에 虞는 也라하니라 하리니 正可擊也
라하고 遂往
하야 克其外城
하고 斬首千餘級
하다
○ 李祐言於李愬曰 蔡之精兵
이 皆在洄曲
하고 及四境拒守
하야 守州城者
는 皆
老之卒
注+[釋義]羸는 倫爲反이니 瘠也라 이니
可以乘虛하야 直抵其城이면 比賊將聞之에 元濟已成擒矣리이다
愬然之하야 夜半雪甚호되 行七十里하야 至州城하니 近城에 有鵝鴨池어늘
四鼓
注+[頭註]四更也라 에 愬至城下
하니 無一人知者라
李祐, 李忠義
其城
注+[釋義]钁은 厥縛反이니 大鉏也라[通鑑要解] 钁은 大鉏也라 方言에 關東名鹵斫이라 爲坎하야 以先登[通鑑要解]率先以登城이라 하고 壯士從之
하야 雞鳴
에 入居元濟外宅
하다
或이 告元濟曰 官軍至矣라한대 元濟尙寢이라가 笑曰 俘囚爲盜爾니 曉當盡殺之하리라
又有告者曰 城陷矣
라한대 元濟起聽於廷
하니 聞愬軍號令
에 曰 常侍傳語
注+[頭註]常侍는 謂李愬也라 라한대 應者近萬人
이라
元濟始懼
하야 乃
左右
하고 登牙城
注+[釋義]古者軍行에 有牙하니 尊者所在라 後人이 因以所治爲牙(衙)라 曰牙城者는 謂牙之城이니 卽內城也라[通鑑要解] 將軍之旗曰牙라 立於帳前를 謂之牙帳이니 取其爲國也라 拒戰
하다
愬曰 元濟所望者는 重質之救爾라하고 乃訪重質家하야 厚撫之하고 遣其子傳道하야 持書諭重質하니 重質이 遂單騎詣愬降하다
元濟於城上請罪
어늘 梯而下之
하야 檻送京師
注+[頭註]檻은 檻車라 하고 不戮一人
하고 屯於鞠場
注+[釋義]鞠은 渠六反이니 蹴鞠之處也라 하야 以待裴度
하다
度入城
이어늘 李愬具
出迎
注+[釋義]王氏曰 左傳에 右屬櫜鞬이라한대 註에 橐은 韜也라 馬上曰鞬이라 鞬은 建也니 言弓矢竝建立其中也라 樂記曰 武王克殷하시고 倒載干戈하야 包之以虎皮하고 將帥之士를 使爲諸侯하고 名之曰建橐라한대 註에 包干戈以虎皮는 (帽)[明]能以武服兵也라 建讀爲鞬하니 字之誤也라 兵甲之衣曰橐니 鞬橐는 言閉藏兵甲也라하니라 橐音羔요 鞬은 巨展, 巨偃二反이라 李愬具此出迎者는 軍禮也니 以示尊敬之義니라[通鑑要解] 橐은 弓衣요 鞬은 馬上盛弓矢器라 하야 拜於路左
라
度將避之한대 愬曰 蔡人頑悖하야 不識上下之分이 數十年矣라
願公은 因而示之하야 使知朝廷之尊하소서 度乃受之하다
愬還軍文城
하니 諸將請曰 始
에 公敗於朗山而不憂
注+[通鑑要解]愬遣兵攻朗山할새 官軍不利하니 衆皆悵恨이어늘 愬獨喜하니라 하고 勝於吳房而不取
하고 冒大風盛雪而不止
하고 孤軍深入而不懼
하니이다
愬曰 朗山不利면 則賊輕我하야 不爲備矣요 取吳房이면 則其衆奔蔡하야 倂力固守라
風雪陰晦면 則烽火不接하야 不知吾至요 孤軍深入이면 則人皆致死하야 戰自倍矣라
若矜小勝, 恤小敗면 先自撓矣리니 何暇立功乎아 衆皆服이러라
愬儉於奉己而豐於待士하고 知賢不疑하고 見可能斷하니 此其所以成功也러라
○ 裴度以蔡卒爲
한대 或諫曰 蔡人反側者尙多
하니 不可不備니이다
度笑曰 吾爲彰義節度使하고 元惡旣擒하니 蔡人은 則吾人也라
先是
에 吳氏父子阻兵
에 禁人偶語於塗
하고 夜不然燭
하고 有以酒
相過從者
면 罪死
러니 度旣視事
에 下令
하야 惟禁盜賊鬪殺
하고 餘皆不問
하고 往來者
를 不限晝夜
하니 蔡人
이 始知有生民之樂
이러라
○ 初에 淮西之人이 劫於李希烈, 吳少誠之威虐하야 不能自拔이 久하야 而老者衰하고 幼者壯하야 安於悖逆하고 不復知有朝廷矣라
雖居中土
나 其風俗
注+[頭註]獷은 惡貌라 가 過於夷貉(貊)
이라
故로 以三州之衆으로 擧天下之兵하야 環而攻之하야 四年然後에 克之하니라
태자첨사太子詹事 이소李愬를
注+[釋義]이소李愬는 이성李晟의 아들이다. 당주唐州,
등주鄧州,
수주隨州의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하였다.
