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公度
注+[頭註]師道幕僚라 之
호되 納質獻地
하야 以自贖
하라하니
師道從之하야 遣使奉表하고 獻沂, 密, 海三州어늘 上許之하다
滄海之大는 (柸)[杯]潦不加하고 溝壑之盈은 一雨輒溢하나니 人之器量小大 猶是也라
舜能兢業於四夷來王之後
하시고 成湯儆懼於十一征無敵之餘
하시며 九夷八蠻通道
로되 細行之矜
注+[頭註]武王也니 見書旅獒篇하니라 矜은 莊也니 矜持自飭貌라 이 猶故也
요 六服
注+[頭註]侯, 甸, 男, 采, 衛와 幷畿內也라 群辟承德
이로되 逸欲不生
注+[頭註]成王也니 見書周官하니라 이 猶昨也
하시니 先王處成功之後
에 類皆如是
라
晉武帝는 平吳而怠하고 隋文帝는 平陳而驕하고 唐憲宗은 定淮蔡而侈하니 是與雨集畎澮에 流泛四出로 何異哉리오
當是時
하야 李師道反覆不臣
이로되 猶未之討也
하고 王承宗再討不服
하야 猶未納款也
하며 劉總
注+[頭註]盧龍節度使라 尙未入朝
하고 吐蕃猶未息寇
하야 天下之事不滿人意者 其類尙多
하니 夙夜祗懼
라도 猶恐不給
注+[頭註]不給은 不暇也라 이라
今弓矢未櫜
에 土木已興
하고 閥閱未奏
注+[頭註]閥은 積功也요 閱은 經歷也라 閥은 通作伐하니 明其等曰閥이요 積其功曰閱이라 에 諫諍已愎
하며 하야 而中貴益橫
하고 任盜臣
注+[頭註]盜臣은 皇甫鎛이니 上丙申年이라 而使當國
하야 而小人益肆
라
夫以憂勤十年之功
으로 而
喪於一役僅成之後
하야 不得正終以盡天年
하니 由量之不宏也
니라
裴度之在淮西也
에 布衣柏耆
注+[通鑑要解]人姓名也라 以策干韓愈
注+[頭註]時爲彰義行軍司馬라 曰 吳元濟旣就擒
하니 王承宗
이 破膽矣
라
願得奉丞相書하고 往說之하면 可不煩兵而服하리이다
愈白度하고 爲書遣之러니 承宗이 懼하야 請以二子爲質하고 及獻德, 棣二州하고 輸租稅, 請官吏어늘 上許之하다
○ 幽州大將譚忠
이 說劉總
하야 歸朝廷
하니 詔洗雪王承宗及成德
注+[頭註]承宗이라 將士
하고 復其官爵
하다
○ 李師道表言호되 軍情이 不聽納質割地라하야늘 上怒하야 決意討之하다
秋七月
에 下制
하야 罪狀師道
하고 令宣武, 魏博, 義成, 武寧, 橫海
注+[頭註]宣武은 韓弘이요 義成은 李光顔이요 武寧은 李愬요 橫海는 程權이라 兵共討之
하다
戶部侍郞判度支皇甫
과 衛尉卿鹽鐵轉運使程
曉其意
하고 數進
餘
하야 以供其費
하니 由是
로 有寵
이라
八月에 鎛以本官하고 异以工部侍郞으로 竝同平章事하고 判使如故하니
制下
에 朝野駭愕
하고 至於市道負販者
하야도 亦
之
注+[頭註]負販은 負物取賣니 賤者之事也요 嗤는 笑也라 하니라
度復上疏하야 以爲天下治亂은 繫朝廷하고 朝廷輕重은 在輔相이라
所可惜者
는 淮西盪定
하고 河北
寧
注+[頭註]底는 音旨니 平也라 하고 承宗
이 斂手削地하고 韓弘
이 輿疾討賊注+[頭註]自將討李師道也라 하니 豈朝廷之力
이 能制其命哉
잇가
陛下建升平之業
이 十已八九
어늘 何忍還自
壞
하야 使四方解體乎
잇가
上以度爲朋黨
이라하야 不之省
하니 由是
로 鎛
은 益無所憚
호되 程异亦自知不合衆心
하고 能
廉謹謙遜하야 爲相月餘
에 不敢知印秉筆
注+[頭註]時에 宰相日하야 知印秉筆하니라 이라
鎛傳云 帝銳於立功이어늘 而皇甫鎛이 聚斂하야 取宰相하니 中興之不終은 有爲而然이라하니라〉
○ 上
이 晩節
에 好神仙
하야 詔天下求方士
하니 宗正卿李道古 因皇甫鎛
하야 薦山人柳
能合長生藥
이라하야늘
