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에 初柳泌等이 旣誅에 方士稍復因左右하야 以進하니 上이 餌其金石之藥이라
有處士張臯者上疏하야 以爲 神慮澹則血氣和하고 嗜慾勝則疾疹作하나니
先帝信方士妄言하야 餌藥致疾하시니 豈得復循其覆轍乎잇가
陛下嗣位之初
에 當
宵衣求理注+[釋義]宵는 夜也라 天子憂勤하야 當未明求衣하고 日仄而食이라 어늘
而嗜寢樂色
하야 日晏方起하시고 梓宮
注+[頭註]天子之喪에 以梓木爲之棺이라 宮者는 生時所居니 緣生事하야 因以爲名이라 在殯
이어늘 鼓吹注+[釋義]吹는 尺爲反이니 音律管之樂이라 日喧하시니 令聞注+[釋義]聞은 音問이니 聲所至也라 未彰하고 惡聲遐布라
臣은 恐福祚之不長하노니 請碎首玉階하야 以謝諫職之曠이라하고 遂以額叩龍墀하야 見血不已어늘
○ 時
에 李逢吉
이 用事
하니 所親厚者
는 張又新, 李仲言, 李續之, 李虞, 劉栖楚, 姜(治)[洽]
注+[頭註]張又新은 補闕이요 李仲言은 掌書記요 李續之는 度支員外郞이요 李虞以下는 皆拾遺요 姜洽은 爲補闕하니라 及張權輿, 程昔範
이요 又有從而附
注+[釋義]附는 依也요 麗는 也라 之者
하니 時人
이 目之
하야 爲
八關十六子注+[釋義]王氏曰 按逢吉傳에 注得幸於王守澄하니 逢吉이 遣從子訓賂注하야 結守澄爲奧援이라 自是肆志하야 無所憚이라 其黨에 有張又新, 李續〈之〉, 張權輿, 劉栖楚, 李虞, 程昔範, 姜(治)[洽]及訓八人이요 而傅會者又八人이니 皆任要劇이라 故號八關十六子라 有所求請에 先賂關子하고 後達逢吉하면 無不得所欲也하니라[頭註] 關者는 要也니 八人이 皆任要居요 十六子는 八人而又傳會者八人也라 라하니라
○ 秋七月에 夏綏節度使李祐 入爲左金吾大將軍하야 進馬百五十匹이어늘 上却之하다
侍御史溫造 於閤內에 奏彈호되 祐違敕進奉하니 請論如法하노이다한대 詔釋之하다
祐謂人曰 吾夜半에 入蔡州城하야 取吳元濟호되 未嘗心動이러니 今日에 膽落於溫御史矣라하니라
身處大喪하야 柩方在殯이어늘 不能明詔公卿하야 推擧弑逆罪人하고 遽與群臣으로 釋服開大宴하며 浚魚藻池하고 幸華淸宮하야 縱情棄禮하야 遊戲無度라
於是에 再失河朔하야 迄於唐亡토록 不能復取하고 而帝亦不旋踵而卽世焉이라
봄에 이보다 앞서 유필柳泌 등이 죽임을 당한 뒤에 방사方士들이 차츰 다시 황제의 측근을 통하여 등용되니, 상上이 금석金石으로 만든 약을 먹었다.
처사處士 장고張臯라는 자가 상소하여 아뢰기를 “정신과 생각이 맑으면 혈기가 조화롭고 기욕嗜慾이 우세하면 질병이 생깁니다.
약은 병을 치료하는 것이니 병이 없으면 약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선제先帝께서 방사方士들의 망령된 말을 믿어 그들의 약을 드시고 병을 얻으셨는데, 어찌 다시 잘못된 전철前轍을 따르신단 말입니까?” 하였다.
상上이 조회를 볼 때에 매번 늦자, 좌습유左拾遺 유서초劉栖楚가 진언進言하기를
“폐하께서 지위를 계승하신 초기에 마땅히 날이 새기 전에 옷을 찾아 입고 밤늦도록 정사를 보아 나라를 잘 다스리기를 구해야 할 터인데,
注+[釋義]소宵는 밤이다. 천자天子가 나라를 걱정하고 정사에 부지런히 힘써서 날이 새기 전에 옷을 찾아 입고 해가 지고 나서야 밥을 먹는 것이다.