회서淮西 사람들은 스스로 ‘일찍이 고하우高霞寓와 원자袁滋 두 장수를 패퇴시켰다.’고 생각하여 이소李愬의 명성과 지위가 본래 미미함을 깔보아서 마침내 대비하지 않았다.
이소李愬가
채주蔡州를 습격할 것을 모의하고
마소량馬少良을 보내어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순라를
注+[頭註]나邏는 돌아다니며 정탐하는 군사이다. 돌 적에
오원제吳元濟의
착생우후捉生虞候인
정사량丁士良을 만나 그와 싸워서 사로잡았다.
이소李愬가 그의 포박을 풀어주도록 명하고, 그에게 의복과 기물과 병기를 지급하고,
착생장捉生將으로 임명하였다.
注+[頭註]서署는 제수함이다.
정사량丁士良이
이소李愬에게 말하기를 “
오수림吳秀琳이 3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문성책文城柵을 점거하여
注+[釋義]책柵은 측혁반側革反(책)이니, 목책이다. 나무를 세워서 만든다. 오원제吳元濟의 왼팔이 되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는 까닭은
진광흡陳光洽이 그의
모주謀主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광흡陳光洽은 용감하지만 경솔하여
注+[頭註]경輕은 거성去聲이니 신중하지 못한 것이다. 가벼우면 지모智謀가 부족하다. 스스로 출전하기를 좋아하니, 청컨대
공公을 위하여 먼저
진광흡陳光洽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그러면 오수림吳秀琳은 저절로 항복할 것입니다.” 하였다.
무신일戊申日(18일)에 정사량丁士良은 진광흡陳光洽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3월에 오수림吳秀琳이 문성책文城柵을 가지고 이소李愬에게 항복하니, 이소李愬가 그를 위로하고 그의 병력 3천 명의 투항을 받아들였다.
오수림吳秀琳의 장수인 이헌李憲이 재주와 용맹이 있었는데, 이소李愬가 그의 이름을 충의忠義로 바꾸고 그를 등용하였다.
이소李愬가 오수림吳秀琳과 함께 채주蔡州를 점령할 것을 모의할 적에 오수림吳秀琳이 말하기를 “공公이 채주蔡州를 점령하고자 한다면 이우李祐를 얻지 않고는 불가능하니, 저와 같은 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마침
이우李祐가
장시촌張柴村에서
注+[通鑑要解]장시촌張柴村은 문성책文城柵의 60리 지점에 있다. 병졸들을 거느리고 보리를 베고 있었는데,
이소李愬가
상우후廂虞候인
注+[頭註]상우후廂虞候는 좌상左廂과 우상右廂의 군대를 관장한다. 사용성史用誠으로 하여금 그를 사로잡게 하였다.
제군諸軍이 회서淮西를 토벌하여 4년이 지나도 채주蔡州를 점령하지 못하니, 군량을 운반하느라 피폐하여 백성 중에 나귀를 가지고 밭을 가는 자가 있었다.
상上이 또한 이를 근심하여 재상들에게 묻자, 이봉길李逢吉 등이 ‘군사들이 지치고 재정이 고갈되었다.’고 다투어 말하여 내심 파병罷兵하고자 하였으나 배도裴度만은 홀로 말이 없었다.
