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正月
에 裴度自興元
注+[頭註]漢之漢中郡也라 晉置梁州러니 唐憲宗이 陞爲興元府하니라 入朝
어늘 以度爲司空同平章事
하다
度在中書에 左右忽白失印하니 聞者失色이로되 度飮酒自如러니 頃之요 左右白호되 復於故處에 得印이라하니 度不應하다
或問其故
한대 度曰 此
는 必吏人盜之
하야 以印書券
注+[頭註]券은 契也라 耳
니
急之則投諸水火요 緩之則復還故處니라 人服其識量하니라
○ 上
이 遊戲無度하고 狎群小하며 善擊毬
하고 好手搏
하며 性復褊急
하야 宦官小過
면 動遭捶撻
하니 皆怨且懼
라
十二月辛丑
에 上
이 夜獵還宮
하야 與宦官劉克明及擊毬軍將
注+[頭註]는 見下丙辰年이라 蘇佐明等二十八人
으로 飮酒
할새 上酒酣
하야 入室衣러니 殿上燭忽滅
이라
蘇佐明等
이 弑上於室內
하고 矯稱上旨
하야 以絳王悟
注+[頭註]憲宗子라 로 權勾當軍國事
注+[頭註]勾는 與拘通하니 執也라 러니 知樞密王守澄
이 以衛兵
으로 迎江王涵
하야 立之
하니 是爲文宗
이러라
○ 上
이 自爲諸王時
로 深知兩朝
注+[頭註]穆, 敬也라 之弊
러니 及卽位
에 勵精求治
하야 去奢從儉이라 詔
하야
宮女非有職掌者
를 皆出之
하야 出三千餘人
하고 五坊鷹犬
을 準元和故事
하야 量留校獵
注+[頭註]顔師古曰 校는 謂以木相貫穿爲闌校耳니 校獵者는 大爲闌校以遮禽獸하야 而獵取也라 劉攽曰 校는 讀如之校하니 亦競逐獸也라 外
에 悉放之
하다
敬宗之世
에 每月視朝不過一二
러니 上
이 復舊制
하야 每奇日
注+[頭註]奇는 隻也니 唐制에 天子以隻日視朝也하니라 에 未嘗不視朝
하니 中外
翕然注+[頭註]翕은 合也라 相賀하야 以爲
太平可冀라하니라
敬宗
이 하며 하고 하며 하고 賞宴遊之諫而賜錦綵
하며 하고 覽失丁之奏而禁度僧
하며 受丹扆之箴而答優詔
하고 하며 하고 沮逢吉所引而伸李紳
하며 采言者所陳而禮裴度
하고 知洛宮荒弛而罷東巡
하니
特以幼少之時에 不親師傅라 故로 卒以荒淫遇弑而隕하니 養太子를 不可不愼이니 古帝王之慮 深矣로다
봄 정월에
배도裴度가
흥원興元에서
注+[頭註]흥원興元은 한漢나라의 한중군漢中郡이다. 진晉나라 때 양주梁州를 설치하였는데, 당唐나라 헌종憲宗이 흥원부興元府로 승격하였다. 서울로 들어와 조회하자,
배도裴度를
사공司空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였다.
배도裴度가 중서성中書省에 있을 적에 좌우 사람들이 갑자기 그의 관인官印을 잃어버렸다고 아뢰니, 듣는 자들이 모두 얼굴이 사색이 되었으나 배도裴度는 태연하게 술을 마셨는데, 얼마 있다가 좌우 사람들이 “다시 원래 두었던 곳에서 인印을 찾았습니다.” 하고 아뢰었지만 배도裴度는 대꾸하지 않았다.
혹자가 그 까닭을 묻자,
배도裴度가 대답하기를 “이는 필시 아전들이 도둑질하여 문권에 도장을 찍은 것일 뿐이다.
注+[頭註]권券은 계권契券(文券)이다.
급하게 조사하면 이 인印을 물 속이나 불 속에 던졌넣었을 것이요, 느슨하게 놓아두니 다시 예전의 자리에 돌려놓은 것이다.” 하니, 사람들이 그의 지식과 도량에 감복하였다.
