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이 與之論朋黨事하니 德裕因得以排其所不悅者하니라
○ 杜牧
이 憤河朔三鎭之桀驁
注+[頭註]河朔三鎭은 魏博史憲誠, 盧龍朱克融, 鎭冀王廷湊라 桀은 登也니 言其登立不順이요 驁는 與傲同이라 하고 而朝廷議者
專事姑息하야 乃作書
하고 名曰
罪言注+[釋義]罪言者는 謂不當位而言하야 實有罪也라 이라하니
大略
은 以爲國家自天寶盜
注+[頭註]謂范陽節度使安祿山이라 起
로 河北百餘城
이 不得尺寸之用
하니 人望之
를 若回鶻
注+[頭註]北夷種이니 其先匈奴라 隋曰回紇이러니 德宗貞元四年에 請改號回鶻하니 言其便捷也라, 吐蕃
하야 無敢窺者
라
齊, 梁, 蔡
注+[附註]齊淄靑은 李正己, 李納, 李(思)[師]古, 李(思)[師]道等이 相傳所據요 梁魏博은 田承嗣, 田悅, 田季安等이 相傳所據요 蔡彰義는 亦謂淮西하니 李希烈及吳少誠, 吳少陽, 吳元濟等이 相傳所據니라 被其風流
하야 因亦爲寇
하니 未嘗五年間不戰
하야 焦焦然七十餘年矣
니이다
今上策은 莫如先自治요 中策은 莫如取魏요 最下策은 爲浪戰하야 不計地勢하고 不審攻守 是也니이다
又傷府兵廢壞
하야 作
原十六衛注+[釋義]原者는 推原也라 唐踵隋制하야 開十六衛라 府兵者는 唐初置軍府하고 以驃騎車騎兩將軍府領之러니 天下旣定에 改驃騎曰統軍이라하고 車騎曰別將이라하다 後에 太宗이 更統軍爲折衝都尉하고 別將爲果毅都尉하고 諸府를 總名曰折衝府라 天下凡十道에 置府六百三十四하니 皆有名號요 而關內二百六十一이니 皆隷諸衛라 凡府有三等하니 兵千二百人爲上이요 千人爲中이요 八百人爲下也라 十六衛者는 唐志에 八衛는 曰左右衛, 曰驍衛, 曰武衛, 曰威衛, 曰領軍, 曰金吾, 曰監門, 曰千牛니 此八衛也요 各有左右라 故曰十六衛也라 每衛에 有上將軍하고 有大將軍하고 有將軍이라 自左右衛로 至領軍은 掌宮禁宿衛하고 金吾는 掌宮中京城巡警하고 監門은 掌諸門禁衛하고 千牛는 掌侍衛也하니라 하야
以爲國家始踵隋制
하야 開十六衛
하니 自今觀之
컨대 設官
에 言無謂者
는 其十六衛乎
注+[附註]雖設官而無兵可將이라 故로 當時以爲無謂라하니 無謂者는 言失於事宜하야 不可以訓이라 인저
貞觀中
에 內以十六衛
로 蓄養戎臣
하고 外開折衝果毅府五百七十四
注+[附註]兵志에 高祖始置軍府하고 以驃騎車騎兩將軍府領之러니 天下旣定에 改驃騎曰統軍이라하고 車騎曰別將이라하다 太宗이 更號統軍曰折衝都尉라하고 別將曰果毅都尉라하고 諸府를 摠〈名〉曰折衝府라하니라 凡十道에 置府六百三十四하니 每府에 折衝都尉一人 左右果毅都尉一人이라 하야 以儲兵伍
하야 有事則戎臣
이 提兵居外하고 無事則放兵居內하야 三時耕稼
하고 一時治武
하야 籍藏將府
하고 伍散田畝
하니 力解勢破
하야 人人自愛
하야 雖有蚩尤爲帥
나 亦不可使爲亂耳
요
及其居外也
엔 緣部之兵
이 被檄乃來
면 斧鉞在前
하고 爵賞在後
하야 飄暴交捽
注+[頭註]捽은 昨沒切이니 持頭髮也요 又手持也라 飄暴交捽은 謂賞罰互用也라 하니 豈暇異圖
리오
雖有蚩尤爲帥
注+[釋義]蚩尤者는 黃帝時作亂者라 나 亦無能爲叛也
니이다
開元末에 愚儒奏章曰 天下文勝矣니 請罷府兵이라하고 武夫奏章曰 天下力彊矣니 請搏四夷라하야
於是
에 府兵內剷
注+[釋義]剷字未詳이라 因檢廣韻玉篇하면 俱無此字요 唯韻會擧要의 産字韻內剗字下註云 通作剷字하니 音楚恨反이니 削也요 又去聲이라하고 剗字下註에 攻也요 平治也라하니라 하고 邊兵外作