泌言 天台多靈草하니 誠得爲彼長吏면 庶幾可求라한대 上以泌權知台州刺史하다
諫官爭論하야 以爲人主喜方士로되 未有使之臨民者하니이다
上曰 煩一州之力하야 而能爲人主致長生이면 臣子亦何愛焉고하니 由是로 群臣이 莫敢言하니라
憲宗이 信方士하야 求長生이어늘 其臣이 不能反復深切하야 極論人生不可益, 天命不可移, 方士不可信之理하고
而以自古未有方士臨民爲言하니 宜其不能開其君之惑也라
漢武喜方士
하야 妻之以女
注+[頭註]漢武以方士欒大로 爲五利將軍하고 尙公主하니라 矣
하니 豈以古嘗有是而可爲乎
아
憲宗
이 徒以强辯
으로 壓其群臣
하고 而不稽其理
러니 曾未幾時
에 金丹
注+[頭註]漢武內傳曰 言 臣能凝澒成白銀하고 成黃金하니 金成服之하면 白日昇天이라하니라 澒은 虎孔切이니 水銀也라 所作躁怒取禍
하니 豈非無窮之永監哉
아
功德使
注+[頭註]初置太學士하야 領玄元館及道院하고 後改爲功德使하야 總僧尼之籍及功役이라 上言
호되 鳳翔法門寺塔
에 有佛指骨
하야 相傳二十年
에 一開
하니 開則
歲豐人安이라
十二月
에 上遣中使
하야 僧衆迎之
注+[頭註]迎佛骨이라 하다
使其事驗이면 則憲宗이 曾不獲嘉報하고 逾年而弑殞하니 其爲誕妄不足信이 章章著矣로다
上이 嘗語宰相호되 人臣이 當力爲善이어늘 何乃好立朋黨고
裴度對曰
方以類聚注+[頭註]易繫辭註에 方은 謂事情所向이니 言事物善惡이 各以類分이라하니라 하고 物以群分이니 君子小人志趣同者
는 勢必相合
이라
君子爲徒를 謂之同德이요 小人爲徒를 謂之朋黨이니 外雖相似나 內實懸殊하니
봄에 회서淮西(蔡州)가 이미 평정되니, 이사도李師道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이공도李公度가
注+[頭註]이공도李公度는 이사도李師道의 막료이다. 그를 설득하기를 “인질과 땅을 바쳐서 스스로 속죄하라.” 하였다.
이사도李師道가 그의 말을 따라 사자使者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고 기주沂州‧밀주密州‧해주海州의 세 주州를 바치니, 상上이 이를 허락하였다.
2월에 용수지龍首池를 준설하고 승휘전承暉殿을 짓는 일을 시작하여 토목공사가 점점 일어나게 되었다.
“크나큰 창해滄海는 큰 장마가 져도 더해지지 않고 작은 도랑은 한 번 비가 오면 곧 넘치니, 사람의 기량의 크고 작음도 이와 같다.
순舜임금은 사방 오랑캐들이 와서 복종한 뒤에도 조심하고 두려워하였고,
탕왕湯王은 열한 번 정벌하여 대적할 자가 없는 뒤에도 경계하고 두려워하였으며,
무왕武王은
구이九夷와
팔만八蠻에 길이 통하였으나 작은 행실을 삼감이
注+[頭註]작은 행실을 삼간 것은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니,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보인다. 긍矜은 장엄한 것이니, 긍지하여 스스로 삼가는 모양이다. 예전과 같았고,
성왕成王은
육복六服의
注+[頭註]육복六服은 후복侯服‧전복甸服‧남복男服‧채복采服‧위복衛服에 기내畿內까지 아우른 것이다. 여러 제후들이 모두 덕을 받들었으나
일욕逸欲이 생기지 않음이
注+[頭註]일욕逸欲이 생기지 않은 것은 주周나라 성왕成王이니, 《서경書經》 〈주관周官〉에 보인다. 예전과 같았으니,
선왕先王이 성공한 뒤에 대처함에 모두 다 이와 같았다.