상上은 유희함에 절도가 없고 여러 소인들을 친압하며 격구擊毬를 잘하고 손으로 때리기를 좋아하며, 성질이 또 편협하고 급하여, 환관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번번이 종아리를 맞으니, 모두 원망하고 두려워하였다.
12월
신축일辛丑日(8일)에
상上이 밤에 사냥하고 궁궐로 돌아와서
환관宦官 유극명劉克明과
격구군장擊毬軍將注+[頭註]격구擊毬는 아래의 병진년(836)에 보인다. 소좌명蘇佐明 등 28명과 함께 술을 마실 적에,
상上이 술에 취하여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대궐 위의 촛불이 갑자기 꺼졌다.
소좌명蘇佐明 등이 방 안에서
상上을 시해하고는
상上의 지시라고 사칭하여
강왕絳王 이오李悟를
注+[頭註]강왕絳王 이오李悟는 헌종憲宗의 아들이다. 권구당군국사權勾當軍國事로 추대하였는데,
注+[頭註]구勾는 구拘와 통용되니, 잡는 것이다. 지추밀知樞密 왕수징王守澄이 호위병을 데리고
강왕江王 이함李涵을 맞이하여 세우니, 이가
문종文宗이다.
상上이
제왕諸王으로 있을 때로부터
목종穆宗과
경종敬宗注+[頭註]양조兩朝는 목종穆宗과 경종敬宗이다. 두 조정의 폐단을 깊이 알았는데, 즉위하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고 훌륭한 정치를 추구하여 사치함을 버리고 검소함을 따랐다.
황제가 칙명을 내려 궁녀 중에 맡은 직책이 없는 자들을 모두 내보내게 하여 3천여 명을 내보냈고,
오방五坊의 매와 개를
원화元和 연간의
고사故事에 준하여
교렵校獵에 필요한 것만 헤아려 남겨놓고
注+[頭註]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교校는 나무를 서로 관통시켜 울타리를 만든 것을 이르니, 교렵校獵은 울타리를 크게 만들어 짐승들을 차단시키고 사냥하는 것이다.” 하였다. 유반劉攽이 말하기를 “교校는 ‘범이불교犯而不校’의 ‘교校’처럼 해석하니, 또한 다투어 짐승을 쫓는 것이다.” 하였다. 그 외에는 모두 풀어주었다.
경종敬宗 때에는 매월 조회를 보는 것이 한두 번에 불과하였는데,
상上이 옛 제도를 회복하여 홀수 날마다
注+[頭註]기奇는 홀수이니, 당唐나라 제도에 천자天子가 홀수날에 조회를 보았다. 조회를 보지 않은 적이 없으니,
중외中外가 모두 서로 축하하여
注+[頭註]흡翕은 합치는 것이다. 태평太平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경종敬宗은 최발崔發의 죽음을 사면해주었으며, 위처후韋處厚의 말을 듣고 이신李紳의 억울함을 깨달았으며, 이발李渤을 시켜 유서초劉栖楚를 선위宣慰하고 발탁하였으며, 이정李程의 말을 받아들여 궁전宮殿을 경영經營하던 것을 파하였으며, 잔치하고 노는 것에 대해 간한 말을 칭찬하여 채색 비단을 하사하였으며, 요대瑤臺의 풍자를 듣고 이한李漢을 용서하였으며, 장정壯丁을 잃게 된다고 아뢰는 말을 듣고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주는 것을 금하였으며, 단의丹扆의 경계를 받아들여 우대하는 조서를 내렸으며, 북문北門의 아룀을 따라 양이量移를 너그럽게 하였으며, 장중방張仲方의 말을 따라 놀이하는 비용을 줄였으며, 이봉길李逢吉이 데려온 사람을 저지하고 이신李紳을 펴주었으며, 간하는 자들이 아뢴 바를 채납하여 배도裴度를 예우하였으며, 낙양궁洛陽宮이 황폐함을 알고는 동쪽 지방을 순행하려던 것을 그만두었다.
무릇 이 십여 가지 조목은 덕종德宗에 비한다면 어찌 우월하지 않겠는가.
다만 어릴 때에 훌륭한 사부師傅를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황음荒淫함으로 인해 시해당하여 죽었으니, 태자太子를 육성育成함을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옛 제왕帝王의 염려가 깊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