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正月
에 初
에 左軍中尉吐突承璀 謀立
王
注+[頭註]憲宗之子니 後宮所生이라 하야 爲太子
어늘 上不許
하다
上服金丹하고 多躁怒하야 左右宦官이 往往獲罪有死者하니 人人自危라
庚子에 暴崩於中和殿하니 時人이 皆言內常侍陳弘志弑逆이라호되 其黨類諱之하야 不敢討賊하고 但云藥發이라하니 外人이 莫能明也러라
中尉梁守謙, 王守澄等이 共立太子하고 殺吐突承璀及澧王惲하다
閏月에 穆宗이 卽位于太極殿하고 貶皇甫鎛하야 爲崖州司戶하니 市井이 皆相賀라
德宗
이 猜忌
注+[頭註]猜는 疑也라 刻薄
하고 以彊明自任
하야 恥見屈于正論
하고 而忘受欺於奸諛
라
故
로 其疑蕭復之輕已
하고 謂姜公輔爲賣直
注+[頭註]蕭復, 姜公輔는 竝見四十五卷甲子年하니라 하야 而不能容
하며 用盧杞, 趙贊
注+[頭註]盧杞는 陰狡險佞하고 趙贊은 奏行하니라 하야 則至於亂而終不悔
러니
由是로 朝廷益弱而方鎭愈强하야 至於唐亡하니 其患以此라
自初卽位로 慨然發憤하고 志平僭叛하야 能用忠謀하고 不惑群議하야 卒收成功이라
當此之時하야 唐之威令이 幾於復振하니 則其爲優劣을 不待較而可知也라
及其晩節
하야는 信用非人
注+[頭註]謂信程异皇甫鎛이라 하야 不終其業
하야 而身罹不測之禍
하니 尤甚於德宗
이라
不必愚君暗主라 雖聰眀聖智라도 苟有惑焉이면 未有不爲患者也니라
上이 見夏州觀察判官柳公權書跡하고 愛之하야 以公權爲右拾遺翰林學士하다
上問公權호되 卿書何能如是之善고 對曰 用筆在心하니 心正則筆正이니이다
○ 上
이 甫過公除
注+[釋義]王氏曰 公除는 謂已成服除之하야 以從公家之事하야 不待終制也라 에 卽事游畋聲色
하고 賜與無節
하니라
憲宗嗣位之初에 委任賢相하야 朝廷淸明하니 有足稱者요 而又慨然發憤하야 志平僭亂하야 能用忠謀하야 不惑群議하며 師老財屈하야 異論輻輳로되 而不爲之疑하고 盜發都邑하야 屠害元臣이로되 而不爲之懼라
故로 能削平猾逆하고 剪除亂階러니 及世難漸平에 驕侈日生하야
姦人皇甫鎛이 以取斂見幸하고 直言裴度 以極諫見棄하며 以宦者爲館驛使하고 以柳泌爲州刺史하며 修麟德殿하고 浚龍首池하며 甚者는 迎凶穢死骨於京師하고 斥諫爭直臣於嶺外러니 未幾에 金丹之藥方試라가 而陳弘志之謀遂行하니 可勝歎哉아
봄 정월에 이보다 앞서
좌군중위左軍中尉 토돌승최吐突承璀가
예왕澧王 이운李惲을
注+[頭註]예왕澧王 이운李惲은 헌종憲宗의 아들이니, 후궁後宮의 소생이다. 태자로 세울 것을 모의하였으나
상上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上이 금단金丹을 먹고 조급증과 노여움이 많아져서 좌우의 환관들이 왕왕 죄를 지어 죽는 자가 있으니, 사람마다 스스로 위태롭게 여겼다.
경자일庚子日(27일)에 상上이 중화전中和殿에서 갑자기 승하하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내상시內常侍인 진홍지陳弘志가 시역弑逆한 것이라고 말하였으나 그의 무리들이 이 일을 숨겨서 감히 역적을 토벌하지 못하고 다만 단약丹藥의 독성毒性이 발작하여 죽은 것이라고 하니, 외인外人들이 이 일을 밝히지 못하였다.
이에 중위中尉 양수겸梁守謙과 왕수징王守澄 등이 함께 태자를 세우고 토돌승최吐突承璀와 예왕澧王 운惲을 죽였다.
윤달에 목종穆宗이 태극전太極殿에서 즉위하고 황보박皇甫鎛을 애주사호崖州司戶로 좌천시키니, 시정市井 사람들이 모두 서로 축하하였다.
유필柳泌를 곤장을 쳐서 죽이고 나머지 방사方士들은 모두 영외嶺外로 유배보냈다.
《신당서新唐書》 〈덕종본기德宗本紀〉贊에 말하였다.