상上이 배도裴度에게 묻자, 배도裴度가 대답하기를 “신臣이 청컨대 직접 가서 독전督戰하여 맹세코 오원제吳元濟와 한 하늘 아래에서 살지 않겠습니다.
신이 관찰하건대 오원제吳元濟는 형세가 실로 곤궁하고 위축되었으나 다만 여러 장수들의 마음이 통일되지 못하여 힘을 합쳐 압박하지 않기 때문에 항복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신이 직접 행영行營에 간다면 여러 장수들은 신이 그들의 공을 가로챌까 우려하여 반드시 다투어 나아가 적을 격파할 것입니다.” 하였다.
6월에 배도裴度를 문하시랑門下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여 창의절도사彰義節度使를 겸하게 하고, 인하여 회서선위초토처치사淮西宣慰招討處置使로 충당하였다.
배도裴度가 장차 길을 떠나려 할 적에 상上에게 아뢰기를 “신이 만약 오원제吳元濟를 격파한다면 폐하를 뵈올 기약이 있겠지만 만약 오원제吳元濟가 남아있다면 신은 대궐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소李愬가 장차
오방현吳房縣을 공격하려 할 적에
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여남汝南에 오방현吳房縣이 있다.” 하였는데, 주註에 “오왕吳王 합려闔廬의 아우 부개夫槩가 초楚나라로 도망오자, 초楚나라에서 이곳에 봉하여 당계씨堂谿氏로 삼았다. 본래 방자국房子國이었는데, 오吳나라 사람을 봉했기 때문에 오방吳房이라 이름했다.” 하였다. 제장諸將들이 말하기를 “오늘은
왕망일往亡日이니,
注+[附註]왕망일往亡日은 입춘立春 뒤 7일, 경칩驚蟄 뒤 14일, 청명淸明 뒤 21일, 입하立夏 뒤 8일, 망종芒種 뒤 16일, 소서小暑 뒤 24일, 입추立秋 뒤 9일, 백로白露 뒤 18일, 한로寒露 뒤 27일, 입동立冬 뒤 7일, 대설大雪 뒤 20일, 소한小寒 뒤 30일이 되는 날이요, 또 정월은 인일寅日, 2월은 사일巳日, 3월은 신일申日, 4월은 해일亥日, 5월은 묘일卯日, 6월은 오일午日, 7월은 유일酉日, 8월은 자일子日, 9월은 진일辰日, 10월은 미일未日, 11월은 술일戌日, 12월은 축일丑日이다. 싸워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소李愬가 말하기를 “우리는 군대가 적어서 충분히 싸울 수 없으니, 마땅히 적이 예상하지 않은 때에 출동해야 할 것이다.
저들은 오늘이
왕망일往亡日이라 하여 우리의 공격을 예상치 못할 것이니,
注+[釋義]불오우不吾虞는 우리의 공격을 예상치 못한다는 말과 같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성공成公 8년조 ‘기숙이아위우其孰以我爲虞’의 주註에 “우虞는 헤아림이다.”라고 하였다.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하고는 마침내 가서
오방현吳房縣의
외성外城을 점령하고 천여 명의
수급首級을 베었다.
이우李祐가
이소李愬에게 말하기를 “
채주蔡州의 정예병들은 모두
회곡洄曲에 있거나 또는 사방 변경에서 방어하고 있어
채주성蔡州城을 수비하는 자들은 모두 파리하고 늙은 병졸이니,
注+[釋義]이羸는 륜위반倫爲反(리)이니, 수척함이다.
우리가 적의 빈틈을 타고서 곧바로 채주성蔡州城에 도착한다면 적장이 이 소식을 들을 때 쯤에는 오원제吳元濟는 이미 우리에게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였다.
이소李愬가 그의 말을 옳게 여겨 한밤중에 폭설이 심하게 내렸으나 70리를 행군하여 채주성蔡州城에 이르니, 채주성蔡州城 부근에 거위와 오리가 모여있는 못이 있었다.
이소李愬가 병사들로 하여금 이 거위와 오리들을 놀라게 하여 군사들의 목소리와 혼동하게 하였다.
오소성吳少誠이 조정의 명을 항거한 뒤로부터 30여 년 동안 관군이 채주성蔡州城 아래에 이른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채주蔡州 사람들이 대비를 하지 않았다.