진晉나라 무제武帝는 오吳나라를 평정하고서 게을러졌고 수隋나라 문제文帝는 진陳나라를 평정하고서 교만해졌고 당唐나라 헌종憲宗은 회채淮蔡를 평정하고서 사치해졌으니, 이것은 빗물이 작은 도랑으로 모임에 흘러 넘쳐서 사방으로 나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4년 동안 힘을 들이고 천하의 병력으로 포위 공격하여 겨우 네 작은 주州를 평정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이사도李師道가 반복무상하여 신하 노릇 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토벌하지 못하였고,
왕승종王承宗을 두 번 토벌하였으나 복종시키지 못하여 오히려 정성을 바치지 않았으며,
유총劉總이
注+[頭註]유총劉總은 노룡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이다. 아직도 조회하지 않고
토번吐蕃이 오히려 침략을 그치지 않아서 천하의 일이 사람들의 뜻에 만족하지 못한 것이 그 종류가 아직도 많았으니, 황제가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며 공경하고 두려워해도 오히려 부족할까 두려웠다.
注+[頭註]불급不給은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활과 화살을 화살통에 넣기도 전에 토목공사가 이미 일어나고 공로를 아뢰기 전에
注+[頭註]벌閥은 공로를 쌓는 것이고 열閱은 경력이다. 벌閥은 벌伐과 통용되니, 등급을 밝히는 것을 벌閥이라 하고 공로를 쌓는 것을 열閱이라 한다. 간쟁을 이미 싫어하며, 환관을 총애하여
인수印綬를 주어서
중귀中貴(환관)가 더욱
전횡專橫하였고, 도둑질하는 신하(皇甫鎛)에게 맡겨
注+[頭註]도둑질하는 신하는 황보박皇甫鎛이니, 앞의 병신년(816)에 보인다. 국정을 담당하게 해서 소인들이 더욱 방자하였다.
10년 동안 근심하고 수고한 공력을 가지고 한 번 싸워 겨우 성공한 뒤에 무너져서 올바르게 끝마쳐 천수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덕량德量이 크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배도裴度가
회서淮西에 있을 적에 평민인
백기柏耆가
注+[通鑑要解]백기柏耆는 사람의 성명이다. 한유韓愈에게 계책을 바치고 등용되기를 요구하여
注+[頭註]한유韓愈는 당시에 창의행군사마彰義行軍司馬였다. 말하기를 “
오원제吳元濟가 이미 사로잡혔으니,
왕승종王承宗은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배승상裴丞相의 편지를 가지고 가서 왕승종王承宗을 설득하면 군대를 번거롭게 동원하지 않고도 그를 복종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한유韓愈가 배도裴度에게 아뢰고 편지를 써서 왕승종王承宗에게 보냈는데, 왕승종王承宗이 두려워하여 두 아들을 인질로 삼고 또 덕주德州와 체주棣州 두 주州를 바치며, 조세租稅를 바치고 관리를 보내줄 것을 청하므로 상上이 이를 허락하였다.
유주幽州의
대장大將 담충譚忠이
유총劉總을 설득하여 조정으로
귀부歸附하게 하니, 황제가 조칙을 내려
왕승종王承宗과
성덕군成德軍注+[頭註]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는 왕승종王承宗이다. 장병들의 잘못을 씻어주고 관작을 회복시켰다.
이사도李師道가 표문表文을 올려 아뢰기를 “군사들의 마음이 인질을 보내고 땅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上이 노하여 토벌하기로 결심하였다.
가을 7월에
제서制書를 내려서
이사도李師道의 죄상을 나열하고
선무宣武,
위박魏博,
의성義成,
무령武寧,
횡해橫海의
注+[頭註]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는 한홍韓弘이고, 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는 이광안李光顔이고, 무령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는 이소李愬이고, 횡해군절도사橫海軍節度使는 정권程權이다. 군대로 하여금 함께
이사도李師道를 토벌하게 하였다.
