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午]〈唐閔帝從厚應順元年이요 四月以後는 唐主從珂淸泰元年이라
唐鳳翔節度使兼侍中潞王從
與石敬瑭
으로 少從明帝征伐
하야 有功名
하야 得衆心
이라
朱弘昭, 馮
注+[頭註]朱弘昭는 樞密使同平章事요 馮贇은 音彬이니 同中書門下二品이라 位望
이 素出二人下遠甚
이러니 一旦
에 執朝政
하니 皆忌之
注+[頭註]忌從珂及敬唐이라 라
○ 閏月에 蜀將吏勸蜀王知祥하야 稱帝어늘 知祥이 卽皇帝位于成都하다
○ 唐潞王
이 旣與朝廷猜阻
注+[頭註]猜忌阻隔也라 라
乃移檄隣道
하야 言 朱弘昭等
이 乘先帝疾
하야 殺長
注+[附註]長은 謂秦王從榮也라 明宗이 疾從榮이 擁兵入하야 宮門皆閉한대 乃走歸河南하니 安從益이 殺之하다 從榮死六日에 而帝崩하니라 立少
하고 專制朝權하니 今從珂將入朝
하야 以淸君側之惡
호리라
三月에 潞王이 建大將旗鼓하고 整衆而東하니 唐主聞潞王至陜하고 憂駭하야 不知所爲라
是夕에 唐主以五十騎로 出玄武門하야 至衛州하야 依刺史王弘贄하다
○ 唐潞王이 至蔣橋하니 馮道等이 皆上牋勸進이어늘
太后下令하야 廢少帝爲鄂王하고 令潞王으로 卽位於柩前하다
○ 唐主欲更命相하야 問所親信以朝臣聞望宜爲相者한대 皆以盧文紀, 崔居儉對라
唐主不能決하야 乃寘(置)其名於琉璃甁하고 夜焚香祝天하고 且以箸挾之하야
○ 唐主與石敬瑭이 皆以勇力善鬪로 事明宗하야 爲左右나
然心競하야 素不相悅이러니 帝卽位에 敬瑭이 不得已入朝어늘 乃復以爲河東節度使하다
○ 蜀主
注+[頭註]孟知祥이라 殂
하니 太子仁贊
이 卽皇帝位
하야 更名
하다
갑오(934) - 당唐나라 민제閔帝 종후從厚의 응순應順 원년元年이고, 4월 이후는 당주唐主 이종가李從珂의 청태淸泰 원년元年이다.
○ 촉주蜀主 맹지상孟知祥의 명덕明德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촉蜀이 나라를 세우니, 모두 다섯 나라이고 세 진鎭이다. -
당唐나라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 겸시중兼侍中인 노왕潞王 이종가李從珂가 석경당石敬瑭과 함께 젊어서부터 명제明帝(李嗣源)를 따라 정벌해서 공명이 있어 민심을 얻었다.
주홍소朱弘昭와
풍빈馮贇은
注+[頭註]주홍소朱弘昭는 추밀사樞密使 동평장사同平章事이고, 풍빈馮贇의 빈贇은 음이 빈彬이니, 동중서문하同中書門下 2품이다. 지위와 인망이 평소 두 사람보다 크게 뒤졌는데, 하루아침에 조정의 정권을 잡자 두 사람을 모두 시기하였다.
注+[頭註]모두 시기하였다는 것은 이종가李從珂와 석경당石敬瑭을 시기한 것이다.
노왕潞王이 이로 말미암아 의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윤월閏月에 촉蜀나라 장수와 관리들이 촉왕蜀王 맹지상孟知祥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권하자, 맹지상孟知祥이 성도成都에서 황제에 즉위하였다.
당唐나라
노왕潞王이 이미 조정과 서로 의심하고 소원하였다.
注+[頭註]시조猜阻는 시기하고 격조한 것이다.
이에 이웃
도道에 격문을 보내어 말하기를 “
주홍소朱弘昭 등이
선제先帝의 병환이 위독한 틈을 타서
장자長子(李從榮)를 죽이고
注+[附註]장자長子는 진왕秦王 이종영李從榮을 이른다. 명종明宗은 이종영李從榮이 병력을 보유하고 들어오는 것을 미워하여 궁궐문을 모두 닫자, 이종영李從榮이 마침내 달아나 하남河南으로 돌아가니, 안종익安從益이 그를 죽였다. 이종영李從榮이 죽은 지 6일 만에 황제(明宗)가 승하하였다. 소자少子(李從厚)를 세우고 조정의 권력을 전횡하니, 지금 이
종가從珂가 장차 조정에 들어가 군주 곁에 있는 악인들을 깨끗이 청소하겠다.”라고 하였다.
3월에 노왕潞王이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군대를 정돈하여 동쪽으로 진출하니, 당주唐主는 노왕潞王이 협주陜州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는 근심하고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날 밤 당주唐主가 50명의 기병騎兵을 데리고 현무문玄武門을 나가 위주衛州에 이르러서 자사刺史 왕홍지王弘贄에게 의지하였다.
당唐나라 노왕潞王이 장교蔣橋에 이르니, 풍도馮道 등이 모두 전문牋文을 올려 황제의 지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
태후가 명령을 내려 소제少帝를 폐하여 악왕鄂王으로 삼고 노왕潞王으로 하여금 영구靈柩 앞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당주唐主가 다시 재상을 임명하고자 하여 친애하고 신임하는 자에게 조정의 신하 중에 명성과 인망이 정승이 될 만한 자를 물으니, 모두 노문기盧文紀와 최거검崔居儉이라고 대답하였다.
당주唐主가 결정하지 못하여 마침내 종이쪽지에 두 사람의 이름을 써서 유리병에 넣은 다음 밤중에 향을 사르며 하늘에 축원하고 또 젓가락으로 병 속의 종이쪽지를 집었다.
그리하여 첫 번째로 노문기盧文紀의 이름을 쓴 쪽지를 집어 마침내 그를 정승으로 삼았다.
당주唐主와 석경당石敬瑭이 모두 용력이 뛰어나고 전투를 잘하는 것으로 명종明宗을 섬겨 좌우의 측근이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마음속으로 경쟁하여 평소 서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황제가 즉위하자 석경당石敬瑭이 부득이 들어와 조회하니, 이에 다시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로 삼았다.
촉주蜀主가
注+[頭註]촉주蜀主는 맹지상孟知祥이다. 죽으니,
태자太子 맹인찬孟仁贊이 황제에 즉위하여 이름을
창昶으로 고쳤다.