하야 戎臣兵伍
奔矢往하야 內無一人矣
라
尾大中乾注+[頭註]禽獸尾大면 則不能運掉이라[通鑑要解] 尾大는 左傳昭十一年에 尾大不掉註에 譬諸禽獸컨대 尾大則不能運掉라 中乾은 僖十五年에 外强中乾하면 進退不可라하니 註에 外雖有强形이나 而內實乾渴하니 則進退兩難也라하니라 하야 成燕偏重
注+[頭註]燕은 盧龍也니 謂成安祿山偏重之勢也라 一云 成은 也라 하야 而天下掀然
注+[頭註]掀은 音軒이니 飜動也라 하야 根萌
燃矣
니이다
由此觀之
컨대 戎臣, 兵伍
를 豈可一日使出落鈐鍵
注+[頭註]鈐은 音黔이니 以閉房神府하야 以備非常이라 鍵은 關鑰也라哉
잇가
然이나 爲國者는 不能無兵이니 居外則叛하고 居內則簒이라
使外不叛, 內不簒은 古今已還으로 法術最長이 其置府立衛乎인저
병부상서兵部尙書 이덕유李德裕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임명하니, 이덕유李德裕가 조정에 들어와 사은하였다.
상上이 그와 더불어 붕당의 일을 논하니, 이덕유李德裕가 이를 틈타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자들을 배척하였다.
두목杜牧은
하북河北의 세
번진藩鎭이 오만하여 복종하지 않고
注+[頭註]하북河北 지방의 세 번진藩鎭은 위박魏博의 사헌성史憲誠, 노룡盧龍의 주극융朱克融, 진기鎭冀의 왕정주王廷湊이다. 걸桀은 오르는 것이니 올라 서서 순종하지 않음을 말하고, 오驁는 오傲와 같다. 조정의 의논하는 자들이 오로지 눈앞의 안일만 일삼는 것에 분개하여 마침내
책문策文을 짓고 ‘
죄언罪言’이라고 이름하였다.
注+[釋義]죄언罪言은 지위를 담당하고 있지 않으면서 말하여 실로 죄가 있음을 이른 것이다.
그 내용에 대략 이르기를 “국가가
천보天寶 연간에 반란이
注+[頭註]천보天寶 연간의 도둑은 범양군절도사范陽軍節度使 안녹산安祿山을 이른다. 일어난 뒤로
하북河北 지방 백여 개의
성城에서 한 치와 한 자의 쓰임도 얻지 못하니, 사람들이 이곳을 보기를
회홀回鶻과
注+[頭註]회홀回鶻은 북쪽 오랑캐 종족이니, 그 선조는 흉노匈奴이다. 수隋나라 때에는 회흘回紇이라고 하였는데, 당唐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 4년(788)에 회홀回鶻로 개칭할 것을 청하였으니, 그 민첩함을 말한 것이다. 토번吐蕃처럼 여겨서 포기하고 감히 엿보는 자가 없습니다.
제齊(淄靑),
양梁(魏博),
채蔡(淮西)가
注+[附註]제齊 지방의 치청군淄靑軍은 이정기李正己‧이납李納‧이사고李師古‧이사도李師道 등이 서로 전하여 점거하였고, 양梁 지방의 위박군魏博軍은 전승사田承嗣‧전열田悅‧전계안田季安 등이 서로 전하여 점거하였고, 채蔡 지방의 창의군彰義軍은 또한 회서淮西라고도 불렀으니, 이희열李希烈과 오소성吳少誠‧오소양吳少陽‧오원제吳元濟 등이 서로 전하여 점거하였다. 그들의 영향을 받아 이 틈을 타고 또한 반란을 일으키니, 일찍이 5년 동안 전쟁을 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초조하고 불안하게 70여 년을 보냈습니다.