밤 4경에
注+[頭註]사고四鼓는 4경이다. 이소李愬가
채주성蔡州城 아래에 이르니, 한 사람도 아는 이가 없었다.
이우李祐와
이충의李忠義가 성을 호미로 파서
注+[釋義]곽钁은 궐박반厥縛反(곽)이니, 큰 호미이다.[通鑑要解]곽钁은 큰 호미이다. 《방언方言》에 “관동 지방에서는 노작鹵斫이라고 한다.” 하였다. 구덩이를 만들어 먼저 올라가고[通鑑要解]선등先登은 앞장서서 성城에 오르는 것이다. 병사들이 뒤따라 올라가서 새벽닭이 울 무렵
오원제吳元濟의
성城 밖의 집에 진입하였다.
혹자가 오원제吳元濟에게 “관군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자, 오원제吳元濟는 그때까지도 잠을 자다가 웃으며 말하기를 “포로들이 반란하는 것일 뿐이니, 새벽에 마땅히 다 죽여버리겠다.” 하였다.
또다시 아뢰는 자가 “성이 함락되었다.”고 보고하였으므로
오원제吳元濟가 잠자리에서 일어나 뜰에서 들어보니,
이소李愬 군대의 호령소리를 들리는데, “
이상시李常侍가 말씀을 전한다.”라고 하자,
注+[頭註]상시常侍는 이소李愬를 이른다. 호응하는 자가 만 명에 가까웠다.
오원제吳元濟가 비로소 두려워하여 마침내 좌우를 인솔하고
아성牙城에 올라가 항전하였다.
注+[釋義] 옛날 군대가 행군할 때에 아기牙旗가 있었으니 높은 자가 있는 곳이다. 후인들이 인하여 치소治所가 있는 곳을 아牙(衙)라 하였다. 아성牙城은 아문衙門의 성城을 이르니, 바로 내성內城이다. [通鑑要解]장군將軍의 깃발을 아牙라고 한다. 장막 앞에 세우는 것을 아장牙帳이라 이르니, 나라의 과아瓜牙가 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때에 동중질董重質이 정예병 만여 명을 보유하고 회곡洄曲을 점거하고 있었다.
이소李愬는 말하기를 “오원제吳元濟가 기대하는 것은 동중질董重質의 구원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동중질董重質의 집을 방문하여 집안 사람들을 후하게 위문하고 그의 아들 전도傳道를 보내어 자신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동중질董重質을 타이르게 하니, 동중질董重質이 마침내 단기單騎로 이소李愬에게 찾아와서 항복하였다.
오원제吳元濟가 성 위에서 죄를 받을 것을 청하므로 사다리로 그를 끌어내려서
함거檻車에 태워
경사京師로 압송하고
注+[頭註]함檻은 함거檻車이다.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며, 군대를
국장鞠場(축구장)에 주둔시키고
注+[釋義]국鞠은 거륙반渠六反(국)이니, 공을 차는 곳이다. 배도裴度가 오기를 기다렸다.
배도裴度가 성 안에 들어오자,
이소李愬가 활집과 화살통(武裝)을 갖추고 나가서 맞이하여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25년조에 ‘오른쪽에 고건櫜鞬을 갖춘다.’ 하였는데, 주註에 ‘고櫜는 활집이다. 말 위에 활과 화살을 꽂아 등에 지는 물건을 건鞬(동개)이라 한다. 건鞬은 세우는 것이니, 활과 화살을 함께 그 가운데에 세워둠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이르기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벌하여 이기시고 방패와 창을 거꾸로 꽂아서 호피로 싸고 장수의 군사들을 제후諸侯로 삼고는 이것을 건고建櫜라 이름하였다.’ 하였는데, 주註에 ‘방패와 창을 호피로 싼 것은 신무神武로 군대를 복종시킬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건建은 건鞬으로 읽으니, 글자가 잘못된 것이다. 병기와 갑옷을 넣어두는 집을 고櫜라 하니, 건고鞬櫜는 병기와 갑옷을 넣고 닫아서 보관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고櫜는 음이 고이고, 건鞬은 거전반巨展反(건)과 거언반巨偃反(근)이다. 이소李愬가 이것을 갖추고 나아가 맞이한 것은 군례軍禮이니, 배도裴度에게 존경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通鑑要解]탁건橐鞬은 탁橐는 활집이고, 건鞬은 말 위에서 활과 화살을 꽂아 등에 지는 물건이다. 길 왼편에서 절하였다.
