蕭
, 段文昌
注+[頭註]俛은 音免이니 皆同平章事라 이 以爲天下已太平
하니 漸宜銷兵
이라하야 請密詔天下
하야 軍鎭有兵處
에 每歲百人之中
에 限八人逃死
注+[頭註]或以逃하고 或以死하야 除其籍이라 하소서
軍士落籍者衆하야 皆聚山澤爲盜러니 及朱克融, 王庭湊作亂一呼에 而亡卒皆集이라
詔徵諸道兵
하야 討之
하니 諸道兵
이 旣少
하고 皆臨時召募
하야 烏合之衆注+[頭註]烏合은 如烏之聚散이니 言無定也라 이라
又凡用兵
에 擧動
을 皆自禁中
으로 授以方略
호되 朝令夕改하야 不知所從이요 不
可否
라
故로 雖以諸道十五萬之衆으로 裴度元臣宿望이요 烏重胤, 李光顔이 皆當時名將이나 討幽鎭萬餘之衆하야 屯守踰年이로되 竟無成功하고 財竭力盡이러라
崔植, 杜元穎, 王播爲相에 皆庸才요 無遠略이라
史憲誠
이 旣逼殺田布
注+[附註]魏博節度使田弘正이 爲王庭湊所殺이어늘 詔起(服)[復]弘正子布하야 爲節度하야 以討廷湊러니 兵馬使史憲誠이 畜異志하고 會救幽州하야 布軍潰하다 布復欲出兵한대 諸將益偃蹇하야 欲布行하니 布無如之何하야 自殺이어늘 衆推憲誠爲留後하니라 호되 朝廷
이 不能討
하고 遂幷朱克融, 王庭湊
하야 以節鉞授之
하니
봄에 상上이 처음 즉위할 때에 양하兩河(河北과 하남河南) 지방이 대략 평정되었다.
소면蕭俛과
단문창段文昌이
注+[頭註]면俛은 음이 면이니, 소면蕭俛과 단문창段文昌은 모두 동평장사同平章事이다. 생각하기를 “
천하天下가 이미 태평하니 점점 군대를 줄여야 한다.”고 여겨, 은밀히 천하에 명령해서
군진軍鎭 중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는 매년 100명 중에 8명을 한정하여 도망하거나 사망한 자를
군적軍籍에서 이름을 지울 것을 청하였다.
注+[頭註]도사逃死는 혹은 도망하거나 혹은 죽어서 군적軍籍에서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상上이 이때 주연酒宴에 빠져서 국사에 관심이 없어 마침내 그들이 아뢴 것을 재가하였다.
군사들 중에 군적에서 빠진 자가 많아서 모두 산과 늪에 모여 도둑이 되었는데, 주극융朱克融과 왕정주王庭湊가 난을 일으켜 한 번 부르자 도망한 병졸들이 모두 모였다.
황제가 조서를 내려
제도諸道의 군대를 징발해서 이들을 토벌하게 하니,
제도諸道의 군대가 이미 적고 또 모두 임시로 불러 모집한 오합지졸이었다.
注+[頭註]오합烏合은 까마귀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일정함이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매번 싸울 때마다 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모든 군대를 운용할 적에 일거일동一擧一動을 모두 금중禁中에서 방략方略을 지시하였으나 아침에 명령했다가 저녁에 바꾸니, 따를 바를 알지 못하였고 또 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헤아리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여러 도에서 징발한 15만의 병력을 거느렸고, 배도裴度는 원로대신으로 오랜 명망을 지녔고 오중윤烏重胤과 이광안李光顔은 당시의 명장이었으나, 유주幽州(盧龍)와 진주鎭州(成德)의 1만여 명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해 주둔하며 지킨 지가 1년이 넘었으며 끝내 승리하지 못하면서 비용이 고갈되고 힘이 다하였다.
최식崔植과 두원영杜元穎과 왕파王播가 재상이 되자 모두 재주가 용렬하고 원대한 지략이 없었다.
사헌성史憲誠이 이미
전포田布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만들었으나
注+[附註]위박절도사魏博節度使 전홍정田弘正이 왕정주王庭湊에게 살해되자, 황제가 명하여 전홍정田弘正의 아들 전포田布를 기복起復하여 절도사節度使로 삼아서 왕정주王廷湊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병마사兵馬使 사헌성史憲誠이 딴 마음을 품고는 마침 유주幽州를 구원하여 전포田布의 군대가 궤멸되었다. 전포田布가 다시 출병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장수들이 더욱 교만해져서 전포田布로 하여금 하삭河朔 지방의 고사故事를 행하게 하고자 하니, 전포田布가 어찌할 수가 없어 자살하였다. 이에 무리들이 사헌성史憲誠을 유후留後로 추대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토벌하지 못하고 마침내
주극융朱克融,
왕정주王庭湊와 아울러
절도사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이로부터 재차 하북河北 지방을 잃어서 당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복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