잠자는 것을 즐기고 여색을 좋아하여 아침 늦게야 비로소 일어나시고,
선제先帝의
재궁梓宮(棺槨)이
注+[頭註]천자天子의 상喪에는 가래나무로 관을 만든다. 궁宮은 생시에 거처하던 곳이니, 생전의 일을 따라서 궁宮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빈궁殯宮에 있는데도 북 치고 피리 부는 소리가
注+[釋義]취吹는 척위반尺爲反(취)이니 음률音律에 맞추어 연주하는 피리와 질나발 따위의 악곡이다. 날마다 시끄러우니, 아름다운 명예가
注+[釋義]문聞은 음이 문이니, 명성이 이르는 것이다. 드러나지 못하고 나쁜 명성이 멀리 퍼집니다.
신은 상上의 복록福祿이 장구하지 못할까 두려우니, 청컨대 옥 계단에 신의 머리를 부수어서 간관諫官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을 사죄하게 해 주소서.” 하고는 마침내 어좌御座 앞의 섬돌에 이마를 찧어서 피가 그치지 않았다.
상上이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그를 선위宣慰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때
이봉길李逢吉이
용사用事하니, 그와 친한 자는
장우신張又新,
이중언李仲言,
이속지李續之,
이우李虞,
유서초劉栖楚,
강흡姜洽注+[頭註]장우신張又新……姜(治)[洽]:장우신張又新은 보궐補闕이고, 이중언李仲言은 장서기掌書記이고, 이속지李續之는 탁지원외랑度支員外郞이고, 이우李虞 이하는 모두 습유拾遺이고, 강흡姜洽은 보궐補闕이다. 및
장권여張權輿,
정석범程昔範이었고, 또 이들을 따라 이들에게 붙은 자가 있으니,
注+[釋義]부附는 따르는 것이요, 여麗는 붙어 있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지목하여
팔관십육자八關十六子라 칭하였다.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당서新唐書》 〈이봉길전李逢吉傳〉에 정주鄭注가 왕수징王守澄에게 총애를 받으니, 이봉길李逢吉이 조카인 이훈李訓을 보내어 정주鄭注에게 뇌물을 주고 왕수징王守澄과 결탁하여 중앙의 후원 세력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이봉길李逢吉이 마음이 방자해져서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의 도당에 장우신張又新, 이속지李續之, 장권여張權輿, 유서초劉栖楚, 이우李虞, 정석범程昔範, 강흡姜洽 및 이훈李訓 등 8명이 있고, 이들에게 붙은 자가 또 8명이었는데, 이들이 모두 요직要職을 맡았기 때문에 이들을 팔관십육자八關十六子라고 이름하였다. 사람들이 요구하거나 청탁할 일이 있을 때에 먼저 이들 팔관십육자八關十六子에게 뇌물을 바치고 뒤에 이봉길李逢吉을 만나면 하고자 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頭註]관關은 요직要職이니 팔관八關은 8인이 모두 요직要職을 맡은 것이요, 십육자十六子는 8인에다 또 이들 8인에게 붙은 자가 8인인 것이다.
가을 7월에 하수절도사夏綏節度使 이우李祐가 도성에 들어와 좌금오대장군左金吾大將軍이 되어서 말 150필을 바치자, 상上이 이를 물리쳤다.
시어사侍御史 온조溫造가 합내閤內에서 탄핵하여 아뢰기를 “이우李祐가 칙명을 어기고 마필馬匹을 받들어 올렸으니, 법대로 치죄할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명하여 이우李祐를 용서하였다.
이우李祐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한밤중에 채주성蔡州城에 들어가 오원제吳元濟를 잡았으나 일찍이 마음이 동요되지 않았었는데, 오늘 온어사溫御史가 나의 간담을 서늘해지게 만들었다.” 하였다.
“목종穆宗이 즉위할 때에 나이가 거의 30세였다.
자신이 국상國喪 중에 있어 선제先帝의 관곽棺槨이 빈궁殯宮에 있는데도 공경公卿들에게 분명히 조명詔命을 내려 시역한 죄인을 추고推考하여 죄를 주지 못하고, 대번에 여러 신하들과 상복喪服을 벗고 큰 잔치를 열었으며, 어조지魚藻池를 준설하고 화청궁華淸宮에 행차하여 정욕情欲을 방종하고 예의를 저버려 유희함이 한도가 없었다.
이에 다시 하북河北 지방을 잃어 당唐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고, 황제 또한 얼마 안 있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주공周公이 말씀하시기를 ‘이로부터 그 뒤로 즉위하는 왕들이 태어나면 안일安逸하니, 또한 장수한 이가 없어 혹은 5, 6년 혹은 3, 4년이었다.’라고 하셨으니, 이는 목종穆宗과 경종敬宗의 부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