배도裴度가 장차 이소李愬의 절을 피하려 하자, 이소李愬가 말하기를 “채주蔡州 사람들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상하의 분수를 알지 못한 지가 수십 년입니다.
바라건대 상공은 이로 인하여 그들에게 상하의 분수를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조정의 존엄함을 알게 하소서.” 하니, 배도裴度가 마침내 이소李愬의 절을 받았다.
이소李愬가 돌아와
문성文城에 주둔하니, 여러 장수들이 묻기를 “공은 처음에
낭산朗山에서 패전하였으나 근심하지 않았고
注+[通鑑要解]이소李愬가 군대를 보내 낭산朗山을 공격할 적에 관군이 불리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실망하였으나 이소李愬만은 홀로 기뻐하였다. 오방현吳房縣에서 승리하였으나 점령하지 않았으며, 큰 바람과 많은 눈을 무릅쓰고 행군을 멈추지 않았고 외로운 군대로 적지에 깊숙히 들어가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끝내 이로써 성공하였으니, 이는 끝내 여러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바입니다.
이에 이소李愬가 대답하기를 “낭산朗山에서 승리하지 못했으면 적이 우리들을 깔보아 대비를 하지 않을 것이요, 오방현吳房縣을 점령하면 그 무리들이 채주蔡州로 달아나서 힘을 합쳐 채주성蔡州城을 굳게 지킬 것이다.
그러므로 오방현吳房縣을 남겨두어 그들의 병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날씨가 음산하면 봉화불이 이어져 전달되지 못하여 적들이 우리가 오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요, 외로운 군대로 적지에 깊숙히 들어가면 군사들이 모두 사력을 다하여 전투력이 배가된다.
먼 것을 내다보는 자는 가까운 일을 돌아보지 않고, 큰 일을 생각하는 자는 작은 일을 계산하지 않는다.
만약 작은 승리를 자랑하고 작은 패전을 걱정한다면 먼저 스스로 흔들릴 것이니, 어느 겨를에 공을 세우겠는가?” 하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이소李愬는 자기 몸을 봉양하는 것은 검소하게 하고 군사들을 대하는 것은 풍부하게 하였으며, 상대방의 어짊을 알면 의심하지 않고 등용하고 가능성을 보면 즉시 결단을 내렸으니, 이것이 그가 성공한 이유였다.
배도裴度가 채주蔡州의 투항한 병졸로 아병牙兵을 삼자, 혹자가 간하기를 “채주蔡州 사람들은 배반하려는 자가 아직도 많으니, 대비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배도裴度가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창의절도사彰義節度使가 되었고 큰 죄악을 저지른 오원제吳元濟를 이미 사로잡았으니, 채주蔡州 사람들은 바로 나의 백성이다.
채주蔡州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보다 앞서 오소양吳少陽 부자父子가 군대로 조정에 항거할 적에 두 사람 이상이 길가에서 모여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하고, 밤에는 촛불을 켜지 못하게 하였으며, 술과 음식을 가지고 서로 방문하는 자가 있으면 사형죄로 처벌하였는데, 배도裴度가 일을 보게 되자, 명령을 내려서 오직 도적과 싸움과 죽이는 것만 금지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따지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왕래함에 밤낮을 제한하지 않으니, 채주蔡州 사람들이 비로소 생민生民의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 회서淮西 사람들이 이희열李希烈과 오소성吳少誠의 위세와 사나움에 협박을 받아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 지가 오래되어 늙은 자는 쇠약해지고 어린 자는 장년壯年에 이르러서 조정을 거역하는 것을 편안히 여기고 다시는 조정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이들은 비록
중원中原에 살았지만 풍속이 사납고 흉포함이
注+[頭註]광獷은 포악한 모습이다. 오랑캐보다 더하였다.
그러므로 오원제吳元濟가 통치한 세 주州의 무리를, 천하의 군대를 총동원하여 4년 동안 포위 공격한 뒤에야 비로소 이길 수 있었다.
- 《구당서舊唐書 오원제전吳元濟傳》에 나옴 -
12월에 배도裴度에게 진국공晉國公의 관작을 하사하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 정사를 맡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