怡幼時
에 宮中
이 皆以爲不慧
注+[頭註]慧는 性解也라 라하고 太和
注+[頭註]文宗年號라 以後
에 益自韜匿注+[頭註]性嚴重寡言하야 群居游處에 未嘗發言하니라 이러니
及上疾篤
에 諸宦官
이 密於禁中
에 定策
하야 立怡爲皇太叔
하고 更名
하다
太叔이 見百官에 哀戚滿容하고 裁決庶務에 咸當於理하니 人始知有隱德焉하니라
○ 三月
에 帝崩
注+[頭註]上餌方士金丹하고 性加躁急하야 喜怒不常이라 自秋로 覺有疾이러니 而道士以爲換骨이라하니라 하고 宣宗
이 卽位
하다
宣宗이 素惡德裕之專이러니 卽位之日에 德裕奉冊이어늘 旣罷에 謂左右曰 適近我者 非太尉耶아
○ 夏四月辛未朔에 上이 始聽政하야 以門下侍郞同平章事李德裕로 同平章事하야 充荊南節度使하다
故
로 能克上黨
을 如拾芥
하고 取太原
을 如反掌
하야 亂略
平
하고 紀律再張
이라
然
이나 惑於左道之言而信淸虛之敎
하야 躬受
하고 築望仙觀
하며 立道門敎授先生
하고 立崇玄館學士
하야 荒唐謬
하니 何以立敎
리오
雖能除去浮屠나 要非眞見不惑이요 特好惡不同耳니 奚足論哉리오
봄에 상上의 병환이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으니, 중외中外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처음에 헌종憲宗이 이기李錡의 첩妾을 받아들여 광왕光王 이이李怡를 낳았다.
이이李怡는 어렸을 때에 궁중 사람들이 모두 그가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였고,
注+[頭註]혜慧는 성품이 영오穎悟한 것이다. 태화太和 연간
注+[頭註]태화太和는 문종文宗의 연호이다. 이후에는 더욱 자신의 재능을 숨겼다.
注+[頭註]성품이 엄중하고 말수가 적어 여럿이 거처하고 노는 곳에서 일찍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상上의 병이 위독해지자, 여러 환관들이 은밀히 금중禁中에서 계책을 정하여 이이李怡를 황태숙皇太叔으로 세우고 이름을 이침李忱으로 고쳤다.
황태숙皇太叔이 백관百官들을 만나볼 적에 슬퍼하는 모습이 얼굴에 가득하고 여러 가지 사무를 처리함에 모두 이치에 합당하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가 덕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3월에 황제가 승하하고
注+[頭註]상上이 방사方士의 금단金丹을 먹고 성품이 더욱 조급해져서 기뻐하고 노여워함이 일정하지 않았다. 가을부터 질병이 있는 것을 깨달았는데 도사道士가 말하기를 “환골탈태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종宣宗이 즉위하였다.
선종宣宗은 평소 이덕유李德裕의 전횡을 미워하였는데, 즉위하는 날 이덕유李德裕가 책문冊文을 받들어 올리자, 예禮가 끝난 다음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마침 내 가까이 있었던 자는 바로 이태위李太尉가 아닌가?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나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하게 한다.” 하였다.
여름 4월 신미삭辛未朔(1일)에 상上이 처음 정사를 다스리면서 문하시랑門下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 이덕유李德裕를 동평장사同平章事로 삼아 형남절도사荊南節度使로 충원하였다.
이덕유李德裕는 정권을 잡은 지가 오래 되어서 지위가 높고 공로가 있었다.
여러 사람들은 그가 갑자기 재상에서 파면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소식을 듣고는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무종武宗이 웅대한 계책을 홀로 결단하여 이미 자신에게서 떠난 위엄과 권세를 자못 떨쳤다.
택로진澤潞鎭이 군대를 믿고 항거하자 여러 사람들의 말에 혹하지 않고 홀로 이덕유李德裕에게 맡겼다.
이 때문에 지푸라기를 줍듯이 쉽게 상당上黨을 점령하고 손바닥을 뒤집듯이 쉽게 태원太原을 탈취하여 난리가 평정되고 기율紀律이 다시 펴졌다.
그러나 좌도左道(異端)의 말에 혹하고 청허淸虛(道敎)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몸소 법록法籙을 받고 망선관望仙觀을 건축하였으며, 도문道門의 교수敎授와 선생先生을 세우고 숭현관崇玄館의 학사學士를 세워서 황당하고 잘못된 짓을 하였으니, 어떻게 가르침을 확립할 수 있었겠는가.
비록 부도浮屠를 제거하였으나 요컨대 참으로 알아서 미혹되지 않은 것이 아니요, 다만 좋아하고 미워함이 같지 않았을 뿐이니, 어찌 논할 것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