“
덕종德宗은 성품이 시기하고
注+[頭註]시猜는 의심하는 것이다. 각박하며
강명彊明함을 자임하여
정론正論에 굴복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였고,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에게 속임을 받는 것을 잊었다.
그러므로
소복蕭復이 자신을 깔보는가 의심하였고,
강공보姜公輔를 일러 정직함을 팔아 명성을 취한다고 여겨
注+[頭註]기의소복지경이其疑蕭復之輕已 위강공보위매직謂姜公輔爲賣直:소복蕭復과 강공보姜公輔의 일은 모두 45권 갑자년甲子年(784)에 보인다. 용납하지 않았으며,
노기盧杞와
조찬趙贊을
注+[頭註]노기盧杞는 음험하고 교활하였으며, 조찬趙贊은 황제에게 간가세間架稅와 제맥법除陌法을 행할 것을 아뢰었다. 등용함에 있어서는 나라가 혼란해짐에 이르러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다.
그런데 봉천奉天의 난리에 이르러 깊이 스스로 징계하고 다스려서 마침내 당장만 편하려는 고식姑息의 정사를 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이 더욱 약해지고 방진方鎭이 더욱 강해져서 당唐나라가 멸망함에 이르렀으니, 그 병통은 이 때문이었다.
처음 즉위한 뒤로부터 개연慨然히 분발하고 참람하여 난을 일으키는 자들을 평정할 것을 생각하여 충성스러운 계책을 쓰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현혹되지 아니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었다.
오원제吳元濟가 주벌을 당한 뒤로 강한 번진藩鎭과 사나운 장수들이 모두 잘못을 뉘우치고 충순忠順을 바치고자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당唐나라의 위엄과 명령이 거의 다시 떨쳐지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우열을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말년에 이르러서는 나쁜 사람들을 신용하여
注+[頭註]나쁜 사람을 신용했다는 것은 정이程异와 황보박皇甫鎛을 신용하였음을 이른다. 공업功業을 끝마치지 못하고서 몸이
불측不測한 화에 걸렸으니, 이는
덕종德宗보다도 더욱 심하다.
반드시 어리석은 군주만이 아니라 비록 총명하고 성스럽고 지혜로운 군주라 하더라도 만약 그들에게 현혹되면 환난이 되지 않는 자가 있지 않다.”
상上이 하주관찰판관夏州觀察判官 유공권柳公權의 필적을 보고 좋아하여 유공권柳公權을 우습유右拾遺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임명하였다.
상上이 유공권柳公權에게 묻기를 “경의 글씨는 어쩌면 이렇게도 아름다운가?” 하자, 유공권柳公權이 대답하기를 “붓을 운용함은 마음에 달려 있으니, 마음이 바르면 붓(필획)이 바르게 됩니다.” 하였다.
이에 상上이 묵묵히 용모를 고치니, 이는 유공권柳公權이 필법으로 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상上이 겨우
공제公除가 지나자,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공제公除는 이미 성복成服한 뒤에 곧바로 상복을 벗어서 공가公家의 일에 종사하여 3년의 상제가 끝마치기를 기다리지 않음을 이른다.” 즉시 유람과 사냥과 음악과 여색을 일삼고, 하사하여 주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헌종憲宗은 즉위한 초기에 어진 재상(武元衡과 배도裴度)에게 정사를 맡겨 조정이 깨끗해졌으니 충분히 칭찬할 만한 것이 있고, 또 개연慨然히 분발하고 참람하여 난을 일으킨 자들을 평정할 것을 생각해서 충성스러운 계책을 따르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현혹되지 않았으며, 군사가 피로하고 재물이 다하여 이론異論이 복주輻輳하였으나 의심하지 않았고, 자객이 도읍都邑에 나타나 원로대신元老大臣을 살해하였으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교활한 역적을 평정하고 난亂의 계제階梯(발단)를 제거하였는데, 세상의 화란禍亂이 점점 평정되자 교만하고 사치한 마음이 날로 생겨났다.
그리하여 간신奸臣인 황보박皇甫鎛이 가렴주구로 총애를 받고 직언直言하는 배도裴度가 지극히 간함으로 버림을 받았으며, 환관宦官을 관역사館驛使로 임명하고 유필柳泌를 주州의 자사刺史로 삼았으며, 인덕전麟德殿을 수리하고 용수지龍首池를 준설하였으며, 심지어는 흉하고 더러운 죽은 사람의 뼈(부처의 손가락뼈)를 경사京師로 맞이해 오고 간쟁하는 정직한 신하(韓愈)를 영외嶺外로 배척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금단金丹의 약藥을 복용하였다가 진홍지陳弘志의 계책이 마침내 행해졌으니, 한탄을 금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