- 《구당서舊唐書 이사도전李師道傳》에 나옴 -
회서淮西가 이미 평정된 뒤에 상上이 점점 교만하고 사치하였다.
호부시랑戶部侍郞 판탁지判度支인 황보박皇甫鎛과 위위경衛尉卿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인 정이程异는 황제의 뜻을 깨닫고 자주 남는 재물을 바쳐서 그 비용을 공급하니, 이로 말미암아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8월에 황보박皇甫鎛은 본래의 관직으로, 정이程异는 공부시랑工部侍郞으로 함께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고 두 사람이 예전처럼 판탁지判度支와 염철전운사鹽鐵轉運使를 맡았다.
이
조서詔書가 내리자
조야朝野에서 매우 놀라고 심지어는 시장과 길거리에서 물건을 지고 파는 자들도 그들을 비웃었다.
注+[頭註]부판負販은 물건을 지고 다니면서 파는 것이니, 천한 자의 일이다. 치嗤는 웃는 것이다.
배도裴度는 소인小人들과 동렬同列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표문表文을 올리고 재상의 직책에서 물러갈 것을 청했으나 상上이 허락하지 않았다.
배도裴度가 다시 상소하여 이르기를 “천하가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조정에 달려 있고, 조정의 권위가 가볍고 무거워지는 것은 재상에게 달려 있습니다.
애석해할 만한 것은
회서淮西가 평정되고
하북河北 지방이 편안해지며,
注+[頭註]저底는 음이 지이니, 평평한 것이다. 왕승종王承宗이 손을 거두어 땅을 바치고
한홍韓洪이 병을 무릅쓰고 수레에 올라
역신逆臣을 토벌한 것은
注+[頭註]한홍韓洪이 병을 무릅쓰고 수레에 올라 역적을 토벌하였다는 것은 스스로 군대를 거느리고 이사도李師道를 토벌한 것이다. 어찌 조정의 힘이 그들의 목숨을 쥐고 있기 때문이겠습니까?
다만 조정의 조처가 마땅함을 얻어서 능히 그들의 마음을 복종시켰기 때문일 뿐입니다.
폐하陛下께서 태평太平한 기업基業을 세운 것이 10분에 이미 8, 9할인데 어찌 차마 도리어 스스로 허물고 파괴해서 사방 사람들로 하여금 해체하게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上은
배도裴度가
붕당朋黨을 한다 하여 그의 상소를 살펴보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황보박皇甫鎛은 더욱 기탄하는 바가 없었으나,
정이程异는 또한 자신이 사람들의 마음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고는 청렴하고 근신하고 겸손하여 재상이 된 지 한 달이 넘도록 감히
인장印章을 맡고 붓을 잡아 정사를 처리하지 않았다.
注+[頭註]당시에 재상이 날짜를 바꿔가면서 인장印章을 맡고 붓을 잡아 정사를 처리하였다.
- 《신당서新唐書》 〈배도전裴度傳〉등에 나온다.
《신당서新唐書》 〈황보박전皇甫鎛傳〉에 이르기를 “황제가 공을 세우는 데에 마음을 다하였는데, 황보박皇甫鎛이 가렴주구하여 재상의 지위를 차지하니, 중흥을 제대로 끝마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하였다. -
상上이 만년에 신선술神仙術을 좋아하여 천하天下에 명해서 방사方士들을 찾으니, 종정경宗正卿 이도고李道古가 황보박皇甫鎛을 통하여 산인山人 유필柳泌가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잘 조제한다고 천거하였다.
이에 황제가 유필柳泌에게 명하여 흥당관興唐觀에 거처하면서 단약丹藥을 굽게 하였다.
유필柳泌가 말하기를 “천태산天台山에는 신령스런 약초가 많으니, 진실로 그곳의 장리長吏가 되면 거의 영약靈藥을 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자, 상上이 유필柳泌를 태주자사台州刺史로 임명하였다.