지금의 상책上策은 우선 스스로 다스리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중책中策은 위박魏博을 취하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고, 최하책最下策은 부질없이 전쟁하여 지세地勢를 헤아리지 않고 공수攻守가 같지 않음을 살피지 않은 것이 이것입니다.” 하였다.
또
부병府兵이 폐지되고 파괴됨을 서글퍼하여 ‘
원십육위原十六衛’를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注+[釋義]우상부병폐괴又傷府兵廢壞 작원십육위作原十六衛:원原은 미루어 근원을 찾는 것이다. 당唐나라는 수隋나라의 군제軍制를 따라서 16위衛를 설치하였다. 부병府兵은 당唐나라 초기에 군부軍府를 설치하고 표기장군驃騎將軍과 거기장군車騎將軍 두 장군부將軍府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는데, 천하天下가 평정되자 표기驃騎를 개칭하여 통군統軍이라 하고 거기車騎를 개칭하여 별장別將이라 하였다. 뒤에 태종太宗이 통군부統軍府를 개칭하여 절충도위折衝都尉라 하고 별장別將을 개칭하여 과의도위果毅都尉라 하였으며, 여러 부府를 총칭하기를 절충부折衝府라 하였다. 천하의 모든 10도道에 634부府를 설치하였는데 모두 명칭이 있었으며, 관내關內에는 261부府가 있었는데 모두 제위諸衛에 예속되었다. 모든 부府에는 3등급이 있었으니, 병력이 1200명인 것을 상부上府라 하고, 1000명인 것을 중부中府라 하고, 800명인 것을 하부下府라 하였다. 16위衛는 《신당서新唐書》 〈병지兵志〉에 8위衛는 좌우위左右衛, 효위驍衛, 무위武衛, 위위威衛, 영군위領軍衛, 금오위金吾衛, 감문위監門衛, 천우위千牛衛이니 이것이 8위衛이고, 각각 좌左‧우右가 있으므로 이것을 16위衛라 하였으며, 매 위衛마다 상장군上將軍이 있고 대장군大將軍이 있고 장군將軍이 있었다. 좌우위左右衛로부터 영군위領軍衛에 이르기까지는 궁금宮禁의 숙위宿衛를 관장하고, 금오위金吾衛는 궁중宮中과 경성京城의 순찰과 경비를 관장하고, 감문위監門衛는 제문諸門의 금위禁衛를 관장하고, 천우위千牛衛는 시위侍衛를 관장하였다.
“국가가 처음에
수隋나라 제도를 물려받아 16
위衛를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정황으로 살펴보건대 설치한 관직 중에
의의意義가 없는 것은 아마도 16
위衛일 것입니다.
注+[附註]비록 관원을 두었으나 거느릴 만한 군대가 없었다. 그러므로 당시에 무위無謂라고 일렀으니, 무위無謂는 일의 마땅함을 잃어서 훈계가 될 수 없음을 이른다.
일의 자취를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면 군제軍制는 실로 천하의 가장 근본적인 명맥命脈입니다.
정관貞觀 연간에 조정에서는 16
위衛를 가지고 무신들을 기르고 지방에서는
절충과의부折衝果毅府 574개를 설치하여
注+[附註][附註] 절충과의부오백칠십사折衝果毅府五百七十四:《신당서新唐書》 〈병지兵志〉에 고조高祖가 처음으로 군부軍府를 설치하고 표기장군驃騎將軍과 거기장군車騎將軍 두 장군부將軍府로 하여금 통솔하게 하였는데, 천하天下가 평정되자 표기驃騎를 개칭하여 통군統軍이라 하고 거기車騎를 개칭하여 별장別將이라 하였다. 뒤에 태종太宗이 통군부統軍府를 개칭하여 절충도위折衝都尉라 하고 별장別將을 개칭하여 과의도위果毅都尉라 하였으며, 여러 부府를 총칭하기를 절충부折衝府라 하였다. 모든 10도道에 634부府를 설치하니 부府마다 절충도위折衝都尉 1인人과 좌우과의도위左右果毅都尉 1인人이 있었다. 병력을 비축해서 일이 있으면 무신이 병력을 인솔하고 밖에서 전투하고, 일이 없으면 군대를 해산하여
부府의 안에 있게 하여, 병사들이 봄‧여름‧가을 세 철에는 밭을 갈고 곡식을 심고 겨울 한 철에는 무예를 닦아서
군적軍籍은
장군부將軍府에 보관하고 병졸들은
전묘田畝에 흩어져 있으니, 세력이 분산되고 사람마다 자기 몸을 아껴서 비록
치우蚩尤와 같이 포악한 자가 장수가 된다 하더라도 난을 일으키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군대를 거느리고 밖에 있을 적에
부部에 소속된 병사들이
격문檄文을 받고 달려오면
부월斧鉞(엄벌)이 앞에 있고 관작과 상이 뒤에 있어서
상賞과
벌罰로 번갈아 제약하니,
注+[頭註]졸捽은 작몰절昨沒切(졸)이니 머리채를 잡는 것이요, 또 손에 쥐는 것이다. 회오리바람과 폭풍이 서로 몰아친다는 것은 상과 벌을 번갈아 쓰는 것을 이른다. 어찌 딴마음을 품을 겨를이 있겠습니까.
비록
치우蚩尤와 같이 포악한 자가 장수가 된다 하더라도
注+[釋義]치우蚩尤는 황제黃帝 때에 난을 일으킨 자이다. 또한 능히 배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개원開元 말기에 어리석은 선비의 장주章奏에 이르기를 ‘천하는 문文으로 다스리는 것이 좋으니 부병제府兵制를 파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고, 무부武夫들의 장주章奏에 이르기를 ‘천하가 무력이 강성하니, 사방의 오랑캐를 공격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습니다.
이에
부병府兵이 안에서 깎이고
注+[釋義]산자剷字는 미상이다. 인하여 《광운廣韻》과 《옥편玉篇》을 살펴보면 모두 이러한 글자가 없고, 오직 《운회거요韻會擧要》의 산자운産字韻 안의 잔자剗字 아래 주註에 “산자剷字와 통하니 음音이 초한반楚恨反(찬)이니 깎이는 것이요, 또 거성去聲이다.” 하였고, 잔자剗字 아래 주註에는 “공격하는 것이고 고르게 다스리는 것이다.” 하였다. 변방 군사들이 밖에서 일어나 무신과 병사들이 여울물이 달려가고 화살이 날아가는 것처럼 급히 달려가서 조정 안에 한 사람도 없게 되었습니다.
꼬리(변방)는 크고 속(중앙)의 기운은 고갈되어서
注+[頭註]금수禽獸의 꼬리가 크면 흔들 수가 없다. [通鑑要解]미대尾大는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昭公 11년年의 ‘미대부도尾大不掉’의 주註에 “금수禽獸에 비유하건대 꼬리가 크면 흔들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중건中乾은 《춘추좌전春秋左傳》 희공僖公 15년年에 “겉은 강해 보이지만 속은 기운이 고갈되어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갈 수도 없다.” 하였는데, 그 주註에 “겉으로는 비록 강한 모습이 있지만 속의 기운이 실로 고갈되었으니, 나아갈 수도 없고 물러날 수도 없다.” 하였다. 연燕(范陽) 지방의 병력이
편중偏重되게 만들어서
注+[頭註]연燕 지방은 노룡군盧龍軍이니, 안녹산安祿山이 편중된 형세를 이루었음을 말한다. 일설一說에 “성成은 성덕군成德軍이다.” 하였다. 천하가 동요되어
注+[頭註]흔掀은 음이 헌(흔)이니, 요동치는 것이다. 뿌리에서 싹이 움트고 꺼졌던 불이 다시 타오르는 것처럼 각종
화환禍患이 모두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무신과 병사들을 어찌 단 하루인들
검건鈐鍵(관리와 통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겠습니까.
注+[頭註]검鈐은 음이 검이니, 방문을 닫고 부府를 신비하게 하여 비상시에 대비하는 것이다. 건鍵은 자물쇠이다.
그러나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군대가 없을 수 없으니, 군대는 밖에 있으면 배반하고 안에 있으면 찬탈합니다.
밖에 있으면서도 배반하지 않고 안에 있으면서도 찬탈하지 않게 하는 방법은 고금 이래로 가장 좋은 방법은 부府를 두고 위衛를 세우는 것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