이에 간관들이 간쟁하여 아뢰기를 “임금이 방사方士를 좋아했지만 방사方士로 하여금 백성을 다스리게 한 적은 없습니다.” 하였다.
상上이 말하기를 “한 주州의 힘을 기울여 군주를 위해 장생불사하게 한다면 신자臣子들이 또한 무엇을 아까워한단 말인가?” 하니, 이로 말미암아 여러 신하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헌종憲宗이 방사方士를 믿고 장생불사약長生不死藥을 구하였는데, 신하들이 반복해서 깊고 간절하게 ‘인생은 더 오래 살 수가 없고 천명은 바꿀 수가 없고 방사方士는 믿어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지극히 논하지 못하고,
단지 ‘예로부터 방사方士에게 백성들을 다스리게 한 적은 없다.’고 말하였으니, 군주의 의혹을 개도開導하지 못함이 당연하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방사方士를 좋아해서 그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니,
注+[頭註]한무희방사漢武喜方士 처지이녀妻之以女:한漢나라 무제武帝가 방사方士인 난대欒大를 오리장군五利將軍으로 삼고 공주公主를 그에게 시집보내었다. 어찌 예전에 일찍이 이러한 일이 있어서 이러한 일을 한 것이겠는가?
헌종憲宗이 한갓
강변强辯으로 신하들을 억누르고 그 이치를 상고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얼마 되지 않아
금단金丹의
注+[頭註]《한무내전漢武內傳》에 이르기를 “이소군李少君이 말하기를 ‘신이 수은을 응결시켜 백은白銀을 만들고 단사丹砂를 수비水飛하여 황금黃金을 만들 수 있으니, 황금을 만들어 복용하면 신선이 되어 대낮에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했다.” 하였다. 홍澒은 호공절虎孔切(홍)이니, 수은이다. 독성에 의한 조급증과 노여움으로
화禍를 취했으니, 어찌 무궁한 후세의 장구한
감계鑑戒가 아니겠는가.”
공덕사功德使가
注+[頭註]처음에 숭현관崇玄館 태학사太學士를 두어 현원관玄元館과 도원道院을 거느렸고, 뒤에 공덕사功德使로 고쳐 승려와 비구니의 호적과 공역功役을 총괄하였다. 상언上言하기를 “
봉상鳳翔 법문사法門寺의 탑에 부처의 손가락뼈가 있어 서로 전해오기를 ‘20년마다 한 번씩 여는데, 이것을 열면
연사年事가 풍년이 들고
인민人民이 편안하다.’고 합니다.
내년에 마땅히 법문사法門寺의 탑을 열 것이니, 청컨대 부처의 손가락뼈를 맞이하소서.” 하였다.
12월에
상上이
중사中使를 보내 승려들을 거느리고 부처의 손가락뼈를 맞이하게 하였다.
注+[頭註]부처의 유골遺骨을 맞이한 것이다.
“가령 이 일이 효험이 있다고 한다면 헌종憲宗이 일찍이 좋은 보답을 받지 못하고 1년 뒤에 시해를 당하여 죽었으니, 그 허탄하고 망령되어 믿을 것이 못됨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상上이 일찍이 재상들에게 이르기를 “신하는 마땅히 힘써 선善을 행해야 하는데, 어찌 붕당을 만들기를 좋아하는가?
짐朕은 이러한 사람을 매우 미워한다.” 하였다.
배도裴度가 대답하기를 “
사정事情의 방향은
유類에 따라 모이고
注+[頭註]《주역周易》 〈계사상전繫辭上傳〉註에 “방향은 사정事情이 향하는 바를 이르니, 사물의 선善과 악惡이 각각 유類로써 나뉘어짐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물건은 무리로써 나누어지니, 군자와 소인 중에 뜻과 취향이 같은 자는 형세상 반드시 서로 합하게 마련입니다.
군자들이 무리가 된 것을 ‘덕을 함께 한다.’고 이르고, 소인들이 무리가 된 것을 ‘붕당을 한다.’고 이르니, 겉은 서로 비슷하지만 내면은 실로 크게 다릅니다.
이는 성명한 군주께서 그들이 하는 바가 간사한가 바른가를 분변함에 달려있을 뿐입니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